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78)
암살검가 로이넨-78화(78/258)
제78화. 흑색탑의 미래 (2)
‘생각보다 훨씬 컸구나.’
거점창고 내부를 걸어가며 루빈은 감탄했다.
9년 이후의 시점과 비교해 보면, 품질이나 희귀도 면에서 회귀 전 대비 훨씬 뛰어났다. 수량도 열 배 이상 많았다. 전부 킬리언의 솜씨이자 안목 덕이었다.
‘흑색구역에 보구가 많은 건 당연해.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은데. 대체 얼마나 쓸어 담은 건지…….’
흑색구역은 어지간한 실력자들도 큰맘 먹고 들어오는 곳이다. 목숨을 보전하려면 최대한 무구를 장착한 상태여야 하는 건 당연했다.
이따금 크고 작은 살육전이 일어나면 주인 잃은 무구들이 나왔고, 그중엔 이름난 귀품도 적지 않았다. 흑색구역을 두고 ‘귀품들의 음습한 집합소’라는 말이 생겨난 이유였다.
덕분에 암살검가는 효율적으로 무구를 획득할 수 있었다. 킬리언은 싸움이 있을 때마다, 혹은 싸움을 조장하면서 거점창고를 채워 나갔기 때문이다.
그는 획득한 무구 중 절반은 본가로 보냈고, 나머지는 요청에 따라 각 방계 가문으로 보냈다.
“도대체 언제까지 꾸물댈 거냐?”
무구 하나하나 신중하게 살피는 루빈의 모습에 킬리언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너희를 시종으로 데려온 거 몰라? 누가 집에 놀러 오면 재깍재깍 튀어 나가야 하는 시종이라고!”
“걱정하지 마. 그런 일이 있으면 바로 튀어 나갈 테니까.”
“하, 지겨워 못 있겠군. 그냥 손에 잘 잡히는 무기 하나 골라 가면 될 것을!”
“그러려면 여기 있는 무기들 다 쥐어봐야 하잖아. 지금 그러고 있는 중이야.”
“미치겠네! 한 시간 후에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지 골라 놔.”
루빈은 돌아서서 창고를 나서려는 킬리언을 불러 세웠다.
“마도구는 어디에 있어?”
“뭐, 마도구? 그건 네가 왜?”
“몇 개 챙겨두면 카포티니에서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아, 네가 가는 곳이 마법도시라고 했지. 시장에다가 팔아먹으려는 거냐?”
루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약삭빠르긴. 저기 있다.”
킬리언에게선 말년의 귀찮음이 풍겼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손을 들어 마도구들을 모아놓은 곳을 가리켰다. 그러곤 털레털레 창고를 떠났다.
“흐음…….”
명기되지 않은 상태로 무분별하게 쌓여 있는 마도구들.
무구라면 어떤 식으로든 활용하겠지만 마도구는 달랐다. 조잡한 마도구조차 극소량의 마나는 필요했기에 암살자에겐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쓸모있는 거지.’
루빈은 마도구들을 하나씩 헤집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쿠제 눈에는 마치 찾고 있는 마도구가 따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도련님. 혹시 따로 찾는 게 있으신가요?”
“응. 아공간 주머니.”
“아.”
쿠제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쿠제 역시 자신에게 마나가 있다면, 가장 유용할 물건이 바로 아공간 주머니라고 생각해 왔다.
“저도 찾아보겠습니다.”
하지만 사실 루빈이 찾는 건 아공간 주머니가 아니었다.
‘안 보여. 시기가 어긋난 건가?’
아공간 주머니도 요긴하겠지만, 그건 여기가 아니어도 충분히 구할 수 있었다.
오직 여기에서만 얻을 수 있는 마도구. 바로 그게 지금 루빈이 철제 상자 속을 열심히 헤집고 있는 이유였다.
오래전 세빌론 왕국이 가장 융성했던 시절의 궁중 대마법사 ‘글레이튼’. 고룡과도 친교를 나누었다고 알려진 대마법사는 마도구 제작자로도 유명했다.
현시점 모든 왕국 궁정에 경비용으로 배치되어 있는 ‘소리를 보는 눈’도 글레이튼의 작품을 개량한 것이었으니.
‘글레이튼의 팔찌.’
글레이튼의 명작 중 하나로 꼽히는 그것은, 가진 힘으로만 따지면 마법사 세계에 혼란을 조장할 정도의 마도구였다.
글레이튼 본인이 한 개만 만들어놓고 더는 제작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알려진 것보다 더 일찍 죽었을 터였다. 다른 마법사들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
글레이튼의 팔찌 효능은 간단하면서도 치명적이었다.
‘마법사의 휘식을 읽어내는 능력.’
초급 마법사와 중급 마법사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바로 ‘휘식의 내면화’였다. 즉 마법 술식을 감추는 것이다.
만약 휘식을 들킨다면? 그건 자신의 행동을 빤히 예고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럼 아무리 대마법사라 할지라도 상대를 이길 확률이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마도구는 단지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휘식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9년 뒤에는 있었어, 분명히.’
루빈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인계받은 거점창고. 지금보다 훨씬 축소된 규모였지만, 거기엔 분명 글레이튼의 팔찌가 있었다.
당시 루빈에게는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아마 클로이의 도움으로 마나를 다스리지 못했다면, 이번에도 애물단지이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지금은 그 어떤 것보다 그게 필요했다.
‘흠, 다음에 다시 와야겠군.’
간단히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으로부터 9년. 그사이에 들어올 물건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들, 아직도 못 골랐냐?”
한 시간 전보다 더 벌게진 얼굴로 킬리언이 나타났다.
“아직 못 골랐는데.”
“허, 이거 끝이 없구먼!”
“어차피 오늘 하루로 끝낼 생각 없었어.”
벌컥벌컥. 오아쿰을 들이켠 킬리언이 크흐,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내일 다시 열어줄 테니까, 일단 나와. 밥 먹을 시간이다.”
그 순간, 루빈이 펼친 암연에 저택 내부 또 다른 인영이 감지됐다. 인영의 크기가 작은 걸 보니 성인은 아니었다.
‘누구지?’
정체는 잠시 후에 밝혀졌다. 널찍한 식탁에 세 암살자가 둘러앉자, 조그만 아이가 조심스레 걸어 나왔다.
“운이 좋은 꼬마였군요.”
“티나가 좋아할 만한 소식이네.”
쿠제와 루빈이 한마디씩 했다.
“…….”
남은 의자 하나를 차지한 꼬마 아이. 며칠 전 불운하게 흑색구역의 경계로 넘어와 버리고 만 그 아이였다.
천운을 타고난 아이다. 때마침 지상에 올라가 있던 킬리언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치아가 다 뽑힌 채로 누군가의 양식이 되어 있었을 테니까.
“나를 졸졸 따라오더군. 어미 잃은 강아지처럼.”
“말수가 적군요.”
쿠제가 아이를 향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아이는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말하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흑색구역에서 마주한 충격으로 인해 정신이 반쯤 나갔으리라.
그래도 계속 이렇게 킬리언의 저택에 지내다 보면 조금씩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흑색구역에서 킬리언의 저택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으니까.
“…….”
아이는 신기한 눈으로 루빈을 쳐다봤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가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있으니 믿기지 않겠지. 안쓰러운 운명이지만, 스스로 극복해 내야 하는 일이다.
이윽고 식사를 마친 아이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식당을 떠났다.
남은 세 사람은 그대로 느긋한 식사를 이어갔다. 킬리언은 뼈에 두툼하게 붙어 있는 살코기를 누렇지만 튼튼한 치아로 발라 먹었다.
“킬리언.”
루빈이 그를 부르자, 고기를 입에 문 킬리언이 두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부르냐는 듯.
“암레트는 왜 요릭을 죽이려고 하지?”
“궁금하냐?”
“요릭이 황실의 광대였다고 들었거든. 그리고 백색탑과 흑색탑. 공존하는 게 서로 좋은 거 아닌가?”
뼈다귀를 다 발라 먹은 킬리언이 꺼억, 트림했다. 더는 루빈에게 정보를 제공할 의무 같은 건 없었지만, 킬리언은 그것조차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는 뼈다귀의 뾰족한 부분으로 이를 쑤시다가 습관처럼 오아쿰을 병째 들이켰다. 그러고선 태연하게 대답했다.
“간단해. 요릭이 암레트가 원하는 걸 슬쩍했거든.”
“그게 뭔데?”
“고룡의 눈물.”
킬리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럴 만한 화젯거리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태연한 태도 때문에 대화가 지나치게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지금 농담하시는 겁니까?”
“너, 이름이 쿠제라고 했나? 그렇게 사람 분간을 못 하겠어?”
“나도 농담처럼 들리는데.”
루빈이 나직하게 말했다. 고룡의 눈물이라니, 누가 쉽게 믿을 수 있을까.
물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암레트가 요릭을 죽이려는 이유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보다 앞서, 요릭이 암레트를 배신할 이유로도 충분했고.
고룡. 반신(半神)이라고도 불리는 종족의 눈물은 신비로운 능력을 품고 있었다. 그 효능은 제각각이지만, 하나같이 엄청난 것들이었다.
“그 말, 증명할 수 있어?”
“증명하는 건 겁나게 쉽지! 네가 여기서 1년만 머물러 봐라. 점점 젊어지는 요릭을 보게 될 테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루빈은 곧바로 이해했다. 그리고 요릭의 몸속에 있는 그 눈물이 어떤 고룡의 것인지도.
“고룡 기벤라트의 눈물.”
“이놈 봐라? 잡지식이 있었네.”
회귀 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고룡 기벤라트의 눈물은 섭취한 사람에게 절정의 육체를 선물한다고.
늙은이에게는 시간을 역행시키고, 어린아이에게는 시간을 주파하여 가장 강한 육체를 지니게 해준다고.
그렇게 섭취자는 전성기의 육체를 평생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400년 전에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했는데.’
고룡의 눈물을 섭취한 인간은 몸속, 정확히는 두개골 속에 고체의 결정체를 지니게 된다. 유산과 같이 전승(傳承)이 가능한 것이다.
이를 빼앗으려면 숙주의 죽음밖엔 방법이 없다. 하지만 불로의 몸을 만들어내는 눈물이었으니 자연사로는 불가능할 터. 그저 살인을 통해 빼앗을 수밖엔 없는 것이다.
“으잇, 퉤!”
갑자기 킬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쪽 바닥에 침을 뱉었다.
“……?”
“제길, 너희들 때문에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잖아.”
그러면서 킬리언은 식탁 앞으로 돌아와 오아쿰을 들이켰다.
“어떤 기억이냐고? 그건 죽어도 얘기 안 할 거니까 기대하지 마라, 이것들아! 이제부터 우리는 그냥 닥치고 밥이나 먹는 거다.”
킬리언은 우적우적 고기를 씹어먹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 기억이 떠오르고 말았으니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쾌한 장면에 킬리언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 * *
고룡 기벤라트의 눈물이 어떻게 요릭에게 전해졌을까.
그 과정의 이면에는 암레트의 집념이 있었다. 암레트는 불로의 비약을 찾기 위해 젊었을 때부터 권력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기꺼이 황족의 피를 이용했고, 염동괴제의 명성을 활용했다.
수색이 수십 년째 이어지던 어느 날. 드디어 암레트는 기벤라트의 눈물을 품은 자가 필리몬드에 오리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문제는 그 후보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 일주일 동안, 육로와 수로를 통해 필리몬드로 진입하는 젊은 남성 500여 명이 그 후보였다.
기벤라트의 눈물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죽인 뒤 두개골을 갈라 확인해야 했다. 결국 다 죽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필리몬드라는 제국법전이 안장된 신성한 도시에서, 500명을 한꺼번에 죽여 그 두개골을 가를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암레트는 흑색구역을 이용했다.
속임수, 납치, 유인, 협박 등. 모든 수를 동원해서 후보 500여 명을 흑색구역으로 보내 버렸다. 그리고 그곳의 요릭과 킬리언에게 그들을 모두 죽일 것을 명했다.
학살이 시작됐다. 단 이틀 만에 흑색탑 한쪽 공터에서 수백 명의 남성들이 킬리언에 의해 참수되었다.
“제가, 제가 왜 죽어야 하나요?”
“살려만 주신다면 거금을 드리겠습니다!”
“아들이 있다고요!”
“나, 나는 1등귀족이야, 이 개새끼야!”
그렇게 얻어낸 별칭, 참수대장.
아무리 노련한 암살자라 해도 버티기 힘든 작업이었다. 그는 암살자였지, 학살자는 아니었으니. 명분과 이유가 결락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쨌든, 그날 저녁쯤 킬리언이 죽인 누군가의 머리에서 드디어 기벤라트의 눈물이 나왔다.
참수에 지친 킬리언이 털썩 주저앉아 오아쿰 한 병을 모조리 입에 퍼붓고 있을 때, 요릭은 몸을 벌벌 떨며 그 노란색의 눈물 결정체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킬리언은 요릭이 그걸 암레트에게 넘기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그 당시 요릭은 암레트보다도 더 늙은 몸이었다. 주름이 쭈글쭈글했고, 몸에서는 혈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는 하루가 다르게 젊어졌다.
만약 몇 년 더 지나 기벤라트의 눈물이 요릭을 절정의 몸에 안착시킨다면, 지금껏 이 세상에 없던 7성 경지의 네크로맨서가 탄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게… 벌써 4년 전 일인가. 이제야 바로잡을 수 있겠군. 그 음흉한 새끼가 7성에 올라서는 것만은 막아야지.’
루빈과 쿠제를 번갈아 바라보는 킬리언. 우적우적 고기를 씹으며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