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53)
암살검가 로이넨-53화(53/258)
제53화. 잿빛항구의 남매 (1)
루빈 일행은 리혼 왕국의 서쪽 국경에 다다랐다.
국경이라고는 하지만 삼엄한 경비와는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성벽은 허물어졌고, 도로를 지키는 경비병들도 야트막한 건물 하나를 출입처로 둘 뿐이었다.
“통행증을 보여주십시오.”
쿠제가 옷 안에서 종이를 꺼내어 건넸다. 받아 든 경비병은 그게 제국통행증이라는 사실이 신기한지, 눈을 크게 떴다.
세심히 통행증을 확인했지만, 그들 수준에서 가려낼 수 있는 건 인장의 진위 여부뿐.
“진본이군요. 통과하십시오.”
사실 제국통행증에는 눈에 드러나는 인장 말고도 마법 서명이 숨겨져 있다. 진위를 제대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마법 서명을 읽어내야 했지만, 리혼 왕국의 경비병들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수고하십시오.”
쿠제는 고개를 까딱이며 앞으로 걸어갔다. 고삐를 이끌자 티나가 발굽 소리를 내며 나아갔다. 검문소가 멀어지기 전에, 루빈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무너진 성벽과 허름한 건물뿐인 국경.
리혼 왕국의 서쪽 국경이 이토록 허술한 이유는, 바로 서쪽 방향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잿빛항구’이기 때문이었다.
잿빛항구는 왕국의 영향력이 통하지 않는 제국직할령 중 하나다. 이곳과 인접해 있다는 것은, 왕국 입장에서는 그쪽으로는 어떤 방어체계도 갖출 수 없다는 걸 뜻했다.
성벽이나 망루 같은 건 물론이고, 그 인근에 왕국의 병력조차 배치해 둘 수 없다. 그것은 곧 황제에 대한 불온한 마음을 뜻했으니까.
“티나.”
푸르르르릉.
“이제 곧 잿빛항구의 검문소가 나올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리혼 왕국의 서쪽 국경이 ‘국경’이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허술한 반면, 잿빛항구의 검문소는 정반대였다.
항구의 경비병들은 전원 제국군 병사로 구성되었다. 일개 병사라고는 하지만, 그들 개개인의 수준은 어지간한 왕국의 기사단원과 맞먹었다.
검문 절차도 까다로울 것이다. 아무리 제국통행증으로 보장된 신분이라 할지라도, 검문을 하는 당사자가 제국군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제국 내에서 내로라하는 유명 가문의 자제라면 몰라도, 루빈은 달랑 신분증 하나뿐이었다. 거기에 수행원도 하인 하나뿐이었으니.
제국군이 무시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제국군을 속이는 거? 그건 환혈족의 숙명이나 다름없지. 걱정하지 마, 도련님.”
가장 큰 위험요소. 그건 티나의 존재 자체였다. 티나는 호기롭게 말했지만, 그 말처럼 간단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평생을 제국에 쫓기며 살아온 티나다. 아무리 변신 능력을 가졌다 해도, 제국군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역시 지니고 있다. 그런 건 숨긴다고 해서 완벽히 숨겨지는 게 아니었다.
“만약 제국군 앞에서 네가 환혈족이라는 게 발각되면…….”
루빈은 만에 하나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해 보았다. 앞서 걷던 쿠제도 궁금한 듯 고개를 돌려 루빈을 쳐다봤다.
“곧장 쿠제가 검을 뽑아 너를 찌를 거야. 우리로서는 몰랐던 사실이니까. 리혼 왕국을 벗어나기 전에 말을 한 필 구했는데, 그게 알고 봤더니 환혈족이었던 거지.”
비정한 가정이었지만, 당연한 행동이었다. 환혈족은 제국이 쫓는 공개 수배자. 아무리 위장 신분으로 꾸몄다 해도, 대놓고 엮일 수는 없었다.
푸르르릉.
이미 그럴 거라 예상했던 티나가 거칠게 말 울음소리를 냈다.
“그래도 네가 죽는 일은 없을 거야. 넌 감옥에 갇힐 거고, 우리는 간단한 조사만 받고 풀려나겠지. 네가 수도로 호송되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줄게. 그러니까 겁먹지 마.”
티나는 ‘겁 안 먹었거든?’이라고 말하는 듯, 신경질적으로 투레질했지만, 그녀의 두려움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타그닥. 타그닥.
항구로 이어진 포장도로를 계속 걸었다. 그러다가 어느 때쯤, 그들 귓가에 해안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섞여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다 냄새가 나네요.”
쿠제의 감탄 섞인 말마따나, 바닷가의 짠내와 항구 특유의 쇳내가 전해졌다.
깡- 깡- 깡-
항구까지는 아직 더 가야했지만, 파도 소리 위에 얹어지는 쇠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항만에서는 배를 건조하는 작업이 한창인지, 나무 삐걱대는 소리, 갑판을 조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와아…….”
티나의 탄성과 함께, 쨍쨍하게 떠오른 햇빛을 그대로 담은 물비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다였다.
이윽고 저 멀리, 파도가 부딪치는 해안과 항만이 보였다.
“저기 검문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 항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쳐야 하는 검문소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포장도로의 끝, 험준하고 견고한 성벽과 망루가 버티고 서 있다. 조금 전 보았던 리혼 왕국의 허물어진 성벽과 대조되어, 그 위용이 더욱 대단해 보였다.
제국직할령과 인접한 왕국은 그쪽으로 성벽조차 둘 수 없도록 하는 대신, 그 반대의 경우엔 어느 곳보다도 견고한 방어체계를 구축해 놓는 것.
그게 텔마흐의 방식이었다.
“이제부터 나는 한 마리 온순한 말이다…. 푸르르릉! 온순한 말이다…….”
잔뜩 긴장한 티나가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지껄였다. 그걸 출발 신호 삼아 그들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검문소 앞으로 다가갈수록 루빈의 암연에 감지되는 병력의 규모도 점점 커졌다. 최소 중대 규모의 제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개중엔.
‘역시 마법사도 있었네.’
경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제국군에 소속된 전투마법사라면 일당백 이상의 전력일 것이었다. 마찰이 발생하면, 쉽지 않은 전투가 될 터.
굳게 닫힌 성문 앞.
군기가 잔뜩 들어있는 제국군 경비가 다가왔다. 두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챙이 깊은 투구가 인상적이었다. 응대를 위해 쿠제가 나섰다.
“여행자십니까?”
“그렇습니다.”
“통행증을 확인해 보도록 하지요.”
“여기 있습니다.”
“흐음…….”
제국통행증은 왕국 사이를 오갈 땐 탄성을 일으킬 만한 통행증이지만, 제국직할령을 통과할 때는 그렇지 않다. 통행증 중에서도 가장 낮은 등급이었으니.
제국군 경비는 눈에 보이는 인장만 확인하고 통과시켰던 왕국 경비대와는 다르다.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 성벽 계단을 타고 마법사 하나가 내려왔다. 루빈은 일행을 위협할 만한 수준의 마법사는 아니라는 걸 단박에 눈치챘다.
‘전투마법사는 아니군.’
마법사들에게 통행증 심사 같은 일은 한직 중의 한직이었다. 그 정도로 마법학교를 낮은 성적으로 졸업했다는 초라한 꼬리표였다.
“줘봐.”
형편없는 마법사일 게 빤하지만, 어쨌거나 계급과 신분상으로 특별대우를 받는다는 걸 생색이라도 내듯, 마법사는 퉁명스럽게 굴었다.
경비병에게서 루빈의 제국통행증을 받아 든 마법사는 쑥 훑어봤다.
‘굽혀야 할 만한 가문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있군.’
곧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달은 마법사는 엄지손톱으로 거만하게 입을 쑤셔댔다.
“흠, 행선지가 카포티니?”
“예, 그렇습니다.”
쿠제가 대답했지만, 마법사의 눈길은 말에 타고 있는 루빈에게 고정됐다.
“요새 그쪽 마법학교가 개학 시기인 것 같은데, 혹시 마법생도요?”
쿠제가 고개를 내저었고, 루빈도 어수룩한 모습을 연기하며 따라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역시 그렇지. 마침 항구에 카포티니 마법생도 전용 함선이 정박해 있어서 해본 말이었소. 행색만 보면 마법사와는 거리가 있겠거니 싶었지.”
“저, 마법사님? 마저 통행증 확인 좀…….”
쿠제가 몸을 굽실거리며 조심스럽게 확인을 요청했다. 마법사가 눈썹 사이를 찌푸리며 입술을 오므렸다.
“성격 급하긴.”
마법사는 주머니를 뒤적여 조그마한 통을 하나 꺼냈다. 뚜껑을 여니 연고 형태의 형광색 물질이 나왔다.
마법사는 손가락 하나로 물질을 쓱 묻히더니, 그걸로 통행증 전면을 훑었다.
새겨져 있는 마법 서명을 확인하는 것이다.
“흠, 진본이군. 위조본이었으면 오랜만에 내 마법 실력을 뽐내려 했건만.”
“하하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쿠제가 어색하게 웃었다. 반면 이런 농담이 지겨운지 경비병의 입꼬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경비병은 눌러쓴 투구 너머로 시종일관 루빈 일행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이윽고.
“통과.”
“그럼.”
루빈은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이며 티나를 전진시켰다. 경비병이 수신호로 통과를 알렸다.
쿠쿠쿠쿵.
거대한 성문이 둔중한 울림과 함께 열렸다. 쿠제가 앞장서 말의 고삐를 이끌며 걸어갔다. 그렇게 통행 절차가 끝나는가 싶었는데.
“잠깐.”
뒤편에서 마법사가 루빈 일행을 불러 세웠다.
순간적으로 루빈은 암연을 넓게 펼쳐 검문소의 경비 인원들 위치를 파악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암살자의 본능이었다.
티나를 검으로 찌르고 모르는 척 넘어가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잠깐 멈춰보시오.”
루빈의 등 뒤로 마법사가 서둘러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쿠제가 상체를 살짝 굽히며 마법사에게 응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일행 곁으로 다가온 마법사는 말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티나의 등이었다. 놀란 티나가 말발굽을 굴렀다.
따그닥, 탁.
“이거, 준마로군.”
뭔가를 알아채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저 순수한 호평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루빈은 티나의 떨림이 심해지는 걸 느꼈다.
“마법사님의 손길이 낯선가 봅니다. 말이 긴장하는 것 같군요.”
“아, 그런가?”
하지만 여전히 손은 내리지 않은 채였다. 루빈은 한마디 덧붙였다.
“말이 흥분할까 무섭습니다.”
“실례했소.”
그제야 마법사가 티나의 등허리에 올려놓았던 손을 내렸다. 그는 쿠제를 보곤 웃으며 말했다.
“카포티니로 갈 때도 이 말을 데려가실 건지 궁금하군.”
“예?”
“잘 알겠지만, 카포티니까지의 여정이 꽤 길지. 말까지 배에 태우려면 부담이 될 것 같아 하는 말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적당한 가격에 말 거래소에 팔고 가라는 말이오. 만약 그쪽이 거래소에 등록해 놓으면, 내가 사려고 했지. 마침 말이 필요했던 터라.”
“아하, 고려해 보겠습니다. 마법사님 말씀처럼 배에 태워 갈 생각은 없던 터라.”
그 말에 마법사가 반색했다.
“여기에 말 거래소는 하나뿐이니, 숙소 구하면 그쪽 주인한테 물어보시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말을 잠깐 멈춘 마법사가 하늘을 쳐다봤다. 그 시선을 따라 쿠제와 루빈 모두 하늘을 쳐다봤다.
“지금 시간에는 달이 보이지 않지만, 요즘 달의 색깔이 붉어지는 시기요. 4, 5년에 한 번씩 그렇지.”
달이 붉어지는 시기.
“마땅한 배를 구하기 어려울 거요.”
이는 루빈도 대충은 알고 있는 풍습이었다.
대부분의 뱃사람들은 달의 색깔이 붉어질 땐 배 띄우는 걸 삼갔다. 불길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바다의 흐름이 유난히 난폭해지는 시기인 것도 맞았다.
“일주일쯤 이어지려나. 어쨌든 말을 팔 거면 서두르는 게 나을 거라는 말이오. 일주일 동안 배도 못 구한 상태로 여기 머물면서 괜한 돈 쓰는 일이 없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법사는 기분 나쁜 미소를 남기고 다시 성문 위로 돌아갔다. 가기 직전, 루빈에게 오만한 눈짓을 던지는 걸 잊지 않은 채.
하여간 거만하기는.
“가시죠. 도련님.”
푸르르릉.
쿠제가 고삐를 이끌었다.
잿빛항구의 검문소까지 통과했으니 티나에 대한 걱정은 덜어낸 셈이었다. 마법사가 말을 찾으려고 해도, 다음에 볼 땐 티나의 모습은 말이 아닐 테니까.
-도련님. 배부터 찾아볼까요?
쿠제의 전음이 루빈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아니. 그 전에 숙소부터 찾아. 티나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을 만큼 괜찮은 곳으로. 배를 구하는 건 둘이서만 해도 충분해.
-알겠습니다.
쿠제는 배들이 정박해 있는 부두 쪽을 뒤로하고, 숙소들이 모인 항구 거리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