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76)
암살검가 로이넨-76화(76/258)
제76화. 노년의 암살자 (5)
‘너무 나갔나.’
루빈은 단검을 쥔 손을 내려다봤다. 흑칠의 오러가 울어대고 있었고, 그에 따라 손에도 둔중한 압박이 가해지고 있었다.
본 베어를 처리하면서, 루빈은 하나의 도박을 감행했다. 숙련되지 않은 1성 경지의 오러로, 2성 수준의 운용을 시도한 것이다.
무모한 도박은 아니었다. 어쨌든 결국 성공했으니까.
조금 전 브리온 오러를 발현시켰을 때, 루빈은 검의 노랫소리를 느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물질체인 검에서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가 아닌, 오러에게서 시작된 노랫소리였다.
2성으로 곧장 도약하는 건 누가 봐도 무리였다. 하지만 오러는 그게 가능하다고, 그게 너를 더 빠르게 성장시킬 거라고 알려주는 듯했다.
-성공도, 실패도 아닌 애매한 운용일세. 아직은 불안정해.
하네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난투를 모두 지켜본 그는 루빈이 결국 옳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자네로선 거기까지가 한계였네. 올라설 수 있는 자리까지 단숨에 뛰어오른 셈이지.
‘저도 느껴집니다.’
-그 상태로 얼마나 더 버틸 것 같나?
‘15분. 어쩌면 그보다 짧을지도요.’
그러니 그 전에 끝내야 한다. 하지만 체력은 소진됐고, 오러의 운용도 한계치였다.
다만, 오러의 환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한 상태였다. 마치 루빈이 한계를 체감할 때 더욱 벼려지는 느낌이랄까.
-루빈, 거짓말하지 않겠네. 아무리 자네여도 저자를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겠군. 적어도 지금은.
하네케의 솔직하고도 냉정한 판단이었다.
루빈 역시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암연이 향하고 있는 단 하나의 적. 바로 사자머리를 눌러쓴 사내였다.
도박을 하면서까지 오러의 경지를 끌어올렸던 이유는, 그저 본 베어 때문이 아니었다. 놈을 처리하기 위해서 오러까지 쓸 필요는 없었으니까.
‘도대체 정체가 뭐냐.’
어느덧 막바지에 이른 난투.
그러나 아직까지 루빈과 사자머리 사이에서는 단 한 번의 격돌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격돌만 없었을 뿐, 루빈은 줄곧 사자머리를 의식하고 있었지만.
반대쪽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의 힘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건 루빈의 암연에 공명을 일으킬 정도의 압도적인 힘이었다.
루빈이 암연을 방출시킬수록 사자머리의 본능과 감각들이 즉각적으로 날을 세웠다.
‘피하라는 뜻인가? 아니면 경고? 회귀 후 이런 적은 처음인데.’
지금, 섬세해진 감각은 단 하나의 사실만 알려주고 있었다. 이 자리를 벗어날 것. 루빈을 향해 회피의 종소리를 울려대는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위기의 순간들은 있었다. 길리필드 수목원에서 순결한 암연을 주입하며 정신을 잃을 뻔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땐 두려움 없이 나아갔던 루빈의 암연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
-그래도 저 사자머리, 자네의 오러는 예상 밖이었나 봐. 아주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군.
두 겹이 덧씌워진 흑칠의 오러가 검은 재를 내뱉는다. 하네케의 말처럼, 사자머리는 루빈의 오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죽엇!”
그 순간, 도끼 사내가 사자머리 쪽으로 달려들었다. 뒤늦게 이를 포착한 사자머리가 즉각 반응했다. 여유로우면서도 재빠른 동작이었다.
“어엇?”
사자머리의 검은 너무 빨랐다. 반응할 수 없을 만큼이나. 눈 깜짝할 새, 도끼 사내는 자신의 쇄골에 박혀 들어간 검을 발견했다.
“크아악!”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자머리는 검을 박아 둔 상태로, 오직 힘만으로 도끼 사내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곤 그대로 땅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두 번째 표적은 본 베어. 사자머리는 본 베어의 머리 세 개 중 하나를 택해, 도끼 사내를 곧장 쑤셔 넣었다. 도끼 사내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산 채로 씹혔다.
그 다음은 본 베어의 하체였다. 쓰윽 하는 소리와 함께, 본 베어의 하체가 순식간에 두 동강 났다.
사자머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유려한 동작을 이어나갔다. 이윽고 본 베어의 머리 세 개가 모조리 끊어지며, 바닥 위를 데구루루 굴렀다.
후두두두둑..
본 베어가 그대로 무너진다.
도끼 사내는 절명한 지 오래.
“후.”
사자머리는 잔해와 사체 위를 여유롭게 산보하며, 루빈을 쳐다보았다. 다음 차례는 너라고, 그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전생의 암연…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아직도 6할 정도.’
루빈은 그런 생각과 함께 쿠제를 바라봤다. 이제 막 마지막 본 베어를 지금 처리한 뒤였다. 쿠제는 잔해를 털어내곤 경기장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도련님.”
쿠제도 모르지 않았다. 살아남은 세 명 중에서 자신이 최약체라는 것을.
그리고 저 괴물 같은 상대는 루빈과 자신이 힘을 합쳐도 어쩌지 못할 경지에 있다는 걸.
그래도 해야 했다. 그래서 짐짓 물었다.
“이길 수 있을까요? 저 괴물.”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서 최고야. 어머니 다음으로.”
“오러도 아니고, 마법도 아니고… 어쩌면 거혈인이 아닐까요?”
쿠제가 던진 말에 루빈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확률은 없다. 하지만 오러의 발현자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니라는 말은 틀림없는 사실.
“온다……!”
역시나 사자머리는 노련했다. 더 대화를 나눌 시간을 주기보다는 빨리 끝내는 쪽을 선택했다.
갈기를 휘날리며 사자머리가 쇄도해 오고.
루빈은 암연을 공격적으로 밀집시켜 상대의 움직임을 쫓았다. 사자머리의 숨통을 틀어쥐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또다시 깨웠다.
‘오른쪽. 아니야… 왼쪽!’
사자머리의 검이 빠르게 방향을 튼다. 전환을 눈치챈 루빈이 공격을 흘려보내며 사자머리의 팔을 휘감는다.
관절을 노려 움직임을 봉쇄하는 암살검가만의 방식.
같은 순간, 쿠제는 사자머리의 후방을 노렸다.
루빈과 쿠제는 암연을 조응시키고 있기에 서로의 다음 움직임을 가늠할 수 있었다. 암연을 통한 긴밀한 협공은 척살조의 방식이었다.
그때였다.
루빈과 쿠제의 귓가를 스치는 선명한 웃음소리. 마주한 사자머리의 입가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
어떻게 빠져나갔는지도 모르게, 루빈의 압박이 풀렸다.
샥, 샥, 샥.
쿠제의 허벅지로 날카로운 검이 베고 들어간 것도 바로 그때였다.
와아아아…….
관중들의 함성이 아득해진다.
고통에 찬 쿠제의 표정을 지켜보던 루빈은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쿠제를 포기하고 혼자라도 살아남느냐, 쿠제를 살리고 공격을 허용하느냐.
암연을 거둬들이며 몸에 집중시켰다. 온몸의 감각이 몸을 뚫고 나가는 듯한 느낌이 일었다.
그렇게 루빈은 쿠제를 부둥켜안았다. 사자머리의 검이 쿠제의 심장에 닿지 않도록 몸을 날렸다.
그런데.
‘검을 뺐어?’
루빈이 피한 게 아니었다. 사자머리가 루빈의 허벅지를 가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놓아버린 것이다.
…와와와아아아!
아득해졌던 함성이 뒤늦게 몰아쳐 온다.
짧은 대결이었지만, 승부는 명백하게 갈렸다. 이젠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사자머리의 검이 루빈의 목에 닿아 있었다.
살갗에 닿는 검의 표면이 차가웠다.
‘왜 베지 않는 거지?’
거친 숨이 몸 밖으로 튀어나왔다. 루빈은 몸을 들썩이며 마지막 일격을 포기한 적을 올려다봤다. 사자의 갈기 몇 올이 눈앞에서 하늘거린다.
“아, 재미없다. 이제 그만하지.”
사자머리는 검을 들어 올리며 몸을 뒤로 뺐다. 그러곤 허리춤에 있던 수통을 꺼내 사자 아가리 속으로 내용물을 퍼부었다.
독특한 술 냄새가 퍼졌다.
어딘가 익숙한 주향(酒香)이.
“그분은 언제나 반쯤은 술에 취해 있었지. 술이 자신의 암연을 더 견고하게 한다 했던가.”
지난 생에 들었던 어머니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반취(半醉)의 암살자.
6성 경지에 이르렀던 로이넨서.
루빈은 사자머리의 눈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그의 얼굴을 감춰주었던 사자머리가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벌게진 얼굴과 게슴츠레한 눈. 초로의 노인이 씩 웃으며 루빈을 내려다보았다.
프스스스.
루빈의 단검을 감쌌던 흑칠의 오러가 스러지고, 쿠제는 고통도 잊은 채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킬리언?”
루빈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제껏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암연이, 광폭한 기세로 경기장을 채우고 있었으니까.
“꼬맹이. 당장 일어나라,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뭐?”
킬리언은 뒤편을 향해 턱짓했다. 상체를 구부릴 정도로 웃어대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요릭이 보였다.
“재밌었는데! 킬리언, 왜 그만둔 거냐? 한 명만 살려두고, 한 놈은 죽였어야지!”
킬리언 앞에 도착한 요릭. 그는 자신과 킬리언의 목소리를 장내에 울려 퍼지도록 했다.
“생각이 바뀌었거든.”
킬리언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몸 좀 풀고 싶다며!”
“몸은 충분히 풀었어. 이 두 놈은 죽이기 아깝더라고. 그래서 내가 시종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괜찮겠지?”
킬리언은 요릭의 권위에 짓눌리지 않았다.
게다가 킬리언이 제왕에게 맞먹는 모습에 놀라야 할 흑색탑의 주민들은, 오히려 킬리언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킬리언! 킬리언!”
이 모든 건 킬리언이 요릭과 벌인 장난이었다. 물론 요릭은, 킬리언의 진짜 목적이 루빈과 쿠제를 자신의 시종으로 빼내는 것이란 사실을 몰랐지만.
“뭐, 저 둘이 죽이기 아까운 놈들이라는 건 인정하지. 특히 꼬마 놈. 네가 죽이면 내가 데스나이트로 만들려고 했거든.”
“미안하지만 이제부터는 내 심부름꾼들이야. 아, 그리고 네가 키우던 사자도 간밤에 죽였다. 그것도 미안.”
킬리언은 바닥에 놓인 사자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발로 찼다.
자신 앞으로 데구루루 굴러오는 사자머리를 내려다보며 요릭은 낄낄 웃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흩어져 있던 본 베어의 뼈 무더기 중 일부가 날아가 사자의 머리에 들러붙었다.
크아아아아아.
완성된 뼈 무더기 몸을 일으키며, 사자가 울부짖었다.
“하여간 여우 같은 새끼라니까. 갑자기 서른 명을 집어넣자고 하질 않나.”
“덕분에 더 재밌었잖아? 여기 두 놈의 실력을 가려낼 수도 있었고.”
순간 킬리언과 눈이 마주친 루빈은, 그제야 그가 왜 갑작스럽게 서른 명의 주민을 끌어들였는지 이해가 갔다.
시종으로 빼내려면 요릭을 납득시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루빈과 쿠제가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했고.
깔아놓은 판 덕분에, 루빈과 쿠제는 의심받지 않고 킬리언의 시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톡톡.
요릭은 기다랗게 뻗은 손톱으로 루빈의 머리를 두드렸다.
“그래, 네가 이 둘 데려가라. 며칠 전에도 애새끼 하나를 주워 오더만… 그런 취향이 있었는지는 몰랐어, 킬리언?”
“됐고, 난 이만 가겠다.”
킬리언은 팔을 내저으며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루빈과 쿠제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런 그들 뒤로 킬리언의 이름이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참수대장! 킬리언!”
“참수대장! 킬리언!”
흑색탑 안에서 그의 인기가 높은 것 같았다.
“…….”
킬리언은 자신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집은 원형경기장에서 세 블록 떨어진 골목에 위치한 커다란 저택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정원을 가로질러 2층으로 올라간 다음에야, 몸을 돌려 루빈과 쿠제를 바라보는 킬리언.
벌컥벌컥.
그리고 술을 한 번 더 들이켜더니.
“커헉!”
홱 손을 뻗어 쿠제의 목을 움켜쥐었다. 술기운에 게슴츠레한 눈동자였지만, 오롯한 살기로 가득했다.
“이봐, 풋내기. 널 살려야 하나 고민했다. 너처럼 형편없는 로이넨서를 살려두는 것보다 세이렌이 새로운 놈을 파견하는 게 나을 텐데. 꼬맹이가 널 지켜주지 않았으면 넌 그때 죽었을 거다!”
이윽고 그가 손을 풀자 쿠제가 바닥을 짚었다.
킬리언의 서늘한 눈길은 이번엔 루빈에게로 향했다. 그는 응접실의 의자로 가서 털썩 앉고는, 식탁 위에 죽 나열된 술병 중 하나를 골랐다. 또 한 모금 술을 들이켠 뒤.
“나한테 도련님 대접받을 생각 하지 마라, 꼬맹이.”
“어, 어찌 그리 무도하게 굴 수 있는 겁니까! 그래도 로이넨 혈통이신데…….”
쿠제가 일어나며 킬리언을 노려봤다.
“그래? 그럼 네가 아까 제대로 지켰어야지. 로이넨서 자격도 없는 놈.”
“됐어, 쿠제. 그리고… 킬리언.”
루빈은 킬리언 쪽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괴팍하긴 하지만 뭐, 상관없지. 넌 어머니만을 모시는 가신이니까.”
“알면 됐다, 꼬맹아.”
킬리언은 졸린 눈으로 기지개를 켰다.
“그나저나, 왜 날 찾아온 거냐?”
암레트가 전하라는 편지가 손에 닿았다. 하지만 바로 킬리언에게 건네진 않았다. 물어볼 게 있었다.
“그 전에 궁금한 게 있다. 어째서 네 암연이 느껴지지 않았던 거지? 싸웠을 때 말이야.”
킬리언은 가볍게 웃었다.
“그게 궁금해? 나는 네가 어떻게 오러를 쓸 수 있는지 궁금했는데. 각자 설명해 주면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