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95)
암살검가 로이넨-95화(95/258)
제95화. 입학 준비물 (3)
완벽하게 몸을 숨긴 루빈은 클로이와 베니테즈의 대화를 엿들으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클로이다! 위더스푼 그 애라고!
‘나도 알아.’
티나의 전음이 요란했지만, 루빈은 침착했다.
클로이의 등장. 바라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위장 신분에도 빈틈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교수님! 학교에서 뵐게요. 지금쯤 제 시녀가 저를 열심히 찾고 있을 것 같거든요.”
클로이가 공원을 떠나고, 베니테즈는 다른 학생들이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자리를 지켰다.
-클로이를 다시 만난 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야. 저 아이를 통하면 칙명부가 원하는 정보들을 쉽게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래? 그럼 오히려 행운인 건가?
물론 행운도 아니지.
클로이는 예상하기 쉬운 사람이지만, 위더스푼이라는 제국귀족 가문은 그렇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순간, 그러니까 루빈이 페르를 제거하려 할 때에 위더스푼과 어떻게 엮이게 될지. 그건 모르는 일이었다.
‘회귀 전에도 페르랑 위더스푼가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자칫 위더스푼과 험악한 사태라도 벌어진다면, 그건 로이넨가의 혈통이라도 감당하기 힘든 파국이 될 것이다.
어쩌면 필리몬드를 휩쓴 반란 모의 사태보다 더 큰 파란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지금은 저 교수가 문제인데.’
이제 루빈의 관심은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운신마법학 교수에게 가 있었다.
선을 넘어 기꺼이 찾으라는 메시지.
루빈이었어도 클로이와 같은 방식으로 수수께끼를 풀어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평민 출신들 중에서 이미 숨은 상인이 이쪽 공원에 있을 거라고 예상한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정작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 해석을 할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닌, 기어이 선을 넘을 수 있느냐의 문제니까.
여기에 특별품목이 있다고 친절하게 말해줘도 평민 출신들은 쉬이 이쪽으로 오지 못할 터.
-너, 어쩌려고?
-어쩌긴, 특별품목을 받아내야지.
-근데 넌 귀족 출신이라 해당 안 되잖아?
맞는 말이었다. 사전에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귀족 출신은 오직 ‘최초’ 발견자여만 숨은 상인으로부터 특별품목을 받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까? 숨은 상인도 찾아낸 마당에 가만히 포기할 수는 없지.
저벅저벅.
루빈의 발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베니테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드디어 아공간을 비울 수 있게 되는 건가, 싶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을 때.
“…….”
얼굴 위로 다시금 아쉬움이 배어든다. 베니테즈는 눈앞의 소년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해도, 그가 평민 출신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옷차림이나 태도만 봐도 그렇지만, 가장 확실한 건 표식 덕분이었다.
통지문 발송 이후 모든 학생들은 마법학교로부터 임시 표식으로 목걸이를 받았고, 거기엔 출신 신분에 새겨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베니테즈 교수님. 저는 숨은 상인을 찾아왔습니다.”
“숨은 상인이라니? 학생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시치미를 떼는 베니테즈. 예상했던 바였다.
“그리고… 우연히 이야기도 엿듣게 되었고요. 그 금발 머리 여자애하고 나눈 이야기 말입니다.”
그러자 베니테즈가 머쓱하게 웃었다.
“아, 뭐, 그렇다면 아니라고 해봤자 소용없겠네요, 하하.”
“저한테도 기회를 주세요, 교수님.”
“보아하니 학생은 평민 출신이 아니군요. 규칙을 잘 모르나 본데…….”
“알고 있습니다.”
루빈이 단호하게 말했다.
알고 있다고? 베니테즈가 흥미로운 눈으로 루빈을 쳐다봤다. 의외인 게 당연했다. ‘특별품목’을 요구하는 귀족 출신이라.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클로이처럼 주겠다고 해도 거절하는 게 일반적인 귀족이었다. 귀족 출신 생도들에게 ‘특별품목’은 특별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게 무엇이든 마찬가지였다. 귀족들도 쉽게 얻지 못하는 물건이라 하더라도, 그건 그들 기준으로 보자면 귀한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특별품목은 평민 출신들에게만 허락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귀족들에게는 구호품이나 빈민품의 상징에 가까웠다.
루빈이 말을 이었다.
“저희 가주님은 출판사업으로 크게 성공하여 3등귀족에 올라선 분입니다.”
“대단한 수완가시군요.”
“네, 말 그대로 선을 넘어 기꺼이 쟁취한 셈이죠.”
그 말에 베니테즈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운신마법학의 권위자, 베니테즈.
그는 계급을 전복하는 꿈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고, 귀족을 혐오하는 부류도 아니었다. 견고한 계급의 질서를 깨부술 수 없다면, 적어도 흔들어는 보라는 주의였다.
누군가는 돈을 벌어 귀족이 될 수 있고, 누군가는 마법사로서의 재능으로 성공하여 귀족이 될 수 있다.
변화에 대한 도전, 그리고 욕심.
그거야말로 베니테즈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였다.
그런 점에서, 욕심을 드러내는 루빈이 싫지 않았다. 다른 귀족들은 평민의 전유물이라며 주려 해도 갖지 않으려는 것을, 이 아이는 기꺼이 욕심내고 있었다.
“교수님, ‘적당한 거래’가 필요한 겁니까?”
“아, 적당한 거래.”
물론 통지문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하지만 그 ‘적당한 거래’라는 것은 매해 ‘숨은 상인’ 역할을 하는 교수들마다 제각각이었다.
어떤 교수는 돈을 받기도 했다. 평민 학생들 중에서도 부유한 자가 없는 게 아니라지만, 그건 취지에 완전히 어긋나는 경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구한 전통은, 그러한 교수의 거래 방식조차 존중했다.
찾아내는 것 자체가 기특하다는 어느 교수는 그냥 주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간단한 시험을 보기도 했고.
그럼 베니테즈 본인은 어떠했는가.
베니테즈가 그 역할을 맡아온 지난 몇 년간 그를 찾아낸 학생이 전무하다 보니, 그 본인조차 자신이 처음에 어떤 계획이었는지 잊어버렸다.
‘그냥 줄까?’
그런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귀족이라 해도 저 태도가 썩 마음에 들었으니까. 게다가 첫 번째로 발견한 귀족 출신인 클로이가 특별품목을 마다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랬다가는, 팍팍한 키건 교장한테 한 소리 들을 걸 각오해야 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학생으로 보이진 않는데… 떼어내야 하나?’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클로이 같은 괴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이런 평범한 학생들은 간단한 마법으로 떨쳐낼 수 있었다.
“…그래도 날 두 번째로 찾아낸 학생인데,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냥 거절하기도 마음이 참 아프군요.”
“감사합니다.”
“아니, 그렇다고 특별품목을 그냥 주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
“간단한 내기를 하죠.”
“내기요?”
물론 이 내기에서 학생이 이길 확률은 없겠지만. 적어도 기회는 줘야지.
베니테즈는 자신의 마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호수 밑 거대 마나석과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마나의 환은 금세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였다.
그렇다고 변신 마법이 가능한 상태까지는 아니었다. 변신 마법은 육체의 성질과 형태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고차원의 마법. 그래서 일반적인 마나뿐만 아니라 몸 자체의 회복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술래잡기입니다. 운신 마법으로 이동하는 저를 잡을 수 있다면, 기꺼이 특별품목을 주도록 하죠.”
“잡기만 하면 된다는 거죠?”
“네, 학생한테는 운신 마법을 미리 학습해 보는 기회가 될 겁니다. 그나저나 아직까지 학생 이름을 모르고 있었군요.”
“루든 포이넨이라고 합니다.”
“루든 포이넨 학생. 제가 건망증이 심한 편이라… 학교에서 만날 때까지 잊지 않도록 노력해 보죠.”
“제가 교수님을 붙잡으면 저절로 기억하시겠죠.”
“하하, 그렇게만 된다면 당연히.”
베니테즈는 눈앞의 학생을 절망시킬 생각에 즐거웠다. 본능적인 호승심이었다.
입학식도 치르지 않은 신입생도 중에는 귀족과 평민을 막론하고,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학생들이 많았다. 마나가 생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세상을 주무르게 될 거라는 그런 착각.
그걸 산산이 깨부숴 줄 생각으로 베니테즈는 씩 웃었다.
“자, 그럼.”
베니테즈는 벤치에서 일어나 루빈으로부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게 시작이었다. 베니테즈는 마법을 시전했다.
‘파공(波空)’.
공기계열 마법이자 운신 마법 술식의 하나.
그 순간, 베니테즈 앞으로 공기의 파장이 일었다. 파장의 역할은 베니테즈 본인을 루빈으로부터 멀리 밀어내는 것이었다.
파앙!
‘역시.’
루빈은 자신으로부터 빠르게 멀어지는 베니테즈를 바라봤다. 글레이튼의 팔찌 덕분에 교수의 마법은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다만, 교수는 신입생도를 배려한답시고 ‘파공’의 수준을 몇 단계나 낮추었다. 루빈으로부터 훌쩍 멀어질 수도 있으면서, 일반적인 육체의 움직임보다 살짝 빠른 정도로만 멀어지고 있었다.
루빈은 곧장 암살검가의 암술을 펼쳤다.
‘그림자 운율’.
“어?”
놀란 베니테즈가 파공 수준을 끌어올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질주를 시작한 루빈이 어느덧 지척까지 오자, 베니테즈는 파공의 크기를 더 크게 하면서 루빈으로부터 훌쩍 멀어졌다.
파앙!
공기의 파장을 통해 튕겨내는 몸을 놓치지 않고 또다시 따라붙는 루빈.
‘뭐야, 이거… 파공을 쓸 줄 알았어? 게다가 휘식을 내면화할 줄도 안다고?’
베니테즈의 이런 착각은 당연했다. 순수한 육체의 움직임이라기엔 너무나 비현실적인 힘이었으니까.
이윽고 학생의 파공 수준이 상당하다는 결론을 내린 베니테즈는 이번엔 ‘연파공’을 시전했다.
‘파공’이 일직선의 움직임을 위한 단발성 운신 마법이라면, ‘연파공’은 말 그대로 연쇄적인 움직임이었다.
파앙! 파앙! 팡! 파앙!
베니테즈 근처 사방에서 연달아 파동이 일어났다. 전진했다가, 위로 치솟았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오는 변칙적인 움직임.
‘아니, 이것도?’
여전히 루든은 눈으로도 쫓기 힘든 이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오고 있었다. 당연히 손이 닿기에는 거리가 있었지만,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뭔가 계속 읽히는 기분인데?’
물론 그런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베니테즈는 루빈이 정말로 팔찌를 통해 휘식을 읽어내며, 움직임을 예측하며 따라붙고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
잠시 루빈과 거리가 벌어졌을 때, 그는 여유롭게 말했다.
“내가 루든 학생을 너무 얕잡아본 걸 인정해야겠어요.”
“…….”
루빈은 그 말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밝혀질 일이니 당장 신경 쓸 게 아니었다.
“하아… 하아…….”
숨이 거칠게 튀어나왔다. 베니테즈 교수가 루빈을 얕잡아본 것처럼, 루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교수가 보여주는 운신 마법은 루빈으로서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운신마법학의 권위자라더니, 정말이었네.’
마법을 쓸 줄 모르는 루빈은 그저 순수한 육체의 움직임으로 교수를 따라갔다. 암연으로 발목과 시력의 감각을 증폭시키며 ‘그림자 운율’를 펼쳐 나갔다.
게다가 팔찌 덕분에 교수의 움직임을 모두 예측하고 있었다. 당연히 금방 붙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암살자의 움직임으로도 따라잡지 못하는 마법사가 있을 줄이야.’
그만큼 베니테즈의 마법이 교묘하고 정확했다는 뜻이었다.
‘파공과 연파공…….’
무조건 배워야 하는 마법이 있다면 이 두 개라는 생각이 드는 그 순간.
베니테즈 교수가 다음 마법을 펼쳤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자, 이러면 어떻게 할 텐가요, 루든 포이넨 학생?”
“교수님께서는 하늘을 날 수도 있군요.”
“학생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죠.”
베니테즈는 호수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수면으로부터 2미터 정도 높이였다.
운신 마법에는 몸을 부양시키는 술식이 있었지만, 지금 베니테즈가 쓰는 건 그게 아니다.
지금까지 썼던 연파공을 발밑 쪽에 연속적으로, 그리고 규칙적으로 시전하는 중이었다.
파공과 파공. 그 사이의 간격과 세기가 완벽하게 일정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는 마법인 것이다.
‘대단한 경지다.’
팔찌를 통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루빈은 계속 모르는 척했다. 베니테즈 교수도 도가 지나쳤다 생각했는지 다시 뭍으로 올라왔다.
“학생과의 내기는 이대로 끝내야겠군요. 루든 포이넨. 이름은 기억해 두었으니 앞으로 학교에서…….”
바로 그 순간, 교수의 입을 틀어막으며 펼쳐진 새로운 전개.
“어?”
이렇게 짧은 탄성을 내뱉었을 뿐이다.
교수는 루빈이 자신처럼 연파공으로 공중에 몸을 띄울 수는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연파공을 쓸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닌, 그걸 정확한 밀도로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연속해서 쓸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그렇다고 달려와 도약한다고 닿을 수 있는 거리 차이는 더더욱 아니었고.
그런데 루빈은 예상을 깨트리는 마법을 보여주었다.
모든 건 한순간에 벌어졌다. 두 사람 사이의 호수가 단번에 얼어붙더니,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앞으로 튀어나온 루빈이 얼음 위를 질주했다.
‘…얼음계열 마법도 할 수 있다고?’
놀라는 것도 잠시, 베니테즈는 자신의 발목을 움켜쥐는 루빈의 손길을 느꼈다.
“잡았습니다. 약속했던 특별물품 주시죠,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