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5)
암살검가 로이넨-5화(5/258)
제5화. 제국의 대장군
‘하네케? 이 노인네가 그 유명한 하네케 브리온이라고?’
나는 제국의 전쟁사에 빼곡히 들어 있는 그의 이름과 무용담을 떠올렸다.
황제의 오른팔.
제국의 살아있는 전설.
불세출의 전쟁 영웅.
그의 가문은 대대로 제국의 군대를 이끈 군인 가문이었지만, 동시에 검술명가이기도 했다. 눈앞에 있는 하네케 역시 생전 7성 경지에 오른 무인이었다.
특히 브리온가 대대로 내려오는 ‘브리온 검법’은 내로라하는 무인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했었다. 하네케가 죽은 뒤로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들었는데…….
그건 그렇고.
“하네케 브리온? 어떻게 당신이 내 앞에 있는 거죠?”
-말했잖나. 세이렌 로이넨, 자네 어미가 날 죽였다고.
그 말에 흠칫하는 날 보며, 하네케가 껄껄 웃었다.
-세이렌의 아들이 맞긴 맞는가 보군. 자네 어머니에 대한 원한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게. 정당한 싸움이었고, 내 완벽한 패배였으니.
어머니에게 패배했다? 그럼 이자는 이미 죽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왜 내 눈앞에 살아있는 거지?
하네케도 내 궁금증을 눈치챈 듯했다.
-우린 꼬박 한나절을 싸웠네. 치열한 싸움이었지. 실수 한 번에 승패가 갈릴 만큼 말이야. 하지만 세이렌은 완벽한 무인이었네. 7성 경지의 오러를 운용하는 나조차도, 죽기 직전에서야 겨우 세이렌의 빈틈을 볼 수 있었으니까. 팔뚝 말이야.
“그럼 어머니 팔뚝에 났던 상처가…….”
-그래. 그 상처. 내 처음이자 마지막 일격의 결과였지. 그것이 내 검혼이 되었네.
그제야 이해가 된다. 미르니코가 뭔가 이상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7성 경지의 하네케의 검혼이니 그럴 수밖에.
자신의 마지막을 알고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무인의 환에 담긴 오러는 ‘검혼’이 된다. 일종의 ‘오러 상위 결과물’인 셈이다.
검혼은 상처 입은 자에게 달라붙어 끊임없이 괴롭힌다. 상대가 극복할 때까지, 혹은 굴복할 때까지. 그래서 ‘죽은 자의 저주’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아직 남아 있었다.
7성의 검혼이 생겼다고 해서, 지금처럼 죽은 자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죽은 자와 대화할 수 있는지 궁금한가? 그건 나도 모르겠네. 다만 짐작할 뿐이지.
하네케가 바짝 다가왔다.
-7성 경지를 뛰어넘은 자의 검혼에는, 그의 영혼이 담긴다.
스스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새로운 사실이었다. 7성 검혼이란, 그저 더 지독하고 호전적인 성질을 가진 오러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러자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 파악되기 시작했다.
“…그럼 어머니의 몸에서, 허약한 내 몸으로 일부러 넘어온 겁니까? 어머니의 암연이 너무 강해서?”
그러자 웃음을 터뜨리는 하네케.
-아니. 영혼이 있다고 해서 검혼의 방향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닐세.
“그럼 뭡니까?”
-정확히는, 자네가 날 받아들였기 때문이지.
웃음을 멈춘 하네케가 말을 이었다.
-자네 덕에 내가 소멸되지 않을 수 있었네. 자네 결심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세이렌의 암연이 날 갈가리 찢어놨을 거야. 내 진심으로 고맙단 말을 하고 싶군.
“그러니까, 제가 받아들였기 때문에 내 몸으로 넘어올 수 있었단 말입니까?”
-회귀자라 그런지 똑똑하구먼.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네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대화는 굉장히 유의미해진다. 나는 대화를 더 이끌어 가보고 싶어졌다.
“알고 그랬던 건 아닙니다. 그저 유일한 살길을 택했을 뿐이죠.”
-유일한 살길이라. 그래, 강해지고자 하는 마음 역시 살길이지. 안 그런가?
하네케가 껄껄 웃음을 흘렸다. 분명,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말투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하네케. 당신은 지금 영혼 상태이시죠. 그러면 혹시… 제 경지가 보이십니까?”
내 몸속에 있는 두 개의 환. 그리고 암연.
그게 보이냐는 물음이었다.
하네케는 실소를 터뜨렸다.
-물론이지. 일시적이지만, 난 지금 자네의 육체와 정신을 일부분 점유하고 있다네. 자네의 경지가 얼마나 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략 알 수 있지. 자네가 몸속에 두 개의 환을 감추고 있는 것까지, 전부 말일세.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잘 되었다.
하네케에게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군으로서 도움을 청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전생에 내가 알지 못했던 비밀들도, 어쩌면 이 노장은 알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내 몸속을 관조하던 하네케가 흥미를 보였다.
-회귀 전 자네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군…. 자네도 궁금하지 않나?
정곡을 찔렸다.
실제로 나는 회귀 전, 5성 경지를 넘지 못했다. 재능과 노력, 암연의 질.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았는데 왜 넘지 못했을까.
죽는 순간까지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평생 내 발목을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하네케는 뒷짐을 진 채 검은 늪 위를 유유히 걸었다. 나는 허우적대며 그를 따랐다. 그에게 답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 그가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아마 나 때문이었을 걸세.
“……?”
-내가 검혼이 되어 자네에게 달려든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겠지. 회귀 전의 자네 또한 겪었을 일.
“그게 무슨 말이죠?”
-간단하네. 그때의 자넨 내 힘을 받아들이지 않고, 맞서 싸우려 했을 테니까. 분명 내 힘이 자네를 억눌렀을 걸세.
내가 맞서 싸웠기 때문에, 억누른 것이다.
7성 경지에 오른 무인다운, 그리고 제국의 번영을 이끈 백전노장다운 말이었다.
-이젠 과거의 일이 되었네만… 어쨌든, 내가 자네의 재능을 짓밟은 셈이군. 그런 상태로도 5성까지 다다랐다면, 그나마 대단한 성취라 할 수 있겠지.
그나마 대단한 성취?
나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천한 출신의 아버지를 가졌단 이유로 평생 형제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그래서 형제들이 암살검가 혈통이라는 사실에 안주할 때, 나는 최고가 되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다.
일종의 독기였다.
그러나 내 노력은 늘 비웃음만 샀을 뿐.
-자네가 날 원망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군.
“대장군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죠. 그리고 운명은 바뀔 거예요. 지금 제게는 회귀 전의 힘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이렇게 대장군도 만나지 않았습니까. 전생이었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야, 자네가 회귀 전엔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으니까.
회귀 전에 하지 않았을 행동이라.
이 말이 단서가 되었다. 이번 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향이 잡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음?’
심장 한 부근에서 뻐근함이 올라왔다. 누군가 심장을 눌러 터뜨리려는 것 같은, 이물감과 압박감.
‘뭐지?’
심장 부근에 자리 잡은 두 개의 환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덩달아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불쾌하지만 익숙한 감각.
분명 이건…….
-허허, 인제 깨달았나? 7성 이상의 검혼을 받아들이면, 그자의 환 또한 갖게 된다. 세상의 비밀이 또 하나 밝혀졌구먼.
‘……!’
하네케 브리온의 환.
나에겐 ‘세 번째’가 될 환이, 내 몸속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비록 하네케가 이룩했던 7성 경지의 오러는 증발해 버린, 텅 빈 환이었지만. ‘세 번째 환’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내 성장 가능성은 상상을 초월하게 됐다.
그 순간, 한 가지 잊고 있던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나는 지금 전설적인 제국 대장군, 하네케 브리온을 마주하고 있다.’
그에게 물어볼 것이 하나 있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얻지 못할 그것.
“대장군, 제게 당신의 검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대장군 하네케의 죽음 이후 완전히 소실되었던 브리온 가문의 검법.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익히지 못하리라.
“검법 전수가 끝나고 ‘오러’까지 익히게 도와주신다면 더 좋고요.”
암살검가 암살자들에게 암연이 있다면, 검술명가 무인들에겐 오러가 있다.
이제껏 암살검가에서 오러를 익힌 자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 없지만, 이제 그런 것 따윈 중요하지 않다.
내겐 오러를 담을 수 있는, 텅 빈 ‘세 번째 환’이 있으니까.
“제 몸 안에 있는 대장군의 환이 느껴지시죠? 저는 여기에 ‘오러’를 담고 싶습니다.”
가능할까? 모르겠다.
암연은 독보적인 힘.
오러와 마나는 하나의 환에 함께 담길 수 있지만, 암연은 아니다.
암연은 다른 모든 힘을 배척하니까.
오직 하나의 환에만 담길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환이 텅 비었더라도, 거기에 오러가 주입되면, 암연이 담긴 다른 환에 의해 깨져버릴 수도 있다. 모든 환은 심장을 중심으로 서로 가까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위험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더 강해지는 것만이 중요해.’
하지만, 하네케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예외적 존재가 되겠다? 나로선 흥미롭다만, 시간이 별로 없군.
“무슨 말씀입니까?”
-여긴 자네의 내면세계라네. 자네의 육체, 정확히는 무의식 안에 있는 공간이지. 우리가 여기서 대화할 수 있는 건, 자네가 내 검혼이 담긴 검날 조각을 쥐었기 때문이야. 그 덕에 결속력이 한층 강해진 덕이지.
“그럼 시간이 없다는 말은……?”
-방금 주치의가 자넬 살피러 방 안으로 들어왔네. 자넨 지금 내 검혼 때문에 고열에 시달리고 있거든. 곧 아이가 쥐고 있는 검날 조각이 발견될 거고, 빼앗아가겠지. 그러면 우리의 대화도 끝일세.
검날 조각을 빼앗기면 대화도 끝난다.
하지만 다시 말하면, 검날 조각을 다시 쥐면 얼마든지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하네케 브리온의 검법을, 아니 하네케가 가진 모든 기억과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대장군은 저벅저벅 어둠 저편으로 걸어가다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건져 올려지는 것처럼.
분명 그는 이대로 대화가 끝나는 걸 아쉬워하고 있다. 이미 한차례 죽음을 맞이한 그의 입장에서도, 브리온 가문의 검법을 계승하기 위해선 나만이 유일한 방법일 테니.
-아쉽군. 자네의 성장이 기대되는데 말이야. 아마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
무의식 너머, 검날 조각을 쥔 내 손이 강제로 펼쳐지는 게 느껴진다. 직감적으로 대화의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나는 씩 웃으며, 하네케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아뇨. 제가 아홉 살이 되면 틀림없이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제가 대장군을 찾아내겠습니다.”
* * *
내가 회귀한 지 8년째.
벌써 여덟 살이 되었다.
오늘은 유독 화창한 날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택과 그 주변까지만 해당되는 말이다.
로이넨 가문의 저택 안에서는 정원 저 너머의 풍경을 볼 수 없다. 거대하고 짙은 안개가 성벽처럼 저택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열한 살이 되지 않은 암살검가의 아이에게 안개는, 외부인이 느끼는 것과 똑같이 성벽 그 자체였다.
외부인이 로이넨 가문의 안개를 뚫고 들어오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열한 살이 되지 않은 암살검가의 아이는 안개 너머로 나갈 수 없으니까.
‘이제 안개의 성벽을 바라보는 것도 몇 년 안 남았군.’
앞으로 3년. 열한 살이 되면, 나는 저택을 나가 위장된 신분으로 살아갈 것이다.
암살검가의 인생은 그때부터가 진짜였다. 황제의 암살검이 되기 위해, 위장된 신분을 가지고 로이넨서의 교육과 보호 속에서 성장하는 삶. 아니, 제련된다는 표현이 더 맞겠군.
나는 침대에 가만히 앉아 몸속을 관조했다.
잠시 후, 심장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세 개의 환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첫 번째, ‘전생의 환’은 아직도 다루지 못한다. 온전히 다루려면 아마 두 번째 암연의 경지가 5성 이상은 되어야 할 거다.
두 번째, ‘현생의 환’은 이미 오래전 암연을 개화했다. 다섯 살에 개화했으니, 어머니보다 1년이나 빠른 기록이었다. 암연은 어느덧 2성 경지에까지 올랐다. 매일 아침 남몰래 수련한 결과였다.
마지막, 하네케로부터 받아들인 세 번째 환. 아직 암연도, 오러도, 마나도 담기지 않은 텅 빈 환이지만, 분명 내 몸 안에 실존했다.
언젠가 다시 하네케를 만난다면, 그리고 브리온 검법을 완전히 계승하게 된다면, 양질의 오러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루빈 도련님?”
아, 맞다. 퓌레가 열심히 설명 중이었지.
내가 고개를 돌리자 유모가 쀼루퉁한 표정으로 날 째려본다.
“미안해, 퓌레.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었어.”
퓌레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도련님은 정말 특이하시다니까!”
저 말은 내 모습이 여덟 살답지 않다는 뜻이다.
하루 종일 내 곁에 붙어 있는 퓌레는 나의 행동이나 말투에서 여덟 살 아이에게서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느낀다고 말했다.
하지만 암살검가의 아이를 기준으로 보자면 내 모습은 아주 특이한 경우도 아니었다.
이 서늘하고 아득한 가풍에서는 누구라도 평범한 여덟 살 아이로 지낼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하던 이야기 계속해 줘.”
“자, 집중하세요. 도련님! 오늘 이야기할 것은 암살검가 혈통이라면 꼭 치러야 하는 두 가지 관문에 대해 말씀드리려는 거예요.”
“‘1차 선택’과 ‘2차 선택’을 알려주려는 거지?”
내 말에 퓌레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오른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얼굴이다.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거든.”
“하여간 기억력도 좋으시다니까, 참! 하지만 정확히 아시는 것 같진 않으니까 제가 제대로 짚어드릴게요. 암살검가의 자제는 아홉 살 겨울에 한 번, 그리고 열한 살 여름에 또 한 번 선택 의식을 치러야 해요. 각각 ‘1차 선택’과 ‘2차 선택’이지요.”
1차 선택과 2차 선택.
출가하기 전에 모두가 치러야 하는 관문이다.
이는 암살검가 본가인 로이넨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방계들도 참여하는 의식이었다.
각 가문의 아홉 살 아이들이 한데 모여 치르는, 공식적인 시험인 셈이다.
1차 선택이 있고 난 뒤, 열한 살이 되면 해당 아이들은 다시 한번 모여 두 번째 시험을 치른다.
“퓌레. 암살검가에는 얼마나 많은 방계가 있는 걸까?”
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퓌레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건… 가주님만이 아시겠지요?”
방계, 수백 년의 역사가 만들어낸 암살검가의 수많은 가지들. 퓌레의 말처럼 로이넨 가문의 가주만이 그 정확한 수를 파악하고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시간이 흐를수록 방계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건 암살검가가 고수하는 독특한 후계 방식 때문이었다.
로이넨 가문의 가주는 남녀 상관없이 형제들 중 가장 뛰어난 자가 잇는다.
이때 로이넨의 가주로 오르지 못한 형제들은 로이넨이라는 성을 내려놓고, 새로운 성을 갖는다. 방계의 가주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수백 년의 역사를 잇다 보니, 수많은 방계가 생겨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가주 본인들도 얼마나 많이 뻗쳐 있는지 모를 이 가문의 계보는, 오직 암살검가의 본가인 로이넨 가주만이 정확히 알 수 있다.
‘크로키슨, 레인크로키, 갤리오트릭, 스토네, 크리거, 칼크리드, 쿠니틀리, 본도그…. 전생에 내가 만나본 암살검가도 고작 이 정도.’
게다가 이 가문들은 모두, 회귀 전 1차 선택과 2차 선택에 함께 참여했던 방계일 뿐이었다.
수십, 수백?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암살검가가 대륙 곳곳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황제의 충실한 사냥개로 살아가는 것을 거룩한 운명이라 믿으며.
‘누가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 알려면 일단 내가 가주가 되어야 해.’
암살검가의 계보를 파악하고, 세력을 구축할 것. 그게 첫 번째 목표였다. 큰 문제만 없다면, 가주가 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퓌레가 상념에 빠져드는 나를 살피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유모의 설명에 집중해야 했다.
“…우리 로이넨 가문이 1차 선택과 2차 선택의 의식을 주관하는 경우는, 우리 가문에 아홉 살이나 열한 살 자제가 있을 때뿐이에요. 본가에 해당 나이의 자제가 없을 땐, 각 방계들끼리만 모여 선택 의식을 치른답니다.”
“그럼 내년에 있는 의식이 모처럼 본가에서 주관하는 의식이 되겠구나.”
“맞아요! 루빈 도련님이 아홉 살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죠.”
“그 말을 굳이 되짚는 건, 본가의 권위를 먹칠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퓌레는 한결같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서 나는 그 미소를 한순간에 사라지게 만들 질문을 던졌다.
“형님들은 어땠어?”
사실 나는 도리언과 매피스의 성과를 이미 알고 있다. 그 둘은 두 시험 모두에서 어머니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만족은커녕 먹칠이었지.
1차와 2차때, 도리언은 각 4위와 3위.
매피스는 5위와 6위였다.
매피스 때엔 유난히 동갑내기 아이들이 많긴 했지만, 그걸로 본가의 약세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었다.
암살검가 로이넨의 적자라면, 무릇 항상 최고의 자리에 올라야 하니까.
“다른 도련님들의 성적은 제가 말씀드릴 수 없어요, 루빈 도련님.”
“흠, 궁금한데.”
로이넨 가문에서 뛰어난 자제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본가의 지위를 잃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암살검가의 계승은 로이넨의 혈통을 우선하기 때문에, 시험 결과와 상관 없이 나와 도리언, 매피스 중에 한 사람이 잇게 되어 있다. 아무런 변수만 없다면 말이다.
능력보다 혈통을 중시하는 이 혈칙에, 방계 가문 중 누군가는 불만을 품고 있을 수도 있을 거다. 암살검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주라는 어머니 때문에 지금만큼은 잠잠하겠지만.
“루빈 도련님! 저길 보세요!”
퓌레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을 가리켰다.
정원을 가로질러 오는 마차 하나가 있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저건 방계 가문 크로키슨 사람들이다.
1차 선택을 딱 1년 앞둔 시점, 크로키슨의 가주와 그 아들이 본가를 방문했었다.
예정되어 있었던 방문.
내가 유독 이날을 또렷이 기억하는 건, 바로 내년에 나와 겨뤄야 하는 크로키슨 가주의 아들 때문이었다.
‘쿤 크로키슨. 그 싸가지를 다시 보게 되네.’
회귀 전의 쿤은, 압도적인 실력의 암살자였다. 쿤과 처음 만나는 오늘 이후, 쿤은 평생 동안 나를 따라다니는 비교 대상이 되었다.
대대로 실력 있는 암살자를 배출하는 크로키슨 가문은, 로이넨의 성을 가진 자제만이 모든 암살검가를 대표하는 가주를 계승할 수 있다는 전통에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본가의 가주가 되지 못한 자신들의 선조를 원망했고, 그때의 어긋남만 아니었다면 자신들이 꾸준히 본가를 계승했을 거라 믿었다.
그런 불만이 가장 크게 표출되었을 때가 바로 이 시기.
크로키슨 가문의 총아였던 쿤은, 그저 그런 재능의 나와 내 형제들을 질투했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재능은 없지만 더럽게 운이 좋은 놈.’
‘암살검가를 침몰시킬 멍청이.’
‘나약함의 극치.’
이것들이 나에 대한 쿤의 생각이었다.
“어머, 도련님! 저쪽 도련님께서 여길 쳐다보고 있는데요? 어떻게 아셨을까.”
퓌레가 말하지 않았어도 나는 쿤이 마차에서 내린 직후부터 계속 그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쿤의 질투 어린 눈빛과 비릿한 웃음.
여덟 살 아이가 품기에는 비정상적으로 강렬한 감정이었지만, 나는 쿤의 그런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안다.
1차 선택과 2차 선택에서 내가 쿤에게 완전히 패배하면서, 나에 대한 녀석의 멸시는 더 커졌었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다를 거다.
“내려가 봐야겠어.”
“어머, 도련님! 가주님 허락 없이는 이론교육을 끝낼 수 없는 거 모르세요?”
퓌레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나는 책상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주님이 날 부를 거야.”
내 한마디가 있은 지 얼마 있지 않아서,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루빈 도련님. 가주님이 부르십니다.”
“어머, 진짜네요?”
두 눈이 동그래진 퓌레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얼른 가자. 친구를 맞이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