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72)
암살검가 로이넨-72화(72/258)
제72화. 노년의 암살자 (1)
“내 로이넨서가 궁금하다고? 음…….”
세이렌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린다. 지난 생의 기억. 토벌군과 암살검가의 전면전을 앞둔 날이었다.
임박한 전쟁에도 암살검가엔 희망이 넘쳐났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그랬다. 절멸이란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무도 믿지 않았을 때였으니.
그러던 어느 날. 식사 중 던진 루빈의 질문이 세이렌의 수저질을 멈추게 했다.
“어머니의 로이넨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평소엔 할 수 없는, 깊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전쟁 전야였고, 어스름홀에서 하는 마지막 저녁 식사였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상적인 기분이, 어머니와 루빈 사이에 생겨났다.
세이렌도 더 이상 암살검가에 관한 비밀을 남겨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황제와의 결전 이후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란 생각이었겠지.
“내 로이넨서가 궁금하다고? 음…….”
세이렌은 두 입술을 붙이고 추억에 잠겼다. 루빈 나이 서른이었고, 세이렌도 사실상 노년에 접어든 때. 아주 오랜만에, 세이렌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분 이름은 킬리언이었다. 킬리언 구트.”
세이렌은 분명, 가신 킬리언을 ‘그분’이라며 경의를 담아 표현했다. 세이렌의 존경을 받는 자. 그것만으로 킬리언이 얼마나 까마득한 경지의 무인이었는지, 루빈은 절실히 느꼈다.
“내가 암살자로 독립한 이후엔 킬리언도 로이넨서 생활을 마무리 지었지. 한동안은 암살 임무에서 벗어나 척살조로도 활동했고.”
“척살조 이후에는요?”
“흑색구역에 들어가 있었다.”
“흑색구역이라면…….”
“필리몬드의 무법지대. 그곳에서 암살자들의 거점을 운영했지.”
독립하고 처음 몇 년을 흑색구역에서 지냈던 루빈이었다. 다만 그가 활동하기 직전까지 흑색구역의 위장별채는 폐쇄된 상태였다. 그때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는데.
“제가 흑색구역 위장별채에 있을 땐 이미 폐쇄되어 있었어요.”
“킬리언의 마지막 임무 때문이었다.”
암살자의 ‘마지막 임무’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최종 임무. 다른 하나는 임무 수행 중에 살아서 귀환하지 못했을 경우.
대부분은 후자의 경우로 쓰였다.
“그러면 그곳에서 죽었다는 건가요?”
그 말에 세이렌이 가볍게 웃었다.
“마지막 임무가 좀 까다롭긴 했지. 그 임무를 해낼 수 있는 자는 암살검가 안에서도 몇 안 됐으니까.”
“그러면 정말로…….”
“아니. 킬리언은 죽지 않았다. 임무를 말끔히 해냈지. 지금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이제 나이가 아흔은 되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킬리언은 반세기 넘게 이어진 암살자 생활을 모두 끝마치고, 명예롭게 세상 뒤편으로 퇴장했다는 뜻이다. 이 냉혹한 세계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퇴역한 암살자들 중 허락된 이들만 갈 수 있다는 신비로운 마을이 있다던데. 어쩌면 거기 있으려나.”
무저갱처럼 깊은 어머니의 두 눈. 무얼 보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루빈은 더 깊은 질문을 해보기로 했다.
“킬리언의 마지막 임무는 무엇이었죠?”
“필리몬드 시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 당시 필리몬드 시장이 누구였던가. 암레트, 바로 황제의 삼촌이었다. 그를 죽인 자가 바로 어머니의 로이넨서였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회귀 전 암레트가 어떻게, 왜 죽었는지는 늘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암레트는 황족이 아닌가.
“왜죠?”
“암레트는 해서는 안 되는 결정을 했다. 사형수 추첨으로 킬리언을 지목했으니까.”
“죽음을 모면하고자 암레트를 죽였다는 말인가요?”
“아니. 킬리언은 죽기 싫다고 임무를 저버리는 소인배가 아냐.”
그렇다면 대체 왜?
루빈은 세이렌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모든 게 황제의 계획이었다. 오래전부터 계획된 텔마흐의.”
“아, 설마. 조건부 임무?”
특정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실행할 수 있는 임무를, 킬리언은 수행하고 있던 것이다. 퍼즐 조각이 조금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킬리언은 무려 15년 동안, 암레트가 자신을 사형수로 추첨하기를 기다렸다. 그게 ‘조건부 임무’의 발동 조건. 임무 내용은, 암레트 암살이었을 테고.
‘텔마흐가 놓은 덫이었구나.’
하지만 대체 왜?
왜 그런 임무를 내린 거지?
왜 제 삼촌을 죽이라 한 거지? 아니 그 전에, 제 삼촌이 킬리언을 죽일 거란 것은 대체 어떻게 안 걸까?
“궁금하겠지.”
“…예, 어머니.”
식사를 마친 세이렌은 식기를 내려놓았다. 우아하게 입가를 닦곤 무구를 챙겨 일어났다. 결전을 앞두고 먹는 마지막 만찬치고는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무엇이 중요하겠느냐.”
“…….”
세이렌은 어스름홀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무장한 가신들이 도열해 있었다.
* * *
“들어가시죠, 도련님.”
흑색구역으로 통하는 광장. 입구는 언제나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루빈과 쿠제는 백색 로브를 눌러쓰고 서로를 바라봤다. 이 경계만 넘는다면, 칼이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무법지대가 펼쳐지는 것이다.
“암연을 펼쳐도 좋아. 어차피 알아채는 건 암살검가 사람일 테니까.”
루빈의 지시에 쿠제가 결의가 들어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벅저벅.
경계를 넘어갔지만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골렘이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릴 뿐이다. 루빈은 점멸하는 골렘의 붉은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스스스스.
두 사람의 왼쪽 손등 위로 적색으로 된 표식이 새겨졌다. 일련번호였다. 결계에 설계된 마법이 발동된 것이다.
루빈은 40202. 쿠제는 40203. 이틀 전 억울하게 선을 넘어가 버린 꼬마의 다음 번호였다.
웅성웅성.
결계 너머, 그들이 걸어온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눈길은 당연하게도 루빈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웬 꼬마가 무법지대로 걸어 들어가다니.
“가자.”
시민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루빈은 나아갔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이번에는 흑색구역 주민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무기력하게 슴벅이는 눈들이었다.
‘날파리들.’
새로운 입주민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슬금슬금 기웃거리는 하류 범죄자들이었다.
외곽으로 피신할 정도로 무력하고 나약한 주민들. 그런 그들이 그나마 사냥할 수 있는 대상도 신입 외에는 없었다.
“……!”
무기력에 잔뜩 찌들어 있던 그들 눈동자에 순식간에 공포가 배어들었다. 이유 모를 공포. 루빈이 공격적인 암연을 펼친 것이다. 이 정도는 해둬야 귀찮은 일에 엮이지 않겠지.
철벅철벅.
진창길을 밟아 나가며 중심부로 향했다. 경계하는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쿠제. 흑색구역으로 들어온 뒤로 그 손은 줄곧 왼편 허리춤에 있는 단검에 닿아 있었다.
“이제부터가 진짜야.”
중심부에 접어드는 순간, 루빈은 덤덤하게 말했다. 마치 이곳을 경험해 본 것 같은 말투다. 쿠제는 호기심 섞인 눈으로 루빈을 쳐다보는 동시에,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저 똑같은 길을 걸어왔을 뿐이지만, 공기가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중심부와 외곽을 나누는 경계 같은 건 따로 없었다. 여전히 바닥은 정비되지 않은 진창이었고, 건물 상태가 폐허나 다름없다는 것도 여전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주민들의 행색이 달랐다. 크고 거칠고 무도한 자들이 으스대며 걸어 다니고 있었다. 각자의 세력이라도 있는 건지, 대부분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다녔다.
간혹 혼자 다니는 사람도 눈에 띄었지만, 루빈이 보기에도 그들은 혼자라도 몸을 건사할 만한 자들이었다.
주민들의 손에는 갖가지 무기들도 들려 있었다. 대검, 도끼, 해머, 사슬이 달린 낫, 장창…. 빈손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비슷하구나.’
9년 먼저 와본 흑색구역이어서 얼마나 다를까 궁금했다. 중심부의 풍경만 보자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암살검가 거점에 접근하는 방법도 똑같으려나.’
흑색구역의 암살자가 어떤 식으로 거점을 운영했는지에 대해서 루빈이 가진 정보는 없었다. 암레트 역시 아는 바가 없으니 루빈에게 지시를 내렸을 터.
9년 뒤 루빈이 거점을 관리했던 방식에서 유추하는 수밖에.
“도련님, 이제 뭘 해야 합니까.”
쿠제는 지난밤 루빈이 시장을 만나고 왔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그 외에 대해서는 아직 설명을 듣지 못한 상태였다.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
“황족입니까? 아니면 제국귀족?”
“아니, 우리 쪽 가신이야. 어머니의 로이넨서.”
“네?”
예상을 비켜 가는 대답에 쿠제의 눈이 커졌다.
전인미답의 절대 경지에 올랐다는 가주 세이렌. 그런 세이렌을 키워낸 로이넨서를 만난다니.
쿠제에게는 단순히 전설적인 인물을 만나는 것 이상의 의미였다. 그는 루빈의 로이넨서였으니, 루빈이 가주에 올라서고, 세이렌과 같은 전설을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으니.
“……!”
쿠제가 꿀꺽 침을 삼키는 바로 그때였다. 왼편에서 손도끼 하나가 난데없이 날아드는 게 느껴졌다.
전설의 로이넨서를 만난다는 사실에 놀랐던 것도 잠시, 쿠제는 곧장 반응했다. 곧장 단검을 빼 들어 왼편에서 쇄도하는 손도끼를 쳐냈다.
챙!
바닥에 내리꽂히는 도끼.
“아이쿠, 미안하구먼! 그만 손이 미끄러져 버렸네?”
“…….”
“처음 보는 놈들인데… 아주 날것은 아닌가 봐?”
도끼 주인은 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주우며 아쉬운 듯 말했다. 루빈은 ‘날것이 아니다’란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저 운 나쁘게 굴러들어 온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꼬마 새끼는 여기서도 오랜만이라, 침 좀 묻혀보려고 했는데.”
루빈과 쿠제는 백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진흙탕에도 아직 순백을 유지하는 그들의 모습은 지나치게 이목을 끌었다. 도끼를 던진 사내 외에도, 흥미롭다는 듯 이쪽을 쳐다보는 무리가 많았다.
다만 그들 중 아무도 먼저 나서진 않았다. 서로 견제하는 것이다. 신입을 먼저 치겠다고 나섰다가, 괜히 다른 무리에게 뒤통수를 맞아서는 안 되니.
“아쉽지만 우리는 여기서 빠져주지. 한번 놓친 가축을 또 잡으려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일도 없거든.”
도끼를 던졌던 사내는 루빈과 쿠제를 지나쳐 자기 무리를 다그쳤다.
“자, 새끼들아! 언제까지 꾸물댈래? 도축 시간 늦겠다! 빨리 안 뛰어?”
빠르게 외곽 쪽으로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보던 쿠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도축?”
무슨 뜻인가 싶었는데, 곧 알게 되었다.
“설마…….”
도끼 사내가 앞장서서 뛰어들자, 흑색구역 외곽에 피신해 있던 하류 주민들이 황망하게 도망치는 게 보였다.
“인육을 뜻하는 걸까요?”
“가서 확인해 봐. 마침 처음 들러야 할 곳도 푸줏간이니까.”
루빈은 태연하게 말하며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