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81)
암살검가 로이넨-81화(81/258)
제81화. 사형수 추첨 (1)
휘이이이.
루빈은 핏빛서리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검신에서 서리가 퍼져 나가며 몸을 에워쌌다.
“으… 피가 얼어붙는 것 같군요.”
쿠제가 감탄했다. 공간을 아우르는 냉기가 잔뜩 벼린 검처럼 온몸을 겨누었다.
‘추위가 느껴지지 않아.’
그건 오직 루빈뿐이었다. 마치 공간을 분리한 것처럼, 루빈의 육체만 온기로 가득했다.
스응!
검을 휘두르자 서리가 춤을 추었다. 한쪽 벽면으로 서리가 몰아치면서 창고의 선반들이 일제히 휘청거렸다.
투두두둥.
“올라가자.”
“네, 도련님.”
거점창고에서 나온 그들은 저녁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휴식을 취했다. 그때까지도 루빈은 새로운 무구를 손에서 놓지 않은 상태였다.
타닥타닥.
루빈은 장작이 타고 있는 벽난로를 바라봤다. 가까이 검을 가져다 대보았다. 그의 의지에 따라 냉기가 검 끝으로 결집했다. 빠르게 나아가 벽난로의 전면에 스며드는 냉기.
트드드득.
냉기는 벽난로뿐만이 아니라, 타들어가던 장작불까지 집어삼켰다. 불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그리고 남아 있던 잉걸불 위로 단단한 얼음이 뒤덮었다. 그걸 본 쿠제가 혀를 내둘렀다.
“어마어마한 위력이네요.”
“아직 부족해.”
회귀 전 로이넨의 가주가 썼던 검이다. 어머니조차 완전히 다루지 못한 검. 언젠가 온전히 다루겠다고, 루빈은 다짐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꼬마 아이가 조심스레 자기 방으로 돌아간 뒤, 킬리언은 요릭 암살 계획을 밝혔다.
“사형수 추첨이 진행될 때, 요릭을 죽일 거다.”
오아쿰을 홀짝이고, 고기를 우적우적 씹는 킬리언. 그 모습은 마치 소풍 약속을 말하는 투였다.
하긴, 함께한 시간이 오래됐으니 요릭에 대한 파훼법도 갖춰두고 있겠지.
요릭은 킬리언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 믿음이 큰 만큼 자신의 목숨이 쉽게 끊어지리라는 걸 모른 채.
“내가 요릭을 그놈 집에서 죽이는 동안, 너희는 추첨이 진행되는 원형경기장에 있으면 될 거야.”
“추첨할 때, 프킨은 어디에 있지?”
“프킨? 그놈도 원형경기장에 있을 거야. 나 대신 사형수를 추격해야 하니까.”
킬리언은 자신의 참수대장 역할을 프킨에게 떠맡길 생각이었다. 요릭을 더 수월하게 제거하려면 프킨을 떨어트려 놓아야 했다.
다만 데스나이트는 어쩔 수 없었다. 요릭을 경호하는 것. 그게 그 데스나이트의 존재 이유였으니, 요릭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함께 상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러면 나는 프킨 옆에 있어야겠네.”
루빈은 핏빛서리를 만지며 대답했다. 새로운 주인을 맞이한 핏빛서리는 그 손길에 따라 빛의 서리를 가볍게 퍼뜨렸다.
루빈이 알고 있는 미래처럼, 사형수 추첨에서 킬리언이 뽑히는 거라면.
프킨을 잡아두는 게 킬리언을 돕는 일일 것이다.
‘내 개인적인 목적 때문이기도 하지만.’
혼란스러운 그때가 글레이튼의 팔찌를 얻어내기 가장 좋을 때이기도 했으니까.
“사형수 추첨이 끝나면, 너희는 출행증을 통해 얌전히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 거다.”
“이틀 남았네.”
“드디어 풋내기들 재워주던 숙소도 영업 마감이군.”
후련함이 감도는 미소와 함께 킬리언은 입을 크게 벌리고 오아쿰을 졸졸졸, 자기 입안으로 따라 넣었다.
* * *
이틀 뒤.
흑색탑의 주민들이 시간에 맞춰 원형경기장으로 모여들었다.
사형수 추첨에 임하는 주민들의 태도는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자기 자신이 뽑히는 확률도 엄연히 존재하건만, 주민들은 그런 현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다만,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한 손엔 칼과 도끼 같은 무기를 들고 있는 상태였다.
만약 자기 옆 사람이 사형수로 뽑힌다면, 참수대장 킬리언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몸소 칼을 휘두르려는 것이다.
“이번엔 지상의 바퀴벌레들 중에서 뽑히려나.”
“벌써 몇 주째 여기서만 뽑혔잖아.”
주민들은 한가롭게 떠들었다.
이들에게 흑색구역의 지상은 바퀴벌레들이 하루하루 인생을 비벼대는 쓰레기통이나 마찬가지. 백색도시의 일반 시민들이 흑색구역을 경멸하듯, 흑색탑 안으로 들어온 이들도 흑색구역을 멸시했다.
주민들의 불만처럼, 최근에는 지하탑에서만 사형수가 나왔다. 그것이 암레트의 정치적인 결정인 줄 모르는 주민들은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받아들였다.
“뭐, 별수 있냐. 다 운인데.”
“내가 뽑히면 나는 도망가지 않을 거다. 네가 내 목을 쳐도 좋고.”
“큭큭, 거 새끼, 허풍은.”
“그런데… 요릭 님과 참수대장이 안 보이네?”
요릭과 킬리언이 특별관람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에 한마디씩 했지만, 다들 그러려니 했다. 흑색구역의 지배자들의 신상은 그들로선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영역.
다만 오늘은 주민들의 눈길을 뺏는 새로운 사실이 있었다.
“오늘은 프킨 부대장님하고… 저 옆에 서 있는 둘은 누구지? 보여?”
“아! 저 둘! 며칠 전에 들어온 그 두 명이잖아. 참수대장이 시종으로 데려갔다는.”
“특별관람석에 앉아 있다니… 부럽네.”
특별관람석에 들어가 있는 건 루빈과 쿠제였다.
사실, 아무리 킬리언이 뽑은 시종이라 해도 이건 특별한 경우였다. 이제껏 시종들은 특별관람석 바로 옆에 머물러야 했으니까.
하지만 며칠 전의 난투를 떠올려 보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프킨을 빨리 제압하고, 킬리언을 돕는다.’
루빈은 프킨을 주시했다.
프킨은 자리를 비운 요릭과 킬리언을 대신하여 관람석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법사의 표정엔 희열이 서려 있었다. 지배자의 자리로 올라서 보는 짧은 희열이.
루빈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그 왼팔에 채워져 있는 글레이튼의 팔찌로 향할 때.
둥. 둥. 둥. 둥.
모든 주민들의 귓가에 공기가 진동하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흑색구역의 경계를 넘는 순간부터 문신의 형태로 새겨지는 주민번호.
그 주민번호의 문신에는 고차원의 표식 마법이 내장되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사형수 추첨이 있을 때마다 표식 마법이 발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표식 마법에 따라 지상에 있는 사람이건, 지하에 있는 사람이건 흑색구역의 범죄자들은 모두 똑같은 울림을 들어야 했다.
둥. 둥. 둥.
아마 지금쯤 지상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을 터.
푸줏간의 사장이든, 세공사든, 그리고 술집 앞을 지키는 팔 하나 없는 문지기든 마찬가지다. 누구나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속죄의 눈. 혹은 불행의 눈.
하지만 지하의 흑색탑에는 그런 눈발조차 흩날리지 않았다. 그저 주민들 귓속으로 퍼져 나가는 울림이 점점 그 간격을 좁히고 있을 뿐이다.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바로 그때였다.
프킨이 고개를 돌려 루빈을 바라봤다.
“어이, 너. 내 옆으로 와라.”
손을 까닥거리며 루빈을 불렀다. 루빈은 굴종하는 태도로 그 옆으로 다가갔다.
“사형수가 뽑히면, 머리 위로 붉은색 빛이 떠오를 거다.”
차근히 설명해 주는 것처럼 말했다.
이건 루빈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폭죽을 점화하는 듯한 그런 불빛이 머리 위에 떠다니게 된다. 그게 바로 사형수의 표식이었다.
이 표식을 없애는 방법은, 죽은 채로든 산 채로든 흑색구역을 넘어가는 것밖에 없었다.
건물에 들어간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불빛은 건물 위로 떠올라 그 위치를 알려줄 테니까. 흑색구역 안에 머무는 한, 사형수가 들키지 않고 살아남을 확률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킬리언은 없지.’
루빈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아마 추첨이 이뤄지면, 요릭의 저택 위에 붉은 불빛이 떠오를 거라고.
프킨은 이미 사형수가 누가 될지 알고 있다. 그러니 붉은 불빛이 요릭의 저택 위로 떠오르면, 곧바로 여기를 뜰 것이다.
‘그때, 뒤쫓아가 팔찌를 얻어내면 된다.’
루빈은 다시 한번 핏빛서리에 손을 갖다 댔다.
“자, 준비해라.”
프킨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왼팔을 들어 루빈 머리에 손을 얹었다.
둥둥둥둥둥둥… 쿵!
원형경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귓가에, 그리고 특별관람석에 들어와 있는 루빈과 쿠제의 귓가에 동일한 소리가 들렸다.
일정한 높낮이로 울리던 소리가 마침표를 찍듯이 커다랗게 증폭했다.
드디어 사형수가 결정됐다는 뜻이었다.
* * *
“…….”
킬리언은 시계를 바라봤다. 12시 45분. 아직 사형수가 뽑히기까지는 15분이 남았다.
이때부턴 추첨을 알리는 소리가 귓속으로 울린다. 둥… 둥… 둥… 아직까지는 울림의 간격이 넓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짧아진다.
킬리언은 탁자 맞은편에 앉은 요릭을 바라보았다.
“너, 점점 젊어지네.”
“클클클, 암레트한테서 슬쩍한 게 가짜가 아니라는 뜻이지.”
“불사와 불로의 상태라… 부럽군.”
요릭이 기벤라트의 눈물을 섭취한 지 4년째였다. 그사이 요릭은 10년은 젊어진 것 같았다. 육체는 절정으로 향하는 중이고, 그에 따라 그의 흑마법도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지금 요릭의 경지는 6성. 대륙을 통틀어도 6성까지 올라온 네크로맨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늙지 않는 몸을 지닌 요릭이라면, 그 너머도 가능했다. 초인의 영역이라는 7성조차도.
‘10년 뒤에는… 흑색구역뿐만 아니라, 백색도시 전체를 집어삼킬 수도 있겠군.’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오늘 요릭은 킬리언의 손에 죽게 될 테니까.
“그래서, 하려던 말이 뭐냐? 킬리언.”
요릭은 느긋한 표정이다. 킬리언이 사형수 추첨을 앞두고 나타났음에도,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킬리언 입장에선 오히려 그 점이 이상했다.
“나 때문에 사형수 추첨에 빠지게 됐는데, 괜찮냐, 너?”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라며?”
“그래, 중요한 건 틀림없지.”
“어차피 너나 나나 매번 참석할 필요는 없지.”
“이상하군. 그래도 내가 붙잡으면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는데. 너는 사형수 추첨을 재밌어했잖아. 그만한 연극도 없다면서.”
“큭큭, 그건 그렇긴 하지. 사형수 하나 뽑혔을 뿐인데 애새끼들이 발광하는 걸 보는 맛이 있지. 하지만 상관없다. 네가 해주겠다는 그 이야기가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또…….”
킬리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뭔가가 이상했다. 이렇게 순순히 따를 놈이 아닌데.
주변을 살폈다. 요릭의 지하실. 네크로맨서의 실험실이기도 한 이곳엔 괴상하고 불쾌한 죽음괴수들로 즐비했다.
본 오우거와 본 트롤이 쿵쿵, 커다란 발소리를 내면서 킬리언의 눈앞을 지나간다.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박쥐는 피가 말라 있는 채로 킬리언만을 노려보고 있다.
죽음괴수들 사이에 묵묵히 서 있는 데스나이트도 있었다. 요릭이 ‘핼킨’이라 이름 붙인 부대장. 무덤 속에서 찾아낸 고대의 기사라 했지.
“그리고 또?”
킬리언이 물었다. 그러자 요릭이 거슬리는 미소를 지었다.
“마침 나도 너를 붙잡고 할 이야기가 있었거든.”
“붙잡고 할 이야기?”
“되도록이면 네가 원형경기장에 못 가도록 말이야.”
“그래?”
킬리언은 오아쿰을 들이켰다. 이건 또 무슨 이야기지? 요릭도 자신을 붙잡아 두려 했다고?
심상찮은 흐름에 킬리언의 손이 자연스럽게 검 위로 내려왔다. 핼킨의 영혼 없는 눈동자가 자신의 손을 주시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때.
점점 간격을 좁혀가던 귓속의 울림이 마침내 끝에 다다랐다. 둥둥둥둥둥둥… 쾅! 사형수가 뽑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 둔중한 울림에 킬리언은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사형수가 뽑힌 건가?”
“그래. 방금 뽑혔군.”
갑자기 요릭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뭐냐, 그 재수 없는 눈빛은. 내 머리 위에 표식이라도 떴나 보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하지만 여전히 웃고 있다. 찝찝한 마음에 킬리언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머리 위쪽을 바라봤다. 당연하게도 사형수를 표시하는 붉은빛은 없다.
“이번엔 누구냐? 누구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넌 알고 있잖아.”
“궁금한가 본데? 안달이 난 걸 보니까.”
요릭이 킬킬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원형경기장 쪽이었다. 벽에 가로막혔지만 그쪽 방향으로 붉은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이번 사형수도 흑색탑에서 뽑힌 거냐?”
“보다시피.”
“대체 누구야?”
“사실 그것 때문에 널 여기 붙잡고 있었던 거다, 킬리언.”
누런 이를 드러내며 요릭이 씩 웃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기다랗게 뻗은 손톱으로 탁자 위를 끼리리릭 그어대면서.
“네가 그 꼬맹이를 많이 아끼는 것 같더라고.”
“꼬맹이? 아껴? 지금 무슨 소리냐?”
“그 애새끼가 암레트한테 어쩌다 밉보인 건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이번 사형수는 그 꼬마 놈이다.”
킬리언은 그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꼬마라니? 하지만 그의 감각은 정확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왠지 모를 불길함이 느껴졌다.
그 순간, 킬리언은 검 위에 내려놓았던 손을 움직였다. 검 손잡이를 움켜쥐고 곧바로 의자를 밀쳐내며 일어났다.
그런 그에게 요릭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루든이라 했지? 그 꼬마애 이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