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67)
암살검가 로이넨-67화(67/258)
제67화. 필리몬드로 가는 길 (4)
다음 날 해가 높이 솟았을 때, 블루캣호에도 승인이 떨어졌다. 비로소 필리몬드강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거대도시의 강은 넓었다.
완벽하게 방비된 나루가 여러 곳. 거대함선은 대부분 바다와 인접한 나루에 정박했고, 블루캣호 같은 소형 함선은 도시 중심부 쪽으로 향했다.
“이제 배를 정박시키겠습니다.”
아늑과 와락이 분주히 움직였다. 지난밤의 여유는 온데간데없고, 두 거혈인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하긴 필리몬드에서 법적인 절차를 성공적으로 밟아야, 배의 소유권을 얻을 수 있으니.
배가 나루에 안전하게 정박한 뒤, 승객과 선원 전원이 블루캣호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그들 앞으로 백색도시의 일면이 펼쳐졌다.
나루 전용 검문소부터 시작해서, 그 뒤편으로 솟아 있는 모든 건물들까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백색이었다. 심지어 거주민들의 옷차림까지도.
저벅저벅.
백의의 경비병들이 함선 앞에 서 있는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승객 두 집단과 선원 두 명입니다.”
아늑이 공손한 태도로 블루캣호에 관해 보고하자, 경비병들이 검문소에 그 사실을 보고했다. 이후 블루캣호 일행은 검문 절차에 따라 세 무리로 나뉘었다.
루빈 일행, 위더스푼가, 거혈인 남매.
가장 먼저 검문소에 들어선 건 클로이와 셀레스네였다.
클로이는 금발을 찰랑거리며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는 루빈 일행을 돌아보며 여유롭게 손을 휘젓기까지 했다.
그렇게 위더스푼 영애와 시녀가 들어선 지 1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검문소 일대가 불이 난 것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제국귀족의 등장에, 그것도 가문의 영애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엄숙해 보이기만 했던 백의의 사람들은 황망히 뛰어다니기 바빴다.
“우리가 저런 사람들을 배에 태웠다니.”
“어젯밤에 제국귀족 승객들과 보드게임을 했다면, 누가 믿어줄까?”
와락과 아늑이 신기한 눈으로 검문소를 올려다봤다. 루빈도 왁자지껄했던 마지막 밤의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보드게임 하니까, 어젯밤의 치욕이… 떠오르는군요.”
쿠제는 고양이를 째려보며 날카로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참담한 패배가 떠올라 이를 갈았다.
루빈과 쿠제는 한편이 되어, 위더스푼 편과 거혈인 편에 맞섰다. 보드게임에 관심이 없는 루빈은 시큰둥하게 게임 말을 옮겼지만, 쿠제는 나름 열심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언을 통해 쿠제에게 훈수를 두는 고양이가 있었다는 것.
‘이 답답한 로이넨서야!’라거나, ‘아이구, 속 터져 죽겠네!’라며 사실상 쿠제를 조종했던 티나였다.
“제가 게임 말을 빼앗길 때마다 셀레스네 님이 저를 얼마나 모멸적으로 쳐다보시던지…….”
유례없는 졸전. 그렇게 간밤을 떠올리며 쿠제가 툴툴거리고 있을 때, 검문소에 들어섰던 셀레스네가 성큼성큼 걸어서 그들 쪽으로 되돌아왔다.
셀레스네 혼자만 오면 괜찮았겠지만, 클로이도 함께였다.
“아가씨, 제가 대표로 인사하겠다니까요.”
이런 셀레스네의 만류에도 소용없었다.
일행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클로이가 경쾌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 뒤로 검문소장을 비롯한 사람들 수십 명이 우르르 몰려나왔지만, 익숙한 듯 클로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잘 있어, 루든! 마법 공부 게을리하지 말고!”
클로이가 악수를 하자며 손을 건넸다. 뒤쪽으로 백의를 입은 수십 명의 눈길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 거리의 행인들도 구경거리를 발견하고 고개를 삐쭉 내밀고 쳐다보았다.
-도련님, 너무 이목을 끌게 됐는데요.
루빈이 클로이에게 응답하여 똑같이 손을 내밀려 하자, 쿠제는 암살자다운 상황 판단으로 이렇게 전음을 보냈다.
-앞으로 저희 행동에 제약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냐, 오히려 잘된 것 같아.
-네?
-덕분에 저쪽에서 나를 좀 더 빨리 찾아낼 테니까.
저쪽? 쿠제가 이해 안 간다는 눈으로 루빈을 쳐다봤다. 필리몬드에 있는 누군가가 루빈을 찾아올 거라는 뜻인가? 어수선한 분위기로 인해 쿠제에겐 당장 궁금증을 해소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클로이, 다음에 봐.”
“그래!”
다시 볼 수도 있다는 전제 아래 남긴 인사였다. 클로이나 셀레스네는 의례적인 인사말 정도로 이해한 것 같지만.
셀레스네는 거혈인 남매도 잊지 않았다.
“와락, 아늑. 클로이 아가씨께서 직접 이야기를 해두셨으니, 법적인 절차가 더 간소해질 거야.”
“감사합니다, 아가씨! 셀레스네 님!”
클로이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내가 고마워! 너희 덕분에 악토니아도 볼 수 있었잖아. 얼마나 멋있던지!”
루빈으로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클로이의 호의 덕분에 루빈의 부담이 줄어들었다. 원래 거혈인 남매가 블루캣호의 소유권을 인정받게 해주려면 루빈이 보증인으로 나서야 했다. 까다롭고 지루한 절차였을 거다. 하지만 클로이가 해준 몇 마디 덕분에 시간을 벌지 않았나.
“그리고 쿠제 님.”
이제 셀레스네와 쿠제 사이의 작별인사만 남았다. 마침 안겨 있던 고양이가 움찔거리며 냐옹, 운 것은 쿠제의 기분 탓이었을까.
“이걸 받으세요.”
셀레스네 손에 들린 건 조그마한 봉투.
“설마 이건… 편지인가요?”
“아니요. 경고장입니다.”
“네?”
“냐아아아옹.”
티나가 허우적대며 쿠제의 품에서 벗어나 루빈에게 안기려 했지만, 루빈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럼 우린 갈게!”
쿠제가 셀레스네의 경고장을 받아 드는 것으로 어수선한 작별이 끝났다.
클로이와 셀레스네가 포니아크호로 환승하기 위해 거리로 올라섰고, 그 뒤로 백의의 사람들 수십 명이 또 우르르 몰려갔다.
“티나 님!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셨던 겁니까? 경고장이라뇨, 네?”
“냐옹? 냐아아아?”
“쿠제, 이제 우리 차례야. 올라가자.”
“하. 대체…….”
두 사람이 계단을 올라갔다. 제국귀족의 등장이라는 일대의 사건 직후여서 그런지, 검문소는 유난히 스산했다.
검문소 탁자 앞을 묵묵히 지키고 앉은 경비병 하나.
“…….”
“입항 문서를 써야 할까요?”
경비병 맞은편에 선 루빈이 나직하게 물었다. 그와 동시에, 경비병을 내려다보는 쿠제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도련님, 이 경비병…….
-그래, 암살검가 사람이야.
놀란 건 경비병 역시 마찬가지. 그도 이제 막 암연을 느꼈을 테니까.
경비병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맴돌다가 루빈과 쿠제를 번갈아 바라봤다. 예정에 없던 방문객이어서 그런지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려는 거 같았다.
-알고 계셨어요?
-아까 배에서 내렸을 때부터 이 사람의 암연이 느껴지긴 했어. 근데 이 자는 이제야 알아차린 것 같은데.
필리몬드에 파견되어 있는 암살자들이 여럿이란 말은 들었다. 그러나 그게 경비병이었다는 건 쿠제로서도 닿기 힘든 수준의 정보였다.
원래라면 루빈 역시 똑같은 입장이겠지만, 루빈에게는 회귀 전의 경험이 있었다. 실제로 이들은 여러 직업군과 신분에 분포되어 있고, 경비병이나 공무원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아, 예. 여기에 작성해 주시지요.”
정신을 다잡은 경비병이 루빈 앞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루빈은 깃펜을 들어 빈칸을 채워 나갔다. 이름, 소속, 나이, 온 목적.
그때.
“……!”
쿠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작성이 끝난 서류에 예상치 못한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루빈 로이넨.
루빈의 본명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가명인 루든 포이넨을 썼어야 하는데.
‘실수인 걸까?’
아니다. 그가 알고 있는 루빈이라면 이런 실수를 할 리 없다.
뒤이어 쿠제는 루빈이 했던 ‘저쪽에서 나를 좀 더 빨리 찾아내겠지’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로이넨 혈통이라는 걸 일부러 밝히려는 건가?
-도련님. 뭘 의도하시는 건가요?
-양쪽 다.
그러고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칙명부와 암살검가 둘 다 말이야.
이 경비병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할 것이다. 암살검가 사람이, 그것도 로이넨 가문의 막내아들이 필리몬드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빠짐없이 보고하겠지.
1차 보고 대상은 필리몬드 내에서 임무 수행 중인 다른 암살자들. 그 이후엔 2차 보고 대상인 칙명부에도 이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칙명부와 암살검가 사이의 연락책. 그게 이 가신의 역할일 테니까.
그렇다면 보고받은 칙명부 인원들은 이 사실을 어디에 보고할까?
황궁?
아니었다. 아무리 대상이 로이넨 가문의 막내아들이라 할지라도 그럴 필요까진 없다. 게다가 루빈은 지금 공식적으로 위장별채로 가는 여정 중이었으니, 흠잡을 만한 것도 없었다.
다만, 칙명부는 필리몬드 시장에게만큼은 이 사실을 반드시 전달할 것이다.
‘필리몬드의 시장이자, 제국의 법무대관.’
한편으로는 루빈과 먼 친척 사이가 되는 사람. 루빈이 자신을 찾아내기를 기다리던 바로 그자였다.
“통과하시지요.”
루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문소를 통과, 거리로 나섰다. 온통 백의로 차려입은 사람들 틈으로 빠르게 섞여들어 갔다.
그 순간.
하늘 위로 수십 마리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행인들은 이 무슨 기이한 징조인가 싶어 불안하게 하늘을 쳐다봤다.
까아아아악.
그르르르!
루빈과 쿠제는 묵묵히 걸어갔다. 백색도시의 하늘로 수십 가닥의 검은색 선을 그어대는 것처럼, 새롭게 퍼져 나간 첩보에 로이네크로우들의 분주한 비행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 *
“아, 아니! 도, 도, 도대체!”
숙소의 가장 안쪽 객실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절규. 손에 들린 편지가 파르르 떨린다.
루빈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흥분을 삭히려 애쓰는 쿠제를 쳐다봤다.
드디어 진실이 밝혀졌다. 셀레스네가 어째서 쿠제에게 그토록 냉담했고, 심지어 멸시하다시피 했는지. 마령을 처치할 때 쿠제로 변한 티나가 셀레스네에게 어떤 비호감을 선사했는지.
“…티나 님? 이 편지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이게, 정말 사실입니까? 아니죠? 셀레스네 님이 농담하는 거죠?”
“흐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셀레스네 그 시녀 참, 농담할 줄 모르는 것 같았는데. 아주 소설을 썼네?”
쿠제는 심호흡했다. 후우. 후우.
“제가 요리하는 셀레스네 님한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는군요? 한 손에는 체리를 들고 다른 손에는 사과를 든 상태로 말이죠. ‘처음 배에 올라탔을 땐 체리만 했던 마음이, 며칠 사이 사과가 되어버렸지 뭡니까’라고…. 이 무슨 해괴한 말이냐고요!”
“쿠제,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전략이었다고. 네가 이해해야 돼.”
“네? 무슨 전략이요!”
“그 시녀가 계속 루빈 상태를 다시 확인해 봐야겠다고 하잖아. 너희 둘은 마령 때문에 정신없는데 말이야. 그래서 혼을 빼놔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사랑을 고백했다는 말씀인가요?”
“적어도 혼을 빼놓는 건 성공했잖아?”
쿠제는 침대에 올라가 있는 고양이의 두툼한 앞발을 부여잡은 채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셀레스네의 진심이 담긴 편지에는 루빈도 미처 알지 못하던 사실들이 잘 나열되어 있었다. 그날, 셀레스네 앞에서 쿠제가 했던 기행들 하나하나가 말이다.
그중에는 민망함을 넘어, 루빈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충격적인 언행도 있었다.
-쿠제 님은 이렇게 말했죠. ‘내가 블루캣호처럼 당신 마음속 깊이 잠수할 수 있다면… 다시는 육지에 발을 내딛지 않아도 좋겠어요’라고.
또 이토록 해괴하고 끔찍한 언어도 구사했습니다. ‘두고 봐요, 셀레스네. 당신이 아무리 수룡의 비늘로 맘을 감춘다고 해도, 스며드는 내 매력에 서서히 침식될 테니까.
편지에 적힌 내용으로만 보면, 쿠제는 허세 가득하며 느끼하기 그지없는 말투에, 저질 유머를 남발하는 조증 환자나 다름없었다.
티나 말대로 셀레스네 혼을 빼놓기에는 충분했겠지만, 미친놈이 되어버린 쿠제의 이미지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외에도 입에 담기도 힘든 끔찍한 말들을 수도 없이 늘어놓았습니다. 제게 또 이런 표현을 하신다면, 저는 명예훼손과 모욕죄를 물어, 필리몬드에 들러 정식 고소장을 접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당신에게 죽음을 건 명예 결투를 신청할 수밖에요. 진심으로 경고합니다, 쿠제 씨. 명심하세요. 다시는 제게…….
콰지직.
셀레스네가 말한 ‘경고’의 의미를 뒤늦게 알게 된 쿠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원망의 눈길이 티나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티나가 황급히 변명했다.
“쿠, 쿠, 쿠제! 잘 들으라고. 내 입장이 되어보면 너도 충분히 이해될걸?”
“…….”
“아, 아니지. 그나마 다행인 줄 알도록 해. 만에 하나, 그 시녀가 정말로 유혹되어 버렸으면 어쩔 뻔했어? 어? 더 골치 아파졌을 거라고.”
이번엔 궤변까지 늘어놓는 티나. 쿠제는 넋 나간 웃음을 토해냈다.
“하, 하, 하.”
“쿠, 쿠제? 왜 웃는 거야? 드, 드디어 미쳐 버린 거야?”
“하, 하……!”
보아하니 유혈사태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한 루빈은, 티격태격하는 둘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들고 있는 책은 와락과 아늑이 블루캣호의 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한 법적인 절차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거혈인 남매는 맞은편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함께 행정법관을 찾아가 소유권 인계를 받는 일은 내일 마무리될 예정.
‘거길 가봐야겠어.’
그 전에 둘러볼 곳이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꼭 둘러봐야 하는 곳.
여전히 옥신각신 중인 티나와 쿠제. 루빈은 쿠제에게 다가가 필리몬드시에서 제공한 새하얀 의복을 건넸다.
“쿠제, 티나. 외출 준비 해.”
모든 게 백색으로 이뤄진 이 도시를 돌아다니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백색 의복을 걸쳐 입어야 했다.
“루빈, 나도 가야 해?”
“당연하지. 또 사고 치면 안 되니까.”
“사고 친 게 아니라, 내 역할에 충실한 거였다니까…. 뭐, 알았어. 마침 배도 고팠으니까 같이 가줄게. 그래서 어디 갈까?”
루빈은 창문을 열었다. 백색으로 가득한 도시의 전경이 펼쳐졌다.
백색 옷을 입은 사람들. 백색 건물들. 백색 도로 위를 달리는 백색의 마차. 백색의 술통들과 백색의 화분들. 그리고 백색의 비둘기들.
그런데 저 멀리, 한군데 오점이 있었다. 마치 하얀 도화지 위에 잉크를 쏟은 것처럼 새까맣게 보이는 곳.
“저기.”
“저기?”
창틀에 올라서며 티나가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검은 고양이 모습인 티나도 다시 변신시켜야 했다. 흰색 쥐나 흰색 고양이면 적당할 것이다.
“저기라면… 설마 흑색구역?”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티나의 만행에 절망하던 쿠제도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흑색구역이라고요? 도련님, 설마 그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건 아니시죠?”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오늘은 말고.”
“오, 늘, 은? 너, 진짜 왜 그러는 거야? 미쳤어?”
루빈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얀 물감이 한 바가지 쏟아진 것 같은 이 도시에서, 새까맣게 그을린 유일한 구역. 또 다른 말로 ‘죽음의 구역’이라 불리는 곳이 루빈의 눈동자에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