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29)
암살검가 로이넨-29화(29/258)
제29화. 검은 몽환숲의 초청장 (2)
루빈은 퓌레를 부축하여 계단을 내려왔다. 거미는 루빈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스샤샤아! 스샤샤아!
거미의 울음에 공격성이 담겼다. 그래도 루빈은 개의치 않았다. 퓌레의 방에 들어가 그녀를 눕히고, 곧장 바깥으로 나왔다.
-루빈, 저 거미,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죽여야 하는 건가? 그게 이 시험의 방법인가?
‘죽이면 일이 아주 심각해질걸요. 어머니도 수습하기 힘들 만큼 말이죠.’
루빈은 거미 앞에 섰다. 두 팔을 내려놓음으로써 저항의 의미가 없다는 걸 나타냈다.
그러자 수천 개의 알갱이가 박혀 있는 거미의 커다란 눈알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초청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읽은 것이다.
피시시시시시.
거미는 루빈을 향해 실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실이 향한 곳은 루빈의 왼쪽 손목.
방사된 거미줄은 손목 일부분만을 휘감더니 결국 두꺼운 팔찌 같은 걸 만들어냈다.
스샤샤아, 스샤샤아.
방사를 멈춘 초청장 거미는 다시 앞다리 두 개를 들어 휘저었다. 그게 끝이었다. 거미는 몸을 돌린 채 창문으로 다가갔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거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루빈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래야 했다.
정신이 1초간 흐트러지다가, 다시 1초 동안은 명료해졌다. 그런 변화가 한동안 지속됐다. 손목에 감긴 거미줄의 효과였다.
왼쪽 팔을 들어 손목을 살펴보았다. 거미줄은 일순간 가시가 돋아나는 것처럼 날카롭게 프스슷 일어나다가, 이윽고 다시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현기증도 완전히 사라졌다.
“때가 됐구나.”
어느 틈에 곁에 세이렌이 와 있었다.
수십 년 전 그녀 또한 똑같은 의식을 맞이했었다. 때문에 지금 루빈의 팔에 팔찌처럼 감겨 있는 거미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가문들도 속속 초청장을 받았겠군.”
그 말에 뒤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직속 가신 데이몬이었다.
“날이 밝는 대로 시험장으로 이동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문제없이 준비하도록 해.”
세이렌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나갔다. 데이몬 역시 곧바로 뒤따랐다.
-루빈, 나로선 이 시험이 어떤 방식일지 조금도 예상이 안 된다네.
하네케였다. 루빈은 덤덤히 설명했다.
‘일단 초청에 응했으니 주최자를 만나러 가야 해요. 조금 전에 봤던 그런 거미들의 여왕을 말이죠.’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설명을 해줘도 암살검가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나뭇가지에 까마귀 알이 맺히는 것도 봤으니, 뭐가 됐든 평범하진 않을 것 같군.
하네케의 말에는 루빈에 대한 걱정보다는 기대감이 더 많이 묻어났다.
다음 날.
프스스스슷.
루빈은 왼쪽 손목에 두꺼운 형태로 휘감긴 거미실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그랬던 것처럼, 날카롭게 일어섰다가 차분하게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다.
‘시험장에 가까워질수록 손목을 휘감은 강도가 강해졌었지.’
회귀 전을 떠올렸다. 그때는 거미실의 압박이 거세지는 것에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그대로 손목이라도 끊어버릴까 봐.
그러나 거미실은 손목을 끊어뜨리지 않는다. 팔을 휘감은 강도가 세진다는 것은 그만큼 시험장이 가까워졌다는 의미였다.
‘이제 다 왔어.’
루빈과 세이렌, 그리고 본가의 수십 가신들은 그랑버드에 올라탄 상태였다. 이번에도 칙명부가 관리하는 그랑버드가 파견된 것이다.
그 뒤를 따르는 수십 마리의 로이네크로우들도 있었다. 선두에서 대열을 이끄는 로호. 붉은 눈의 이 로이네크로우는 도착을 알리는 의미로 울어댔다.
까아아악.
그와 동시에 루빈의 손목을 휘감고 있던 거미실도 이제까지 보여주었던 규칙적인 움직임을 멈추었다.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데이몬이 손을 들었다. 본가의 암살자들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직속 가신의 명이 내려오자, 그랑버드에 올라탔던 본가의 수십 암살자들이 일제히 뛰어내렸다.
대열을 유지하던 로이네크로우들이 구도를 깨트리며 뿔뿔이 흩어졌다. 낙하하는 주인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내려가거라.”
애정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한마디를 던져놓고, 세이렌 역시 그대로 공중으로 뛰어내렸다. 낙하하는 그녀를 따라 하늘에 머무르던 로호도 빠르게 내리꽂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도련님.”
아직 로이네크로우가 없는 루빈은 데이몬의 로이네크로우의 도움을 받았다. 루빈이 등에 올라타고, 데이몬은 다리를 붙들어 매달렸다.
“다른 가문의 자제들은 저녁쯤 도착할 겁니다.”
안정적으로 지상에 착지한 뒤, 루빈이 로이네크로우의 등에서 내려올 때 데이몬이 말했다.
반나절 만에 시험장에 도착한 로이넨 가문과 달리 다른 방계들의 합류는 더 늦어질 것이다.
그랑버드를 이용하여 시험장으로 이동하는 것은 오직 로이넨 가문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으니까.
본가의 가신들은 도착하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였다. 시험 시작에 앞서 열리는 연회를 준비하고, 가주들이 머무를 장소를 정비해야 했다.
가신들이 드나드는 연회용 건물 뒤편, 키 큰 나무들로 울창한 숲이 있었다. 왠지 시선을 잡아당기는 곳이었다.
“저 숲이 보이십니까?”
마침 데이몬도 그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보여. 으스스하네.”
“저기가 바로 2차 시험을 치를 장소입니다.”
이미 한 차례 똑같은 시험을 치른 적이 있었기에 모를 수 없었다. 그래서 루빈은 놀라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숲으로 보이지만… 훨씬 끔찍한 곳이죠.”
알고 있다. 검은 몽환숲이라 불리는 저곳에 비하면, 1차 선택의 시험장은 그냥 놀이터나 다름 없었다.
“곳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으시겠지요. 하지만 죄송합니다, 도련님. 규칙상 더 말씀드릴 게 없네요.”
“어쨌든 1등을 하면 좋은 거잖아?”
루빈이 모르는 척 물었다.
“그렇습니다. 1차 선택에서 그랬듯, 이번에도 그에 따른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보상 면에서도 이번 시험은 1차 선택보다 규모가 컸다.
암살자 삶에서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수 있을 만한 ‘선택’들이 바로 여기서 주어졌으니.
그때였다. 검은 몽환숲 맞은편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루빈 도련님,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가문이 있는 모양이군요.”
흑마가 이끄는 마차 두 대가 나란히 나타났다. 그들 가주와 가신들의 로이네크로우가 마차를 호위하듯 공중을 맴돌고 있었다.
까아아아아악.
‘아, 검은 몽환숲 근처엔 그 가문이 있었지.’
뒤늦게 생각이 났다. 이 정도로 빨리 도착할 만큼 검은 몽환숲과 가까이 위치한 그 가문. 그들이라면 마차를 이용하고도 반나절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루빈은 그들이 마차에서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이윽고 앞선 마차에 타고 있던 가주가 먼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뒤따라온 마차의 문이 열리며 이번 시험의 참가자 또한 얼굴을 드러냈다.
‘이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떠오른 감상이었다.
크리거 가문의 장녀 블라네 크리거를 보고 루빈이 놀란 이유는, 2년 사이 바뀐 그녀의 모습 때문이었다.
2년 사이 성장했다는 뜻이 아니었다. 성장한 몸과 별개로 그녀 몸에는 다른 변화가 있었다.
‘화상을 입었나? 작은 상처가 아니야.’
얼굴을 비껴간 건 다행이라 해야 할까? 화상은 그녀 목에서 시작해 왼팔을 타고 내려와 팔뚝에서 멈추었다.
‘블라네의 상처가 회귀 전과 다르다.’
회귀 전 블라네는 화상을 입은 적이 없다.
그렇다는 건, 블라네의 상처는 회귀한 루빈이 바꾼 결과에 따른 새로운 흐름이라는 것이었다.
“가주님을 뵈옵니다.”
연회장 안에서 세이렌이 나오자 크리거 가주가 몸을 수그렸다. 블라네도 따라서 몸을 숙였다.
“어서 와. 블라네 크리거.”
세이렌이 크리거 가주를 맞이하는 사이, 루빈은 블라네에게 다가갔다.
하밀 쿠니틀리와 더불어 참가 자제 중 유이한 여성 참가자, 블라네 크리거.
루빈이 기억하는 블라네는 유능한 암살자였다.
하밀이 아까운 재능에 비해 일찍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달리, 블라네는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아마 6성까지 도달했었지.
“…네.”
블라네는 어쩔 수 없이 대답하는 것처럼 우물거렸다.
활달했던 아이였는데. 2년 사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생겨난 화상 흔적이 성격까지 바꿔 버린 걸지도.
블라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를 맴돌았다. 그런 딸을 바라보는 크리거 가주의 눈빛에 언뜻 분노가 치민다는 걸, 루빈은 알아차렸다.
“블라네, 들어가 있거라.”
크리거 가주의 명에 따라 블라네가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미래가 바뀌었다. 하밀이나 쿤한테도 변화가 있으려나.’
블라네를 보자면, 둘에게 어떤 변화가 있을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모든 게 회귀 전과 똑같이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루빈이 의도적으로 바꾼 상황에 따른 미묘한 차이가 크게 작용하게 될지도 모른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무언가가 긍정적으로 변할 수도 있겠군.“
예를 들면 쿤이 나에 대한 시기와 증오를 꺾는다거나, 하밀이 운명을 극복해 내 자신을 따르게 된다거나.
“…….”
하지만 아쉽게도 쿤은 그대로였다. 아니, 변화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회귀 전보다 훨씬 더 루빈을 증오하게 됐으니까.
남들의 시선 속에 있을 땐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지만 신경 쓰일 만한 눈길들이 사라지자, 쿤 크로키슨은 또다시 송곳 같은 증오를 드러냈다.
서슴없이 루빈을 노려본다. 그러면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고귀하신 로이넨 혈통을 이번에야말로 끊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좋은 예감이 드는걸.”
“만나자마자 듣기 좋은 소릴 하는구나. 한결같아서 좋다는 말이야.”
“너야말로 한결같아서 좋단 말이지. 건방진 자식.”
그러면서 쿤은 루빈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2년 동안 수련에 매진할 줄은 알았지만, 생각 이상이었다. 쿤의 신체는 이전보다도 훨씬 성장해 있었다.
몸 안에선 암연이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그걸 얼마나 잘 조절하고 응용할 수 있을지.
“루빈, 알아? 나 어젯밤 악몽을 꿨어.”
쿤이 태연하게 말했다.
“꿈속에서 네 팔을 잘라내는 꿈.”
“그게 왜 악몽이지? 너한텐 좋은 꿈 같은데.”
“아니. 지금까진 줄곧 네 목을 베는 꿈만 꿨거든.”
“그럼 그렇지.”
그때, 막 도착한 하밀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루빈은 쿤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밀!”
“벌써부터 뭐라도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 챙기는 거, 역겨워.”
“쿤. 하밀도 왔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똥개처럼 짖어대기만 할 거야?”
“저딴 계집은 상관 안 해. 약해 빠진 것들 앞에서 내가 착한 척이라도 해야 하나?”
으르렁거리는 쿤을 보자 하밀이 한심하단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넌 여전하네. 2년 동안 철 좀 들 줄 알았는데.”
“2년이 아니라 10년이 지나도 나한테 약한 것들은 그저 약한 것들이지. 설마 너,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친구 사이가 아니라도 예의는 필요한 사이 아닌가?”
“야, 잘 기억해 둬. 기회만 있다면 나는 누구든 박살 내버릴 거야. 여기 고귀하신 루빈 로이넨을 포함해서 말이야.”
그러든지 말든지. 루빈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하밀은 루빈의 오른편에 앉았다.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밀 역시 쿤처럼 2년 사이 적지 않은 훈련을 해온 게 분명하다.
‘하밀도 암연을 개화했군. 아직은 미약하지만, 확실히 시기가 빨라.’
루빈과 시선을 맞추며 하밀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잘 지내셨나요? 도련님.”
예의와 친근함이 두루 느껴지는 인사에 루빈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하밀은 쿤에게는 눈길 한번 주는 것으로 인사를 끝내 버렸다.
‘언젠가 기회가 있다면, 하밀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첫 임무 수행 중 독공에 따른 함정으로 목숨을 잃는 하밀. 루빈은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살릴 수 있는 인재는 누구라도 살려야 한다. 그래야만 황제에 대한 복수를 이룰 수 있다.
“2년 사이, 다들 편하게 발 뻗고 잤나 보군.”
쿤이 다른 참가자들을 둘러보면서 비아냥댔다. 쿤다운 한마디였지만, 이윽고 블라네를 발견하고는 말을 바꿨다.
“아닌 사람도 있는 것 같지만.”
블라네의 드러난 상처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쿤을 비난하려던 하밀도 블라네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그 더러운 입 좀 그만 다물…….”
아무리 혹독한 가풍 속에서 지내는 암살검가의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블라네의 상처를 가볍게 볼 수는 없겠지.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의식하는지, 블라네의 고개가 더 바닥으로 파묻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