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64)
암살검가 로이넨-64화(64/258)
제64화. 필리몬드로 가는 길 (1)
조심스럽게 열리는 문.
뒤를 살피며 객실 안으로 들어온 티나는 느긋한 미소를 보였다. 들어오자마자 쟁반에 담긴 다과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는.
“우후! 고생하신 여러분, 제가 제국귀족만 먹는다는 다과를 받아왔습니다.”
쾌활하고 여유로웠다. 별일 없었던 건가?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두 사람 앞에서, 티나는 고양이로 다시 변신하고는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왜 그렇게 쳐다봐? 잘 해결된 거 아니야?”
“셀레스네랑은 문제없었어?”
문제? 문제 될 게 있었나? 티나는 눈을 끔뻑이며 꼬리를 풀썩였다.
다과를 받기 위해 요리실로 들어갔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셀레스네를 잡아두기 위해 갖은 애를 썼을 뿐.”
티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쉽지만은 않았다. 마령을 해치우는 루빈이나, 그런 루빈을 보조하는 쿠제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해도.
‘제과 솜씨를 치켜세우며 얼마나 먹어댔는지, 뱃속이 다 뒤엉킬 것 같네.’
위더스푼 가문은 간식조차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보는 앞에서 과자와 빵을 만들어댔던 셀레스네였다. 맛이 일품이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쿠제 역할에 지장이 생겼을 것이다.
간식 시식 이후에는 요리실 안을 서성이며 이런저런 핑계를 댔다.
실수인 척 조리기구를 엎어버리기도 했고, 그러다가 진짜 실수를 해버리면서 셀레스네의 인상이 잔뜩 구겨지기도 했다.
‘쿠제에 대한 인상이 조금 달라졌겠지만, 그래도 나는 해야 할 몫을 한 거야.’
대의를 위해서 쿠제가 감당해야 할 사소한 에피소드도 하나 있었다.
그러나 그걸 이 자리에서 이야기했다가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 같아, 티나는 입을 꾹 닫고 모른 척했다.
“이렇게 세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지금의 평화가 달콤하구나.”
티나는 턱을 침대 위에 붙이며 바짝 엎드렸다. 가만히 눈을 감고 졸린 척을 했다.
“…….”
“어째 불안한데요.”
쿠제가 느낀 불안감은 틀리지 않았다.
두 시간쯤 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쿠제는 셀레스네에게 냉대를 당했으니까.
이전의 셀레스네를 감안하더라도, 그만한 냉대가 더 없을 정도의 반응이었다.
셀레스네와 쿠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만했지만, 차마 누구도 직접 물어보지는 못할 정도의 냉담함.
가장 어이가 없는 쪽은 당연히 쿠제였다. 그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채로 식사 시간 내내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때만이 아니었다. 셀레스네의 냉대와 무시는 이후에도 쭉 이어졌다.
‘뭐지? 티나가 뭔 짓을 벌인 거지.’
루빈은 신경 쓰지 않는 척 가만히 식사를 이어나갔다.
* * *
블루캣호는 날이 밝아오기 직전에 운항을 재개했다. 아늑이 고지한 대로였다.
잿빛해협 심해에 선박을 고정시켰던 닻이 끌어올려지면서 블루캣호는 수면을 향해 떠올랐다.
다만 수면 위로 올라가지는 않고, 수면으로부터 몇백 미터 아래 지점에 잠수한 채로 항해를 시작했다.
해가 떠오른 지 두 시간쯤 뒤. 잿빛해협을 벗어난 블루캣호가 비로소 수면 위로 올라왔다.
끼룩, 끼룩!
고래가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함선이 나타나자, 하늘을 날던 갈매기들이 깜짝 놀라 비행의 방향을 바꿨다.
“으쌰! 으쌰!”
아늑과 와락은 갑판 위로 올라와, 함께 배를 덮은 수룡의 비늘을 걷어냈다. 그다음에는, 내렸던 돛대를 세운 뒤 수룡의 비늘을 삼각돛 형태로 하여 내걸었다.
바람을 받으며, 함선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해상은 평화로웠다. 심해에서부터 줄곧 배에 갇혀 있다시피 했던 탑승객들이 나와 햇빛을 누려도 좋을 만큼.
“냐옹, 냐옹.”
고양이가 갑판 위에서 펄쩍펄쩍 뛰었고, 루빈은 그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티나가 저지른 짓이 무엇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그다지 심각한 건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여행에 지장이 생길 정도는 아닌 것 같군.’
당연히 티나가 먼저 실토해 준다면 좋겠지만.
지금 티나는 열심히 고양이인 척, 햇빛 아래 게으르게 늘어져 있는 중이었다.
“냐아아아아?”
“됐다, 됐어.”
루빈은 양손을 깍지 낀 채로 머리 뒤로 둘렀다. 그리고 갑판 위에 누워,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쳐다봤다.
항로가 제대로 잡혔으니 블루캣호는 일주일 이내에 필리몬드에 다다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위더스푼 가문과의 불편한 동승도 끝이 날 테고.
‘필리몬드라…….’
이른바 백색도시, 필리몬드.
제국 본토를 기준으로 다섯 번째로 큰 도시. 어째서 ‘백색도시’라는 별칭을 지녔는지는 검문소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도시를 이룬 모든 장소가, 심지어 사람들의 의복까지 모두 새하얗게 물들어 있을 테니까.
필리몬드에는 신성한 제국법전 원본이 안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국에서 필수적으로 진행되는 여러 행정적 절차가 집결하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행정수도. 물론 실상은 제국법 위에 황명이 존재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이곳에서 법이 전파되고 갱신된다.
‘아늑과 와락이 처한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이 도시를 선택하긴 했지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필리몬드는 루빈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기착지였다.
이번이 아니었다면 언젠가, 복수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한 번은 꼭 들러야 할 도시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루빈이 예정했던 시기는 5년쯤 뒤였지만, 이참에 그 시간을 훨씬 앞당겨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오히려 잘됐다고나 할까.’
루빈은 곰곰이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오늘의 날짜와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를 짜 맞췄다. 그러자 나온 결과는 14일 후.
즉, 2주 뒤 필리몬드에서는 사건 하나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필리몬드에서 며칠을 대기해야겠군.’
제국 본토에서는 최소한의 시간만 보내는 게 애초 원칙이었지만, 이 일은 그 원칙을 깰 가치가 충분했다.
“……?”
루빈이 필리몬드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구름을 감상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눈앞으로 아주 얇은 실 한 오라기가 떠다니는 게 보였다. 거미줄인가 싶었지만, 그것보다는 살짝 굵었다.
게다가 색깔이 묘했다.
연푸른색의 실이었다.
루빈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실이 공중에서 움직인 방향을 눈길로 따라갔다.
갑판 한쪽. 루빈과 티나의 맞은편 쪽에서 클로이와 셀레스네가 마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가끔씩 바다를 내다봤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무 이야기도 오가지 않았다. 수다스러운 클로이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데.
‘마법사들은 전음을 이렇게 쓰나?’
셀레스네와 클로이 사이.
주변에서 날아든 실이 뭉쳐지고 있었다. 루빈의 눈앞을 지나쳤던 한 가닥의 실도 마찬가지.
한데 합쳐진 실들은 이제 파지지직,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치 점화되어 줄의 끝부터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 다음, 클로이의 눈앞에서 줄이 휘적휘적 움직이며 어떤 문장을 만들어냈다.
‘아, 놀이였나?’
루빈이 알기론, 마법사들이라고 해서 전음의 형태가 다르지는 않았다.
작동 원리야 암살자들과 다르겠지만, 그 방식은 음성 전달식이었다.
그렇다면 클로이와 셀레스네가 한가롭게 문장을 끼적이는 건 일종의 놀이거나, 또 다른 수련법인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셀레스네 양.
셀레스네 양? 시녀를 그렇게 지칭한 건 놀림조인 건가? 아니면 미처 파악하지 못한 뭔가가 있었던 건가?
우연히 지켜보게 된 두 사람의 대화였지만, 이제 와서 몸을 돌릴 수도 없었다.
-결정이 되면 나한테 신호를 줘, 셀레스네.
-아가씨!
연푸른빛의 실들이 이번엔 셀레스네 앞쪽으로 옮겨가 그녀 말을 담아냈다. 느낌표까지 덧붙이면서.
깃펜 하나를 번갈아 쓰면서 종이 위에다 밀담을 나누는 것과 같았다.
-내가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거 맞지?
-정말 계속 그러실 건가요!
-쿠제를…….
쿠제라고? 낯익은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루빈이 얼결에 한 발짝 내디뎠을 때였다. 루빈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셀레스네가 서둘러 클로이를 멈췄다.
“도련님?”
“루든?”
두 사람 다 의외라는 표정.
그제야 루빈은 두 사람의 대화를 목격하는 게 아무나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자기 곁에 있던 티나나 쿠제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 대화를 봤어?”
클로이는 질문을 던졌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직접 확인에 나섰다.
손가락을 튕겼을 뿐인데…….
문장을 만들던 연푸른빛의 줄이 루빈 쪽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루빈 눈앞에서 팔랑거리더니, 루빈이 눈동자로 그 움직임을 따라가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보이는 거 맞구나! 너, 왜 얘기 안 했어?”
클로이는 빠르게 다가와 루빈 앞에 섰다. 악의나 공격성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쾌활함 그 자체. 얼굴 가득 미소를 드러내며.
“너도 마법사였던 거야?”
“아니에요, 아가씨.”
셀레스네는 예단하지 않았다. 그녀는 합리적으로 이 상황을 해석했고, 루빈을 처음 만난 이래로 줄곧 지켜봤던 그의 모습을 다시 추론했다.
“제가 보기엔 루든 도련님은 마나에 감응할 수 있는 정도예요. 그 이상이었다면 제가 알아봤을 겁니다.”
마법사가 아니라고는 해도, 클로이와 마나선을 휘적이며 나눈 밀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라면 그렇다면 일반인에서는 조금 벗어난 경우로 보아야 했다.
“치, 아쉽네. 나는 마법사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아가씨, 제가 너무 안일했네요. 저희 이야기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죄송합니다.”
“어차피 중요한 이야기도 없었잖아. 아닌가?”
셀레스네가 심각한 만큼 클로이는 가벼웠다. 클로이로서는 루빈이 마나에 감응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재밌는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확한 확인이 필요하겠네요. 루든 도련님, 괜찮으시면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정확한 확인이라니, 뭘 말하는 거야?”
“지금 제가 예상하기로는 마나에 감응하는 정도인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확실하게 파악해 두어야겠습니다. 아가씨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 말이죠.”
마나에 관해 루빈이 지닌 경지를 감별하겠다는 뜻이었다.
셀레스네의 태도를 보아하니, 거절해도 계속 밀어붙일 것 같았다. 이 시녀를 막아줄 사람은 클로이뿐인데, 클로이는 어깨만 으쓱거렸으니.
‘마나 감응력이라… 궁금하던 참에 차라리 잘됐군.’
몇 년 전. ‘빛과 반역의 탑’을 견학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루빈은 탑 안에 넘쳐나던 마나에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그때 루빈을 괴롭혔던 것도 마나에 감응하는 능력이었다.
회귀 전에는 다른 암살자처럼 마나에 감응하지 못했다. 암살자로서는 그게 약점이라면 약점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나에 애매한 수준으로 감응하게 된 지금, 그게 강점이 된 것도 아니었다.
“대신 둘이 나눈 대화가 무슨 뜻인지 알려줄래?”
그걸 알려준다면 셀레스네의 감별에 응해주지.
루빈은 두 사람이 나눈 밀담이 쿠제를 향한 셀레스네의 냉대와 관련이 있다고 짐작했다.
다르게 표현하면, 티나가 벌인 짓의 내막을 알아내는 것이다.
“풉.”
클로이가 웃음을 참았다. 그때 루빈은 셀레스네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걸 눈치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