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68)
암살검가 로이넨-68화(68/258)
제68화. 백색도시의 흑색구역 (1)
“음식 나왔습니다.”
나이 지긋한 식당 주인이 음식을 내왔다. 선량한 미소를 품은 인자한 얼굴. 머리칼은 필리몬드 시민이라는 의미가 담긴 백색이었다.
‘보아하니 필리몬드에 처음 온 자들이군.’
열두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사내 하나. 그리고 흰색 고양이.
이곳 토박이인 식당 주인은 누가 이 도시의 첫 방문객인지 곧잘 알아맞혔다.
남자아이의 머리칼이 검은색이라는 것.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이 도시에 두 번째로 방문할 때부터는 흰색 모자를 쓰거나 간단한 염색으로 머리색을 백색으로 바꾸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서는 너무 눈에 띄기 때문이었다.
선량한 미소를 머금고, 식당 주인은 이 방문객들의 눈길이 자주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식당 맞은편, 대로의 끝.
‘신기하겠지, 신기하고말고.’
제국의 유명한 상업도시인 데다 행정수도 격인 필리몬드다. 온갖 행정기관들이 모여 있는 대도시인 셈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의 명소는 시장도 아니고, 법원도 아니었다.
바로 여기. 흑색구역 입구가 훤히 보이는 광장이었다.
“손님, 흑색구역을 처음 구경하시는 건가요?”
식당 주인이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심각한 표정으로 고기요리를 우물거리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아, 그렇습니다. 흑색구역뿐만 아니라 이 도시에도 처음입니다.”
“그렇군요. 머리에 염색을 하지 않으셔서 그렇게 짐작했습니다.”
“이 도시에서 하얗지 않은 건 사람의 눈동자와 접시에 담긴 요리뿐이라던데, 정말 그런 것 같군요.”
“그런 우스갯소리가 있긴 하죠. 백색은 이 도시의 상징과 같으니까요. 새하얀 마음. 죄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식당 주인은 사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소년을 흘깃 쳐다봤다.
말이 없는 흑발의 소년. 가만히 보니 소년에게서는 귀족이나 풍길 만한 기품이 배어난다. 이제껏 두 사람의 관계가 아들과 아버지 사이인 줄 알았던 식당 주인은 아차 싶었다.
“아, 이런. 제가 실수를 했나 봅니다. 부자지간이신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군요.”
“괜찮습니다.”
남자아이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저희 가문은 하인에게 관대하죠. 식탁에서 하인과 마주 보며 식사하는 게 저희 가문에서는 드문 일이 아닙니다.”
“가주님의 아량이 대단하시군요.”
그러자 하인으로 밝혀진 사내가 말을 받았다. 가주에 대한 경탄에 말을 얹으려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흑색구역의 입구를 구경하는 것도, 가주님께서 공자님과 저에게 지시하신 일입니다.”
식당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일이 드문 건 아니었다. 귀족가의 가주들이 자기 자식에게 깨달음을 주는 간접적인 방법. 귀족가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흑색구역 입구를 구경시키는 일이었으니까.
“그건 자랑할 만한 일이 아냐, 쿠제. 여기선 일상적인 일이거든.”
“그런가요? 저는 가주님만의 혜안이신 줄 알았습니다.”
“주변을 둘러봐. 다른 식당 테라스 보이지?”
공자의 말대로 건너편을 둘러보는 하인. 그 말처럼 다른 식당의 테라스도 딱 봐도 기품 있고 부유해 보이는 귀족가 자제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여기처럼 준법정신 투철하게 하는 곳도 없겠네요.”
잠깐 자리를 비웠던 식당 주인이 돌아와, 공자와 하인의 음료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사실 법의 무서움을 깨달을 수 있는 더 좋은 장소가 있지요. 딱 한군데요.”
“오, 거기가 어딥니까?”
하인이 진심으로 궁금한 듯한 얼굴로 식당 주인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만들었다.
“흑색구역 안쪽이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눈만 끔뻑이던 하인은, 뒤늦게야 농담이라는 걸 깨닫고 피식 웃었다. 흑색구역 안으로 들어가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두가 알고 있기에 웃을 수 있는 농담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끔찍한 농담이었군요.”
농담의 질이 끔찍한 게 아니라, 농담의 내용이 끔찍했다. 스스로 내뱉은 농담이지만, 흑색구역 안으로 들어간다니! 상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지지 않는가.
식당 주인은 몸을 부르르 떨며,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끔찍한 상상을 서둘러 지워 버렸다.
* * *
-수다스러운 주인이군.
-음식도 맛이 없네요. 셀레스네 님의 요리에 비하면, 먹을 게 못 됩니다.
식당 주인이 다른 손님을 응대하기 위해 물러난 뒤. 루빈은 유리잔에 담긴 음료를 찰랑거리며 쿠제와 전음을 나누었다. 시선은 테라스 아래로 보이는 흑색구역에 고정시킨 채였다.
대로가 끝나는 지점에 거대한 장벽이 세워져 있었다. 장벽의 색깔은 당연하게도 백색이었지만, 그 너머는 달랐다.
장벽 너머에 펼쳐져 있는 건 흑색.
모든 건물이 흑색인 데다 거리는 흑연이 쏟아진 것처럼 질척거리는 진창길이었다. 사람들은 꾀죄죄한 걸 넘어서 피폐했고, 헝겊 무더기로 만든 옷을 걸쳐 입었다.
힘없이 걸어 다니며 흑색과 백색의 경계 너머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자들. ‘나가고 싶어! 날 내보내 줘!’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들.
루빈은 저들이 흑색구역 안에서도 최약 계층에 속한다는 걸 알았다. 거리에 보이는 쥐나 바퀴벌레처럼, 자기들 생태계에서 쫓겨난 가장 약한 개체들.
‘저자들도 마찬가지지.’
저들을 쫓아낸 진짜 강한 놈들은, 흑색구역 깊은 곳에 꼭꼭 숨어 있을 것이다. 약자들을 멸시하면서, 새로운 먹잇감이 들어오길 기다리면서.
루빈이 알기론 그랬다.
‘제국 유일의 합법적인 범죄 구역.’
이것이 백색도시 면적의 1퍼센트에 불과한 흑색구역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외에도 많았다. 백색도시의 작은 구멍. 죽음의 구역. 치외법권. 똥통…….
어쨌든 변치 않는 사실은, 릴리크 제국 내의 모든 무법자, 무절제 쓰레기들은 이 조그마한 구역에 처박히게 된다는 점이다.
-루빈, 내가 예전부터 궁금했던 게 뭔지 알아?
루빈에게 전음을 보낸 건 티나였다. 그녀는 백색 고양이가 되어, 식탁 아래에서 몸을 잔뜩 움츠린 상태였다.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대 황제는 왜 이런 구역을 만든 걸까?
-…….
-이상하잖아. 범죄자 놈들이야 그냥 처벌하면 되는데, 왜 저런 불결한 곳을 만들어서 몰아넣는지.
세상에 알려진 사실은 ‘전대 황제의 칙령에 따른 것이다’ 정도였지만, 루빈이 알고 있는 진실은 달랐다. 흑색구역은 텔마흐가 황제로 올라서기 전부터 추진된 계획이었다.
-제국이 만든 달콤함이지.
-달콤함?
-저기에 가면 더 이상 수배되지 않고, 도망치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저 안에서는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되니까. 범죄자들한테는 자유가 손짓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
하지만 이 달콤함은 범죄자들만을 위한 게 아니다. 무법지대가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건 범법자나 살인자뿐만이 아니라, 선량한 제국민들 또한 마찬가지. 놀랍게도, 그들 역시 흑색구역의 존재를 지지했다.
‘우리 안에 가둬놓은 호랑이를 감상하는 것과 같달까.’
호랑이가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두려움을 느끼지만, 호랑이가 우리 안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걸 보면 오히려 훨씬 큰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소리 소문 없이 호랑이를 죽이는 것보다, 모두에게 보이도록 가둬놓는 게 선전 효과도 좋을 테고.
‘그러니까 모두를 위한 달콤함인 거지.’
불편한 진실이다. 이런 것까지 티나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루빈은 말없이 흑색구역을 바라봤다. 거대한 장벽 곳곳에 백색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과 백색 로브의 마법사들, 그리고 온몸을 백색으로 칠한 거대 골렘까지. 모두 황실에서 파견한 병력이었다.
저들이 서슬 퍼런 눈으로 바라보는 건 흑색구역 안이었다. 구역의 범죄자들이 모두 힘을 합쳐도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전력.
‘법의 심판을 피해 도망칠 수는 있지만, 되돌아 나올 수는 없는 땅.’
흑색구역 안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건의 살인과 강도, 흉악 범죄가 발생한다. 하지만 이쪽에선 아무 개입도 하지 않는다. 그저 바깥으로 나오는 것만을 금지할 뿐이다.
-자기들끼리 평화롭고 안전하게, 사회를 만들면 될 텐데.
루빈은 티나의 전음에 피식 웃었다. 평화주의에 빠져 있는 환혈족다운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텔마흐를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텔마흐는 그럴 일말의 가능성조차 남겨두지 않는 냉혈의 지배자다.
그리고 그가 벌이는 일엔 항상 그럴듯한 계획이 숨어 있다. 흑색구역도 마찬가지.
-흑색구역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추첨을 해.
-추첨?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범죄자 중 한 명을 뽑는 추첨.
-왜 뽑는데? 반장이라도 뽑는 건가?
-제물. 범죄자들에게 자유를 준 백색도시에게 바치는 제물을 뽑는 거야.
제물이라고 표현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범죄자 인도계약’이라 불렸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필리몬드 시민들이 법의 승리라면서 가장 환호하는 제도였고.
범죄자들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그 자유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 매주 한 명씩 무작위로 뽑힌 사람을 법의 심판대에 올리고, 그자는 시민들 눈앞에서 사형에 처한다.
‘수천 분의 1의 불행. 그 나머지 확률은 자기가 살아남을 확률.’
필사적으로 흑색구역으로 내달리는 범죄자들은, 대부분 자기가 그 추첨에 뽑히지 않을 거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이게 바로 텔마흐가 고안한, 시민과 범죄자 모두에게 주는 달콤함이자, 그 스스로 세상을 정화시킨다고 믿는 제도였다.
“도련님, 저기 보세요.”
그때였다.
쿠제가 거리의 인파를 가리켰다. 그쪽을 지켜보는 루빈의 눈에 날카로움이 배어났다.
곧바로 알아차렸다. 무엇을 보라 했는지.
인파 속 한 남자. 펑퍼짐한 백색 외투를 걸쳐 입은 남자가 있었다. 외투 아래 숨긴 왼손에는 검이 들려 있고, 그 검에는 묻힌 지 오래되지 않은 피의 흔적이 있다.
‘걸을 때마다 왼쪽 발을 절고 있지만, 신발이 닳은 흔적은 그 반대. 즉, 다리의 상처는 최근에 생겼다는 뜻이군.’
암연의 도움 없이, 간단한 관찰만으로도 그가 몇 시간 전에 범죄를 저질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실제로도 계속 흑색구역을 힐끔거렸다. 무법지대로 도망칠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남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금씩 흑색구역으로 전진했다.
‘법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있군.’
흑색구역으로 향하는 자의 두려움은 그것뿐일 수밖에. 단지 돌아 나오는 출구가 존재하지 않을 뿐, 입구 쪽 경계선은 지키는 사람 없이 활짝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남자가 발걸음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40미터쯤 남았을 때부터는 절던 다리를 힘껏 움직여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
“냐아아옹!”
엎드려 있던 티나까지 일어서며 테라스 난간 쪽으로 다가갔다.
도망자 사내가 뛰어가는 그 앞으로 하필이면 필리몬드의 아이들 몇몇이 뛰어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자신들 쪽으로 돌진해 오는 남자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비켜, 이것들아!”
남자가 자기 앞길을 막는 아이들에게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아, 아 안 돼!”
아이들 무리 곁에서 지켜보던 엄마들 역시 소리쳤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아이 하나가 남자에게 떠밀려 경계선 쪽으로 굴러간 뒤였다.
“뭐야, 이 애새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