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98)
암살검가 로이넨-98화(98/258)
제98화. 룸메이트 (2)
실제로 만난 오스카 투니오는 투명천장 너머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농담을 좋아하고 쾌활한 성격이었으며, 평민 출신 삼휘 마법생도답게 뻐기는 부류는 아니었다.
“루든, 넌 언제 마나가 발현됐어?”
“난 2년 전에. 너는?”
“나는 4년 전. 아버지 따라서 일을 하고 있는데, 핑 하면서 현기증이 오더라.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때 마나가 발현된 거였어. 너는 어쩌다 발현됐는데?”
“여행 중이었는데, 배 안에서 갑자기 발현됐어.”
“바다 위였다는 말이지? 큰일 날 뻔했네! 어떤 사람은 발현 과정이 잘못돼서 죽는 경우도 있대.”
루빈이 알기로도 그런 경우가 드물게 있다고 했다. 만약 클로이와 엮이지 않은 채로 시간이 죽 지났다면, 루빈 몸 안에서도 불안한 과정을 거쳤을 수도 있었다.
“들어봐, 내가 호수시장에서 만난 애는…….”
오스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례들을 죽 늘어놓았다.
마나의 후천적 발현.
이건 삼휘의 마법사들끼리만 오갈 수 있는 대화였다.
원휘나 모휘의 마법사들에겐 살다 보니 마나가 발현됐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들에게 마나란, 태어났을 때부터 몸 안에 지니는 것이었다.
마나가 후천적이냐 선천적이냐는 마법사 세계 권력 지형도의 핵심이었다.
마법사 사회에서 삼휘가 무시당하고 배제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삼휘 마법사 대부분이 후천적 마나를 지녔기 때문이다.
이엘로스 가문이 삼휘인데도 제국 안에서 마법명가 대우를 받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들은 선천적 마나를 지닌 사람들만으로 대를 이어가며, 다른 휘식처럼 순혈주의를 고수했다.
“그래서 이엘로스 가문에선 자제들이 결혼 적령기만 되면, 제국 곳곳을 뒤져 삼휘 마나를 지닌 귀족 가문을 찾느라 예산을 펑펑 쓴대.”
“이엘로스라면… 마법 상점에서 봤어.”
“진짜? 아, 맞아. 너라면 볼 수 있겠구나. 네가 귀족이라는 거, 깜빡했네.”
루빈과 오스카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복도를 걸었다.
두 사람 어깨엔 각자의 열쇠벌레가 내려앉아 있었다. 루빈의 열쇠가 잠자리였다면, 오스카는 장수풍뎅이였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처럼 대화하는 귀족과 평민의 모습이라니. 다른 학생들 눈에는 루빈과 오스카의 조합이 좀 남달라 보였을 게 당연했다.
그래선지 지나다니는 학생들이 슬쩍슬쩍 쳐다보며 두 사람의 목걸이를 확인했다. 루빈 목걸이에는 귀족을 상징하는 파란색 펜던트가, 오스카 목걸이에는 평민을 상징하는 붉은색 펜던트가 있었다.
“루든, 두 달 뒤에 뭐가 있는지 알지?”
오스카가 목걸이를 내려다보며 말했기 때문에, 루빈은 ‘목걸이 의식’을 말하려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내가 알기론, 평민과 귀족의 목걸이를 한데 모아서 녹여 버리는 의식이 있다던데.”
“아, 난 그거 말한 거 아닌데.”
“그럼?”
“물론 그날 그런 신성한 의식이 있긴 하지. 그게 이 학교의 ‘귀족과 평민은 삼휘 아래 평등하다’는 원칙을 상징하는 의식이니까.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건 그 의식 전에 있는 행사였어.”
“그게 뭔데?”
“신학기 새로운 학생의 탄생을 기념하는 연회 말이야.”
“아, 연회.”
“‘아, 연회’라니! 너한테는 아무렇지 않다는 거야? 아하, 귀족이라 이건가?”
루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단지 연회라는 단어 자체가 피로감을 몰고 올 정도로 귀찮게 느껴졌을 뿐이다.
오스카가 말한 것처럼 시점은 2개월 후. 장소는 교내 행사 전용 마탑인 ‘세레나데관’에서 입학식 연회가 치러진다.
루빈으로선 간단한 다과회 정도를 원했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웃고 떠들고 음식을 먹는 건 외부 귀빈들의 몫이었고, 그날 학생들에게는 또 다른 숙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귀빈들이 내려다보는 연회장 안에서 파트너와 함께 춤을 추는 것.
“너는 귀족답게 사교적인 춤을 출 줄 알겠지만, 난 아니야. 그래서 2개월 동안 기숙사 사감님한테 꼼짝없이 춤을 배워야 해.”
“안내서에는 귀족 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던데.”
“물론… 그 문구를 보고 안일한 평민들도 있겠지. 그런데 걔네는 인생 최고의 기회를 날린다는 걸 모르는 거야.”
“인생 최고의 기회?”
“훗, 나는 귀족 영애한테 춤을 신청할 거거든.”
남자 마법생도가 여자 마법생도에게 춤을 신청하여 승낙을 받아내는 게 일반적인 전통이었다.
그 반대가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그런 경우는 오랜 역사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
여자 마법생도 입장에서는 파트너가 없으면 없었지, 그런 식으로 먼저 신청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무리 마법생도로서 모두가 평등하다고 해도, 귀족은 귀족끼리, 평민은 평민끼리 춤을 추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더구나 신분을 나타내는 목걸이를 녹이기 전이기도 했으니.
“이날, 귀족 영애 눈에만 든다면… 신분이 상승되는 것도 꿈은 아니니까.”
이미 오스카의 머릿속에는 마법 실력을 발전시켜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미래 같은 건 없는 것 같았다.
“룸메이트, 어쨌든 귀족 춤을 배우는 두 달 동안 나를 보기 힘들 거야. 후… 마법학교에서 처음 배우는 게 춤이라니.”
회귀 전에 귀족들의 무도회를 숱하게 겪어본 적 있는 루빈이었다. 그래서 오스카의 꿈이 허무맹랑하다는 걸 잘 알았지만, 그 기대가 너무 커 보여 그냥 넘어갔다.
‘연회를 기대하는 건 오스카만이 아니네.’
복도를 걸으며 아이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조금만 들어봐도 알 수 있었다. 두 달 후에 있을 연회 얘기가 대부분이었다.
“이번 연회에 오는 귀빈들이 엄청나다는데?”
“아무래도 이엘로스 가문 때문인가?”
“에릭 이엘로스… 걔는 누구한테 춤 신청을 하려나.”
“이번에는 델린 가문 애도 입학한대.”
“그러면 답 나왔잖아. 이엘로스 가문이 델린 가문한테 춤 신청하겠네.”
학생들 입에 오르내리는 가문들 중엔 위더스푼이 없었다. 만약 교류학생으로 위더스푼의 막내딸이 온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모든 관심은 거기로 빨려 들어갈 게 틀림없었다.
‘여파를 감안하면 클로이는 수업시간에나 그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겠네.’
루빈으로선 그편이 좋았다.
지금 당장은 클로이를 이용하는 것보단 독단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그러려면 오히려 이목을 덜 받는 게 유리했다.
저벅저벅.
계속해서 기숙사의 공간을 여기저기 둘러보는 두 사람. 오스카는 호기심에 돌아다닐 뿐이었지만, 루빈은 칙명부가 원하는 대로 기숙사 내부를 틈틈이 분석하고 기억에 남기는 중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발견한 곳은 내부 발코니와 연결된 곳이었다. ‘휴게공간’이라는 표지판이 떡하니 있었지만, 보이기로는 어쩐지 단련장 같은 곳.
“여기는 뭐지?”
장소를 채우고 있는 건 기구들이었다. 시간을 때울 만한 놀이기구 같아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죄다 마나 증진을 위한 거니까.
기숙사 방에서 내던지고 받는 마나구처럼, 이곳의 기구들 대부분 함께 합을 맞출 누군가가 필요했다.
당연히 루빈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 다녀와. 나는 이것들 좀 보고 있을게.”
루빈 혼자서 다른 곳을 둘러보는 동안 휴게공간에 남겠다는 오스카.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충분한 마나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로 가동 시 위험’이라는 안내판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지, 마나 기구들을 하나씩 하나씩 가동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빈은 랩소디관을 계속 돌아다녔다. 그로선 아직 두 가지 목적 모두 충족하지 못한 상태였다.
‘뭔가가 더 있을 텐데.’
두 개의 방이 ‘공간접속’으로 설계된 것처럼 마법건축술이 가미된 장소가 더 있을 터.
마법생도들이 하나둘씩 입주하는 지금이 가장 어수선하니, 최대한 많이 돌아다녀야 했다.
게다가.
‘페르 로렌치니는 어디에 있지?’
아직 페르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게 신경 쓰였다. 남학생들의 방문은 모두 확인했다. 거기 어디에도 페르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시점이 어긋난 건가? 아니면 나중에 입학하게 되려나?’
그런 생각 속에 걸어가던 루빈은 갑자기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뭔가가 있었다. 삼각형의 건물 구조상 위편 꼭짓점 부근이었다.
으슥하고 어두운 복도. 벽에는 마법에 의해 은은하게 빛나는 ‘출입금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루빈은 살짝 미소 지었다. 찾고 있던 게 바로 이것이었으니.‘출입금지’ 문구를 지나쳐 계속 나아가던 걸음을 다시 멈췄다.
‘이번엔 소리를 보는 눈?’
사라진 대마법사 글레이튼이 발명한 마도구 중 하나였다. 한때는 엄청난 파급을 불러올 정도의 마도구였으나, 글레이튼이 손수 개량하면서 현시점엔 대륙 주요시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경비 장비가 되었다.
철제 받침대에 사람 머리통만 한 눈동자 하나가 걸려 있다. 그 눈동자는 특이하게도 검은자와 흰자의 위치가 뒤바뀐 모습이다.
‘소리를 보는 눈’은 이름 그대로 소리에 반응하게 되어 있다. 소리가 나게 되면, 그게 마치 유리 위의 얼룩처럼 마도구에 그대로 기록이 남는 것이다.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
마도구는 복도 저편으로 나아가는 대상을 감시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루빈이 서 있는 복도 저 끝에 뭔가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소리를 보는 눈’은 분명 뛰어난 경비용 마도구지만, 그 앞에 서 있는 게 암살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대륙 주요시설에 빠짐없이 비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문스러운 암살이 계속 발생하는 이유. 암살검가엔 그 파훼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루빈은 주변을 둘러본 다음, 곧바로 암술 ‘그림자 허밍’을 펼쳤다.
‘아주 고요한 것 같아도, 모든 장소에는 미세한 소리가 흘러 다니게 되어 있지.’
사람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소리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게 바로 ‘그림자 허밍’이었다.
루빈이 지나치는 순간, 마도구는 소리를 찾아냈지만 특이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방금까지 그 장소에 떠도는 소리의 일부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어라?’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이건 또 뭐야?’
‘그림자 허밍’으로 무사히 마도구의 경계를 뚫은 루빈은 또다시 동작을 멈췄다.
복도 맞은편에 웬 늑대 한 마리가 있었다. 은색의 털로 뒤덮인 늑대는 고요한 눈동자로 루빈을 바라봤다. 적개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적개심이 쏟아지리라는 건 분명했다.
‘아까부터 기숙사 안에서 이상하게 짐승들이 계속 감지되는 것 같더니… 이제야 알겠군.’
늑대가 지키고 서 있는 저편에 분명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건 확실했다. 어쩌면 늑대는 그저 입구를 지키는 가장 미약한 짐승인지도 모른다.
루빈은 더는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늑대를 제거하고 나아가서 확인할 수도 있지만,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루빈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복도의 그늘 속으로 걸어 나가, 같은 방식으로 ‘소리를 보는 눈’을 통과했다.
‘다음에 움직일 땐 짐승들까지 감안해야겠네. 생각보다 귀찮겠어.’
그런 생각과 함께 오스카가 있는 ‘휴게실’로 돌아왔는데.
“마, 말도 안 돼!”
“하소연은 다른 곳에 가서 하지? 자, 다음 도전자 있나요? 참고로 돈 내기라는 거 알고 들어오시고.”
오스카는 휴게실에서 한창 판을 벌이는 중이었다.
다른 학생들을 끌어들여 ‘구속구 제거’ 내기를 벌이고 있었다. 방식은 간단하지만, 기본적인 마나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내기였다.
일단 두 사람이 테이블 위에 왼팔을 올려놓으면, 마나 기구가 그들의 왼팔을 가죽띠로 묶어버린다.
그 상태로 마나 휘식을 섬세하게 그려 나가다 보면 왼팔을 구속한 가죽띠가 하나씩 벗겨지는 식.
루빈과 떨어져 있던 20분 사이. 오스카는 이미 열 명쯤 상대하여 모두 승리를 챙긴 뒤였다. 그가 따낸 동전들이 테이블 위로 수북했다.
“오스카.”
“어, 루든! 왔어? 이러다 나 부자 되는 거 아니냐?”
“해줄 말이 있는데…….”
“뭔데? 기다려 봐, 내가 이 불쌍한 도전자한테 돈 좀 따고.”
쿵. 쿵. 쿵.
그 순간, 휴게실에 있는 학생들 모두 복도에 들어차는 울림을 느꼈다. 루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말해주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네.”
“뭔 소리야, 루든? 어! 네 뒤에 곰… 머리에 닭이 내려앉아 있는 곰…이 있는데?”
“기숙사 사감이 수혈인(獸血人)이라는 걸 알려주려고 했거든.”
이미 때는 늦었다. 복도 저편에서 눈을 부라리며 성큼성큼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으니까.
긴 머리가 치렁치렁 내려온, 날카롭기 그지없는 인상의 사내였다. 그는 곰을 옆으로 밀쳐 버리곤 냅다 소리쳤다.
“어떤 멍청한 놈이야! 신입생 주제에 돈 내기를 하고 있는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