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75)
암살검가 로이넨-75화(75/258)
제75화. 노년의 암살자 (4)
흑색탑의 왕인 요릭에게 감히 ‘제안’을 할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자들은 흑색구역 바깥에 있거나, 전부 죽었다.
그런 점에서 사자머리는 근 몇 년간 보았던 지원자 중 가장 대담했다.
요릭은 기형적으로 느껴질 만큼 커다란 입술을 쫙 찢으며 웃었다. 음흉함을 풍기는 미소였다.
다음 순간, 손을 휙 내젓는 요릭. 그러자 허공에 시커먼 빗금이 그어졌다. ‘음화된 마나’를 부리는 것이다.
트득, 트득, 트득.
빗금은 곧 틈이 되었다. 비집고 튀어나오는 뼈 무더기. 그가 다시 손을 휙 내젓자, 뼈 무더기가 얼기설기 뭉치며 그를 위한 계단을 형성했다.
‘본 코넥시온…….’
2성급 흑마법 계열의 조형 술식이다. 이름 그대로 뼈의 연결. 마법 자체는 간단했지만, 시전자의 경지에 따라 뼈의 강도와 양, 복잡도가 달라졌다.
‘보통이 아닌 놈이야.’
루빈은 요릭의 ‘본 코넥시온’이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다는 걸 단박에 알아보았다. 본래 간단한 흑마법이건만, 저것 자체만으로도 공격과 방어를 겸용할 만한 수준이었다.
거구의 몸을 이끌어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요릭. 얼굴에는 실실거리는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들어보겠노라.”
다시 원형경기장 내부에 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거만한 몸짓. 약에 취한 듯 몽롱한 눈동자. 요릭은 흥미로운 표정과 함께 사자머리를 노려보았다.
루빈도 사자머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안이라고? 요릭을 상대로 제안을 하는 지원자가 있을 줄이야. 계산 착오였다, 완전히.
“이 중에서 두 명만 살아서 들어가는 거지?”
“그래, 그렇지.”
그 순간, 루빈은 암레트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요릭은 한때 황실에서 황족 전용의 광대였다는 말.
어쩌면 요릭은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돌발적인 출연자를 맞이하여 광대놀이에 빠져보는 것이다. 흑색탑의 주민들을 관객 삼아서.
‘관중들이 불안해하고 있어.’
아까까지만 해도 광란의 웃음소리를 냈던 흑색탑의 주민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엄숙함을 넘어 불안해하고 있었다.
“뭘 꾸물거려? 말해보라.”
“나는 흑색탑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싶다. 여기 있는 지원자들을 다 죽이는 건 내겐 문제도 아니지. 그렇다고 널 만족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말이야.”
“뺑뺑 돌려 말하기는. 용건이 무엇인고?”
“흑색탑 주민 서른 명을 더 넣어줘. 거기에서 살아남게 되면, 그땐 요직을 받을 자격이 되겠지.”
“오호.”
요릭이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며 놀라움을 과장되게 표현했다. 주민을 마음대로 난투에 집어넣는다니. 그게 가능할까?
그러나 흑색탑에서 요릭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어쩌면 이곳에서만큼은 텔마흐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다시는 지상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지하도시의 주민들. 요릭은 모든 걸 제 마음대로 행했다. 심지어 주민들의 생사여탈권조차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사자새끼가… 재미있군. 아주 재밌어.”
“벌써부터 재밌어하면 안 되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좋아, 좋아. 흠, 내 뒤에 서 있는 놈들 보이나? 내 부대장들이다. 저 옆에 설 자리를 하나 내어주지.”
요릭은 자신이 내려온 특별관람석을 가리켰다. 데스나이트를 포함해 세 명의 부대장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신 나도 재미는 봐야지. 주민 서른 명을 더 투입해도 통과자 숫자는 똑같다. 두 명이지.”
“상관없어.”
그 말에 관중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들로서는 피를 흘려가며 겨우 들어온 낙원이다. 그런데 다시 경기장으로 내몰려 죽을 수도 있게 되었으니.
“크하하하! 재밌어, 아주 재밌다고!”
‘…….’
루빈과 쿠제는 심각해진 표정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사실 서른 명의 주민이 투입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루빈도 쿠제도 그들 틈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예외적인 상황 하나만 뺀다면 말이지.’
두 명만 살게 되는 난투에서, 루빈과 쿠제가 탈락할 수도 있는 경우는 단 하나였다.
바로 킬리언이었다. 만약 요릭이 주민 서른 명 중 킬리언을 끼워 넣는다면?
사실 이건 확률의 문제가 아니었다.
요릭은 누가 킬리언인지 알고 있으니까.
저 건방진 사자머리를 죽이고 싶다면, 요릭은 기꺼이 킬리언을 넣을 것이다. 사자머리가 아무리 강한 녀석이라 해도, 어머니의 로이넨서를 이길 순 없다.
“뭐 해? 빨리 골라.”
사자머리가 재촉했고, 요릭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맞춰 뼈 무더기가 생겨났다. 그는 공중 위를 성큼성큼 움직이며 관람석 전체를 한 바퀴 쭉 돌았다.
그러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너! 너! 그리고 너! 야, 너도! 너…말고, 너! 그래, 너! 너! 너!”
고민 따윈 없었다. 1층과 3층 사이를 오가며 주민들을 바로 골라냈다.
요릭이 지목할 때마다 공중에서는 손이 튀어나왔다. 살갗이 모두 스러져 뼈만 남은 손이 관중의 멱살을 거칠게 잡곤 그대로 원형경기장 안으로 끌어내렸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는 죽기 싫습니다. 군주시여!”
“저 사자 새끼 때문에… 크흑.”
발악과 애원 그리고 경악이 난무하지만, 요릭에게 자비란 없었다.
“어이, 사자머리. 됐나?”
주민 서른 명이 모두 선택됐다. 지목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부지한 셈. 관중석에 앉은 사람들 얼굴에 언제 공포에 떨었냐는 듯 빠르게 생기가 돌아왔다.
“이런 개새끼! 뭔 짓을 벌이는 거야!”
사자머리를 향한 도끼 사내의 욕설은 공허하게 울릴 뿐.
열 명만 서 있을 때는 제법 널찍했던 경기장이 추가된 서른 명으로 인해 비좁게 느껴졌다.
‘노인은 모두 네 명… 저 중에 킬리언이 있는 건가?’
루빈은 끌려 나온 주민들 중 노인들을 집중적으로 바라봤다.
킬리언을 찾아야 했다. 그래야 이 아수라의 한복판에서 대비할 수 있었다.
“도련님. 분명 암연이 느껴지는데… 정확히 찾아내지 못하겠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게다가 킬리언도 암연을 흩뜨려 놓았고.”
“어쩌면 저희를 못 알아보는 걸까요?”
그럴지도. 킬리언이라면 루빈이 백색도시에 도착했다는 정보만 파악해 두고 있을 테니까.
현재로선 루빈이 흑색구역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시장과 그 하수인만 알고 있었다.
“그래그래, 이래야 볼 맛이 나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요릭은 뼈의 계단을 걸어 올랐다. 특별관람석으로 돌아가던 그는 길게 튀어나온 손톱으로 입술을 만지작댔다.
“그리고… 이러면 좀 더 재밌어질 거 같은데?”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즉각적으로 흑마법이 발현됐다.
경기장 안에서 요릭이 밟고 돌아다녔던 뼈 무더기들, 그리고 관중을 끌어냈던 뼈의 손들. 그것들이 일제히 한데 뭉치며, 세 마리의 괴수가 태어났다.
쿠르르르릉.
흑마법 계열의 창조 술식 중 하나인, ‘본 크레아시온’. 뼈 무더기를 뭉쳐, 영혼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뼈 무더기들이 점차 형체를 갖춰 가기 시작했다. 완성된 것은 익숙한 외형의 괴수, 본 베어였다.
‘내가 아는 본 베어가 맞나? 저 정도 크기는 본 적 없는데.’
술식으로 따지면 본 코넥시온과 마찬가지로 흑마법의 기초 중 하나였지만, 그 시전자가 요릭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름 그대로 뼈로 이루어진 곰. 그러나 요릭이 만들어낸 놈들은 일반적인 본 베어의 크기를 훨씬 상회했다. 게다가 이놈들은 한 마리당 머리가 세 개씩이었다.
크르르륵카아!
본 베어가 울부짖었다. 유황불이 이글거리는 눈은 광기에 절어 있었다.
본 베어들이 주민 서른 명과 지원자 열 명을 슬슬 경기장 한가운데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당장 달려들지 않는 걸 보니, 요릭의 명령을 받는 듯하다.
“가두겠다, 이건가?”
참가자들이 바깥으로 도망치지 못하게끔 가두리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 싸움에 개입할지는 알 수 없는 일.
“쿠제. 집중해.”
“네, 도련님……!”
“서로를 못 챙길 수도 있으니까.”
“혹시라도 킬리언 님이 이 안에 섞여 있으면 어쩌죠?”
그 말에 루빈은 허리춤의 단검을 빼 들었다. 벌써부터 그런 상황을 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배제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죽여야겠지. 어머니의 로이넨서를 죽이기는 싫으니까.”
루빈은 단검을 역검 형태로 잡았다. 그러곤 이 상황을 초래한 근원을 노려봤다.
사자머리를 뒤집어쓴 남자.
“웃고 있군.”
사자머리 너머에서, 그는 분명 웃고 있었다. 얼굴 대부분이 가려져 있어도, 사자 아가리 속 그 미소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루빈은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는지 궁금하네.”
이윽고 특별관람석으로 돌아간 요릭이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곧 관중들의 웅성거림을 뒤엎는 뿔나팔 소리가 이어졌다.
쁘후우우우.
총 마흔 명이 집결하면서 잔뜩 비좁아진 경기장. 게다가 본 베어들의 몰이까지.
루빈은 진지한 얼굴로 후우,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온 사방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 * *
잘린 팔이 나뒹굴고, 뒤통수에 꽂힌 검이 눈알을 찢고 튀어나온다.
바로 직전까지 고함을 질러댔던 입은 벌어진 채 바닥을 나뒹굴고, 생기 가득하던 눈동자에선 생명이 스러진다.
사방으로 튀는 피와 오줌이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한데 뒤섞여, 끔찍한 악취를 내뿜었다.
처음 5분 만에 스무 명이 죽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스무 명 중에서 또다시 열 명이 죽어버리는 데는 20분이 채 안 걸렸다.
특별관람석에서 내려다보는 요릭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한 손으로는 짐승의 실제 두개골로 만든 술잔을 들고 있었는데, 거기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특제 와인이 담겨 있었다. 다른 손으론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깃덩이를 한 덩이 집었다.
와그작와그작.
고깃덩이를 입안에 마구 넣으며 또 비릿하게 웃어댔다.
“후우, 후아.”
경기장은 짧은 소강기에 접어들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열 명은 서로 간격을 유지하며 숨을 골랐다.
“에이, 그러면 안 되지. 머리 굴릴 시간이 어딨나? 당장 두개골을 깨버리기에도 촉박한데 말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요릭은 손가락을 튕겼다.
난투가 시작된 뒤로 내내 움직이지 않던 본 베어 세 마리가 크게 울부짖었다. 이제부터는 본 베어가 난투에 끼어드는 것이다.
“본 베어한테 전부 죽어버리면 어쩌지? 서른 명 정도 더 넣어볼까?”
그 말과 동시에, 본 베어 한 마리가 달려들어 사람 하나를 낚아채곤 몸뚱이를 두 쪽으로 찢었다.
다른 쪽에서는 누군가가 본 베어 아가리에 짓이겨졌다. 사람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본 베어의 잿빛 몸이 붉게 물들었다.
“그럴 것 같지는 않군요.”
“그래?”
요릭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네 명의 부대장 중 하나이자, 유일한 마법사이기도 한 프킨이 한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 꼬마애가 대단하군요.”
“누구? 아, 저놈?”
요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동의하는 바였다.
살육의 난투 속 유일한 꼬마 아이. 아이는 난투가 시작된 뒤부터 그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마치 하늘에서 조망하고 있는 듯 완벽히 계산된 움직임. 사방에서 쏟아내는 공격들을 막아내고 피해내고, 반격까지 이어갔다.
저것이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움직임이라는 건, 숙련된 전사가 아닌 요릭과 프킨이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아쉽군, 아쉬워. 두 명만 살려두긴 아쉬워.”
흑발의 아이뿐만이 아니다. 아이의 동료로 보이는 사내도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사자머리도 있었다.
요릭은 고기 찌꺼기가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면서, 이 즐거운 볼거리의 장본인을 주시했다.
사자머리의 움직임은 흑발 아이와 비슷하면서도, 거기에 노련함까지 덧씌워진 듯했다.
얼마나 많이 죽여댔는지, 그가 눌러쓰고 있는 사자머리의 갈기는 이미 붉게 물들었다. 마치 미친 듯 포식하는 진짜 사자처럼 말이다.
“재밌어, 참 재밌어!”
요릭은 상체가 흔들릴 정도로 크게 웃어댔다. 이 얼마나 기다렸던 살육제인가.
다시금 흥분한 요릭이 몸을 일으켜, 유황불이 일렁이는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때마침 눈앞의 경기장에선 새로운 양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슈우우웅.
흑발 아이의 뒤에서 앞다리를 크게 휘두르는 본 베어.
모든 걸 예상했던 건지, 흑발 아이는 몸을 튕기며 도리어 본 베어의 앞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러더니 본 베어의 허리춤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까드득!
소름 끼치는 뼈의 절단음.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만 같던 뼈대에 커다란 틈이 벌어졌다.
흑발 아이는 연속적으로 단검을 꽂으면서, 틈의 개수를 빠르게 늘려 갔다.
크르르르카아!
본 베어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아이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흑발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이내 틈이 충분히 넓어져 아이 몸이 들어갈 정도가 되었다. 아이는 곧바로 본 베어의 내부로 들어갔다.
“허어……!”
요릭이 미친 듯 손뼉을 치며 웃어댔다.
트트트트트틋!
본 베어의 몸 안으로 들어갔던 아이. 이윽고 괴수의 아가리가 산산조각 나면서, 아이가 솟구쳐 나왔다.
일반적인 검이라면, 본 베어의 뼈 무더기를 저런 식으로 잘라낼 수 없었다.
본 베어를 찢으며 솟구쳐 오른 아이의 검에는 흑칠의 겹이 씌워져 있었다. 단검 주위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탓.
콰콰콰쾅.
아이는 바닥에 착지했다. 아이가 걸어가는 사이, 뒤편에 멈춘 듯했던 본 베어가 순식간에 붕괴됐다.
“오러군요. 그것도 아주 견고한 오러입니다.”
프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요릭은 또다시 미친 듯 손뼉을 쳐댔다.
“재밌네, 재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