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62)
암살검가 로이넨-62화(62/258)
제62화. 목걸이 속 존재 (3)
-마령이라더니, 시답잖은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하네케는 굵직한 목소리로 한마디 던졌다. 그러나 바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는 가만히 마령이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마령은 군대를 생산 중이었다.
마령의 상체는 살갗도 없이 기괴하게 자리 잡은 뼈 무더기였고, 그 뼈들을 하나씩 떼어내면 마령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병사가 되는 듯했다.
그르르르…….
뼈를 잘게 분지를수록 더 작은 형태의 병사가 만들어졌다.
병사라고는 했지만, 인간형이 아닌 그저 괴수. 마령의 몸에서 만들어진 괴수였으니, 이쪽 세계의 괴수와는 또 얼마나 다를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하네케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검의 손잡이를 거꾸로 잡아 검의 방향이 바닥으로 향하게 한 뒤.
-이제 그만하면 됐다.
그 말과 함께 언덕을 가볍게 뛰어오른 하네케. 마령의 앞쪽에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수백이 넘는 수의 괴수들이 우글거리는 한복판이었지만, 그는 가벼운 웃음과 함께 이렇게 소리쳤다.
-기꺼이 한 번에 쓸어주마!
하네케는 검을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대지에 꽂아 넣었다. 바위지대였기에, 일반적인 검이었다면 부러지거나 그 끝만 조금 박혀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검은 흑칠의 오러가 일곱 겹이나 휘감긴 상태. 한때 공성전의 선봉에서 성벽을 부술 때 휘둘렀던 그 일격이, 대지 위에 직격으로 강타했다.
하네케가 대지에 검을 꽂아 넣는 순간.
그들 주변을 에워싼 공기가 한순간 압축되는가 싶더니, 하네케의 포효와 함께 대지가 뒤흔들렸다.
쿠쿠쿠쿠쿵!
바닥을 디디고 있던 마령의 병사들이 예외 없이 중심을 잃으며 쓰러졌다.
-뭐, 뭐, 뭐, 뭐야!
마령은 와인잔처럼 투명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를 꽥 질러 댔다.
병사들을 넘어뜨리는 것만으로 끝을 볼 생각이 없는 하네케였다. 그는 대지에 박았던 검을 빼 들며 자세를 낮추었다. 다음 순간, 그가 검을 가로로 긋는 동시에 몸을 중심축으로 원형을 그려냈다.
가까이 있던 병사들부터 멀리 있던 놈들까지. 한복판에서 시작된 공격이 파형을 일으키며 멀리 퍼져 나갔다.
가까이 있던 괴수는 그야말로 바스러졌고, 그나마 멀리 있던 놈은 조각조각 파편이 되는 정도로 허물어졌다.
형태는 달라도 어쨌든 결과는 똑같았다. 이 한 번의 공격에 살아남은 괴수는 단 하나도 없었다.
-군집된 병사는 한 번의 포탄이면 족하지.
진법을 강론하듯 한마디 던지며 하네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뒤 검을 고쳐 쥐고는 마령 쪽으로 걸어갔다.
-내 병사들은 한 번에 죽지 않는다고!
마령이 또다시 소리를 꽥 질렀다.
하네케는 자신이 걸어온 뒤쪽을 쓱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살아생전 네크로맨서가 부활시킨 해골 병사들과도 싸워봤지만, 내 검에는 복구가 되지 않더군.
-그딴 네크로맨서와 나를 비교하다니, 어리석군. 내가 만들어낸 건 인간 시체 따위가 아니라, 마령의 군대란 말…….
어리석은 건 마령 쪽이었다. 하네케 등 뒤로 보이는 수백의 마령 병사들은 되살아나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그 뼈들을 다시 조립하여 더 거대한 괴수로도 만들어낼 수 있었는데.
-검의 경지가 그래서 중요한 법이지.
마령이 다급하게 촉수를 움직여 하네케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하네케는 가벼운 걸음으로 마령에게 다가든다.
-전투에서 역량이 부족한 지휘관은 개죽음을 자초하는 법. 마령세계에 너 같은 놈들만 있다면 좋겠군.
마령의 머리 안에 담긴 뱀들. 험악하게 아가리를 벌려대며 서로 뒤엉켰다. 지금 마령이 순수한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었지만, 하네케가 그 사실을 알 리는 없었다.
단지 너무 징그럽다는 생각만 들었으니까.
-더는 보고 있기가 역하군. 루빈에게 보여줘 봐야 좋을 게 없겠어. 이제 그만 끝내도록 하지.
하네케는 검을 어깨높이로 들었다. 이만한 상대에겐 브리온 검식을 펼칠 필요조차 없었다. 생각보다 형편없는 침입자에 아쉬움마저 생길 정도였다.
-제기랄. 주소를 잘못 골랐네.
마령에겐 더 물러날 곳도 없었다. 등 뒤로 단단한 암벽이 느껴졌다.
-어차피 너흰 죽음이란 걸 모르지 않더냐.
-마령에 대해 조금 아는구나?
-너흰 여기서 사라져 봤자 다시 마령세계로 돌아갈 뿐이지. 다음에 올 땐 제대로 준비해서 오도록. 아니, 얼씬도 하지 말고 거기에 얌전히 있는 게 이롭겠군.
마령은 머리를 마구 휘저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만, 잠깐만!
-……?
-너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라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애를 쓰는구나.
-정말이야! 한번 듣기만 해봐. 루빈이라고 했나, 이 내면세계의 주인 말이야. 그 꼬맹이를 위해서 꼭 알아야 하는 건데, 정말 안 들을래?
-…….
그 말에 하네케가 들었던 검을 내려놓았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루빈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루빈이 지금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건 분명히 느껴졌다.
-루빈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아냐, 지금 당장을 말하는 게 아니야. 그런데 이대로라면 언젠가 문제가 생길 거야.
하네케는 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박혀 버린 검이 파르르 떨렸다. 마령이 허튼짓을 하는 순간, 바로 뽑아 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루빈은 곧 도착한다. 이놈의 생사여탈권은 루빈에게 맡겨야겠군.
하네케는 팔짱을 끼고 마령을 바라보며 턱짓을 했다. 꼭 알아야 할 그 사실을 이야기해 보라는 뜻이었다.
* * *
쿠제는 루빈을 살폈다.
‘흔들림이 없어. 얼어붙은 것처럼.’
루빈은 그 스스로 예상한 것처럼, 암연을 주입하는 그 순간부터 현실세계에서의 의식을 잃었다. 한 손으로는 식탁 위에 놓인 목걸이를 쥐고 있지만, 앉은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제대로 되고 있는 걸까? 쿠제는 불안과 후회를 동시에 느꼈다. 도련님에게만 너무 많은 부담을 지운 건 아닌지.
‘다른 방법을 찾아봤어야 했던 건 아닐까.’
자기도 모르게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게 된 쿠제. 그 순간, 집중력이 뒤틀리면서 그 여파가 곧장 드러나고 말았다.
그가 펼치고 있던 반구형의 암연에 순간적으로 밀도의 차이가 나타났다. 쿠제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루빈은 짧은 경련을 일으킨 뒤였다.
“쿠제!”
루빈이 소리쳤다. 아니, 루빈이 소리친 게 아니라 루빈으로 변신한 티나가 소리친 것이었다.
“집중해. 루빈을 죽이고 싶어?”
“아, 죄송합니다!”
쿠제는 심호흡을 하고,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다시 집중하기 시작하자 반구형의 암연으로부터 안정감이 느껴졌다.
“도련님이 걱정돼서요.”
쿠제의 솔직한 말에 티나는 머리칼을 쓱 넘겼다. 진지하면서도 덤덤한 표정이었다.
“루빈이 확실히 파악하고 세운 계획이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겠죠?”
“아직도 모르겠어? 얘가 어떤 놈이냐면 말이지…….”
티나는 쿠제를 안심시킬 겸, 루빈과 함께 겪었던 몇 가지 일화를 들려줄 참이었다. 길리필드 수목원에서 있었던 로이네크로우 비행 일화를 막 말하려고 할 때.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똑똑똑.
조심스러운 노크에 쿠제와 티나가 긴장한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셀레스네입니다.”
티나는 쿠제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의 손짓을 해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 앞으로 걸어가 반쯤만 문을 열었다.
“어, 셀레스네, 어쩐 일이지?”
루빈치고는 살짝 어색한 말투였지만 셀레스네의 의심을 살 정도는 아니었다. 셀레스네는 몸을 숙여 예를 표했다.
“루든 도련님이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네요.”
“무슨 일이지?”
쿠제는 다시 한번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살짝 귀찮다는 느낌이 풍기도록.
“클로이 아가씨께서 살펴보라 하셔서 왔습니다. 편찮으신 것 같아 아가씨께서 걱정하시고 있습니다.”
“아, 클로이…. 몸이 안 좋은 건 아니고, 살짝 피곤한 정도야.”
“그렇군요. 아가씨께 다과를 만들어 내가려고 하는데, 혹시 도련님께서도 드시겠습니까?”
티나는 턱을 긁적이며 고민하는 척을 했다.
“다과라.”
“좋아하시는 다과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아공간 주머니에 다양한 다과를 준비해 두고 있으니까요.”
반쯤 열어놓은 문을 붙잡고 나누는 대화라니. 이대로 있는 게 더 불안할 것 같아, 티나는 일단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뭐든 상관없어. 쿠제를 보내도록 할게.”
“알겠습니다, 그럼.”
셀레스네는 문 앞에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돌아서서 복도를 걸어가나 싶었는데… 그녀가 다시 돌아섰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게 있어서요.”
“응? 뭐가?”
셀레스네의 시선이 열린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명백히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요. 둥둥둥 하는.”
아, 씨. 어떻게 들었지? 쿠제의 반구형 암연에서 불가피하게 나는 소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티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한 발짝 다가오려는 셀레스네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방 안에 있는 쿠제한테는 들리지 않도록 속삭였다.
“사실 쿠제가 지금 육체 단련을 하고 있거든.”
“육체 단련이요? 의외인데요.”
“내가 봐도 대단한 건 아니야. 모양내기일 뿐이지. 어쨌든 웃통을 벗고 전념하고 있어.”
웃통을 벗었다는 말에 셀레스네 표정이 구겨졌다. 보기 싫다는 뜻이 분명했다. 이제야 순순히 물러날 것 같았다.
“그렇군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나저나 도련님, 정말 괜찮으신가요? 안색이 정말 좋지 않네요.”
티나는 멋쩍게 웃으며 서둘러 대화를 종결시켰다.
“심해라 그런지 몸이 찌뿌둥하네. 잠도 몰려오고. 일단 쿠제를 보내도록 하지. 당연히 옷은 입혀서.”
한쪽 눈을 깜빡이는 루든을 보며 셀레스네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별말 없이 돌아섰다. 티나는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들킬 뻔.”
겨우 위기를 넘겼다는 생각에 티나가 어깨를 쫙 폈다. 걱정하는 눈으로 돌아보는 쿠제를 바라보며 득의만만하게 말했다.
“설마 걱정했던 거 아니겠지? 방금 전에 내가 하는 거 못 봤어?”
“제가 다과를 가져와야 하는데…….”
“아니야. 내가 가야지. 넌 여기서 하던 거 마저 해. 계속 집중하면서.”
그러면서 티나는 이번엔 쿠제로 변신했다.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마주하는 생경한 경험에 쿠제는 침을 삼켰다. 자칫 또다시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집중하면서.
“조, 조심히 다녀오세요, 티나 님. 문 잠그는 것 잊지 마시고요.”
티나는 문 앞에서 쿠제를 돌아봤다. 불안하게 쳐다보는 로이넨서를 안심시켜 줘야 했다. 그래서 셀레스네에게 했던 것처럼, 여유로움이 가득 담긴 윙크를 보냈다. 그런 태도야말로 쿠제를 불안하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다녀올게!”
쿠제로 변한 티나는 복도에 나서자마자, 음성을 익히기 위해 ‘아, 아’ 몇 번 소리를 내었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잠긴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쿠제는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를 심호흡을 반복했다.
눈앞에 앉아 있는 루빈도 걱정이었지만, 셀레스네를 마주할 티나도 걱정이었다. 그중 쿠제를 더 불안하게 하는 건 단연 티나였다.
* * *
루빈은 겹겹이 쌓인 어둠을 헤쳐 나갔다.
그를 감싼 어둠은 질퍽거렸고, 심지어 공격적이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루빈이 한 발짝 나아갈수록 그 기세가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얼마를 걸어온 건지. 끝없는 어둠의 공간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질주할 수도, 도약할 수도 없이 한참을 걸어야만 했다. 루빈이 짐작하기론 수 킬로미터는 걸어온 느낌이었다.
‘거의 다 왔어.’
예상했던 대로였다. 어둠이 끝나기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걷다 보니 앞을 가로막는 벽이 나타났다. 깨지기 직전의 유리처럼, 벽 곳곳에 금이 뻗치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를 들어 벽을 가볍게 밀었다.
콰쾅.
벽이 무너지면서, 눈앞에 익숙한 풍경이 드러났다. 바로 그가 하네케와 함께 구축해 놓은 내면세계의 수련장이었다.
-왔나?
저쪽에서 하네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빈은 속도를 내서 움직였다. 몸 안에 옥죄고 있던 모든 감각이 되살아났고, 암연의 운용도 가능해졌다.
바람소리를 내며 하네케 앞에 도착했더니.
“이놈은 뭐죠?”
루빈은 마령의 흉측한 외형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령일세. 내 추측으로는 하급 마령일 것 같네만.
-무슨 소리, 나는 상급 마령이라고!
-들었지, 자기 말로는 상급 마령이라 하는군.
루빈은 가볍게 도약하여 하네케 옆에 섰다. 하네케의 검이 바닥에 꽂혀 있는 게 보였다. 의문이 담긴 눈으로 하네케를 쳐다봤다.
“이놈을 마령세계로 돌려보내야 해요. 그래야 목걸이에 깃든 위험도 없어질 거고요.”
-나도 해치우려고 했네. 그런데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더군.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 루빈은 박혀 있는 하네케의 검을 쥐려다가 멈추었다.
대신 마령을 에워싼 형태로 공중에 수십 개의 검을 띄웠다.
공중에 떠오른 수십 개의 검은 빛을 반짝거리며, 그 날카로움을 드러낸 채로 마령에게 칼끝을 겨누었다.
원한다면 손가락 두 개를 튕기는 것만으로도 마령을 원래 세계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이곳은 루빈의 내면세계였고, 여기서 루빈은 일종의 신이었다. 생명체를 만들어낼 수 없지만 그 외의 모든 건 가능했다.
-아, 아니 일단 말은 들어봐야지. 이 꼬맹아!
그래, 무슨 소릴 지껄이는지 한번 들어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