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71)
암살검가 로이넨-71화(71/258)
제71화. 백색도시의 흑색구역 (4)
도시를 날려 버릴 만한 폭발마법? 그것도 심장에? 이런 이야기는 어머니에게서조차 들어본 적 없었다.
루빈이 알고 있는 사실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암레트는 죽음을 맞이한다. 조용한 죽음이다.
암레트의 말대로라면, 죽음과 동시에 심장에 얽힌 방어마법이 발동되어야 함이 맞다. 하지만 필리몬드가 대규모 폭발로 날아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가능성 없는 이야긴 아니야.’
엘프는 동의하지 않았겠지만, 궁중의 대마법사라면 경우가 달랐다. 제국 황실과 연결될 정도의 대마법사라면 그리 어려운 마법 설계도 아니었을 거다. 정치적 이해에 따라, 충분히 암레트의 요구에 응할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나는 살아남았단다. 형한테도 그 사실을 말했거든.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냐? 형은 다른 형제들을 하나씩 제거하면서도 나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단다. 그렇게 하믈레트가 황제로 등극했고, 나는 여기로 내쫓겼지.”
황제는 언제든 도시를 날려 버릴 수도 있는 폭탄을 황궁에 놔두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한때 적출됐던 심장은 암레트의 보험이 되었다. 하믈레트로부터 황위를 이어받은 텔마흐도 자신의 삼촌을 어쩌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제야 루빈은 암레트가 기거하는 이 공간이 어째서 이토록 살풍경한지 이해가 됐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며 이 도시의 시장으로 군림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유폐된 거나 다름없었다.
“바깥 공기를 마셔야겠군.”
암레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바닥을 이루는 판석 하나에 올라섰다. 곧 판석이 지면으로부터 한 뼘 정도 떠올랐다. 몸이 불편한 그가 이동할 수 있도록 마법이 내장된 판석이었다.
“따라오너라.”
둥둥둥. 암레트가 건물 밖으로 나갔고 루빈도 뒤따랐다.
판석은 탑 꼭대기의 가장자리로 향했다. 아찔한 높이. 어떤 마법 덕분인지 바람은 불어오지 않았다.
밤의 어두움이 내려앉았지만, 모든 게 백색으로 칠해진 도시는 훤히 보였다.
“보이느냐?”
암레트가 가리킨 곳은 흑색구역이었다. 탑 위에서 바라보니, 그야말로 도화지 위에 뚫린 구멍처럼 보였다.
“내가 필리몬드의 시장으로 처음 왔을 때, 황궁에서부터 광대 한 놈을 데려왔다. 나와 하믈레트의 유머 코드에 딱 맞는 놈이었지. 아마 내가 그놈을 데려가서 형은 많이 아쉬웠을 게다.”
흑색구역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암레트의 손가락은 여전히 흑색구역을 가리키고 있었다.
“요릭이라는 놈이란다. 그놈이 저기에 있지.”
“범죄자입니까?”
“그 반대지. 녀석은 흑색구역의 지배자다. 텔마흐가 흑색구역을 만들려고 했을 때, 내가 앉힌 놈이다.”
암레트는 클클클 웃었다. 루빈은 직감적으로 시장이 자신을 흑색구역으로 보내려는 이유가 요릭의 목숨과 관련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요릭은 황궁에 있을 때부터 연극 연기에도 소질이 있었지. 그때 녀석이 제일 맛깔나게 하던 대사가 바로 그거였다.”
‘오늘 내 모습을 안다고 믿을지라도, 내일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암레트는 말을 이었다.
“요릭 그놈이 그 대사를 읊어본 지도 수십 년 전이다. 이제 다시 일깨워 줄 때가 됐어.”
“죽이라는 뜻입니까?”
암레트의 눈길이 루빈에게로 향했다. 우아한 신사에게 욕지거리를 들은 듯한 얼굴. 이어지는 암레트의 웃음소리가 밤공기 사이로 울렸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심인 모양이구나.”
“암살검가는 허튼소릴 하지 않습니다.”
“암암, 그렇고말고. 지겨운 규율. 수칙. 법규…. 하긴, 너는 암살검가 안에서 우수한 성적을 냈다지?”
‘1차 선택’과 ‘2차 선택’에서 루빈이 우승했다는 사실을 아는 듯했다. 비록 그가 유폐된 거나 다름없는 신세여도 그의 정보력은 칙명부 내부에까지 닿아 있는 모양이었다.
“네가 아무리 뛰어나도, 지금의 네가 요릭을 죽일 순 없을 게다. 네가 요릭을 죽일 수 있었다면 내가 직접 병사들을 보냈겠지.”
루빈의 실제 경지를 파악하지 못했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죽이는 게 아니라면 왜 흑색구역으로 들어가라는 거지?
그때, 암레트의 품 안에서 밀봉된 봉투가 나왔다.
“네 역할은 내 편지를 전하는 거다. 흑색구역 안에 있는 암살검가 일원한테 말이다.”
흑색구역 안에 상주하는 암살자. 루빈은 그게 누구를 말하는지 알았다.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그 명성은 익히 알고 있는 가신이었다.
‘킬리언’이라 알려진 사내. 단출한 이름만큼이나 뒤탈 없는 실력의 소유자였다. 암레트 정도의 인물이 충분히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다.
‘이제야 알겠군. 왜 나를 찾았는지.’
흑색구역 내의 암살자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킬리언이 흑색구역 안에서 어떻게 지내는지는 몰라도, 단 하나의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그의 거처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암연을 지녀야만 한다는 것.
흑색구역 안에 있는 위장별채는 평범하지 않다. 로이넨 저택 지하에 있는 거대한 창고가 그렇듯, 흑색구역의 위장별채 또한 암연을 지닌 자만이 출입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중요 거점이자 창고였으니까.’
필리몬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가신들은 새로운 무기를 건네받거나, 각 암살검가 가문과 소통하기 위해 반드시 흑색구역의 위장별채를 통해야 했다.
흑색구역은 출입할 수 없는 영역이었으니, 대신 그들의 로이네크로우가 오가며 무기나 여비를 지급받거나 새로운 정보를 전달받았다.
그리고 그건, 회귀 전 루빈이 맡았던 임무이기도 했다. 아직은 킬리언이라는 노년의 암살자가 맡고 있지만, 10년 뒤에는 루빈의 첫 임무지가 되는 곳이 바로 흑색구역 안에 있는 위장별채였다.
“칙명부와 무관한 일이라 생각하면 될까요?”
루빈이 담담하게 짚었다. 그럴 수밖에. 무슨 이유로 암레트와 요릭이 틀어졌는지는 몰라도, 문제 해결에 칙명부가 관여한다면 모두에게 부담이 될 것이다.
“할 수 있겠느냐?”
흑색구역으로 들어가라는 이유가 킬리언을 만나라는 것이었다면, 오히려 잘됐다.
킬리언을 만나 적당한 무구를 얻는 것. 정확히는 카포티니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무구를 얻는 것. 이것이 흑색구역에 들어가려는 진짜 이유였으니까.
‘회귀 전과는 달라져야 해.’
이제부터는 회귀 전의 기억과 일치하지 않는 일들도 벌어질 터였다. 그러니 확실한 미래는 절대 놓쳐선 안 된다.
“할 수 있습니다.”
루빈은 일부러 자신감을 표출했다. 열한 살배기 어린아이답게. 세이렌의 아들답게.
암레트가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아무렇게나 달라붙은 얼굴 살점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기특한 녀석.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암레트가 떨리는 손으로 루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불쾌한 손길이었지만, 루빈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다시 어둑한 응접실.
“자, 이걸 보려무나.”
세 개의 종이였다. 암레트가 먹은 사탕의 포장용 종이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종이 위에 뭔가 적혀 있었다. 암레트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시 같았다.
암레트는 세 장의 종이를 각각 여러 번 접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루빈 앞에 띄웠다.
“이것들은 흑색구역의 추첨과 관련이 있단다. 내가 여기서 고르는 번호가 다음 사형수를 결정하는 거지.”
“네?”
루빈이 되묻자, 암레트는 기분 좋게 웃었다.
“놀랐느냐? 설마 정말 추첨으로 뽑는 줄 알았던 게야?”
회귀 전 흑색구역에서 임무를 수행한 적 있는 루빈이었다. 흑색구역에서 치러지는 추첨은 운과 완벽히 무관하다는 걸 잘 알았다. 모든 것은 그저 필리몬드 시장의 마음에 따른다는 걸, 루빈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추첨에만 뽑히지 않으면 영원히 잡히지 않으리라는 범죄자의 꿈은, 말 그대로 환상이었을 뿐.
루빈은 계속해서 모르는 척 연기했다.
“자, 여기 세 장의 종이엔 내가 고른 사형수들이 있단다. 이번 주에 죽지 않는다면, 다음 주에라도 죽여야 할 흉악한 놈들이지. 첫 번째 놈은…….”
암레트는 루빈에게 세 명의 사형수 후보를 말해주었다.
첫 번째는 ‘시민들의 마음을 얻어내는 죽음’이었다. 이자는 필리몬드의 명망가 자제를 해하고 도망친 자였다. 워낙 명망가였기에, 이자를 죽이면 필리몬드의 모든 시민들이 기뻐할 것이다.
두 번째는 ‘암레트 본인에 대한 복수를 막아주는 죽음’이었다. 이자를 죽이면 훗날 암레트가 당할 위협이 줄어들었다.
세 번째는 ‘황제를 안심시킬 죽음’이었다. 지금으로서는 황제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놈이지만, 자기가 판단하건대 훗날 황제의 눈엣가시가 될 수도 있는 자였다. 이자를 죽이면 텔마흐의 마음을 안심시킬 수 있었다.
“네가 생각하기에 이번 주에는 누굴 죽이면 좋겠느냐?”
루빈은 뜸을 들였다. 고심하는 척했다. 무슨 대답을 하든 변하는 건 없었다. 루빈은 이번 주에 누가 뽑히는지 알고 있으니까.
암레트가 원하는 사형수.
‘킬리언.’
암레트는 킬리언에게 흑색구역의 지배자를 죽이도록 사주한 뒤, 뽑기를 통해 그도 함께 처리할 것이다. 요릭과 킬리언을 동시에 제거하는 것이 암레트의 의도였다.
‘하지만 킬리언은 암레트의 바람대로 죽지 않았지.’
루빈이 관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미 미래가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까. 지금은 루빈이 어떤 대답을 하든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이건 그저, 암레트의 장난일 뿐이다.
이런 확신과 함께, 루빈은 암레트를 직시하며 대답했다. 가장 암살검가다운, 아이다운 대답을.
“저는 ‘황제를 안심시킬 죽음’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호. 이유는?”
“흑색구역의 지배자가 암살되면 황궁에서도 곧 그 사실을 깨닫게 되겠죠. 황제 폐하께서는 필리몬드를 다시 정비하려 하실 테고요. 그때, 폐하께 드릴 선물 정도는 마련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선물 정도라…. 그렇지, 그렇지. 이번 기회에 이놈을 죽이면 텔마흐도 꽤 흡족해할 거야.”
암레트의 손이 루빈을 쓰다듬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루빈. 아무래도 이번 주에는 이 녀석을 골라야겠구나.”
공중에 떠 있던 세 장의 종이가 한데 뭉쳐 구겨지더니, 벽난로를 향해 휙 내던져졌다. 불길에 삼켜진 종이뭉치는, 마치 세상에 없던 것처럼 빠르게 타올랐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구나.”
“네, 시장님.”
“내일, 흑색구역 통행증을 받을 수 있을 거다. 널 보살펴야 하는… 로이넨서라 했던가? 그자 것까지 포함해서 두 장을 내어주마.”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규율은 규율이니까.”
두 사람은 나란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암레트는 휘청휘청 소파에 다가가 몸을 파묻었고, 그걸 지켜보는 루빈은 몸을 숙이며 예를 갖췄다.
암레트는 나가보라는 의미로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루빈이 몸을 돌려 나가려 할 때.
“아, 잊을 뻔했군. 어제 이 도시에 제국귀족이 왔다는 거 알고 있겠지? 마법가문 위더스푼 말이다.”
“……!”
루빈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벽난로의 불길을 쬐던 암레트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낮에, 그 가문 딸아이가 여기에 올라와서 한동안 놀다 갔단다. 아주 앙증맞고 수다스러운 아이더구나.”
“위더스푼 가문과 친교가 두터우셨군요.”
“제국귀족이라면 으레 제일 먼저 황족과 대면해야 하니까. 그리고 그 가문은 뭐랄까, 좀 특별하거든.”
암레트의 손가락이 다시금 심장 부근을 두드렸다.
“내 심장과 연결된 인연이랄까.”
클클거리는 웃음.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갔다. 아마 암레트의 적출된 심장에 방어마법을 걸었다는 궁중마법사는 위더스푼 가문의 사람일 것이다.
“그 수다스러운 아이가 자기가 타고 온 배에 관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포이넨 가문의 루든이라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그 애에게 마법을 직접 가르쳐 주었다고.”
“…….”
“암살자가 마법이라니. 재미있구나.”
암레트는 다시 손을 내저었다. 정말 나가보라는 뜻이었다. 루빈은 몸을 숙인 뒤 실내를 빠져나왔다.
암레트가 했던 마지막 말의 서늘함이 가시지 않았다. 행간에는 경고가 숨겨져 있었다. 이제껏 어느 암살자도 마법 세계에 발을 들인 적 없으니.
루빈 역시 마법에 대해 큰 욕심 같은 건 없었지만, 그걸 암레트가 알아줄 리 없었다.
아직 암레트만 알고 있는 걸까?
언제까지 암레트만 알고 있는 사실일까?
루빈이 바깥으로 나오자, 건물의 문이 스르르륵 닫혔다. 고개를 돌려서 바라보니, 잠들어 있던 그랑버드가 날카로운 눈동자로 루빈을 노려보고 있었다.
“…….”
루빈은 덤덤히 걸어, 난간이 형성된 계단의 아랫부분에 올라섰다.
쿠쿠쿠쿠쿠쿵.
꼭대기 층에 붙어 있던 돌계단이 하나둘씩 움직여 탑 전면을 휘감아 내려갔다. 루빈은 서서히 가까워지는 지상을 바라보며 찝찝함을 털어냈다.
‘어차피 암레트는 곧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