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88)
암살검가 로이넨-88화(88/258)
제88화. 붉은색으로 물드는 백색탑 (4)
“티나, 블루캣호가 정박해 있는 나루 근처로 가자.”
“오랜만에 만나서 인사도 안 하냐?”
“인사…? 하지 않았나?”
“안 했어, 인마!”
티나는 여유로운 날갯짓과 함께 배가 정박해 있는 나루로 향했다. 구름 아래로 하강하자, 혼란에 빠진 백색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추락한 그랑버드와 전멸한 정예병들. 그리고 백색탑 주위로 모여 있는 수많은 시민들과 그들을 통제하는 일반 병사들.
“아까 너 데리러 갈 때,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잖아. 너, 이 자식. 알고 있었지?”
세이렌의 등장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머니를 만나게 될 거라곤, 나도 예상 못 했어. 그리고 황제가 필리몬드에 계엄령을 내릴 거라는 사실도.”
“이제 이 지긋지긋한 백색도시에서 벗어나나 했더니, 또 며칠을 죽쳐야겠네.”
“그래도 이전처럼 급박하지는 않을 거야. 위험한 일도 없을 거고. 이참에 조용히 축제만 즐기면 돼.”
“축제?”
“계엄이 풀리면, 도시의 축제가 시작된다고 했거든.”
그 말에 티나가 한결 부담을 덜었는지 가볍게 콧노래를 불렀다.
반면 루빈은 달랐다. 좀처럼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로이넨 저택을 떠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재회한 어머니, 단지 세이렌과 재회했다는 사실만이 놀라운 게 아니었다.
어긋나는 시간의 궤적.
루빈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일들이 펼쳐지는 것.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루빈의 선택이 과거와 달라질수록 그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루빈을 죽이려 했던 암레트과 황제의 진압군은 경우가 달랐다. 시간의 어긋남이 지나치게 컸고, 그 규모도 막대했다.
회귀 전 암레트의 사인은 자연사였다. 킬리언의 암살을, 노화에 따른 자연사라고 거짓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 암레트는 반역자로 몰려 죽었다. 거기에 황제는 하르뎀가의 가주라는 새로운 영웅을 연출하기까지 했다.
‘내가 만든 크고 작은 변화가 결국 큰 차이를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
앞으로는 루빈이 알고 있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미래가 더 많이 펼쳐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회귀 전 세이렌은 루빈 나이 스무 살이 넘어서야 8성에 올라섰으나, 지금은 이미 8성에 도달한 상태. 10년 가까이 앞당겼다.
지금 루빈이 올라타고 있는 티나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이미 2년 전에 죽었을 환혈족이지만, 지금은 이렇게 로이네크로우로서 루빈을 도와주고 있었다.
‘강해지면 돼. 그게 새롭게 펼쳐지는 미래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야.’
미래를 무조건 짜 맞출 수는 없는 법이다. 이전의 루빈과 지금의 루빈은 이제 좁혀질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기벤라트의 눈물.’
루빈은 들고 있는 요릭의 두개골을 쳐다봤다. 은은한 노란빛이 품어져 나와 언뜻 보기에는 장식품 같다. 티나의 관심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근데, 루빈. 네가 들고 있는 그거… 혹시 나 주려는 거냐?”
“미안하지만 이건 내 거야.”
“슬쩍만 봐도 홀려버릴 것 같단 말야…. 이 선량하고 자애롭고 아름다운 환혈족한테 주지 않을래?”
티나는 정말 진지하게 이걸 노리는 것 같았다. 혹여 욕심 때문에라도 고룡의 눈물을 집어먹어서는 안 되었기에, 루빈은 단단히 일렀다.
“네크로맨서의 두개골이거든, 너한테는 별로일걸?”
“뭐, 네크로맨서! 그 더러운 놈들? 당장 갖다 버려!”
흑마법사가 아닌 이상, 대부분 사람들이 흑마법을 경멸했지만 환혈족은 그 정도가 유독 심했다.
네크로맨서의 중요 가치는 생명 경시를 너머 생명 모독에 가까웠으니. 티나 녀석이 요릭을 보지 못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티나, 쿠제는 만났어? 지금 어디에 있지?”
“네가 말한 대로, 그 꼬마애를 집에 무사히 데려다주고 블루캣호에서 대기하고 있을걸.”
“흠, 그러면 쿠제가 가져온 네 선물도 봤겠네?”
“뭐? 선물이 있다고? 설마……!”
“그래. 영롱한 빛을 내는…….”
루빈의 다음 말은 바람 소리에 묻혀 버렸다. 티나가 전력으로 속도를 냈기 때문이다. 환혈 특성 ‘속력’을 지닌 녀석답게, 굉장히 빠른 속도로 비행하는 티나였다.
* * *
“자, 이거.”
테이블 위에 두 개의 큼직한 짐 꾸러미를 올려놓는 세이렌.
킬리언의 눈이 반짝였다. 꾸러미 안에 뭐가 들어 있을지는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다. 파출리와 블루베리다.
다만 일반적인 파출리와 블루베리가 아니었다. 이건 로이넨 저택에서 가신들이 직접 길러낸 것들이었다.
로이넨의 가문주(酒) 오아쿰은 파출리와 블루베리만 있으면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술.
하지만 주조에 쓰이는 재료가 로이넨 저택 인근의 토양에서 자랐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역시! 내가 가주 하나 잘 키워냈다니까. 옛 로이넨서를 향한 마땅한 복지로군.”
“…….”
세이렌은 잠시 주변을 살펴봤다.
황제의 진압군이 나타나기까지 네 시간 정도 남은 때였다.
그랑버드 추락이라는 난데없는 사고로 어수선하긴 했지만, 그건 앞으로 펼쳐질 일대 사건에 비하면 사소한 사고일 뿐.
그래서 그런지 사고 현장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시민들이 평상시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호로록, 호로록.
세이렌과 킬리언도 카페의 외부 테이블에 앉아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를 모두 마시고 나면, 임무를 마친 세이렌은 로이넨 저택으로 돌아갈 것이고, 킬리언은 킬리언대로 새로운 길을 떠날 것이다. 그러기에 앞서 간단히 회포나 나누는 것이었다.
“퓌레가 직접 길러낸 거야.”
“오, 그래? 기특하군. 그 애는 잘 있나?”
“가끔 자기를 고아 신세에서 벗어나게 해준 주정뱅이 아비를 그리워하지.”
퓌레는 임무 수행 중이던 킬리언을 만나게 된 다섯 살 때까지 거리의 부랑아였다. 부모도 없이 죽을 처지였던 퓌레를 암살검가로 데려온 게 킬리언이었다.
그리워한다는 말이 흡족한지, 킬리언이 카페에서 내온 차를 홀짝홀짝 마시며 미소 지었다. 버릇처럼 ‘크하’라는 감탄사를 날리기는 했지만.
“오호, 아비를 그리워해?”
“루빈을 더 그리워하는 것 같긴 하지만.”
“뭐라고! 루빈을 왜!”
“아, 퓌레가 루빈의 유모인 거 몰랐나?”
킬리언의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처음 알았다. 누가 그렇게 막무가내 꼬마 놈을 길러냈나 했더니, 내 딸이었다니.”
“내가 루빈을 만나게 된다는 걸 알았으면 전해주라며 편지라도 내놨을걸.”
“퓌레는 그러고도 남을 애지. 로이넨가에서 가주한테 심부름시킬 수 있는 하녀는 그 애밖에 없을 거야.”
“누구 딸인데.”
킬리언과 세이렌은 서로 가볍게 웃었다. 근처에는 세이렌의 놀라운 미모에 기웃거리는 필리몬드 남자들이 있었고, 그 사실을 알아차린 킬리언은 세이렌을 놀리며 또 키득거렸다.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 홀짝이는 세이렌의 머릿속에선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중이었다.
죽어가던 암레트는 세이렌에게 황궁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려 했지만, 그딴 기억 중에 좋은 건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이따금 기분 좋게 하는 추억이란 다른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로이넨서 킬리언과 위장별채에서 생활했을 때.
가짜 역할 수업을 위해 광장에 나와 별 이상한 신분들을 즉흥적으로 지어냈었다. 또, 그 시절 킬리언은 돌아다니는 제국군 병사의 투구를 도둑질시키기도 했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킬리언은 정통에서 벗어난 로이넨서였다.
“어쩌다 보니 이번에 네 막내아들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군. 재밌었어. 여러모로 널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어.”
“칭찬인가?”
그 물음에 킬리언은 장난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사뭇 진지해진 투로 나직하게 말했다.
“어쩌면 널 뛰어넘는 로이넨 혈통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혹시 모르지. 너의 다섯 번째 아이가 릴리크 황실과의 질기고 역겨운 끈을 끊어줄지도.”
순간적으로 세이렌의 눈빛에 노기가 드러났다.
황실을 모욕하는 언사 때문이 아니다. ‘다섯 번째 아이’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다섯 번째 아이라니. 조심성없는 말버릇은 여전하네.”
“잊으면 안 돼, 세이렌. 잊어서는 안 돼.”
그 순간, 킬리언은 세이렌이 방출하는 암연을 느꼈다. 세이렌이 오랫동안 억눌러 오던 기억에 손을 댄 일이, 그녀를 무절제한 상태로 만든 것이다.
‘8성에 이르렀다는 건 알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살면서 이토록 광막하고 견고한 암연을 처음 느낀 킬리언은 세이렌을 경외하는 한편, 이러한 분노 또한 암살검가에 필요한 감정이라는 걸 잘 알았다.
“…….”
세이렌은 무정한 눈빛으로 킬리언을 바라봤다. 이제 그 이야기는 이쯤에서 멈추어야 한다고 경고를 담아서. 킬리언도 결국 그 뜻에 따랐다.
그때, 적발의 미녀에게 접근하려던 필리몬드 남성 중 하나가 그녀가 뿜어내는 암연에 허우적댔다.
그렇게 자신이 왜 공포와 불안을 느끼는지 영문도 모른 채,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돌아간 직후.
세이렌은 하늘의 저편을 바라봤다. 그러곤 이렇게 말했다.
“표백(漂白)의 아침.”
“무슨 말이지?”
“오늘 저녁부터 시작되는 진압 작전. 훗날 역사서에 기록될 이름이야.”
황궁에서는 이미 반란 세력을 소탕한 기념일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오염을 씻어내겠다는 의미가 담긴 표백. 매년 이 기념일을 기억하는 축제가 열릴 것이다.
“킬리언, 너 아직 은퇴 못 하는 거 알지?”
“빌어먹을. 잘 알고말고.”
은퇴 조건이었던 암레트 제거를 달성하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킬리언은 새로운 은퇴 조건이 생기기 전까지 암살자의 삶을 이어나가야 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경력과 경지의 암살자라면 굳이 위장별채를 마련해 둘 필요는 없을 터.
그래서 킬리언은 한동안 대륙을 유랑할 작정이었다.
“흠, 그렇다면 이번엔 어디를 떠돌아다녀 볼까나.”
“오아쿰 적당히 마시면서 대기하고 있어. 너만 할 수 있는 임무가 생기면, 그때 다시 부를 테니까.”
“이제 떠나려는 거냐?”
세이렌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킬리언도 흐뭇한 표정으로 오아쿰 재료가 담긴 두 꾸러미를 들고 일어났다.
이제는 또 흩어질 시간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차를 한 잔씩 마신 두 부녀가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보일 터.
그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 * *
“…….”
강의 수면 위로 부는 바람에 배가 부드럽게 출렁인다. 갑판 위로 올라가면 촘촘하게 빛나는 별빛들이 훤히 보일 만한 날씨.
그러나 흔들리는 블루캣호 안에 있는 일행들은 모두 지하칸에 내려와 있었다. 모두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거리에는 둔탁한 발소리들이 일사불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만약 지금 바깥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본다면, 거기에는 10여 기의 그랑버드가 밤하늘을 메우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될 터.
날이 저물자마자 시작된 ‘표백의 아침’ 작전.
도시에는 기습적인 계엄령이 선포됐고, 모든 시민들은 자신의 집에 틀어박혀서 밤을 보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사이, 일사불란하게 도시를 헤집는 제국군은 암레트와 함께 희생양이 될 귀족들을 잡아들였다.
몇몇 귀족 가문에서는 각자의 무장세력을 가동했지만, 사태를 돌이키기에는 황제가 파견한 병력이 너무나도 강했다.
6성 오러를 뿜어내는 하르뎀 가주와 특별 여단들의 활약에, 상황은 자정이 되기도 전에 정리가 됐다.
“고요해졌군. 하지만 날이 밝고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는 이대로 있어야 할 거야.”
와락, 아늑, 쿠제. 모두가 긴장된 표정인 데다 티나마저 고양이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잔뜩 움츠러든 상태.
하지만 루빈만은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다.
진압군이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만이 유일하게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 적 있었기 때문이다.
고요한 거리 위에 흩뿌려져 있는 몇 방울의 피. 공포를 조장하고, 위선을 다스리는 황제.
다시금 분노가 일었다.
‘언제나 같은 식이지, 텔마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