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61)
암살검가 로이넨-61화(61/258)
제61화. 목걸이 속 존재 (2)
“계획이라도 있나 보지?”
“글쎄.”
마령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이유.
루빈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간단하게 끝날 설명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달아 털어놓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나중에 천천히 말해줄 수 있을 때가 오겠지.’
검혼, 하네케, 그리고 회귀까지 모두.
루빈은 경직된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지도록 목소리에서 힘을 뺐다.
“정말 이 목걸이에 마령이 있다면, 정신을 잃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놀라지들 마. 최대한 빨리 처치하도록 노력할게.”
쿠제와 티나 둘 다 루빈이 걱정됐지만, 마령을 이대로 놔두는 게 더 큰 위험이 될 거란 걸 잘 알았다. 곧 둘의 결의 깃든 대답이 이어졌다.
“알았어.”
“저도 버텨보겠습니다.”
“그리고 티나.”
“응?”
“네 역할이 아주 중요해.”
티나는 고양이의 몸으로 폴짝 뛰어올라 의자 등받이에 올라탔다.
여행선이라는 한정된 공간, 위더스푼이라는 막강한 가문의 등장, 그리고 마령이라는 예측불허의 존재.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티나가 민트색 눈동자를 빛냈다.
“내 역할은?”
“네가 맡아줘야 할 상대가 있어.”
“좋아, 말해! 그게 누구지?”
“바로 셀레스네야.”
“뭐?”
티나의 꼿꼿하던 몸이 푸르륵 흘러내렸다.
“나로 변하든, 쿠제로 변하든 상관없어. 지금 객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들키지 않도록 해줘.”
외부인이 객실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를 막아 달라는 것이었다.
아늑과 와락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상관없을 것이고, 마나 운용하느라 정신없는 클로이는 웬만해서는 직접 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가장 위험한 인물은 단연 셀레스네였다.
“난 또…. 그런 거라면 문제없지. 고양이로만 있는 거 지겨웠는데, 마침 잘됐네?”
의기양양한 티나에게 쿠제가 불안한 눈빛을 던졌다.
“괘, 괜찮으시겠죠?”
“걱정할 거 없어, 쿠제. 나 못 믿어?”
“…예, 알겠습니다.”
루빈은 짧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목걸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럼, 이제 시작한다.”
루빈의 암연이 목걸이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루빈의 또 다른 손에서 순간적으로 빛이 번쩍였다.
루빈이 다른 손으로 쥐고 있던 건, 하네케와 연결된 칼날 조각이었다.
* * *
내면세계.
원래대로라면 절대 들여다볼 수 없는 무의식의 지대. 하지만 루빈의 내면세계는 달랐다.
하네케가 깃든 뒤로 이곳은 두 사람의 수련장이 되었고, 이곳에서 루빈은 하네케를 통해 전생에는 디뎌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검술의 경지를 열고 있었다.
광야 한가운데 자리 잡은 수많은 수련의 흔적.
-후우… 후우…….
하네케는 검을 쥔 두 손에 힘을 주며 거대한 암벽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광야에 몰아치는 바람이 그의 백발을 흩날렸다.
바람이 멎기 전. 하네케의 검이 암벽을 향해 휘몰아쳤다. 무가 잘려 나가듯 선명한 사선이 그어지는가 싶더니, 쿠쿠쿠쿠쿠 소리와 함께 암벽이 밀려 내려왔다.
-아직인가.
하네케는 단독 수련 중이었다.
최근에 루빈은 쿠제를 통한 새로운 암연 활용법에 집중함과 동시에, 자기 스스로 오러의 경지를 높이는 중이었다.
그렇게 루빈이 전방위적으로 그 능력을 늘려가는 만큼, 하네케 또한 자율적으로 자신만의 수련을 이어나갔다.
루빈을 가르칠수록 하네케 역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누구인가. 비록 지금은 죽음과 함께 육체를 잃었지만, 오랫동안 대륙 최고 수준의 경지에 올랐던 7성 무인이자, 제국 대장군이지 않았나.
루빈이란 자는, 그런 하네케조차 더 강해지고 싶은 열망에 빠뜨릴 만큼 자극을 주는 존재였다.
그런 점에서 이 내면세계는 하네케에게도 완벽한 수련장이었다. 갈증도 배고픔도 졸음을 느끼지 않는 상태로 오직 검만 쥘 수 있었으니까.
-이제는 군인이 아니라 무인이 되어버렸군.
하네케에게 군인과 무인은 달랐다.
군인은 지키거나 빼앗기 위해 싸우지만, 무인은 오롯이 자신의 경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싸우는 자들. 이제는 지켜야 할 육신도 제국도 없으니, 무인이 될 수밖에.
파아앙!
하네케는 바닥에 자신의 검을 내리꽂았다. 검이 손에서 벗어났지만 검신에는 아직도 그가 직전까지 내뿜었던 오러가 스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일곱 겹으로 검신을 감싼 흑칠의 오러. 검은색 오러는 브리온 가문의 상징이었다.
-…….
무의 길을 걷는 요즘에도 문득문득, 전장에 감돌았던 과거의 전운이 그립기도 했다.
전운이 그립다니, 그 말이 우스웠지만 실제로 그랬다. 브리온 가문의 한 사람으로서, 전쟁터가 가문의 안뜰보다도 더 익숙했던 것도 사실이다. 또, 축제에서 울리는 축포보다 포탄의 울림이 더 익숙했고.
-오랜만에 바깥 구경 좀 해볼까나.
하네케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루빈의 감각을 공유할 수 있었다. 루빈에게 요청을 해야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루빈이 하네케의 요청을 거절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최근에 루빈에게 일어난 일들 또한 알고 있었다. 수련에 집중하면서 하네케가 그쪽으로는 신경 쓰지 못하긴 했어도,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세빌론 왕국을 부활시키려는 자들.
거혈족 남매가 운항하는 유명한 배.
그리고 위더스푼이라는 마법명가의 등장.
그러나 지금 당장의 일은 그도 알지 못했다. 하필 루빈과의 연결을 끊고 수련에 집중하고 있던 때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말을 건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루빈은 반응이 없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하네케로선 도통 무슨 일인지 알 길이 없다.
-사고라도 난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갑자기 하네케가 디디고 서 있는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쿠쿵.
예상치도 못한 지진에 하네케는 빠르게 광야의 암벽들을 연달아 밟으며 언덕 위로 향했다. 본능적으로 그의 손은 바닥에 박혀 있던 검을 빼 든 뒤였다.
수련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다다른 하네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자연스럽게 칠흑빛 오러를 발현시켰다.
루빈은 여전히 응답이 없고, 내면세계에는 지진이 일어나다니. 하네케는 확신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게야.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위더스푼 가문이었다. 제국귀족으로 있는 그 마법사 가문의 위용을 하네케 역시 익히 알고 있었다.
마법사 여단의 지휘관 계보에 따르면, 역대 지휘관은 위더스푼 가문 내부에서만 연례적으로 승계될 정도였다. 이것이 갖는 권력이 얼마나 거대한지는… 오직 대장군을 지낸 하네케만이 알리라.
하네케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안일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조언을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자책감마저 들었다.
-뭐야, 저건?
한동안 멎었던 지진이 다시 일어났다. 가장 안전한 지대라고 생각했던 그 앞으로,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쿵.
하네케가 놀라 바라보는 건 땅이 갈라지면서 만들어진 틈이었다.
그 틈 사이로 올라오는 무언가. 그건 질척거리면서 냉기를 뻗치는, 시커먼 촉수였다.
그걸 보자마자 하네케는 지금 루빈에게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다는 걸 확실히 받아들였다.
루빈은 내면세계의 주인이었기에 이 공간을 마음껏 구획하고, 설계하고, 건설할 수 있다. 그런 루빈도 불가능한 게 하나 있었는데, 바로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명체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기괴하다는 말로는 부족한데.
질퍽거리는 촉수는 고작 하체였을 뿐. 지상으로 올라서면서 드러나는 괴물의 상체는 더 가관이었다. 살갗이 없는 대신, 굵고 날카롭게 자리 잡은 뼈가 우글거렸다.
-저게 머린가? 최악이군.
하네케가 사망 이후 처음으로 욕지기를 느낄 정도였다.
머리는 뼈만으로 이루어진 상체 끝에 붙어 있었다. 얼굴은 윤곽만 있는 투명한 상태여서 마치 유리로 만들어진 와인잔 같았다. 그런 얼굴 안에 수백 마리 뱀이 뒤엉키며 불쾌하기 짝이 없는 침을 흘려댔다.
괴물의 전신이 드러난 이상, 더는 잠자코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하네케는 그쪽을 보며 크게 소리쳤다.
-무얼 찾고 있느냐!
이내 마령의 머리가 하네케 쪽으로 향했다.
동시에, 투명한 얼굴 위로 눈과 입이 생기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럴 수가.
내면세계 전체를 뒤흔들 만큼이나 불경한 음성. 마령의 입에서 진심으로 놀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미 선점해 있던 놈이 있었네?
-…….
-아무 말도 안 하는 거 보니까, 맞는 것 같네?
-이놈,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하네케가 크게 소리쳤다. 단순한 소리침 그 이상. 7성의 경지에 올랐던 대장군의 기백이 온전히 담긴 고함이었다.
마령의 질퍽거리는 하체가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아닌가? 설마 너, 마령이 아닌 거야?
마령이라는 그 단어 하나. 그게 하네케의 머릿속을 선명하게 지나쳐 갔다.
마령이라. 앞뒤 상황은 모르겠지만, 눈앞에 나타난 이 괴괴한 놈이 그가 알고 있는 그 마령이라는 건 확실해졌다.
-마령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건가?
하네케의 질문에 마령이 낄낄 웃었다. 마령으로서는 웃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마령이 인간 안에 있을 만한 곳은 여기밖에 없는데? 그나저나… 나는 마령도 아닌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한데.
-뭐라?
-이건 내 먹잇감인데, 왜 네가 버티고 서 있냐는 말이다!
마령이 갑자기 크게 울부짖으며 하네케를 향해 온몸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내면세계 안으로 마령의 울부짖음이 크게 메아리쳤다.
-되는 일이 없군!
마령의 처음 목표는 어린 여자애였다. 목걸이를 통해 그 여자아이의 내면을 틀어쥐어 꼭두각시로 만들려던 게 원래 계획이었다.
하지만 여자애가 품고 있는 밀도 높은 마나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갉아먹는다면 성공할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그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
목걸이가 여자애에게서 남자애에게로 옮겨간 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마치 마령을 반기는 것처럼 소년의 내면으로 통하는 길이 활짝 열렸던 것이다.
그렇게 암연이라는, 마령이 전혀 모르는 힘에 이끌려 소년의 내면으로 틈입했다.
그렇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아무래도 루빈이 널 내게 보낸 것 같구만.
한 손으로 검을 쥐고, 다른 손으로 수염을 쓸어 넘기던 하네케가 덤덤하게 말했다.
-나를? 너한테?
-이유를 알고 싶나? 당연히 내면세계의 침입자를 격멸하라는 뜻이겠지.
그 말에 마령이 한 번 더 낄낄거렸다. 섬멸이라니. 한낱 인간 따위에게 이따위 말을 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마령세계에서 비웃음을 살 게 빤했다.
-어이가 없네? 그래도 하나는 확실히 알겠어.
쿵. 쿵. 쿵.
마령의 촉수 하체가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동안 상체를 이룬 뼈들이 다닥다닥 소리를 내며 오르락내리락 움직여 댔다.
공격을 감행하려는 것이다.
-너를 없애야만 내가 여기에 눌러앉을 수 있다는 거지.
마령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눈앞의 저 노인이 이 내면세계를 지키고 있으니, 저 노인을 죽여야만 자신이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내면세계에 두 개의 영혼이 깃드는 건 마령이 보기에도 흔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신기하다며 여유를 부릴 일도 아니었고.
빨리 제거하면 할수록 마령은 더 빨리 힘을 회복할 테고, 그러면 더 빨리 이 공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네케는 그저 웃을 뿐.
-지금 비웃은 건가?
-글쎄. 마침 잘됐다고 해야 하나.
오랜만의 전투를 앞두고.
하네케는 검을 휘둘러 허공을 갈라보았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며, 그의 얼굴에 다시 잔잔한 미소를 일으켰다.
루빈에게는 귀찮은 일이 생긴 것 같지만, 하네케에겐 아니었다. 아주 오랜만에… 전투에 대한 향수를 채워줄 만한 일이었으니.
-그래도 서둘러야겠지.
-건방진 노인네로구나!
마령과 하네케. 지금 여유로운 쪽은 단연 하네케였다. 그 사실이 거슬린 망령은 괴팍하게 울부짖었지만, 하네케는 여전히 담담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내 즐거움이 줄어들 테니까.
내면세계로 복귀하기 위해 루빈이 다가오고 있다. 즉, 하네케가 이 내면세계의 파수꾼을 자처할 시간이 그 정도로 길지 않다는 뜻이었다.
-후우…….
짧은 심호흡과 함께, 하네케의 검에 또다시 흑칠의 오러가 휘감긴다.
한 겹, 두 겹…. 모두 일곱 겹이 감기며 검신뿐만 아니라 그 주변을 뜨겁게 달구었다. 7성 경지의 오러가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하네케의 백발이 저절로 위로 솟아올랐고, 그 눈빛에 비장함이 서렸다.
-자, 그럼. 선전포고는 없어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