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28)
암살검가 로이넨-28화(28/258)
제28화. 검은 몽환숲의 초청장 (1)
“흠, 티나가 로이네크로우들의 새로운 왕으로? 재밌군.”
세이렌은 길리필드 영감이 직접 쓴 편지를 읽고 탁자에 내려놓았다. 루빈이 다녀간 일이 정리되어 있는 편지였다.
그녀가 알고 있는 영감의 성격으로 보자면, 글에 나와 있는 칭찬들은 흔한 게 아니었다.
‘고목에 암연을 주입하는 일은 해내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게 가능한 정도였던가.’
예상 밖이었다. 티나를 살려두는 것과는 별개로 이번 일은 루빈에 대한 그녀만의 시험이기도 했다.
당연히 실패를 예상했건만, 그 예상을 이번에도 뒤엎어 버렸다. 세이렌은 놀라움을 숨긴 얼굴로 루빈을 바라보았다.
“루빈.”
“예, 가주님.”
“네가 해낸 일에 대한 보상이 따라야겠지. 원하는 게 있느냐?”
그 말에 루빈의 얼굴 위로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럴 땐 그저 어린아이의 모습이군.
“매일 서고를 이용하고 싶습니다.”
“서고를?”
서고는, 대개 명문가에서 가문의 비전이나 고서를 보관하는 곳이다.
하지만 로이넨가의 서고는 그렇지 않다. 기본적인 검법서나 역사서 따위만 있는, 말 그대로의 평범한 서고인 것이다.
고작 요구한다는 게 서고 출입이라니.
세이렌이 예상했던 건 저택 바깥을 출입하는 특권 같은, 금기를 깨는 요구였다.
이제 루빈에게 남은 건 2년 동안의 답답한 생활뿐. 2년 뒤 ‘2차 선택’을 치르고, 이후 출가를 하기 전까지 로이넨 혈통은 저택 안에만 있어야 했으니까.
“책을 많이 좋아한다더니. 어려울 건 없지. 단, 자정까지만 머무르도록.”
“감사합니다, 가주님.”
“이제 휴식에 임해라, 루빈.”
그렇게 루빈이 나가고.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직속 가신 데이몬이 세이렌 쪽으로 몸을 숙였다.
“가주님. 명하신다면, 서고에 머무르는 도련님을 관찰하겠습니다.”
데이몬은 세이렌이 가지고 있는 호기심을 눈치채고 있었다. 루빈을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
게다가 그 역시 세이렌처럼, 막내 도련님이 그저 책을 읽기 위해 서고를 이용하는 것인지 의심하고 있었다. 만약 다른 목적이 있다면, 거둬들여야 할 수도 있으니.
하지만.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어쨌든 이것은 루빈이 해낸 일에 대한 보상. 굳이 파고들면서까지 뒤엎을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 아이를 확인할 기회는 앞으로도 많을 테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루빈에게는 다시 무미한 일상이 이어졌다.
‘하아앗!’
두 개의 목검이 맞부딪친다.
노인과 소년이 서로를 노려본다. 맞닿은 목검이 떨리기 시작하지만, 두 사람 다 쥐고 있는 힘을 풀지 않는다.
이윽고 뒤로 몸을 빼는가 싶던 루빈이 다시 뛰어들어 틈을 노린다.
브리온 검법. 루빈의 목검이 보여주는 움직임은 바로 브리온 검법 11식이었다.
둔탁한 마찰음이 연달아 울린다.
연쇄 공격을 하나씩 막아내는 하네케. 뒤엉키는 것 같지만, 지금 두 사람은 정확한 공격과 정확한 방어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하아앗!’
다시 한번 검이 맞부딪칠 때.
파바박, 소리를 내며 두 목검이 부서지고 말았다. 목검의 부러진 검신 부분이 두 사람의 등 뒤로 날아갔다.
‘또 부서졌네요.’
-마침 시간도 자정이 다 된 것 같네. 이제 자네도 서고에서 나가야 하지 않겠나?
루빈은 목검의 손잡이 부분을 내려다보았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였다. 저택 서고에서 책을 보는 것도 자정까지만 허용되었다. 이제 곧 퓌레가 루빈을 찾으러 올 것이다.
그러기에 앞서.
루빈은 자기 방식대로 하루 치의 수련이 끝났음을 기록하기 위해, 내면의 수련장 한쪽에 세워놓은 거대한 바위 앞으로 갔다.
트드드드득.
루빈은 부러지고 남은 목검의 짧은 부분으로 바위에 빗금을 힘주어 그었다.
-오늘로 729개의 빗금이로군. 벌써 2년이 지났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탑을 견학하고, 척살조로부터 티나의 죽음을 막아내고, 길리필드 영감의 수목원을 다녀온 지 벌써 2년.
그동안 루빈은 서고에서 책을 읽겠다는 핑계로 들어와, 하루에도 몇 시간씩 브리온 검법을 수련했다.
2년 동안 도달한 브리온 검법 11식.
12식이 브리온 검법의 마지막 검식이었기에, 그 끝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12식 다음엔… 드디어 오러.’
하네케는 오러 이전에 검법이 우선이라고 했다. 검법을 모두 익혀야만 오러를 위한 준비가 되는 거라고.
-그게 오러와 암연의 차이일세.
암살검가에서는 일정한 암연이 갖춰지지 않으면, 그에 맞는 검식을 실현할 수 없었다.
전투에서의 움직임, 전투에 관한 모든 기운. 그런 것들이 모두 암연의 영향력 속에 있기 때문에, 암연이 갖춰져야만 고차원의 검식을 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오러의 구조는 달랐다. 오러를 발현하기 위해서는 일단 검법의 검식을 모두 익혀야 했다.
-오러는 검식의 완성체라고 할 수 있지. 모든 검술명가의 검법마다 오러의 성질도 다른 법. 자네가 오러를 발현하게 된다면, 그 뿌리는 브리온 검법에 있는 거라네.
브리온 검법이 아닌 다른 검법을 마스터했다면, 다른 뿌리를 지닌 오러를 발현했을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똑같이 ‘오러’라고 불러도, 어느 검법을 익혔냐에 따라 다 다른 거지.
브리온 검법 11식도 완벽하게 익혔으니, 며칠 안에 12식을 시작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정말 오러라는 것도 멀지 않았다.
지난 11년 동안 텅 비어 있던 ‘세 번째 환’에 오러를 담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차 선택 전에 오러를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루빈이 그렇게 혼잣말할 때.
하네케는 루빈과의 대련에서 부러진 목검들을 둘러봤다. 1천 개에 가까운 목검이 전쟁터를 연상시키듯 수련장 주변 바닥에 꽂혀 있었다.
하네케는 루빈을 돌아보며 말했다.
-‘1차 선택’으로부터 2년 후라고 했지. 얼마 남지 않았겠군.
하네케는 창고 속 부러진 칼날 신세였던 자신과 루빈이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1차 선택’에서 루빈이 우승을 한 덕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2차 선택’ 또한 가벼운 시험일 리 없었다. 어쩌면 ‘1차 선택’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정확히 언제인가?
‘당장 오늘 시작될 수도 있어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시작되는 것. 그게 2차 선택의 방식이죠.’
루빈은 여전히 당장 오러를 발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되네. 지금 자네의 성장 속도는…….
그러다 잠시 망설이는 하네케.
있는 그대로 칭찬해 주어야 할까?
아니면 방심하지 않도록 다그쳐야 할까?
-나쁘지 않다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루빈이 검술 11식에 다다르는 동안 하네케가 얼마나 자주 놀랐는지는 셀 수도 없었다.
루빈은 자기의 본능에 따라 브리온 검법을 재창조했다. 하네케의 처음 걱정대로였다.
하지만, 루빈이 놀랍도록 빠르게 흡수하며 일취월장하는 모습은, 그런 걱정조차 잊게 만들었다.
바로 곁에서 성장세를 지켜보는 이 경험이, 브리온 검법의 자취가 흐릿해지는 아쉬움을 달래줄 정도였다.
‘퓌레가 왔네요.’
루빈이 말했다. 곧 지하 서고의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문 앞에서 멈추었다.
“도련님!”
“응, 이제 나가려고 했어.”
“벌써 12시라고요, 12시! 저도 제때 잠 좀 자봤으면 좋겠어요, 정말!”
말은 저렇게 해도, 세상 그 누구보다 자신을 걱정하는 존재임을 루빈은 잘 알았다.
“알았어, 지금 나가.”
루빈은 펼쳐두었던 책을 덮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자, 아랫입술을 깨문 퓌레가 코를 들썩이며 서 있었다.
-자네 시녀는 이 어둡고 삭막한 가문에서 유일하게 활기찬 사람인 것 같네. 어둠 속에 빛나는 한 마리 형광개구리라고나 할까.
“루빈 도련님,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하네케의 격조 있는 농담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린 루빈은, 황급히 표정을 바꾸었다.
“재밌는 책 구절이 생각나서.”
“그렇게 책만 보다간 눈만 나빠진다니까요!”
퓌레는 서고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택을 수호하는 수많은 가신들이 곳곳에 은신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들어가자마자 일찍 주무시는 거 약속해요? 네?”
“알았어, 약속할게.”
퓌레는 의심 어린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이제 2차 선택이 코앞인 거 잊지 않으셨죠? 며칠이나 남았을지 모르겠지만…….”
말꼬리를 흐리는 퓌레. 2차 선택도 앞선 시험처럼, 암살검가 자제의 선천적인 자질을 측정하는 일이다. 시험을 대비해 훈련 같은 걸 할 필요도 없었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른 방계의 가문들이야, 좋은 성적을 위해 갖은 비밀 수업들을 해오고 있을 테지만.
지금 퓌레가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겁먹지 마, 퓌레.”
“도련님, 저 겁먹은 거 티 나나요? 사실 요즘은 그거 때문에 잠도 못 자겠어요.”
“괜찮아. 잘 될 거야.”
자신감이 느껴지는 루빈의 한마디 때문인지 퓌레의 표정이 살짝 부드럽게 바뀌었다.
“하긴, 겁내봤자 달라지는 건 없겠죠?”
이른바 ‘초청장.’
2차 선택에는 초청장이라는 의식이 선행되는데, 퓌레가 걱정하는 게 바로 그거였다.
드물게 초청장 의식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는 시녀가 생겨나기도 했으니 당연했다.
“암, 어쩔 수 없겠죠! 도련님의 시녀라면 이런 건 숙명이니까!”
“응? 그러니까 내 걱정이 아니라……?”
“도련님, 위로해 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조금 용기가 생겼어요!”
그렇게 자기 혼자 의지를 다지며 루빈의 거처로 들어서는 퓌레.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루빈은 피식 웃어버렸다.
‘솔직해서 좋다니까.’
저택 동쪽에 있는 거처로 들어간 퓌레는, 곧바로 루빈이 편히 잠들 수 있도록 침대를 살폈다.
그사이 루빈은 거실에서 2년 전의 1차 선택을 떠올려 보았다.
쿤 크로키슨과 하밀 쿠니틀리. 루빈에 이어 2위와 3위를 했던 두 사람이 얼마나 성장했을지 궁금했다.
2위라는 성적으로 전설적인 무기인 케르기티의 단검을 손에 쥐었던 쿤.
루빈의 회귀 전에도 쿤은 우승자의 자격으로 그 무기를 선택했으니, 상황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생의 쿤에게는 로이넨 혈통에게 우승을 빼앗겼다는 열패감이 가득했다. 이 변수로 쿤의 면모가 회귀 전과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였다.
“꺄아아아악!”
갑자기 위층에서 퓌레의 경악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택 반대편에 있는 세이렌까지 깨울 정도로 커다란 외침이었다.
‘초청장이다!’
루빈은 바로 알아차렸다.
암연을 숨겨두지만 않았어도 틈입 자체를 눈치챘을 텐데.
어쩔 수 없었다. 대신 퓌레가 사고를 당하는 것이라도 막아야 했다.
루빈은 서둘러 뛰어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닥에 주저앉은 퓌레가 보였다. 그리고 그녀 맞은편으로 사람 몸뚱이만큼 커다란 거미가 있었다.
-저게 그 초청장이라는 건가?
‘맞아요. 2차 선택의 초청장이죠.’
거미는 여러 다리 중 앞다리 두 개를 들어 눈앞에서 휘저었다. 거기에 반응한 퓌레가 두려움 속에 움찔거렸다.
루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만약 루빈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퓌레는 큰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었다.
‘초청장의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거미는 난폭하게 굴었을 거예요.’
그렇다고 루빈 외에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설사 호위가신들이 초청장 거미의 접근을 알아차렸더라도, 이 의식을 멈추는 건 금지되어 있었으니.
심지어 시녀가 죽는 일이 발생할지라도 가신들은 잠자코 기다려야 했을 거다. 초청장의 수신자인 루빈이 나타날 때까지 말이다.
스샤샤아, 스샤샤아.
초청장 거미는 톱니 같은 이빨을 흐느적거리며 불쾌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한시 빨리 초청에 응해야 했다.
‘일단 퓌레부터 다른 곳으로 옮겨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