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79)
암살검가 로이넨-79화(79/258)
제79화. 흑색탑의 미래 (3)
흑색탑으로 들어오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밤.
킬리언은 두 사람에게 2층에 비어 있는 방들 중 하나를 내주었다. 루빈은 휴식을 취하며 창밖으로 펼쳐진 흑색탑의 전경을 관찰했다.
거리 화분엔 꽃이 피어 있고, 앙증맞은 강아지들이 여기저기 뛰논다. 이곳은 잘 구축된 도시, 그 자체였다.
거리를 쳐다보던 루빈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어째서 이렇게 말끔할 수 있는 거지? 네크로맨서를 지배자로 둔 도시답지 않게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했으니.
“자정이군요.”
옆쪽에서 쿠제가 말했다. 하지만 지하 도시는 여전히 대낮처럼 밝았다. 마법에 의한 인공적인 빛 때문이었다.
‘백야인가.’
회귀 전에 대륙 북방에서 여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북방의 여름은 밤이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지금이 딱 그때와 같았다.
그래서 그런가. 킬리언 저택의 모든 창문에 두툼한 덧창이 장착된 상태. 버튼을 누르면 마치 벽처럼 내려앉는 방식은 백야가 있는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 자라, 이것들아.”
킬리언이 터벌터벌 복도를 걸어오더니 방문 앞에서 말했다.
“아, 그리고 미리 말해두겠는데, 너희 둘 다 내일 나랑 같이 요릭의 저택에 다녀올 거다.”
“왜 가는 거지?”
“부대장들끼리 하는 회의라고 생각해라.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늘어놓는 자리긴 하지만.”
“주의할 점은?”
“글쎄. 일단 요릭은 신경 쓸 거 없어. 그놈은 너희를 좋아할 테니까. 자기 왕국의 훌륭한 인재로 보는 거지. 근데 다른 부대장들은 모르겠군. 그 새끼들은 나를 경계하는 놈들이라.”
킬리언을 제외한 부대장 셋.
그 모습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보랏빛 피부의 데스나이트. 창을 무기로 쓰는 거구의 전사. 그리고 왜소한 체구의 마법사였다.
“그중에 프킨이라는 놈이 있어.”
“프킨?”
“마법사다. 요릭이 특히 아끼는 놈이지. 비릿하기 그지없는 새끼니까 괜히 엮이지 말도록.”
“참고할게.”
그때, 창밖에서 밝게 빛나던 하늘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이내 철컥철컥하는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일부 집들에서 덧창을 내리는 소리였다.
킬리언도 창가로 걸어가 덧창을 내렸다. 내부의 창문까지 닫는 그 모습에 쿠제가 물었다.
“무슨 일이죠?”
“지금 막 요릭이 잠든 거다.”
요릭이 잠들면 지하도시에 어둠이 내려앉은 구조인 건가? 그런데 왜 굳이 덧창을 내리는 거지? 쿠제가 물으려 하자, 킬리언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걸어갔다.
“일일이 설명해 주면 말이 길어지니까, 그냥 자라.”
“이곳에 지내려면 꼭 알아야 할 거 같은데요.”
쿠제의 대꾸에 킬리언은 그저 오아쿰 병을 꿀꺽꿀꺽 목 뒤로 넘겼다.
“너희는 내가 알려주는 것만 알면 돼. 이외엔 알 필요 없다.”
그대로 복도로 나가 버리는 킬리언.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쿠제가 쓰게 웃었다. 괴팍한 주정뱅이의 모습에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쿤 도련님이 늙으면 저리되시는 건 아닐지.”
크로키슨가의 가신으로서 쿤에게 시달렸던 지난날이 떠올랐는지, 쿠제는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장난스럽게 떨었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때. 복도를 걸어가던 킬리언이 크게 소리쳤다.
“다 들리니까 내 욕은 그만두는 게 좋을걸. 이 로이넨서 새끼야!”
암연으로 청각을 증폭시킨 것이다. 쿠제가 깜짝 놀라 무어라 대꾸하려는데, 킬리언이 선수 쳤다.
“하여간 멍청한 꼬맹이 놈. 로이넨서 하나 제대로 뽑지 못해서는! 쯧쯧.”
“…….”
루빈은 망연자실한 쿠제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곤 암연을 넓혀, 킬리언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어딜 가는 거지?’
킬리언의 발소리가 복도 끝 작은 방 앞에서 멈췄다. 조심스레 열리는 방문. 훈기가 잔뜩 풍기는 방이었다.
“…의왼데.”
킬리언은 잠든 꼬마애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 숨결이 고른지, 표정이 나쁘지는 않은지.
이윽고 이상 없다는 걸 확인한 킬리언은, 술병을 홀짝이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쿤 도련님보다는 나은 것 같네요.”
“그러게.”
“그나저나, 바깥이 어두워졌는데 왜 다들 덧창을 내린 걸까요?”
빛 차단 용도는 분명 아니었다. 그럼 방범용인 걸까? 확실한 건 킬리언 포함 몇몇 집들만 그랬다는 점이다.
“이유가 뭘까요?”
조금은 알 것 같았지만, 루빈은 말을 아꼈다.
흑색탑에서의 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일군 도시에서 요릭은 어떤 존재인지. 조금씩 윤곽이 그려졌다.
“곧 알게 되겠지.”
확인할 수 있는 날이 곧 올 것이다. 루빈은 그 정도로만 대답한 뒤, 눈을 감았다.
쿠제는 곧장 잠들었지만, 루빈에겐 지금까지 늘 그래 왔듯 마지막 일과가 남아 있었다.
-오늘은 좀 늦었군.
‘바로 시작하시죠.’
내면의 수련장. 루빈은 하네케와 서너 시간 검을 맞댄 후에야 노곤해진 몸을 쉴 수 있었다.
다음 날. 덧창이 다시 올라갔을 땐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창밖으로는 다시 평화롭고 세련된 도시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정오쯤, 킬리언이 앞장서서 요릭의 저택으로 향했다.
부대장들이 참석한 회의는 주기적으로 열리지만, 매회 새롭거나 발전되는 사항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술이나 퍼마시면서 지루한 오후를 보내는 것뿐이다. 어제 같은 돌발 이벤트에 왜 그렇게 열광적이었는지 단번에 이해됐다.
요릭은 한 시간째 쩌렁쩌렁한 웃음을 그치지 않으며 어제의 난투를 되짚었다.
“크크큭, 루든. 죽을까 봐 겁먹을 필요 없어. 죽자마자 내 시종으로 되살려 줄 테니까.”
데스나이트로 삼겠다는 뜻이군. 끔찍한 말이었지만 가볍게 넘겼다. 기괴하게 자라난 요릭의 손톱이 얼굴 위를 그으며 지나갈 때도, 루빈은 무표정했다.
‘전부 세 명이라고 했지.’
루빈은 시선을 돌려, 요릭 옆에 선 부대장들을 훑어보았다.
“…….”
커다란 양날도끼를 등에 멘 창백한 사내. 영혼을 잃은 눈동자로 루빈을 노려보는 자는 데스나이트였다
5성 네크로맨서 이상만이 부릴 수 있는 피조물. 놈에게서 경지를 가늠할 수 없는 ‘음화된 마나’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옆에는 거대한 창을 쥔 거구의 사내가 있었다. 이름이 소킨이라 했던가. 킬리언은 부대장 중 가장 안심해도 좋을 상대라고 했다. 무의 경지도 보잘것없고 머리도 좋지 못하다고.
다만 그가 들고 있는 창의 모양새가 유독 눈에 띄었다. 시뻘겋게 녹이 슨 창끝, 피가 눌어붙은 듯 새카만 창 자루. 창끝에서 피어오르는 은은한 마기까지.
‘음화된 마나’로 제조된 마구(武具)가 분명했다. ‘마나’로 제조된 보구와 정반대의 힘을 가진, 불경한 무구였다.
‘역병창(疫病槍)이군.’
회귀 전 기억이 떠올랐다. 스치기만 해도 눈 녹이듯 살점을 녹여 버린다는 마구. 상대하기 까다로워 보였다.
‘프킨은 어디에 있지?’
킬리언이 요주의 인물로 평했던 마법사가 보이지 않았다. 요릭의 저택 내부를 훑어보아도, 분주히 돌아다니는 하인들만 보였다.
“프킨, 그 새낀 가장 나중에 부대장으로 승격한 놈인데, 나머지 둘에 비하면 살짝 위험한 놈이지.”
킬리언의 평이었다. 이곳 마법사들을 절멸시킨 놈이라고.
프킨이 흑색탑에 들어온 건 2년 전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흑색탑 안에는 열 명의 마법사가 있었다. 음지를 택했을지언정 마법사로서 형편없는 자들은 아니었다. 전부 흑색탑 안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던 자들이었는데.
고작 열흘. 프킨이 그들 모두를 형체도 없이 소멸시키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킬리언은, 그가 원했다면 하루 만에도 가능했을 거라고 했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하루에 한 명씩만 죽이면서 요릭을 즐겁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요릭. 프킨은 어디 간 거지?”
킬리언이 물었다. 이 자리에 프킨이 없다는 사실은 그의 눈에도 이상해 보였다.
“지상으로 올려 보냈다.”
“지상으로?”
“암레트, 그 노인네가 드디어 노망이 난 건지… 이틀이나 일찍 번호를 보냈어.”
이번 주에 있을 사형수의 추첨 번호를 회수하러 갔다는 말이다.
“그래?”
킬리언은 무덤덤한 태도로 프킨에 대한 화제를 접었다.
암레트가 갈구하던 ‘기벤라트의 눈물’을 가로챈 요릭이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아직 악어와 악어새 같은 공생관계를 깨트리지는 않았다.
범죄자는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진리를 공표해야 하는 암레트의 입장과, 어떤 죄를 저질러도 운만 좋다면 처벌 없이 살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줘야 하는 요릭의 입장.
둘에게 사형수 추첨은, 없애 버리기엔 너무도 요긴한 일종의 ‘사업’이었다.
‘추첨 번호를 받아 오는 임무를 프킨이 직접 한단 말이지.’
프킨의 위용이나 그에 대한 요릭의 신뢰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게다가.
‘프킨은 암레트에게서 킬리언 제거 임무를 받았을지도 몰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추론이었다. 루빈이 아는 미래에 따르면, 이번 사형수 추첨에서 뽑히는 사람은 킬리언이었으니까.
킬리언의 반발에 대비해, 그를 확실히 제거할 수 있는 실력자를 섭외해 놓았을 게 당연했다. 그건 프킨이 유력했고.
‘언제쯤 오려나.’
여러모로 프킨의 면모가 궁금해졌다. 루빈은 요릭의 관심을 견뎌내며 얌전히 프킨을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시끌벅적한 악기 연주 속, 무희들이 요릭 앞에서 난잡한 춤을 추고 있을 때였다. 무대를 가로질러 요릭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
프킨이었다.
원형경기장에서 봤던 것처럼 왜소한 몸이었다. 마법사답지 않게 얼굴 곳곳엔 상처가 많았다. 얼핏 보면 전쟁터의 말단병사 같았다.
오른쪽 입술 끝에서부터 시작한 칼자국이 귓불까지 이어져 있다. 루빈은 프킨이 말을 할 때마다 입가의 칼자국이 출렁거리는 걸 지켜보았다.
“이걸 보시죠. 제가 미리 확인하길 잘한 것 같네요.”
프킨은 요릭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이며, 자신이 미리 확인한 사형수 번호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
“크흠…….”
요릭은 입술을 쭉 내밀고 종이를 내려다봤다. 곧 눈길이 킬리언 쪽으로 향했다.
“킬리언.”
“왜?”
“요새 몸 상태, 나쁘지 않지?”
루빈이 보기에도 의미심장한 질문. 킬리언은 눈치챘을까?
“어제 봤잖아. 내가 녹슨 것처럼 보이냐?”
“아냐, 당연히 그건 아니지…. 이번 추첨 때도 기대하겠단 뜻이니까, 오해 말라고.”
“걱정도 많아.”
킬리언은 대수롭지 않게 오아쿰을 들이켰다.
킬리언의 별칭이 참수대장인 또 다른 이유.
추첨에서 뽑힌 사형수가 간혹 도망칠 때가 있다. 대부분 군중에 의해 붙잡히지만, 아무래도 가장 확실한 추격자는 킬리언이었다.
그가 한때 암살검가의 척살조장이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알 리 없지만, 어쨌거나 이곳에서 킬리언은 유령쥐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어떤 표적이라도 찾아내 기어코 목을 떨어트렸으니까.
이곳 주민들에게 킬리언이 존경받는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아, 그리고 너. 루든. 이 귀여운 시종 놈.”
“예, 요릭 님.”
“옆에서 잘 보좌해야 한다. 저래 봬도 귀하신 몸이라고.”
루빈은 몸을 수그려 대답을 대신했다.
때마침 무대가 끝났다. 무희들이 물러나면서, 루빈은 가려져 있던 프킨의 전면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
루빈은 제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다시 보아도 확실했다.
“뭘 쳐다봐? 쥐방울 새끼가.”
“아, 죄, 죄송합니다.”
루빈이 황망한 모습을 연기하며 몸을 다시 수그렸다. 남몰래 웃음이 나왔다.
‘찾았다!’
프킨의 팔뚝을 나선으로 타고 올라가며 영롱한 빛을 내는 자주색 팔찌. 글레이튼의 팔찌였다.
‘저놈이 갖고 있었구나.’
열 명의 마법사들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킨 마법사 프킨.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밝혀졌다.
상대 마법사의 휘식을 읽는다는 글레이튼의 팔찌를 가졌다면, 열 명이 아니라 백 명이라도 무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