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90)
암살검가 로이넨-90화(90/258)
제90화. 축제 나들이 (2)
“우와…….”
“야, 너 입 좀 다물라니까. 침 좀 흘리지 말고! 진짜 쪽팔린다, 쪽팔려!”
와락과 아늑은 등불로 수놓은 골목을 걸어가며 티격태격했다. 하지만 그들을 신경 쓰는 시민은 없었다. 거혈족의 우렁찬 목소리조차 간단히 묻힐 정도로 거리는 떠들썩했다.
휘리리리릭, 팡!
휘리리리릭, 팡! 팡!
하늘에서 터지는 폭죽들. 밤하늘에 생겨난 화려한 그림들을 보며 시민들이 노래를 불러댔다.
시민 모두들 백색 로브를 벗어던진 상태였다. 집에 고이 놓아두었던 다채로운 색깔의 옷을 꺼내 들고 해방된 것처럼 거리를 뛰어다녔다.
“여기가 메이슨의 집인 것 같군요.”
약도를 들여다보며 앞서 걷던 쿠제가 멈추었다. 메이슨, 그게 아이의 이름이었다.
아이의 집이 있는 곳은 평범한 시민들이 모여 사는 구역. 이곳엔 부자도, 귀족도 없었다. 활짝 열린 대문으로 메이슨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문은 다른 세입자들과 같이 쓰는 복도로 이어져 있었고, 복도 끝에는 널찍한 뒤란이 자리했다. 다른 건물 사람들과 함께 쓰는 공용 공간이다.
루빈 일행은 공용 공간 쪽으로 걸어갔다.
“어서 오세요!”
“얼른 와요, 지금 막 음식이 나왔습니다.”
인근 이웃들이 모두 모여 루빈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웃들은 루빈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메이슨이 흑색탑에서 보고 들은 걸 철저히 비밀로 지켰기 때문에, 그냥 여행자들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어이, 지각생들! 여하튼 반가워요. 자, 다들 뭐 해요? 빨리 술잔을 들고 건배합시다. 왜 이렇게 꾸물거리는 겁니까! 인생은 그저 즐기기만 해도 모자란다고요!”
분위기를 휘어잡는 중년의 여자. 그녀가 갑자기 술잔을 들고 건배를 제안했다. 괄괄하기 그지없다.
메이슨의 부모도, 이웃도 그녀를 모르는 것 같았지만, 모두들 그러려니 했다.
지금 필리몬드 곳곳에서는 서로 안면도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웃고 떠드는 중이었으니까.
“티나 님이 정말로 먼저 와 계셨네요.”
쿠제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괄괄한 여자는 티나였다. 민트색 눈동자를 부릅뜨며 아직도 건배를 제창하는 중이다.
“짠! 짠! 짠! 마셔요, 어이, 거기! 마시라니까?”
“킬리언 할아버지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어른들이 술잔을 나누는 사이, 메이슨이 루빈 곁으로 다가와 아쉬워하며 말했다.
아마 메이슨이 가장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킬리언이겠지. 하지만 그는 이미 필리몬드를 떠난 지 오래다.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티나와 괜찮은 호흡을 보여주긴 했을 거 같다.
“도련님, 킬리언 할아버지한테 편지를 쓰면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언제 만날지는 장담 못 해.”
“그래도 가지고 계시다가, 만나면 전해주세요!”
루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메이슨이 자신의 집으로 서둘러 올라갔다. 지금의 메이슨은 흑색구역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이후, 축제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뒤란에 모인 사람들은 마구 떠들긴 했지만 정치 이야기만은 삼갔다. 암레트라느니, 황제라느니 그런 이야기는 단 한 사람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만취한 사람조차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 또 졌네! 또 졌어!”
“아이고, 얼마나 형편없는 실력이었는지 잠들 뻔했다네.”
“놀리지 마세요!”
사람들은 즐기고 또 즐겼다. 루빈은 한쪽에서 테이블을 펼쳐두고 보드게임을 즐기는 노인 쪽으로 다가갔다.
보드게임 ‘필리몽’.
필리몬드에서 시작되어 대륙에 널리 퍼진 전술 보드게임이었다. 각각 검은 말과 흰 말을 열세 개씩 움직이며 상대방을 이기는 게임. 내가 움직일 말을 상대방이 정해준다는 특이한 방식이 있었다.
“꼬마야, 이거 할 줄 아느냐?”
“음, 조금요.”
“해볼 테냐? 마침 적수가 없던 차인데.”
루빈은 노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거만함이 가득한 노인이었다. 그때, 메이슨이 다가와 루빈의 귀에 속삭였다.
“저 할아버지 엄청 고수예요. 이 동네에서는 상대가 없고, 필리몬드 안에서도 3위의 실력자예요.”
“그래?”
“그리고 엄청 짠돌이예요!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에요.”
“얘야, 할 거냐, 말 거냐? 나는 꼬마애라도 내기를 해야 한단다.”
노인이 거들먹거렸다. 메이슨의 말처럼, 이제껏 노인이 필리몽으로 패배한 적은 열 번도 안 됐다. 그것도 필리몽 챔피언들과 겨뤘을 때뿐.
시중에 나와 있는 필리몽 기보집에도 통달했던 터라, 자신이 새로운 전략서를 낼까 고민할 정도였다.
“이게, 전술 연구 삼아 제국군에서도 해본다는 그 보드게임이라네요?”
“허허, 잘 알고 있구나. 말놀이 같지만 사실 여기 안에는 실제 전쟁에서 쓸 수 있는 전술이 녹아들어 있지. 그래서, 할 테냐?”
“하죠.”
“다시 말하지만 승부의 세계에서는 애라고 봐주는 거 없단다.”
루빈은 턱을 긁적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메이슨 가족의 집주인이라던데, 내기는… 이번 달 집세를 걸어요.”
“허허허허.”
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웃었다. 그때, 쿠제가 다가와 수중에 들고 있는 금화를 보여주었다. 메이슨 가족의 집세로는 충분한 돈이었다.
돈을 확인한 노인의 눈에 빛이 났다. 부잣집 도련님이 이렇게 나온다면, 인생을 제대로 가르쳐 줘야지.
노인이 몸을 테이블 쪽으로 기울였다. 그 동작을 기점으로 필리몽 내기가 바로 시작됐다.
그리고 15분 후.
“이럴 수가.”
“제가 이겼네요?”
“말도 안 돼.”
노인이 눈을 끔뻑였다. 15분간 스물세 수를 두었고 결과는 완벽한 패배.
“너, 정체가 뭐냐?”
믿을 수 없었다. 말을 하나하나 놓는 것에 따라 기풍이 흐르는 법이다. 그런데 어찌 이 핏덩이 같은 아이한테서 노장의 기풍이 느껴지는가.
“너는 천재야, 아니… 필리몽의 신이 될 아이야!”
노인이 호들갑을 떨었다. 필리몽 전략서의 고전 중 하나로 자리 잡은 ‘하네케 편’. 그게 눈앞에서 그대로 펼쳐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럼, 이번 달 집세는 안 받으시면 되겠네요.”
그쯤에서 루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부에서는 아쉬워하는 하네케의 목소리가 울렸지만. 그렇다고 축제 내내 필리몽만 겨루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는 노인을 놔두고, 루빈은 이번엔 팔씨름 내기가 벌어지는 곳으로 갔다.
“크하하하! 난 아직 힘이 넘치는데, 또 덤빌 사람 없나?”
우람한 체구의 사내가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그자가 이제는 슬슬 지쳤을 줄 알고 도전자 쪽에 돈을 걸었던 사람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였다.
“어이, 이봐. 당신이 그렇게 팔씨름을 잘해? 내가 선수 하나 내보낼 테니까 겨뤄보자고!”
“환영입죠, 귀부인. 다 데려와 보십쇼.”
“자, 다들 돈 걸어보세요! 제가 데려온 선수는 이 친구입니다.”
분위기를 휘어잡으며 나타난 건 괄괄한 중년 여자, 즉 티나였다. 그녀는 음흉한 웃음을 애써 참는 중이다. 왜냐하면, 데려온 도전자가 바로 아늑이었으니까.
“여자라고 무시하나요? 이래 보여도 아주 훌륭한 싸움꾼이랍니다.”
티나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말했지만, 아무도 아늑한테 돈을 걸지 않았다.
다들 우람한 사내에게 돈을 걸었다. 하지만 그게 티나가 원하던 바였다. 티나가 돈을 많이 따려면 상대편이 이길 확률이 높아야 하니까.
“정말 다들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빨리 시작하기나 해요. 그쪽엔 아무도 돈을 안 걸으니까.”
“그럼 제가 직접 걸죠, 호호. 저는 이 친구를 믿으니까요!”
티나가 아늑을 팔씨름용 탁자 맞은편에 앉혔다. 그런 다음, 아늑의 곱슬머리를 장난스럽게 만지고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곱슬머리 선수!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우리 돈 좀 쓸어봅시다.”
“저, 아주머니, 근데 지금 제가…….”
“어헛! 나는 다 알아요. 아가씨가 힘쓰면 이 탁자가 아작 난다는 거. 그니까 적. 당. 히. 이길 정도로만 힘내요. 알았죠?”
“아니, 그게, 지금…….”
“어머, 지금 그 눈빛! 너어어무 마음에 들어. 게슴츠레해 가지고, 호호호. 엄청 강해 보이잖아? 내가 모은 돈의 절반을 밀어 넣었다는 것만 잊지 말고요, 호호.”
그렇게 시작된 팔씨름. 티나의 표정은 밝았다.
거혈인은 거대화 상태가 아니어도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낼 수 있다. 아늑이 거혈인이라는 정보만 있었다면 누구나 티나의 선택을 따랐을 터.
그러나 티나에게는 아늑에 대한 치명적인 정보 누락이 있었다.
“누나, 뭐 해? 아, 팔씨름… 어라. 누나, 술 마셨어?”
아늑을 찾아 돌아다니던 와락이었다.
그때, 아늑의 팔은 바깥쪽으로 한참 기울어진 상태. 티나의 얼굴이 점점 더 파랗게 질려가는 중이었다.
쿵.
결국 티나의 눈앞에서 아늑의 손등이 탁자에 닿았다.
“말도 안 돼! 왜 힘을 안 내는 거야! 너 저 덩치 아저씨한테 뒷돈 받았지!”
“제가 술을 마시면 힘을 못 내는 타입이라…….”
“뭐! 거혈인들은 다 그래?”
“아뇨, 저만…….”
티나가 강해 보인다고 흡족해하던 게슴츠레한 눈. 그건 아늑이 술에 취해간다는 뜻이었을 뿐.
“내 돈! 내 돈!”
절망에 빠진 티나가 눈물을 참으며 무리를 빠져나왔다. 루빈과 쿠제가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침울해하던 티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쿠제 손에 놓인 무언가가 그녀를 사로잡을 만큼 반짝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제, 그건 뭐야?”
“흑색구역에서 챙겨온 티나 님 선물입니다.”
“오오, 루빈이 말했던 그 선물이구나! 왜 이제야 보여주는 거야!”
적광석 재질의 쿠나이 한 자루와, 보석이 세공되어 있는 카람빗 한 자루. 티나는 두 자루의 단검을 손에 들더니 심각한 얼굴로 고민을 이어나갔다.
“나는 이거!”
“하나를 고르라는 뜻이 아니라, 둘 다 쓰시라는 거였습니다.”
“내가 너희처럼 무기 갖고 싶어서 환장한 줄 아니?”
무기로서의 가치로만 보면 적광석 재질의 쿠나이가 훨씬 높았지만, 티나가 선택한 건 역시나 보석이 세공된 카람빗.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정말 하나로 괜찮으시겠어요?”
“괜찮다니까!”
“흠.”
그때, 쿠제한테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남은 단검을 자기가 알아서 처리해도 되겠느냐는 허락을 받아낸 다음, 그걸 들고 메이슨을 찾았다.
“이제 가시려고요?”
메이슨이 아쉬워하며 물었다. 루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오늘은 여기까지 놀려고. 근데 쿠제가 너한테 뭘 주려나 봐.”
“네?”
“자, 이거.”
메이슨은 쿠제가 건넨 묵직한 단검을 두 손으로 받았다. 단검을 보자, 자연스럽게 메이슨의 머릿속에는 흑색구역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표정에는 긴장감이 서렸다.
“넌 흑색구역에서 살아서 나온 사람이잖아. 아마 살아서 나온 사람은 이제까지 열 명도 안 될걸?”
“그럼 이거… 기념품인가요?”
“기념품이라. 뭐, 그런 셈이지.”
물론 기념품으로만 남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또다시 위기가 닥치고, 가족이 위험에 처한다면 메이슨이 직접 이 단검을 들고 맞서야 할 테니까.
“그리고 너, 대장장이가 꿈이라며? 이래 봬도 이거, 잘 만들어진 무기니까, 자주 들여다보면서 연구해 봐도 좋을 거야.”
사실이었다. 적광석 재질 자체가 드문 데다 저토록 교묘하게 제련된 쿠나이 역시 흔치 않았다. 메이슨은 활짝 웃으며 쿠제한테 잠시 안겼다.
그렇게 작별인사를 나누고, 루빈 일행은 메이슨의 집에서 나왔다.
술에 취한 아늑. 그런 누나를 부축하는 와락. 아늑 옆에서 구시렁대는 중년 여자. 그저 흐뭇한 쿠제. 그리고 묵묵한 루빈.
모두 블루캣호로 돌아왔다.
잔잔한 물결 위에서 블루캣호는 기분 좋게 흔들리고 있었다. 불야성을 이룬 도시를 바라보던 루빈은 하늘에 터지는 폭죽으로 눈길을 돌렸다.
휘리리릭, 펑!
휘리리릭, 펑! 펑!
내일도 축제는 이어질 터. 하지만 루빈은 오늘의 휴식이 유독 선명한 기억으로 남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최종 목적지는 카포티니.’
루빈은 이미 축제가 끝난 일주일 이후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일주일 뒤에 배를 출발시키면, 쾌속선 블루캣호로 닷새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마법사들의 도시.
위장별채에서의 새로운 삶.
마법학교에 있는 암살 표적.
루빈의 표정에 자연스럽게 결의가 서렸다. 어쩌면 루빈의 축제는 이미 끝났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