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99)
암살검가 로이넨-99화(99/258)
제99화. 룸메이트 (3)
수혈족(獸血族).
거혈족과 함께 제국에 편입된 소수부족. 그들의 몸속에는 모든 짐승과 감응할 수 있는 피가 흐르고 있다.
그들 순수한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스릴 수 있는 존재가 짐승뿐인지, 아니면 괴수나 영물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인지.
그들의 처지는 거혈족보다 나았다.
거혈인은 제국군에 입대하지 않는 이상 제국직할령에서만 살아야 했지만, 수혈인에게는 거주와 입신의 자유가 있었다.
성정에 따라 대부분의 수혈인들은 거대 밀림에 들어가 살거나, 제국과 엘프와의 외교 지역에 터전을 잡았다. 또, 각 왕국의 귀족들에게 파견되어 가축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경우도 흔했다.
‘기숙사 사감이 수혈인일 줄은 몰랐네.’
사감실로 따라오라는 지시에 따라, 루빈과 오스카는 다른 학생들의 눈길을 받아내며 복도를 걸어가는 중이었다.
도중에 내뺄까 주변을 두리번거렸던 오스카는 이내 마음을 접어야 했다. 마치 범죄자를 호송하는 것처럼, 두 사람 옆으로 곰과 사자가 코를 벌름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내 돈…….”
오스카가 구속구 제거 내기에서 딴 돈은 모두 본래 주인들에게 돌아갔다. 오스카와의 내기에서 패배한 마법생도 중에는 이름이 알려진 마법가문도 있었다.
그런데 그걸 간단히 이겨 버리다니. 루빈은 오스카의 마법 재능이 자신이 예상한 것 이상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루든, 너는 왜 끌려가는 거야?”
“흐음, 그러게.”
“설마 돌아다니다가 유리창이라도 깨트렸어?”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면 유리창을 깨트리는 쪽이 더 낫겠다 싶었다.
오스카에게는 모르는 척했지만, 루빈은 사감이 왜 자신까지 부르는지 알고 있었다. 금지된 복도에서 마주친 늑대 때문이리라. 늑대는 곧바로 사감을 찾아 그 사실을 알렸을 테니까.
“들어가라, 이것들아!”
사감실에 도착한 뒤, 사감은 문을 열고 냅다 소리쳤다.
열린 문틈으로 풀냄새가 배어 나왔다. 일반적인 방이 아니다. 문틀을 넘어가기 전부터 루빈은 이 너머에 드넓은 공간이 있으리라는 걸 알았다.
“…….”
역시 고차원의 공간 확장 마법이 설계된 곳이었다. 방 너머로 넓게 펼쳐져 있는 초원이 보였다. 거기엔 갖가지 짐승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보아하니, 수혈족의 통제 아래 먹이사슬은 끊어진 상태인 것 같았다. 맹수들은 얌전히 드러누워 발톱으로 배나 긁어대고 있었다.
문 바로 앞. 철제 책상과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감은 의자에 털썩 몸을 앉히고, 노기 가득한 눈으로 두 마법생도를 노려봤다.
“내 이름은 스레힘이다! 기숙사에서 멍청이들을 다스리고, 망나니들을 교화시키고, 머저리들을 짓누르는 그런 역할이지.”
“휴, 다행이다.”
“뭐?”
스레힘이 눈을 부라렸다.
“저희는 망나니도, 멍청이도, 머저리도 아니니까 말입니다.”
“어이, 초록 머리! 너는 분명 망나니에다 머저리다! 방금 한 그 말이 그 증거거든.”
잠시 눈을 감고 흥분을 다스리는 스레힘.
어째서 그가 마법학교 기숙사의 사감이 되었는지 알 만했다. 귀족과 평민 구분 없이, 모두에게 악을 질러댈 수 있는 수혈인이 얼마나 될까.
“입소 첫날 돈 내기를 한 머저리 생도의 이름이 궁금하군?”
“오스카 투니오입니다.”
“오스카, 부디 네가 졸업할 때 4성의 마법사가 되어 있길 바란다. 지금으로 보면, 머저리로 이름을 날릴 거 같아 심히 우려스럽군. 그리고 너… 검은 머리.”
스레힘 사감이 루빈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루든 포이넨입니다.”
“루든 포이넨. 너는 왜 끌려왔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내 친구는 네가 알 거라고 하는데.”
때마침 스레힘의 친구, 거대한 늑대가 그 곁으로 다가왔다. 복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날카롭기 그지없는 눈동자가 루빈에게로 향했다.
루빈은 그 눈길을 피하는 대신, 짧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제가 돌아다니다가, 가서는 안 되는 곳에 간 것 같습니다. 뒤늦게 늑대를 발견하고 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너는… 머저리도 망나니도 아닌, 멍청이다. ‘접근금지’라는 말을 못 봤나?”
“…못 봤습니다.”
“크흠! 이봐 둘. 너희는 신입생도의 미덕이 무엇이라 생각하지?”
“패기와 무절제가 아닐까요?”
오스카의 당돌한 대답에 스레힘 사감이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그 소리에 놀란 미어캣 몇 마리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겁이다! 신입생도는 겁을 지녀야 한다.”
“사감님. 용기가 아니라, 겁을 가지라는 말씀인가요?”
“그래, 오스카 생도. 잔뜩 겁을 먹고, 모든 행동이 가져올 파장을 걱정해라.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움직여라. 그게 신입생도의 태도다. 나대지 말라는 거지. 가서는 안 될 곳을 가지 말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하지 마라! 아주 쉽지 않나?”
이후 사감은 같은 맥락의 일장 연설을 죽 이어나갔다.
대들어봤자 그를 더 자극하리라는 걸 깨달은 오스카는, 어느 순간부터 영혼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고, 루빈도 그런 척을 했다.
그러면서 루빈은, 은근슬쩍 암연을 최대한 뻗어, 초원으로 이루어진 사감실의 지형을 파악했다.
‘내가 들어온 곳 말고도 문이 하나 더 있군.’
초원의 저편. 언덕을 넘어가면 문이 하나 더 있었다. 궁금증이 일었지만, 지금 당장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문이 어디로 연결되는지는 나중에 차차 밝혀내면 되겠지.
“…알겠나?”
연설을 마친 사감이 물었고, 루빈과 오스카는 반사적으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너희들은 오늘 신기록을 세웠다.”
“신기록이요?”
“기숙사에 들어온 지 두 시간 만에 벌점 부과라는 신기록. 오스카 투니오와 루든 포이넨한테 각각 벌점 10점과 5점을 부과한다. 오스카 생도, 벌점에 불만이 있나?”
“아… 아뇨, 불만 없죠, 당연히.”
스레힘은 혀를 쯧쯧거렸다. 그와 동시에 기린 한 마리가 오스카 쪽으로 다가왔다.
기다란 혀를 날름거리며 초록 머리를 한 움큼 휘어잡더니, 오스카의 몸을 문 쪽으로 돌려세웠다. 이제 나가라는 뜻이다.
그렇게 루빈도 몸을 돌려 나오려는데.
“근데 루든 생도.”
“네?”
“늑대랑 마주치기 전에 경비용 마도구가 있었을 텐데, 어떻게 들키지 않고 거길 지나칠 수 있었던 거지?”
“…저도 그걸 봤습니다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점검을 해봐야 할 것 같네요.”
“그래? 흐음… 또 고장인 건가. 관리인을 불러야겠네.”
스레힘 사감의 무딘 의심은 그 정도로 넘어갔다.
그대로 사감실을 나선 루빈과 오스카는 각각 다른 층에 있는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래 봤자 곧바로 투명천장을 사이에 두고 다시 마주할 뿐이지만.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오스카의 힘없는 목소리가 넘어왔다.
“벌점이라니… 망했다.”
“그래도 여긴 퇴학은 없잖아.”
“퇴학은 없어도 유급은 있지. 그보다 벌점이 쌓이면… 엄청 귀찮아진단 말이야.”
카포티니 마법학교는 생도들에게 상점과 벌점 시스템을 적용했다. 벌점이 일정 이상으로 올라가면, 그에 따라 여러 과업이 주어지는 식이다.
교내 봉사뿐만 아니라, 주말에 학교를 나가 대민봉사를 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나저나 루든, 나한테 귀족 춤 알려주면 안 돼?”
“거절할게, 나도 딱히 소질이 있는 건 아니라서.”
오스카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기숙사에서 귀족 춤을 가르쳐 주는 건, 사감의 몫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방학 중인 마법학교는 숨죽인 분위기로 가득했다. 학교다운 활기로 채워지는 건 입학식 이후였다.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고, 학교를 떠나 있는 재학생들과 교수들이 모두 돌아오는 때.
그 전까지는 마나와의 조화를 위해 미리 기숙사에 들어와 있는 신입생들의 잠잠한 목소리만이 떠돌았다.
두 달이 지나는 동안 귀족과 평민 사이에서 친밀해진 사람은 루빈과 오스카뿐. 그렇다고 귀족과 평민 사이에서 사감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사건이 벌어지지도 않았다.
스레힘 사감이 첫날에 루빈과 오스카를 휘어잡은 모습이 많이 알려진 탓인지, 귀족 출신 생도들도 몸을 사리는 것 같았다.
스레힘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인원 점검을 할 때마다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이용했다. 다양한 짐승들을 동원하여 기숙사실 앞에서 별다른 문제가 없는지 확인했다.
늑대와 곰이 날 선 경계를 선 덕분에, 입학식 전까지는 밤에 복도를 나다닐 수 없다는 규칙도 충실히 지켜졌다.
“겁이다, 겁! 신입생의 미덕은 겁을 지녀야 한다는 거다!”
겁 없는 생도들에겐, 직접 겁을 만들어 먹여줄 기세였다.
하지만 스레힘 사감은 자신의 감시와 압박을 뚫어내는 암살검가 생도가 있다는 건 알아차리지 못했다.
루빈은 사감과 그 짐승들의 패턴을 파악하면서 조금씩 운신의 폭을 넓혀 나갔다. 그에 따라 기숙사에 대한 정보도 점차 쌓여 나갔다.
“루든. 오늘 나한테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 곰이랑 춤을 췄다니까. 내일은 참새 떼가 허수아비 인형을 조종할 건데, 그게 바로 내 춤 연습 상대라고.”
귀족 춤을 배워보려고 했던 평민들 모두 선생이 스레힘 사감이라는 사실에 일찌감치 포기한 상태. 그래서 귀족 춤 수업을 신청한 생도는 오스카뿐이었다.
사감은 체계적으로 귀족 춤을 가르쳤지만, 오스카의 연습 상대로는 언제나 짐승들을 활용했다. 매일 저녁, 기숙사실로 돌아온 오스카는 온몸에 들러붙은 털을 떼어내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던 어느 날.
루빈이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다.
잠잠한 일상에 돌덩이가 풍덩 떨어지는 그런 사건이.
“사감님, 그게 사실인가요?”
“대답 좀 해주세요! 교장님한테 물어봐 주시든가요!”
방학 중에는 학교에 교수들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래서 질문의 포화를 받는 건 오로지 사감의 몫.
결국 스레힘은 그날 저녁, 학교뿐 아니라 도시 전체에 퍼져 나가고 있는 소문의 진실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모든 남자 마법생도들을 한데 모았다.
“몇몇 마법가문이나 귀족 가문에서는 자체적으로 소문을 확인했겠지만…….”
그때, 차분히 기다릴 수 없었던 오스카가 사감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저한테는 그런 정보력이 없으니까 빨리 대답해 주세요. 정말로 위더스푼 가문의 막내딸이 이번 학기에 저희랑 수업을 같이 듣는 건가요?”
사감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피로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교장님께 확인한 사항이다, 오스카. 소문은 사실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얘기된 거라고 한다.”
“그러면 그 제국귀족 영애께서도 입학식… 아니, 무도회에 참석하시는 건가요?”
“그래, 클로이 위더스푼이 교류학생이라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분한테 춤을 신청할 자격이 주어진다는 거죠?”
“‘그분’이 아니라, ‘그 애’다. 마법학교에서는 도련님이니 공녀님이니 그런 거 없다는 거 모르겠나, 오스카?”
“항상 겁을 지니라면서요, 사감님.”
오스카의 도발적인 유머였지만, 충격적인 소식에 다른 생도들은 거기에 호응조차 하지 못했다.
사실 위더스푼 영애는 2년 전에 잠깐 카포티니에 들렀던 바 있었다. 그때의 방문이 2년 뒤의 입학으로 이어질 줄 알았던 사람은 극소수였지만.
그래서 놀라는 건 생도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밝혀지자, 카포티니 도시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앞으로 입학식과 연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라. 문제는 위더스푼의 딸만이 아니다. 그 애가 교류학생으로 들어온다는 사실 때문에 입학식 규모가 엄청나게 커져 버렸다는 거, 그걸 명심하도록.”
그때.
“이제 다 끝났습니까? 방으로 가도 되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날아오는 목소리. 에릭 이엘로스였다. 왜 그렇게 호들갑이냐는 듯한 태도였다.
‘클로이가 여기로 오다니…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사실이었어!’
그 순간, 에릭은 승리자의 미소를 애써 숨기고 있었다.
이엘로스 가문이 삼휘의 기수라는 위상을 지닌 덕분에, 에릭은 몇 번인가 클로이를 만났던 적이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였지만 상관없었다.
‘쓰레기 새끼들. 뭔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거지? 클로이가 춤을 추겠다면 그건 나밖에 없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