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of Ice RAW novel - Chapter 8
제1장 황실의 보복
1
소문은 바람을 타고 떠도 것처럼 빠르다.
☆ ☆ ☆
무림대회가 끝나고 보름이 지나지 않았는데, 소문은 벌써 장강을 넘어 강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상한 소문이었다. 무림대회에 관과 황실이 개입했다는 다소 엉뚱한 내용인 것이다. 소문의 진위를 가리기도 전에 귀동냥으로 전해 들은 터라 대부분 믿지 않을 그런 풍문이랄까. 그러나 어떤 이들은 항주의 일과 이번 일을 연관 짓기도 했다. 극히 적었으나 내심 우려하는 자도 있었다. 그런 중에 또 다른 풍문, 이번에는 소문이라기보다는 괴사(怪事)에 가까운 내용이 입에서 입을 타고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떤 문파에 서신 하나가 도착한다.
문주에게 보내진 서신이다.
무슨 내용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서신을 받은 문주도 언급을 하지 않는다.
다음날 밤, 그 문파에 비명이 울린다.
아침이 되면 문내에서 시체가 한 가득 실려 나온다.
그리고 문의 모든 재산이 아문으로 넘어가 버린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밑도 끝도 없는, 그래서 들어도 믿지 않을 그런 괴사였다. 하지만 오늘, 호광의 중심인 홍호(洪湖)에서 괴사를 만들어낸 무리가 언제나 해왔던 것처럼 익숙하게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홍호에 위치한 신도문(神刀門)의 문주 장백경(長白鏡)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갑자기 문내로 난입한 괴한 때문이었다.
괴한은 충분히 그를 두렵게 했다. 숨김없이 뿜어내는 싸늘한 냉기는 무시하더라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파리하게 떠오른 얼굴은 귀신의 그것 같아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눈빛. 녀석의 눈빛은 붉게 충혈되어 있어 그의 전신을 핥은 느낌이었다.
“무슨 짓?”
괴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수려한 미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담겼으니,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검은 종이에 먹을 붙는 것 같아서 더욱 음침하고 무거웠다.
장백경은 꿀꺽 침을 삼켰다.
미소를 담은 괴한의 입이 움직였다.
“어제 내가 보낸 서신을 받았을 텐데.”
“서신?”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괴한의 말처럼 서신을 받기는 했다. 영주로 보냈던 문도가 큰 사고를 쳤고, 그 탓에 많은 사상자가 생겼으며, 백성이 큰 피해를 보았다는 증거와 그와 관련된 사건경위에 대한 내용이 한가득 담긴 서신이었다.
당시 장백경은 코웃음을 쳤다. 서신의 마지막에 그 죄를 책임지어 신도문의 현판을 내리고 문도를 내보내어 문파를 해산하라는, 말 같지도 않은 명령이 적혀 있어서였다. 그때는 장난이지 싶었다.
“장난 같았겠지?”
괴한이 물었고, 장백경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괴한이 다시 물었다.
“서신의 마지막에 이곳 지부대인의 직인이 찍혀 있었을 텐데도 장난이라고 생각했겠지?”
역시 장백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장난이 아니었더라도 무시했겠지? 무림인은 원래 그러잖나.”
이번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도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신 때문에 찾아온 것 같은 녀석 앞에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때부터 괴한이 무어라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장백경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사실 듣고 있을 정신도 없었다. 낫처럼 휜 흉측한 무기가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니, 거기에만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황실이 어쩌고, 나찰귀로가 어떻고, 무림전담반이 어쩌고 하는 말이 언뜻언뜻 들리기는 했다.
“놀라운 비밀 하나 알려줄까?”
묵묵히 낫을 주시하던 장백경이 두 눈을 번쩍 들어 올려 괴한을 보았다.
괴한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아는 자는 모두 죽는다.”
장백경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무, 무슨 사실을 말하는 거요?”
듣지 못했다. 다행이다 싶은데, 괴한의 눈은 상관없다는 빛이었다. 그리고 눈에 담긴 것처럼 행동도 주저함이 없었다.
픽!
불빛이 번뜩였던 것 같았다. 괴한은 단지 검지를 치켜세웠을 뿐인데, 잠시 방안이 환해진 것 같더니 그 순간 장백경은 정신을 놓았다. 그의 이마에는 작은 구멍 하나만 있었다. 그것이 사인의 전부였다.
장백경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침상 밑에 몸을 뉘었다. 때마침 열린 방문을 통해 요기를 풍기는 사내가 들어왔다.
“모두 끝냈습니다.”
괴한은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장백경의 얼굴을 구경하는 듯 보다가 물었다.
“나머지는?”
“하인과 하녀 등, 무공을 모르는 자들은 그냥 도망치도록 두었습니다.”
“아문에 연락하여 사상자를 정리하도록. 그리고 신도문의 모든 재물을 압류하여 일부는 백성에게, 나머지는 황실로 보내라고 지시하게.”
“존명!”
요기의 사내가 방을 나가자 괴한은 창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달은 참 밝다.
“이런 밤에는 술이나 한 잔했으면 좋으련만!”
괴한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한가한 소리를 하는군.”
이제부터 정말 바빠질 것이다. 지금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바빠질지도 모른다. 우선 무림대회에 잡아들인 오백여 명의 무인을 처리해야 하는데, 그들은 지금 친황대 삼 개 대, 그리고 동창과 함께 먼저 수도로 보내었다. 돌아가면 그들의 죄목부터 하나하나 정하고 죄를 따져 누구도 반발할 수 없는 벌을 내려야 했다. 또한 자신이 이끄는 나찰귀로와 남은 두 개의 친황대는 각기 길을 달리해서 지금처럼 영주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문파를 하나하나 처리하며 북경으로 향하고 있었다. 처리는 문제가 아닌데, 그 처분은 꽤 골치 아픈 일거리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까지 처리하면서 또 다른 무림계획을 진행해야 하니 한가한 시간은 당분간 그와는 먼 이별이었다.
“이젠 완연한 가을인 모양입니다. 밤하늘도 높아 보이는군요.”
한창 달을 보는데, 그 앞을 지나가던 홍면노가 걸음을 멈추고 같은 곳에 시선을 주며 물었다.
“무얼 그리 깊이 생각하십니까?”
괴한, 사자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무슨 생각이 있으려고. 그보다 대원들의 불만은 없나?”
“예상하셨겠지만, 은형신검 등 정파 쪽에 몸담았던 녀석들이 약간 불편해하는 정도입니다. 이런 식의 일은 애초부터 맞지 않는 녀석들이었으니까요.”
“자네는 아닌가?”
“저야 심심해서 죽고 싶을 정도로 오랜 은거를 했으니…….”
“나찰귀로에 들어온 이유가 심심해서라니 의외로군.”
홍면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기록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보았지. 하지만 남은 인생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는 게 무슨 뜻인 줄은 몰랐네. 그게 심심해서였다니, 하하하!”
“산에서 수십 평생을 홀로 살다 보면 인생에 대해서 달관하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태어난 의미에 대해서도 되새겨보게 되지요. 노부도 그랬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세상에 태어났는가? 난 무엇 때문에 무공을 익히고 있는가? 이렇게 산중에서 늙어 죽는다면 그것이 정녕 내 인생인가? 등등.”
듣고 있던 사자비의 미소가 은근해졌다. 그는 약간 호기심을 담은 눈으로 물었다.
“그래서 이제 인생의 의미를 찾았나?”
“글쎄요. 그런 건 아직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군요.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마누라도 얻었으니 말년에 복을 얻은 셈이 아닙니까.”
“과연, 친황대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네일걸세.”
“대인이 아니시고요?”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항상 불행한 법이지.”
중얼거림처럼 떠도는 말이 묘한 여운을 남겼다.
홍면노가 미소를 드러내자 사자비가 퉁명스레 물었다.
“뭔가, 그 표정은?”
“대인의 만족은 무엇인지 궁금해서요.”
잠시 기억을 더듬던 얼굴의 사자비가 피식 웃었다.
“인간에게 만족의 끝이 있을지 의문이로군!”
그는 다시 달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겐 올라갈 계단만 있을 뿐, 계단의 끝은 아직 보이지도 않는다네.”
그러면서 더 케케묵은 질문을 던지지 못하도록 명했다.
“대원들을 정비하여 떠날 준비를 지시하게.”
“이젠 총단으로 가는 것입니까?”
“처리해야 할 곳이 한 군데 더 남았지.”
“우리가 가는 길목은 이곳이 끝이 아닙니까? 다른 곳은 수라금룡대가 이미 처리를 하고 있을 텐데요.”
“의창(宜昌)으로 가기로 했네. 거기에 마지막으로 볼일이 있으니.”
“의창이라면……?”
나찰귀로에 있다 보니 주워들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홍면노가 혈리금도문을 거론하자 사자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아니겠나!”
“그들은 영주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것으로 아는데, 아니었습니까?”
“아니었지. 하지만 세 시진 전에 연락을 받았네. 며칠 전, 영주에서 압송 중이던 문도를 빼내려고 도중에 기습했다더군.”
어이없다는 표정이 홍면노의 얼굴에 귀걸이처럼 걸렸다. 곧이어 그는 실소를 흘렸다.
“대담하군요. 죄인을 압송하던 황실의 고수를 공격하다니.”
“뭐든 힘으로 해결하려는 작자들이 아닌가.”
“그래도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짓을!”
“증거를 남기지 않고자 복면을 쓰고 야밤에 기습했다더군.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던 것이겠지.”
홍면노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동창에 친황대 삼 개 대가 있었으니……. 그들에게는 재수가 없는 날이었겠군요.”
“그랬지. 해서 몇 놈을 생포했다는 보고를 들었네. 그들 뒤에 혈리금도문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고. 간도 크지!”
말과 함께 사자비가 묘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 큰 간을 이번 기회에 바짝 졸여놓을 생각이네. 다시는 황실을 얕보지 못하도록.”
그의 목소리는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당양(當陽)에서 본대와 합류했을 때, 그의 얼굴은 평소의 그것과 달리 심하게 구겨졌다.
그는 진정으로 화가 난 얼굴이 되었다. 모습만 그런 것이 아니다. 친황대에 들어온 이후로 이렇게 노기가 들끓은 적이 없었다. 기분이 나쁘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자존심이 상한 이상의 표정이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도대체 방비를 어찌 한 건가?”
인적이 드문 야산에서 낮게 깔린 사자비의 질책이 제사수라금룡주 엽적화에게 달려들었다. 주장으로서 죄인을 압송 중이었던 소천룡은 이미 부상을 당한 상태, 때문에 그가 지금 친황대의 책임자였다.
엽적화는 물음을 던진 상대, 애송이었지만 이제는 감히 마주 볼 수 없는 친황대의 총감을 향해 난감한 표정을 보였다. 그는 녀석들의 기습을 무난히 막은 후, 천천히 북경으로 이동 중이었다. 배후인 혈리금도문이 눈치를 채지 못하게 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의창을 지나쳐서 녀석들을 방심케 한 후, 불시에 뒤를 치겠다는 작전의 일환이었다.
“그것이, 놈들이 행동을 대담하게 한 것 같습니다.”
구출작전이 실패는 했지만 배후가 들통나지 않았으니 다시 한 번 기습을 노렸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대에게는 책임이 없다?”
사자비는 조소를 흘리며 재차 물었다.
“다시 기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오히려 안일한 생각으로 평소보다 경비를 허술하게 한 것은 아닌가?”
“그, 그건…….”
정곡을 찔린 엽적화는 변명하지 않았다. 설마 그렇게 혼이 났는데 다시 죄수들을 구출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그때의 책임자는 소천룡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이 책임자였다.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사자비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정말 기분이 상한 것이다.
이번 일은 총감이 된 후의 첫 임무. 그런 만큼 어떤 것보다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 했다. 그런데 작전을 무사히 마치고난 후의 처리가 이런 식이면 문제가 클 수밖에 없었다. 꼴도 우습게 되었다. 아마도 황제에게 보고가 들어갈 텐데, 큰 실적을 올려놓고도 핀잔을 들을 수 있었다. 더욱이 황실의 고수가 무림의 기습을 받아 죄수를 놓쳤다는 사실은 황제의 기분을 매우 불쾌하게 할 것이었다.
그는 엽적화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벌을 내려 엄히 다스리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점도 그의 기분을 좋지 않게 했다. 진정으로 자신을 따르게 하고자 주자혁까지 초빙한 마당이 아닌가. 아직 자리도 잡지 못한 마당에 대주에게 엄중한 벌을 내린다면 통솔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사자비의 노한 눈빛을 받은 엽적화의 얼굴이 붉어졌다.
순간 사자비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바뀌었다.
“일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오히려 그 말이 위협적이었던 것 같았다. 엽적화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사자비가 달래듯 말했다.
“그러나 두 번의 실수는 용납할 수 없네. 앞으로 주의하도록.”
엽적화가 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털어버리고, 우선 보고부터 듣도록 하지. 입은 피해가 어느 정도인가?”
“오늘 새벽에 오백여 명의 복면인이 매복을 한 상태에서 우리를 기다리다가 두 번에 걸친 기습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백여 명의 죄인들이 도주했습니다.”
“두 번?”
“네.”
“소천룡 대주께서 부상을 당하시고 대원 세 명과 동창위사 서른여덟 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꽤 실력이 좋았던 모양이지?”
“상당한 실력자들이었습니다만, 그보다 첫 기습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린 녀석들이 고수였습니다.”
“자세히 말해보게.”
“처음에는 오십 명 정도의 인원이 기습을 해왔습니다. 생각지 못한 기습이라 초반에 제대로 반응을 못 한 덕분에 동창의 위사들이 피해를 입었으나 그리 크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더는 안 된다고 판단했는지 바로 도주를 했습니다.”
“그래서 인원을 나눠서 추격을 했나?”
“네. 하지만 소천룡 대주께서 직접 나선 덕분에 열 명의 대원만 무리에서 이탈했을 뿐, 그 사이 다시 이차 기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로군. 하나 소천룡 대주가 부상을 당했다는 건 의외야.”
“그를 데려왔던 대원들의 증언으로는 도주자 중에 화경의 고수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소천룡 대주도 처음에는 그것을 모르고 추격에만 신경 쓰다가 적들이 갑자기 도주를 멈추고 달려든 덕분에 제대로 대응을 못 했다더군요.”
“화경의 고수?”
“그렇습니다.”
사자비의 입가가 살며시 길어졌다.
“이번에도 혈리금도문이겠지?”
“기습한 녀석들의 무공이 며칠 전 녀석들과 흡사했습니다.”
“그렇다면 혈리금도문에서도 최고의 정예만 데려왔다는 소리로군.”
사자비는 확신했다. 명문이라고 불리는 문파도 모든 문도가 사승관계로 엮여 무공을 전수받는 것은 아니었다. 돈, 혹은 명예 때문에 초빙되거나 팔려오기 때문에 같은 문파의 문도라도 무공의 원류가 천차만별이었다. 그런데도 비슷한 무공을 구사했다면 문파에서 어릴 때부터 데려와서 직접 사문의 무공을 전수해 길러낸 무사들일 것이고, 그런 고수가 대부분 문파를 이끌어가는 중추역할을 맡게 된다.
“이번이 오백 명이고, 전에는 삼백이라고 했나?”
“대충 그 정도의 숫자입니다.”
“모두 합하면 팔백!”
사자비의 입가가 더욱 길어졌다. 혈리금도문이 호광에서 알아주는 사파라도 정예고수가 팔백이나 상했다면 엄청난 타격을 받은 셈이다. 어쩌면 모든 전력을 이번 구출작전에 쏟아 부었을지도 몰랐다.
그 인원을 한데 뭉쳐서 기습을 했어도 턱없이 부족했을 텐데, 힘을 분산하여 두 차례에 걸쳐서 공격했으니…….
“그런 면으로 보자면 우리 쪽의 피해가 생각이상으로 크군.”
“죄송합니다.”
“소천룡 대주의 부상은 심각한가?”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당분간은 거동이 불편할 것 같습니다.”
“혈리금도문의 동정은?”
“기습 후에 곧바로 이인 일조로 하여 열 개 조를 혈리금도문으로 보내어 감시하도록 했습니다.”
“대처는 빠르군.”
사자비는 주변을 돌아보며 명했다.
“자네는 남은 죄수와 부상자를 수습하여 계속 북경으로 이동하게. 단, 친황대 두 개 대와 나찰귀로는 내가 데리고 있어야겠네. 혈리금도문을 처리한 뒤에 곧바로 합류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2
의창은 호광을 가로지르는 장강 서쪽에 위치해 있다. 유람객이 긴 여행의 노곤함을 풀고자 잠깐씩 쉬어가는 곳으로 알려졌지만, 강남삼성을 통해 물건을 싣고 옮겨온 선박 등이 사천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박하여 귀주, 광서 운남 등으로 들어갈 물류를 분류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자연히 문화적으로는 낙후되었으나 돈이 모이는 곳임이 분명했고, 그런 만큼 강호의 무리가 똬리를 틀고 이권을 톡톡히 챙기기는 길목이었다.
볼거리라면 삼유동(三遊洞)과 천연탑(天然塔), 백마동(白馬洞) 정도. 하지만 정작 그곳을 말하는 자들은 혈리금도문을 빼놓지 않는다. 그곳의 선착장을 모두 장악하여 금도문주의 허가가 없이는 어떤 배도 정박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작 문제는 의창을 지나 중경으로 들어갈 때 강강수로연맹의 세 개의 수채를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를 무사히 지나려면 꼭 의창에서 배를 정비하고 적절한 시기를 파악해야 하며, 혈리금도문의 중재를 받아야 했다. 혈리금도문과 세 개의 수채가 공공연히 손을 잡고 일을 하기 때문이었다.
총체적인 과정은 이렇다.
혈리금도문은 정박한 배에 세금을 받고, 그 세금의 일부를 수채와 나눈다. 하면 수채는 혈리금도문이 내어준 증표를 단 선박에 약간의 통행세만 받고 통과를 시킨다. 만약 선착장에 들어가는 돈을 아끼고자 의창을 그냥 지나치는 선박이 발견되었을 시에는 수적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목숨까지 빼앗는다. 이 과정을 통하여 선착장을 독점한 혈리금도문은 막대한 이익을 수중에 넣게 되고, 그 거금을 기반으로 지금은 호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방파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수채도 혈리금도문과 손을 잡는 것이 큰 이익이었다. 몰래 장강을 지나는 선박을 최소한으로 줄여 새는 통행세를 막을 수 있어서였다. 또한 뒤로는 혈리금도문에게 많은 자금을 상납받기에 여러모로 좋았다. 그런데 오늘, 혈리금도문과 세 수채의 자금줄이 비명으로 아침을 열었다.
시작은 다섯 개의 선착장 양끝이었다. 지독한 요기를 풍기는 금빛의 무리가 갑자기 양쪽에서 들이닥치더니 예고 없이 시산혈해를 만드는 것이다. 규칙도 법도도 없었다. 오로지 혈리금도문의 복장이라면 경고 없이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며 중앙 선착장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그렇게 이동하다가 혈리금도문이 보이면 또 죽인다. 반복에 반복. 이건 전투라기보다는 살육이요, 학살이었다. 금빛 무리는 살인기계와 같았다.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 배를 정박한 여타 무인과 선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혈리금도문이 이런 식으로 몰살당하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도대체 어떤 무리가 간도 크게 혈리금도문의 밥줄을 건드리고 문도까지 죽이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전율스러운 금빛 무리의 무공에 압도되어 사라졌다.
대부분 혈리금도문과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설사 친분이 있다 해도 감히 나설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저 숨 막히는 금빛 무리에게 달려들었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할 것 같았으니.
눈 깜짝할 사이였다. 물경 이백에 이르는 금빛 무리는 반 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중앙 선착장까지 장악해서 혈리금도문도를 제압해 버렸다. 부상을 당한 이도 없었다. 모조리 죽었고, 설사 운 좋게 부상을 당했어도 금빛 무리의 확인사살 탓에 끝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그렇게 선착장이 완벽히 정리되었을 때, 금빛 무리는 선착장 전체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금빛 무리의 정체가 드러났다. 황궁의 고수라는 것이다. 친황대라던가. 황실의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관리가 아니라면, 특히 그런 쪽으로는 아예 관심도 없는 무림인이라면 알지도 못할 단체였으나 그들의 무공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경악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범선의 선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묘령의 여자가 말했다. 붉은 꽃무늬의 화려한 청의 때문에 보기 좋게 살이 오른 얼굴이 귀엽게 보이는 여인이었다.
그녀와 나란히 서 있는 중년 여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글쎄다!”
“혈리금도문이 목적이었던 것 같죠?”
“그런 것 같구나. 행동을 보면 그들에게 원한을 가져도 단단히 가졌음이 분명해. 그런데 이해를 할 수가 없구나. 황실이 왜 무림문파에 원한을 가진 걸까.”
묘령의 여인이 표정을 어둡게 했다.
“이제 어쩌죠?”
중년 여인은 대답을 뒤로하고 난간을 밟았다. 곧이어 나는 새처럼 선착장에 내려서더니 묘령의 여인을 불렀다.
“우선 혈리금도문으로 가서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알아보자꾸나!”
“혹시, 그곳도 황실의 공격을 받았으면 어떡해요?”
“그건 그때 가서 대처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금도 어르신이라면 쉽사리 당하시지는 않을 게다. 우리가 모르는 오해에서 비롯된 일일 수도 있고.”
묘령의 여인이 수긍의 표정을 보인 후, 중년 여인 옆으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얼굴에 담긴 의문은 여전해 보였다.
그녀는 일사불란하게 시체를 정리하는 친황대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황실의 고수가 이 정도로 실력이 좋았나요? 순식간에 제압해 버려서 제대로 실력을 파악하기도 힘들 정도였어요.”
중년 여인은 대답을 뒤로한 채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그녀가 중얼거림처럼 말했다.
“어쩌면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소문이라니요?”
“가면서 얘기하자꾸나.”
말과 함께 중년 여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놀랍게도 신형이 살짝 흔들린다 싶었는데, 그녀의 몸은 이미 삼 장이나 앞으로 쏘아져가고 있었다. 묘령의 여인도 급히 걸음을 놀렸다. 그녀 또한 신법 수련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속도로 증명했다. 그러나 두 여인이 혈리금도문에 도착했을 때, 이곳도 선착장과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여기가 더욱 시끄러웠던 모양이었다. 하루 일과를 위해 의창으로 향하던 백성이 소란에 이끌려 혈리금도문 앞에서 웅성거리는데, 그 수가 상당했다.
어렵게 그들을 헤치고 정문 앞으로 다가간 두 여인은 산처럼 쌓인 혈리금도문의 무사들을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무사들은 하나같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시체가 산을 이룬다는 말이 딱 맞을 모습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혈리금도문이…….”
묘령의 여인이 굳은 표정으로 떠듬거렸다. 중년 여인도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망연히 시쳇더미를 보다가 한숨만 몇 번을 쉬고, 이어서 고개를 돌려 옆에서 구경하던 청년을 향해 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이오?”
조금은 불량스러워 보이는 청년은 여인의 허리에 검이 있는 것을 보고 금방 비굴한 표정을 했다.
“죄인을 압송하던 황실 위사를 공격했다고 들었습니다.”
“혈리금도문이 왜?”
“죄인 중에 이곳 문주의 제자와 장로가 있었다네요.”
그러면서 손을 들어 벽에 붙은 큰 방을 가리켰다. 거기에 방금 청년이 말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황군을 죽이고, 죄인을 빼낸 죄를 더하여 혈리금도문을 역당의 무리로 규정한다는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구나. 금도 어르신의 제자가 왜 죄인이 되어 압송되었을까? 하물며 죄인을 관에서 관리하지 않고, 황실에서 압송하는 이유는 또 무엇이지?”
묘령의 여인이 말했다.
“사부님이 말씀하신 소문이 사실이라는 뜻 아닐까요? 얼마 전에 열린 무림대회에 혈리금도문이 참가했다고 하셨잖아요. 영주에서 흘러나온 소문도 그랬다면서요? 황실의 고수가 거기에 참가한 무인들을 전부 잡았다고.”
“흐음!”
“그러면 말이 되는 것 같아요. 금도 어르신의 제자가 거기에 참가했다가 잡혀서 죄인의 무리에 섞이게 되었고, 그들을 압송하는 과정에서 사실을 파악한 혈리금도문이 그녀와 문도를 구출하려고 황실의 위사를 공격했다면 아까 선착장의 일과 여기의 일이 설명 되잖아요. 황실의 고수까지 상했다니 혈리금도문을 가만히 두지는 않겠죠.”
“그런데 왜 황실에서 이 일을 주관했냐는 것이다. 뭔가 냄새가 나지 않니?”
그때,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강서 유령문(幽靈門)의 홍 장로님이 아니십니까?”
중년 여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들 틈에 끼어서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내가 거기에 있었다.
“뉘시오?”
사내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다가왔다. 그는 혈리금도문을 들락거리는 괴기스러운 무사들을 경계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문주님은 안전하십니다.”
두 여인이 크게 눈을 뜨고 사내를 보았다.
“정말이오?”
“네. 빨리 눈치를 채시고 일이 벌어지기 전에 빠져나가셨습니다. 특히, 저를 보내시어 홍 장로님을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어디 계시오?”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를 따라오시면 조만간 만나게 되실 겁니다.”
중년 여인이 턱짓으로 가자는 뜻을 보였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인파를 헤쳤다. 두 여인이 역시 그를 따라 인파를 뚫었다.
의창을 빠져나온 사내는 곧장 장강을 따라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가는 중에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자 중년 여인이 물었다.
“대충 상황은 파악했으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소.”
사내가 침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영주에서 올라온 소문은 들으셨는지요?”
“떠도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소.”
“사실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어 신경 쓰지 않다가 얼마 전에 아가씨와 채 장로님을 비롯하여 대회에 보냈던 문도가 황군에 끌려 압송된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황실에서 주관하는 터라 조심스러웠지만 들키지만 않으면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하고 며칠 전에 기습을 했었어요.”
“그래서 제자 분은 구하셨소?”
“실패를 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에는 문주님이 직접 나섰죠.”
“죄인을 호송하던 황군을 두 번이나 공격했다는 말이오?”
중년 여인이 실소를 흘렸다. 과연 황실이 이렇게 과한 반응을 보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건 황실을 우롱하는 짓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여걸이라고는 들었지만, 너무 무리를 하셨어.’
하긴, 들키지만 않는다면 무슨 상관이랴!
사내가 대답했다.
“저희도 처음에는 우리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한데, 기습 후에 본문 주위에 수상한 자들이 붙어 감시하는 것을 파악했죠. 문주님을 비롯하여 몇몇 분들이 새벽을 틈타서 잠시 몸을 피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 데리고 가지 않고.”
“혹시나 해서였습니다. 괜히 무사들을 빼서 문을 비우면 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일까봐서 평소처럼 행동하기로 했었어요. 결과적으로는 틀린 판단이 되었지만…….”
사내가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일을 처리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말을 하는 사이에 허름한 객잔 하나가 강변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가 거기를 가리켰다.
“저곳에서 잠시 기다리고 계십시오.”
“어르신께서는 다른 곳에 계시단 말이오?”
“그러합니다.”
사내는 어색한 미소를 흘린 후에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홍 장로님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아직 문주님의 거처를 외부인에게 알리기가 곤란해서 그러니, 이해해 주십시오.”
중년 여인이 수긍의 뜻을 보이며 객잔으로 걸음을 옮겼다.
객잔에는 손님이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식사 때가 아니기도 했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인적이 드문 이곳까지 찾아올 사람은 없는 듯했다. 그나마 오른편 창가 쪽, 강가가 훤히 보이는 탁자에 세 명의 사내가 차를 마시고 있어 한적함을 달래줄 뿐이었다.
유령문의 홍 장로, 홍규화(洪葵花)는 제자 장청하(長靑河)와 함께 구석진 자리를 찾았다. 장청하가 자리에 앉기 바쁘게 창가 쪽의 인물을 힐끔거리며 낮은 경고음을 냈다.
“무림인인 것 같아요.”
생뚱맞다고 생각한 건가. 제자의 말을 듣고 홍규화는 픽 웃어버렸다. 강호초출이라 볼 수 있는 제자가 다른 의미에서 관심을 보인다고 판단해서였다. 무인들이 득실거렸던 선착장에서도 경계를 풀고 있더니 굳이 시빗거리도 없는 이런 한적한 객잔에서 사내들을 경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과연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세 남자 중 하나가 상당한 미남자였다. 이성에 관심이 많을 여인이라면 충분히 시선을 빼앗길만한 사내였다.
그녀의 미소가 거슬렸는지 장청하가 얼굴을 붉히며 거칠게 항변했다.
“이상한 생각 말아요.”
하지만 홍규화의 미소는 더 짙어질 뿐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한 쪽으로 흐르는 것을 민감하게 감지한 장청하는 불퉁한 표정을 짓더니 화제를 돌렸다. 이런 대화로 말다툼을 해봤자 자신만 손해라고 생각한 것이다. 때마침 객잔에서 일하는 노인이 오기도 했다.
“그보다 굳이 그분을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
간단하게 소면 두 개를 시키고는 그렇게 물었다.
장청하의 의도대로 화제가 금세 바뀌었다.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주님의 뜻을 전해야지.”
“이미 힘이 꺾였잖아요.”
“그건 상관없단다. 문주님은 어르신을 믿고 힘을 합치려 한 것이니 말이다.”
“그분이 그렇게 대단하세요?”
다소 철없는 물임이 황당했던 모양, 홍규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는 어찌 배움은 빠른데, 귀는 어두운지 모르겠구나.”
“저도 알아요. 그분이 사파의 십존 중 한 명이라고. 다만, 그 정도의 고수라도 단지 한 명일뿐이잖아요. 차라리 우리와 세력이 비슷한 다른 문파와 힘을 합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뜻이었어요.”
“전에도 말한 적이 있다만 그런 고수는 웬만한 백 명의 고수보다 낫다. 왜 문파마다 그런 고수를 배출하거나 초빙하려고 혈안이 되었는지 따져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겠느냐!”
“설마 그 정도로 실력의 격차가 심할까요?”
“쯧쯧!”
일변 혀를 차고, 일변 이해하는 것처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충고했다.
“나중에라도 그분의 무공을 구경할 기회가 생기면 한 번 확인해 보아라. 내가 말해주었던 것보다 실제로 보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크다는 걸 알게 될 테니 말이다.”
장청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홍규화가 덧붙였다.
“무인들이 왜 그런 고수의 무공을 한 번이라도 보고자 천릿길도 마다않고 쫓아다니겠느냐. 네게 한 걸음 더 진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르니 명심하여라.”
“알겠어요.”
때마침 소면이 나와서 사제 간의 오붓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이 각이 지나자 객잔으로 사내가 들어왔다. 그녀들을 안내했던 사내였다. 그가 정중하게 말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어르신께서는 오지 않으셨소?”
홍규화가 그를 따라 객잔을 나오며 던진 물음이었다.
“거처에서 나오셨지만 사람들 눈을 의식하여 여기까지는 오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오.”
“문주님을 왜 만나기로 하셨습니까? 문주님도 그 이유를 모르시는 듯하던데요.”
“정보 하나를 입수하게 된 탓이오.”
“정보라시면……?”
듣는 사람도 없는데 비밀이라도 되는 듯 홍규화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혹시, 규보에 대해 아시오?”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것과 관련된 정보요.”
사내의 눈이 동그래졌다. 흥미보다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눈빛이었다.
“규보와 관련된 정보라니 그게 무엇입니까?”
“자세히 말할 수는 없으나 중요한 문제요. 이번에 어르신을 찾아뵈는 것도 그 일로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요.”
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의 사내였다.
홍규화가 내막을 숨긴 채 설명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라 아직 정확하지는 않소. 본문에서 사람을 시켜 정보의 진위를 파악 중인데, 사실이라고 판단되면 곧바로 움직여야 하오. 정보 자체가 은밀히 퍼지는 중이라 본문과 귀문이 힘을 합하여 움직였으면 좋겠다고 문주님께서 생각하고 계시오.”
“아주 중요한 일인 것 같군요. 하지만 지금 본문의 사정이…….”
“알고 있소. 그러나 어르신께서 나서만 주신다면 큰 힘이 될 거라 믿소. 나머지는 우리 유령문이 알아서 하게 될 테니 말이오. 여차하면 다른 문파를 더 끌어들일 수도 있는 일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오.”
이때 강변을 따라 흑의인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경공술이라 모두 대화를 멈추고 그를 살폈다.
사내는 그들을 곧장 지나쳐서 객잔으로 들어갔다.
“엄청난 속도예요.”
장청하의 감탄이었다.
홍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속도보다는 자객이나 야행인의 솜씨라 하겠다. 걸음마다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은밀하더구나!”
잠시 후에 흑의인을 더한 무리가 객잔에서 나왔다. 창가에서 차를 마시던 세 명의 사내였다. 그들은 흑의인과 동행하여 홍규화의 무리가 가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자연히 앞서고 뒤따르는 형국이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목적지가 같은 것처럼 되었다. 강변에서 방향을 틀어 좁은 소로로 들어섰는데, 사내들도 그곳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지 사내가 걸음을 멈췄다.
“잠시 쉬었다가 가지요.”
그 의미를 파악한 홍규화와 장청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옆으로 비켜섰다. 뒤따르는 무리가 그들을 미행하는지 알아보려는 행동이었다.
다행히 사내들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대로 지나치는 것이다.
이번에는 앞서고 뒤따르는 형태가 바뀌었다. 그런데 길을 가면 갈수록 사내의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갈림길에서도 앞선 무리와 가는 방향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들의 정체가 수상하군요.”
“혹시 황실의 끄나풀?”
홍규화의 말에 장청하가 한 걸음 앞서며 말했다.
“잡아서 물어볼까요?”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차피 이럴 경우도 대비해 놨으니까요. 게다가 네 명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혈리금도문의 금도파파를 믿는 말투였다. 그러나 공토에서 기다리던 일행, 만약을 대비하여 미행하는 자를 막고자 대기하던 혈리금도문의 호위무사를 만난 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돌연한 무리의 등장 때문에 열 명의 호위가 그들을 가로막는 형세로 길게 벌려 섰다. 사내와 홍규화, 그리고 장청하는 그 순간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순식간이었다. 혈리금도문의 무사가 공터로 진입하는 길목을 막기 무섭게 무리에서 젊은 사내가 속도를 빨리하여 선두로 튀어나오고, 그것을 목격한 무사들이 무어라 경고음을 발했다. 청년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끝이었다. 열 명의 무사가 사내를 덮친 행동은 눈 깜짝할 짧은 시작일 뿐이었다.
윙!
홍규화 등은 사내의 기형검이 뽑히는 것만 보았다. 뒤이어 검로에서 밝은 빛이 허공에 그림을 수놓는 것처럼 늘어지며 열 명의 무사를 삼키는 모습은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했다.
“저, 저…….”
홍규화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두 눈을 부릅떴다. 옆에 있던 장청하도 대경하여 입만 벌리고 있었다. 사내는 단 한 수로 검강을 뽑아내어 열 명의 무사를 쓰러뜨린 것이다. 무사들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낙엽처럼 바닥에 떨어질 뿐이었다.
동료가 죽었으니 당연히 분한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을 것이다. 두 여인을 안내하던 사내가 놀란 얼굴로 몸을 떨어 반응했다. 그것에 문제가 되었다.
“가는 방향이 같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싸늘해서 뱀이 기어가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열 명의 고수를 너무 쉽게 죽여서 살인을 했다고 생각되지 않는 청년의 목소리였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에 여자보다 더 하얀 피부, 거기에 담긴 눈빛이 비웃음을 담은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혈리금도문과 관계가 있느냐?”
세 사람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이는 청년의 얼굴과 눈빛에 압도된 탓이었다. 그때 무리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세 사람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처음 객잔에서 보았을 때는 모두 표국의 무사로 의창을 찾은 무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무리에서 분류되자 눈에 튀어도 너무 튀는 것 같다. 평범한 사내가 무리에서 이탈하자 더는 평범하지 않은 것이다.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광인의 그것이었다. 붉게 충혈되어 먹이를 노리는 짐승의 그것처럼도 보였고, 재미로 벌레를 잡아 죽이는 아이의 잔인함처럼도 보였다. 이미 긴 세월에 묻혀버렸지만 사내가 오래전 하남성을 떨쳐 울렸던 광혈귀행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다만 점점 거리를 좁히는 녀석의 광기에 사로잡혀 몸만 굳혔을 뿐이었다.
몸서리치는 장청하의 어깨를 홍규화가 손으로 짚고 앞으로 나섰다. 사내를 상대로는 그녀 역시 자신이 없었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호를 보내면 너만이라도 도망치거라.]
마주 나오며 그렇게 전음을 보냈는데, 놀랍게도 앞선 청년이 그들을 살려주었다.
“그만!”
광혈귀행의 걸음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홍규화도 검을 뽑으려다가 동작을 멈추고 청년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무리에서 가장 어려보이는 청년이 우두머리임을 알 수 있었다.
청년이 조소 비슷한 것을 떠올렸다.
“지금부터 역도의 수괴를 잡으러 가는바, 따라와서 수괴의 한손을 거들겠다면 너희도 같은 죄로 처벌한다. 그러나 그녀와 상관없다면 가던 길 가라.”
그리고는 몸을 돌리는 것이다.
세 사람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청년의 얼굴에 잠깐 보였던 미소가 잔상처럼 남아서 소름을 돋게 했기 때문이다.
공터를 지나 다시 소로로 접어드는 무리를 보며 장청하가 떠듬거리며 물었다.
“사, 사부님이 말씀하시던 고수가 저런 사람들인가요?”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홍규화는 사내를 보았다.
“어르신은 어디 계시오?”
“조금만 더 가면 사당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때 굉음이 울렸다. 소리로 보아 그리 멀지 않은 곳인 것 같았다. 소리 뒤로 불빛이 번쩍이고, 하늘로 몇 개의 강기가 솟구쳐 올랐다. 흡사,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가을 하늘을 하얗게 밝혔다.
소란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바위가 부서지는 소리, 나무가 부러져서 넘어지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반 각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거짓말처럼 조용해져서 평소보다 더 깊은 침묵에 빠져드는 듯했다.
그들은 한참이나 자리를 지키다가 결국 걸음을 옮겨 사당으로 향했다.
“저, 저건!”
사당 앞에서 사내가 경악했다. 사당은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다. 벽은 허물어졌고, 사당도 한쪽 면이 무너져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일대는 또 어떤가. 병풍처럼 둘러친 나무가 부서지고 잘려서 황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홍규화와 장청하도 경악했다. 그들의 두 눈은 정확히 붉고, 황금빛 나는 비단옷의 시체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주변에 널린 이십 명의 혈사대(血死隊)!
혈사대가 혈리금도문주의 독립호위대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 만큼 상당한 실력의 고수로 구성되었던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 혈사대가 하나같이 몸이 잘려서 주위에 널려 있었다.
사당으로 향했던 인원은 모두 네 명.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일까?
그것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혈리금도문주, 금도파파로 알려졌고 사파의 십존으로 더 유명한 그녀와 그녀의 호위대를 단 네 명이 처리를 할 수 있었을까!
우연히 만난 것도 아니다. 역도를 거론했으니 황실의 고수일 테고, 금도파파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정확히 알고서 찾았음이 분명했다. 모든 정황으로 볼 때 녀석들, 황실의 고수로 짐작되는 놈들은 금도파파를 상대로 자신이 있었다는 말이었다.
“항주의 일이 단지 과장된 소문이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그리고 영주의 무림대회도 홍규화는 과장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 후로 떠도는 괴사의 풍문도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황실이 움직이고 있다.’
이 사실은 흘려 넘길 수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수도 있는 모호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깐의 침묵을 깨고 장청하가 두려운 목소리로 말했다.
“목은 어디 있죠?”
주변을 둘러보아도 금도파파의 몸만 있을 뿐, 머리는 찾을 수 없었다. 대답은 숲을 빠져나왔을 때 얻을 수 있었다. 누가 말해준 것도 아니고, 눈으로 보고 직접 얻은 대답이었다. 선착장 가장자리에 어느새 굵은 나무가 세워졌고, 거기에 금도파파의 늙은 얼굴이 효시되어 있는 것이다. 목 아래로 줄을 달아 흰 천이 걸려 있는데, 거기엔 황실을 모독한 죄를 묻고, 의창을 오가는 사람에게 경고하는 것처럼, 혹은 협박하는 것 같은 내용의 글귀가 붉은색으로 적혀 있었다.
그것을 지켜본 두 사제는 오늘 운이 아주 좋았다고 생각했다. 금도파파를 만난 중에 황실의 고수와 마주쳤다면 자신들도 금도파파와 혈사대처럼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 테니까. 그 생각을 다른 사람도 하고 있었다.
“굳이 그들을 살려둘 필요가 있었습니까?”
흑풍행의 의문이었다. 그가 본 바로는 숲에서 만난 세 사람 중에 혈리금도문의 집사가 있었다. 객잔으로 달리다가 마주쳤을 때 이미 사실을 파악했고, 사자비에게도 고한 바 있다. 한데 사자비는 듣고도 모른 척 개의치 않았다. 사당 근처까지 움직일 때도 그들과 함께 이동하더니 결국에는 살려 보내지 않았나. 그것이 의문이었다.
사자비기 선착장에 걸린 금도파파의 머리를 보며 비소를 드러냈다.
“우리의 활약상을 소문내줄 사람들이 필요하잖은가.”
단순히 함정을 파서 무림의 이름 높은 고수를 잡은 것이 아니라 황실이 실력으로 벌했다는 확실한 소문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황제를 기쁘게 할 밤참 정도랄까!
하지만 흑풍행은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다.
제2장 웅크린 검은 용
1
사천 성도, 북으로 십 리!
그곳은 사람의 발길을 거부한다. 경관이 아름답고 맑은 호수까지 있어 산책을 즐기기엔 적당한 곳인데, 찾는 이가 없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이유가 있다. 거대한 장원 하나가 수문장처럼 그곳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장원은 조금 특이했다. 원래는 붉은 색인데, 세월을 이기지 못해 누렇게 바랜 담장이 장원 전체를 두르고, 그 너머에 담장만큼이나 오래된 고층 전각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매캐한 냄새가 항상 장원 내외를 들끓는다면 아주 특별해진다. 독초와 약초를 다루는 냄새인 것이다.
사천 성도 부근에 그런 장소가 있다면 정체는 하나밖에 없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독문, 바로 당문의 본가였다.
휘적휘적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인적이 드문 곳이라 오늘 정문을 책임진 당두성(唐頭成)은 경계무사를 앞세우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누가 접근합니다.”
무사 하나가 그렇게 당두성을 깨웠다.
당두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일은 정문 경계였고, 갑자기 사촌형이 성도로 가는 바람에 대신 이 일을 맡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떤 놈이 귀찮게 하냐는 얼굴로 앞을 보는데, 접근하는 인물을 보고 놀란 눈이 되었다.
“형님!”
절로 소리친 당두성은 부리나케 달려나갔다. 검은 장삼을 입은 사내를 보던 그의 눈은 경외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꿈자리가 좋더라니!’
오늘 운이 좋았다. 원망했던 사촌형이 고마울 지경이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검은 장삼자락을 휘적이던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밝은 미소를 보내왔다. 어쩐지 헤퍼 보이는 미소였다.
“아아! 그간 잘 있었나?”
“그럼요.”
당두성은 여부가 있냐는 듯 고개를 꾸뻑 숙였다.
“가주님은 계시고?”
“가주님 만나러 오셨습니까?”
“사천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알려드릴 정보가 있어 잠깐 시간을 냈지.”
“지금 집무실이 계실 겁니다. 따라 오십시오.”
당두성은 급히 앞장섰다. 상대가 당문 내부를 잘 알고 있지만 직접 안내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그것도 흔치 않은 이유였다. 무림에 내로라는 후기지수를 굽어보는 최고의 고수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흔할까. 그것도 무림 정도의 우상, 구파일방의 명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고의 고수와. 정사를 막론하고 무림의 후기지수라면 누구나 우상처럼 여기는 자라면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당문과 소림이 키워낸 기재!
천하에 둘도 없는 무공천재!
무림사에 전무후무할 후기지수!
여러 가지 수식어가 따라 붙지만 결국 한 가지로 귀결되는 사내. 흑룡이었다.
흑룡과 당문의 관계는 깊고 깊다. 흑룡의 아버지가 당문의 가신으로 향주를 지냈다는 점부터, 그가 죽고 남겨진 두 아들을 보살펴준 곳이 당문이라는 사실까지. 거기다 흑룡의 동생을 양아들로 받아들인 가주였다.
당두성은 힐끔힐끔 흑룡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어릴 때 같이 당문에서 지냈다지만 소림사 전대방장의 제자가 되어 당문을 떠난 후에는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오늘처럼 불쑥 찾아올 때도 있었으나, 때마다 가문의 어른들에게 불려가서 그들을 상대하기에 바빴다. 당두성 같은 후기지수는 그와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잡을 수 없었다.
검은 장삼만큼이나 까만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검은 눈동자도 그렇고, 굳게 뻗은 코도 그랬다. 물론 평범한 얼굴이지만, 적어도 당두성에게 만큼은 가장 빛나는 사내가 분명하다.
“내 얼굴에 뭐 묻었나?”
당두성이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요. 그저 오랜만에 봐서…….”
“그보다 사람들이 별로 없네?”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다들 바쁩니다.”
“이상한 소문?”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그보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흑룡, 고룡탁(古龍卓)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당두성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간 풀지 못했던 의문이 많았다. 정말 오늘은 운이 좋은 것 같았다.
“형님께 무공을 가르치신 분이 소림사의 전대방장이신 원효 대사와 현 무당파의 장문진인이라고 들은바 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흑룡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걸!”
애매모호한 답이라 뭔가 더 있는 느낌인데, 당두성은 감격한 표정만 보였다.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소림과 무당이다. 두 문파의 무공을 동시에 배울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은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당문의 가주에게 특별히 무공을 전수 받았으니, 당대 최고라는 세 종류의 무공을 배운 셈이다. 권각술의 으뜸인 소림의 무공, 검법으로 첫 째인 무당의 무공, 암기술의 원조인 당문의 비기. 모든 것이 무림인이라면 원하고 원하는 것이었다.
물론,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한 문파의 비급이 다른 두 문파로 흘러들어갈 우려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 세 문파의 수장이 비술을 전수한다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더 큰 문제는 흑룡이 소림의 승려도 아니요, 무당의 도인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당문 사람이냐. 그것도 아니다. 객관적으로 따지면 그는 떠돌이 잡객정도로 봐야한다. 출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자가 속가제사 형식이 아니라 적전제자(嫡傳弟子:직전제자 중에 정통성을 이어받은 자.)의 형태로 무공을 사사했으니 놀라울 뿐이었다. 물론, 여기엔 약간의 사연이 있었다.
흑룡은 어릴 때 그리 특별한 아이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그리 똘똘해 보이지 않았고, 잘생긴 편도 아니었다. 말썽이란 말썽은 다 부리는 코흘리개. 좋게 표현하면 개구쟁이 정도? 오히려 천재는 그의 동생, 고원탁이 더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었다. 무공에 천부적인 두각을 나타며 당문의 어른들을 종종 놀라게 했으니. 오죽하면 가주가 당가의 성을 주고 양아들로 삼았을까.
반면, 흑룡은 당문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재능을 보이지 못했다. 어쩌면 당문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처음으로 알아준 사람은 당시 방장 직을 사제에게 넘기고 무림을 떠돌던 원효 대사였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 당문의 개문잔치가 있음을 알고 들렸다 흑룡을 발견한 것이다. 원효 대사는 첫눈에 흑룡을 알아보고 그를 제자로 데려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가주는 흔쾌히 허락했다. 소림 내에서도 제자를 받지 않기로 유명했던 무림의 거두가 왜 흑룡에게 관심을 두는지 의구심이 일었지만, 흑룡의 미래를 위해서 좋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당가의 사람 중에 소림의 정식 제자가 있다면 훗날 소림과 깊은 연을 맺을 수 있다는 바람도 한몫 거들었다. 고원탁을 양아들로 삼아서 동생을 빼앗았다는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정작 당사자가 원효 대사를 거부를 한 것이다.
흑룡은 원효 대사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 이유는 두고두고 당문 내에서 화자 될 웃지 못 할 이야기였다. 당시 열두 살이었던 걸 생각하면 무리는 아니었다. 무림 최고명숙의 유일한 제자는 흑룡에겐 전혀 중요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이야기가 나오면 아직도 당문 어른들은 배를 잡고 웃는다. 대머리가 되기 싫다는 것이니 말이다.
– 전 염소가 아니에요. 삼시세끼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요. 그리고 저 할아버지처럼 머리를 빡빡 밀기도 싫어요. 중이 되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어요.
그러면서 소림으로 못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옹고집도 이런 옹고집이 없어서 당가를 당혹스럽게 했다. 놀라운 것은 원효 대사였다. 끝내 고집을 부리는 흑룡에게 중이 되지 않아도 좋다는 허락을 한 것이었다. 단지, 소림인임을 시인하고 자신의 제자가 되어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했다.
그때 가주의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저렇게까지 회유해서 흑룡을 데려가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이 보지 못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미 허락을 한 상태였고, 흑룡도 원효 대사에게 넘어간 후였다. 훗날 흑룡의 체질과 재능을 알았을 때 두고두고 후회를 했고, 지금도 소림에 흑룡을 빼앗긴 것을 안타까워했으나 이미 새장을 벗어난 새일 뿐이었다. 그래도 당문에 엮어두고 싶어서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그를 당문으로 불러들여 일 년 간 자신의 비기를 전수하고 흑룡이 당가의 가족임을 확실히 했다.
그렇다면 무당의 제자는 어떻게 된 건가. 그 또한 아주 재밌는 일화가 있다.
한창 흑룡에게 무공을 전수하던 원효 대사를 무당의 장문진인이 찾은 적이 있었다. 제자를 받을 생각이 없다던 원효가 조건까지 달고 고룡탁이라는 제자를 간신히 얻었다는 이야기가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탓이었다. 그런데 흑룡이 수련하는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해 버렸다.
당시 흑룡은 막 자신의 재능을 폭발시키던 시기였다. 내공수련을 하지 않아도 절로 내공이 쌓이는 체질이라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고, 원효 대사의 노력으로 무공에 대한 이해능력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커지는 때였다. 무당의 장문진인 양조(良照)는 사심이 일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뿌리칠 수 없는 욕심이 그를 사로잡았다. 해서 당장 원효를 찾아가 물었다.
– 룡아가 소림사의 정식제자가 아니라던데 맞소?
원효 대사는 물음 자체를 불쾌해 했지만, 맞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양조가 안면몰수하고 또 물었다.
– 절로 내공이 쌓이는 체질이던데, 그러고 보니 소림의 내가심법을 전수받지 못한 것 같소. 그 또한 맞소?
원효는 더욱 불쾌한 표정이 되었지만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심법을 전수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양조가 또 물었다.
– 이제 초보적인 권각술을 배우는 것 같았소. 소림의 심법을 전수받지도, 소림의 비기를 전수받지도 않았다. 소림의 기명제자도 아니다. 그럼, 사문이 없다는 뜻 아니오?
원효 대사는 정녕 화가 났다. 그의 나이 일백 세를 넘긴 때였는데, 소림에서 나고 자란 것을 생각하면 일백 년 이상을 수양에 몸 받친 셈이다. 그 수양이 한순간 깨지는 느낌을 받았다. 심중에 끓어오르는 적의가 상당했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 룡아는 빈승을 사부라 여기고 평생 함께 하길 원한다오.
그때 양조가 결정적으로 원효에게 일검을 내질렀다.
– 룡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소. 나를 따라가겠다고 하던걸요.
원효는 당장 달려나가 흑룡을 찾았다. 그리고 양조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했다. 그때 흑룡은 무당이 소림을 놀리는 시초가 될 명언을 남기게 된다.
– 무식하게 주먹다짐 하는 것보단 검을 사용하는 게 멋지잖아요. 전 검법을 배울래요. 전 저 할아버지 따라가고 싶어요.
원효는 물 빠진 가죽주머니처럼 힘없이 서 있었고, 따라왔던 양조는 무안해하면서도 만면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양조도 자신의 제안이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원효에게 다른 제안을 했다. 흑룡이 소림인이며, 원효의 제자임을 인정하겠다. 단지, 소림의 제자이지만 무당의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인정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무공을 가르칠 기회를 달라는 이야기였다.
원효는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양조의 꾐에 넘어가버린 흑룡이라 자칫 제자를 무당에 빼앗길 수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래서 흑룡은 원효에게 육 년 동안 기본을 닦게 되고, 일 년 간 당문에서 비기를 익혔으며, 스무 살 때 무당으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이미 흑룡은 환골탈태를 겪어 화경의 고수가 되어 있었다. 후에도 체질이 변하지 않아 빠르게 내공이 쌓이던 중이었고, 무당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곳에서 그를 대적할 고수가 셋을 넘지 않았다. 다행히 양조는 그보다 고수였고, 가르칠 검법도 많았다.
흑룡은 삼 년간 무당에서 무공을 배우고 다시 원효에게 소림의 상승무공을 배우러 갔는데, 당문에서 무당으로 갈 때 무림강호를 격동시킬 업적을 남겼다. 무당에서 소림으로 갈 때 또다시 몇 가지 기행을 거쳐 흑룡이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는데, 항상 검은 장삼을 입어서 생긴 별호였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구파일방에게 흑룡은 특별한 존재로 통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구파일방의 회합에 벌어진 비무에서 다른 후기들을 압도했다는 사실보다, 후기들을 상대할 때 삼 초를 넘긴 적이 없다는 사실보다 더욱 그를 특별히 빛냈던 일은 원효 대사와 양조진인의 말이었다.
원효 대사는 회합의 마지막 자리에서 구파일방의 명숙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빈승은 흑룡을 얻지 못했소. 다만, 그가 빈승을 얻었을 뿐이라오. 내 평생 그런 행운이 없었으니, 당장 죽음을 맞이해도 후회가 없을 것이오!
뒤이어 양조진인이 이렇게 말해서 모두를 경악케 했다.
– 그는 무공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무공이 그에게 사용되고자 존재해 왔다. 한평생 후회 없이 살았으나, 흑룡을 가르치며 내 한계를 절감했노라!
그러면서 흑룡을 구파일방 모두의 제자로 삼길 제안했다. 두 사부가 그를 감당하기에 모자람을 인정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삼 년 후, 병들어 죽어가던 화산파 장문인이 흑룡에게 자신의 심득을 전하고 눈을 감을 때, 이런 말을 남겼다.
– 강호에 흑룡의 명성이 대단하다고 하나, 내가 아는 흑룡이라면 속절없이 떠도는 소문은 그의 능력을 일 할도 표현하지 못했다. 그가 악인이었다면 무림사를 새로 썼으리라!
그런 흑룡과 같이 걸어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당두성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물론, 속세에 벗어난 구파일방의 일이라 세세한 부분까진 알지 못했지만 그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흑룡은 하늘 위의 하늘이었다. 특히, 무공에 대해 조언을 할 때는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난 저게 마음에 든단 말이야!”
갑자기 걸음을 멈춘 흑룡이 손을 들어 내원 정문을 가리켰다. 그의 시선은 정문 위에 걸린 현판에 고정돼 있었다.
‘幼者敬長 不恥下問(유자경장 불치하문).’
‘아이는 어른을 공경하고, 어른은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세가의 특성상 화합을 내세우는 현판이었고, 내원 바로 앞에 회의실이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적절한 내용이었다.
당두성도 그곳을 바라보다가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더 가르침을 받고 싶지만 이제 흑룡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집무실에 가주님이 계실 겁니다.”
흑룡이 하하거리며 웃었다.
“고맙다.”
그리고는 당두성의 기대를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그런데……. 내가 너와 친했던가!”
당두성은 황당한 표정이 되어 실망한 듯 외쳤다.
“형님!”
“농담이야, 농담!”
그러면서 회의실로 걸어가더니 갑자기 뒤돌아 물었다.
“한데, 네 이름이 뭐였지?”
당두성이 소리쳤다.
“두성입니다, 당두성!”
“하하, 농담이래도.”
하지만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걸어가면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잊을 수가 있나!’
어릴 때 흑룡과 붙어 다니며 사고를 쳤던 무리 중 하나가 바로 당두성이 아닌가.
당두성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린 채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있는 것 같았다.
2
갑작스런 방문이 익숙한 모양이다. 흑룡을 본 가주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오랜 벗을 만난 사람처럼 웃었다.
“네놈이 여긴 어쩐 일이냐?”
꾸중 같지만 가주의 입가엔 미소만 가득했다.
흑룡이 공손히 포권하며 예의 헤픈 미소를 흘렸다.
“사천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들렸습니다.”
“대사께서는 안녕 하신가? 몸이 편찮으시다는 말을 들은 듯한데.”
“무슨 말씀을! 저보다 오래 사실 것 같던데요.”
쾌활하게 웃는 흑룡을 보며 가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마나 머물다 갈 셈이냐?”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았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곧 가야 해요.”
“소림의 일이냐?”
“구파일방 전체의 일이죠.”
그러면서 허풍 치듯 말했다.
“제가 아니면 그 순진무구한 분들을 누가 이끌겠습니까, 하하하!”
“오만방자한 놈 같으니라고!”
“사실인걸요.”
흑룡은 어깨를 으쓱했다. 믿어달라는 표정인데, 가주는 무시하고 본론으로 넘어갔다.
“할 말이 무엇이냐?”
“무림에 이상한 소문이 떠돈다면서요?”
“이상한 소문이라니?”
“아시지 않습니까. 규보에 대한…….”
가주의 표정이 굳었다.
“그 일을 구파일방에서 간섭한다는 말이냐?”
“어르신들께서는 이일의 위험성을 아주 깊이 생각하고 계십니다. 혈풍이 불거라나! 저야 관심 없지만 저를 믿고 맡긴다니 해야죠. 하하하!”
가주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흑룡의 눈을 들여다보며 심중을 잃는 듯 신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가 물었다.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로구나.”
흑룡이 움찔했다. 그 형태를 본 가주는 더욱 확신했다.
“무덤이 있는 곳이 사천이로군. 그래서 네가 온 거야. 그렇지?”
“저, 저는 아무 말 안 하렵니다.”
이번에는 가주가 웃었다. 소문으로 떠돌던 정보에는 무덤에 대한 장소가 확실하지 않았다. 심증이 가는 곳이 중원에만 열 군데였데, 그중 사천이라면 두 군데로 좁혀진다. 이건 결정적인 정보였다. 구파일방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확실했다.
“가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저도 기쁘지만…….”
흑룡이 머리를 긁적이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이 불효를 저질러야할 것 같습니다.”
“나에게 정보를 흘리려고 온 것이 아니었더냐?”
“저야 마음은 굴뚝같죠.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구파일방은 이번 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서요. 저는 당문이 이 일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러 온 겁니다.”
“우리에게 빠지라는 말이냐?”
“무림맹도 조만간 정보를 얻을 것이고, 그들도 나설 것이 분명하잖아요. 당문도 무림맹의 소속 문파가 아닙니까. 여러모로 빠지는 것이 좋겠죠.”
하지만 가주의 생각은 달랐다.
“이건 아주 귀한 무공비급에 관한 문제다. 비급을 얻고자 노력하는 일이 무슨 문제며, 맹이 왜 간섭한단 말이냐.”
“정사 모두가 이리떼처럼 달려들 테니까요. 뭐, 그 전에 제가 찾아서 장경각에 봉인시켜버리면 그런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흑룡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가주가 물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라면?”
“정사간의 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농후하겠죠. 그래서 구파일방은 이 일에 한에서 살생에 대한 금제를 풀었습니다. 저를 선봉으로 내세운 것도 그런 이유가 크죠. 저야 승려도, 도인도 아니니까요.”
가주가 두 눈을 치떠 흑룡을 노려보았다.
“만약, 당문이 끼어든다면 어찌하겠느냐?”
“저를 만나지 않길 바라셔야 할 겁니다.”
가주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잠시 후, 표정을 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회의를 열어 심사숙고 하마.”
“그럼, 저는 가주님만 믿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런. 오랜만에 왔는데 식사도 한 끼 안 하고 가겠다는 게냐? 모두들 반가워 할 텐데?”
“제가 얼마나 바쁜 몸인데요. 무림의 안녕이 제 어깨에 걸려있다고 사부님께서 누누이 강조를 하셨습니다요.”
“그놈, 허풍은!”
그래도 가주는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내가 원아의 일을 빨리 떨친 것 같아서 걱정을 덜었다.”
“원탁이요?”
흑룡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놈이 왜요? 사고라도 쳤습니까?”
가주는 놀란 얼굴로 흑룡을 보았다.
“드, 듣지 못했더냐? 대사께 연락을 보내었는데?”
“……!”
아무래도 원효 대사가 흑룡에게 사실을 털어놓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제자의 혈육이 죽었다는 사실을 말하기가 껄끄러웠을 것이다. 그 덕분에 가주만 난처해졌다. 그조차 당원탁의 죽음에 크게 분노했었고, 자신의 입으로 그 일을 다시 끄집어내려니 마음이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휴!”
가주의 한숨이 탁자를 무너뜨릴 듯 아래로 깔렸다. 그는 신중하게 당원탁의 일을 설명했다. 무림대회에 갔던 일과 그곳에서 벌어졌던 모든 사실을. 그동안 흑룡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듣다가 이야기가 끝났을 때, 원래의 장난스런 표정은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황실의 일이니 복수를 할 수가 없다?”
한참 후에 흑룡이 뱉어낸 말이었다.
가주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적어도, 원탁이를 그런 상황에 빠뜨린 녀석이 누구를 죽였는지 알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실의 대신이 그 일을 주도했었다. 나도 보복을 위해 알아보았으나,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더구나. 그래서 잊었으니, 너도 잊어라.”
“황실의 관리 따위가 무섭다는 말씀입니까?”
“그의 권세가 낮지 않다. 지금 황실의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자다. 만약 그를 죽인다면 마음은 편하겠으나 뒤를 감당할 수 없다. 평생 황실의 추격을 받으며 도망자가 되어야 한다다는 뜻이야.”
분노한 듯 자리를 박차고 흑룡이 일어섰다. 가주는 입을 다물었다.
“가주님께 아들이고, 제겐 동생입니다. 복수도 할 수 없다면 그게 무슨 가족입니까.”
“내 마음이 너와 다르지 않다만, 부디 철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흑룡은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다가 가주를 향해 물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놈!”
“말씀해 주십시오.”
불같이 들끓는 흑룡의 눈을 본 가주는 말릴 수 없겠다는 생각했다.
그의 굳게 다물린 입술이 움직였다.
“황실 동창 친황대 총감, 사자비라는 자다.”
“사자비!”
마음에 되새기듯 말하고는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남겨진 가주는 인상을 쓰며 두 눈을 감아버렸다. 원효 대사가 왜 말하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제3장 타성에 젖은 자들
1
하남 정주(鄭州)에서 신정(新鄭)을 잇는 관도는 넓게 펼쳐진 황색 비단 길을 가로지른다. 바짝 마른 삭막한 기후 때문에 이삭이 떨어져 황량한 느낌마저 드는데, 사람을 유혹하는 손짓처럼 바람에 시달려 너울거린다. 그 끝에 거대한 성이 외롭게 걸려 있었다.
황량한 벌판에 삭막한 성 하나!
‘正度聯盟(정도연맹).’
현판에는 웅장한 필체로 그렇게 양각되어 있었다. 이곳이 정도 무림을 이끄는 무림맹의 총단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알아보았는가!”
실내의 은은한 분위기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탁자를 앞에 두고 차를 홀짝이던 노인이었다. 그는 맞은편에 서 있던 사십대 중반의 사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사내가 대답했다.
노인은 찻잔을 내려놓고 곱게 기른 수염을 쓰다듬었다. 왜소한 체격에 백의무복을 입고, 머리와 수염이 온통 하얘서 신선 같은 느낌을 주는 노인의 행동이었다.
정기가 가득한 노인의 눈빛은 천장으로 향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인데, 잠시 후에 그의 시선이 내려와 사내에게 향했다.
“항주와 영주의 일이 비슷하다고 보는가?”
“모두 황실이 개입했다는 점을 보자면 그렇습니다.”
“요즘 항주는 어떤가?”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항주무림은 아직도 숨죽이고 있습니다. 문파마다 힘도 많이 꺾인 것 같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하나, 제갈세가와 사마세가는 욱일승천이라지?”
“그렇습니다만.”
노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사내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생각은 필요 없습니다. 그 시기에 있었던 일을 정확히 알아내지 못한다면 어떤 판단도 무의미한 것이죠. 대부분의 문파가 함구하고 있어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짐작하는 바가 있을 게 아닌가. 숨기지 말고 말해 보시게.”
“그럼, 짐작만 말하겠습니다.”
노인이 말하라는 표시를 주었다.
“문파 간의 분쟁을 목격했다는 자가 없습니다만, 조사한 바로는 몇몇 문파의 문도가 확실히 줄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짐작대로라면 큰 싸움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황실이 개입한 시기임을 보면 말이 안 되는 행동이죠.”
“그 말은 황실이 무림의 분쟁을 조장했다는 뜻인가?”
“짐작만 할 뿐입니다.”
“계속해 보게.”
“황실이 항주를 어지럽힌 후에 여러 문파가 손실을 보았다면 정확히 두 개, 제갈세가와 사마세가만큼은 큰 이익을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세력이 관의 통제를 받는데 비해 그들만 제외되었으니까요. 관에서 상당한 편의를 봐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아! 물론, 이 또한 아직 확인된 바 없는 제 짐작임을 감안해 주십시오.”
“제갈세가가 그간 손을 뻗치지 않았던 사업에도 끼어들고, 가지고 있던 사업도 확장했다지? 실력 있는 무사도 최근 들어 많이 고용한다고 들었네만.”
노인이 장난꾸러기 같은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과연, 짐작이라고 하여 흘려 넘길 사안인가!”
물론, 그럴 수 없다. 정도에 들어간다는 두 세가가 황실을 끌어들여 세력 확장을 했다면 당연히 맹이 나서야 하는 일이었다. 항주에는 정파도 있고, 그들 또한 피해를 본 것이니 말이다. 세가를 위해 다른 정파를 이런 식으로 골탕먹이는 일은 맹에서 통제를 해야 한다.
“애초 중요한 문제로 여기지 않아 세 명의 조사관만 파견했던 일이었습니다. 무림대회가 있은 후, 조사관을 더 파견하여 면밀히 조사하라했으니 그때까지는 관망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긴, 새색시의 엉덩이 반점도 첫날밤을 치러야 알 수 있다 했으니…….”
사내의 이마가 잠시 구겨졌다.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그러지 마시게. 농 한 마디 던졌을 뿐이네. 그보다 영주의 일은 어떤가? 항주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자네가 아닌가!”
“혹시 기억하십니까? 어명을 받고 항주로 파견되었던 관리에 대한 보고를.”
“기억하네만.”
“영주에도 그가 나타났습니다.”
“호오! 황궁 최고의 고수라 짐작한다는 그 젊은 관리 말인가? 백궁의 설혼마녀와 호각을 이뤘다던?”
“그렇습니다.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는 최소한 화경의 고수이고, 그 이상일 가능성도 아주 크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 정도라면 황궁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그럼, 그 소문도 사실인가?”
“……?”
“대회에 참석했던 모든 무인을 잡아서 압송했다던 소문 말일세.”
“사실입니다. 그리고 조사 중에 놀라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오래전에 흑접에서 얻었던 정보를 기억하시는지요?”
“황실에서 뛰어난 고수를 양성했다는 정보는 기억하네.”
“이번 영주의 일로 그 정보가 가시화되었습니다. 또한, 그 주최가 얼마 전에 황실의 권력을 가로챈 동창의 내부조직, 친황대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들이 영주에 파견되어 무림인을 모두 잡아들였습니다.”
노인이 두 팔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깍지를 꼈다.
“흥미로운 일이로군!”
“단지, 흥미롭다는 말로 넘길 사안은 아닌 듯합니다.”
“항주도 그렇고, 영주도 그렇고, 많은 불법적인 일이 자행되었지. 충분히 나설 만한 상황이 아니었나!”
“그렇게 추상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거기엔 마교도까지 가세한 상태. 어부지리를 택했다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쉽게 무림을 제압했습니다. 거기다 관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 황실에서 나섰다고 보기엔 그들의 행동이 과했습니다. 한창 새로 얻은 권력을 정비해야 할 시기가 아닙니까. 영주까지 가서 무림의 일에 간섭했다는 것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줄로 압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떠도는 괴사가 그것을 증명하니까요.”
노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일도 황실이 관여했다는 뜻?”
“압송 중에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노인은 들은 기억이 있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혈리금도문이라지?”
“그렇습니다. 그 일로 인해 보는 눈도 많은 시간에 황실의 고수를 투입하여 혈리금도문을 멸문지화 시켰습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사라진 몇 개의 문파도 같은 형식임이 드러났습니다. 아직 진상이 밝혀지지 않아 소문만 무성한 듯한데, 황실이 움직였다는 증거가 너무 많아서 금방 기정사실이 될 듯합니다.”
“그러고 보면 꼭 경고문 같네, 그려.”
“누굴 향한 경고인지가 중요하겠죠.”
“누구에게 하는 경고 같은가?”
“대부분 권력을 쟁취한 뒤에는 적아를 구분하여 세력을 넓히고, 적을 누른 다음 파벌을 만듭니다. 차지한 권력을 확고히 하는 작업이죠. 친황대는 그런 작업 대신 무림을 공격했습니다. 반대파벌을 위협하는 수단으로는 적당하지 않은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자네 말은 무림이 목적이었다는 말인가!”
“물론, 짐작일 뿐입니다.”
노인은 은근한 미소를 보였다.
“이번 짐작은 너무 앞서간 것 같네.”
“많이 앞서 나갔지요. 그러나 가능성이 아주 없지도 않습니다.”
“가능성이라…….”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황실이 얻을 것이 없지 않은가. 외부의 일이에는, 특히 득이 없는 일이라면 하늘이 두 쪽 나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인물들일세.”
“과연 그럴까요?”
“아직 말하지 않은 뭔가가 있는가!”
“처음부터 자금의 흐름을 중심으로 조사했었습니다. 대회 이후부터 무너진 문파의 자금이 관부에 압류되었다가 황실으로 유입되더군요. 그 액수가 상당합니다.”
“돈이 탐났다?”
“그것이 이유라면 좋겠지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관심을 두고 지켜봐야 함은 분명합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은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하나, 노친네들에게는 확실한 무언가가 밝혀질 때까지 함구하시게.”
노친네가 현재 무림맹을 이끌어가는 맹의 중심, 열일곱 명의 장로라는 사실을 사내는 잘 알고 있었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문제 삼길 좋아하는 그들이 아닌가. 사실을 알아보게. 득달같이 찾아와서 탁상공론이나 벌이자고 할 걸세.”
듣던 사내가 처음으로 미소 같은 것을 떠올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노인이 말한 탁상공론이 무림 전체의 일을 관통하고 해결책을 찾으며 무림맹의 위엄을 세우는 중대사라는 것을. 자칫 잘못된 결정이 그날 회의에서 결정되면 무림 전체가 영향을 받고 무구한 피를 흘리게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앞의 노인은 그 자체를 무시하는 태도였다. 전무림이 우러러보는 맹의 장로들도 노친네라 싸잡아 말하는 것으로 보아 불만이 대단한 듯하다.
“그분들이 하시는 일이 아닙니까.”
사내는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다른 자의 입에서 노인이 언급했던 유의 말이 나왔다면 검부터 뽑아들었을지도 모른다. 맹에 소속된 무사라면 누구라도 그리했을 것이다. 명백히 무림맹을 비하하는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하긴, 그럴 경우는 없다고 봐야 한다. 누가 감히 맹의 장로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앞의 노인은 그리했다. 그리고 맹과 맹의 인물을 비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무림 전체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 어떤 대단한 감투도 그 앞에서는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자. 바로 무림맹주이자 천하제일도로 불리는 벽라도패 송무광이 노인의 신분이었으므로.
노인, 송무광은 허허 웃었다. 맹주라지만 전혀 맹주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랜 시간 맹주로 추대되어 자리를 지키다 보니 절로 생긴 여유일지도 모른다고 사내는 생각했다. 십오 년 전, 맹에 파견되어 맹주를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이런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여유는 철철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이젠 진지한 문제도 장난스럽게 대화를 유도할 정도이니……. 이런 장난스런 대화 속에서 전무림의 판도를 뒤바꿀 계획과 지시가 나온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까!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답도 없다는 사실을 느끼곤 하지.”
맹주 송무광의 미소는 짙어졌다.
“뭐든지 문제가 되기 때문일세. 옆집 처녀가 넘어졌다는 소문만으로도 전날 밤 처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의견을 주고받을 위인들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리고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젓는 것이다.
사내는 그 모습을 보다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놔주었다가는 어디로 대화가 흘러갈지 짐작도 할 수 없다. 여러 번 겪어 보았다.
“또 다른 보고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보고와는 달리 맹주님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겁니다.”
“무언가?”
“규보에 대한 정보입니다.”
“규보?”
맹주는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는 얼굴이었다.
사내는 여전히 진지했다.
“무덤에 대한 것입니다.”
사내의 예상대로 맹주는 처음과 달리 빠른 반응을 보였다.
“무덤에 대한 정보라니?”
“말한 대로입니다. 암암리에 무림에 정보가 흘러다니고 있습니다. 아직 파악되지는 않았습니다만, 몇몇 세력이 소규모로 정보조직을 급조하여 은밀하게 진상을 파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발, 그 조직에 정파는 섞이지 않았다고 말해주게.”
“공교롭게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흐음!”
잠시 침묵을 지킨 맹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규보의 무덤이 실체 한다 믿는가?”
“아직 알 수 없습니다만, 맹에서도 조사단을 짜고 있습니다. 명만 내리시면 곧바로 움직일 생각입니다.”
“결국, 노인네들을 불러서 의논할 거리가 생긴 셈이로군.”
맹주의 입에선 깊은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 갑자기 몸에 힘을 주어 허리를 곧게 폈다. 조금 전의 노인이 맞나 싶을 정도. 눈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맹에 소속된 문파가 혹시 그 일에 가담되었나?”
맹에 소속된 문파라면 열일곱 개의 좌석을 차지한 정도세력을 말한다. 무림맹에 고수와 장로를 파견한 문파였다.
“세 문파가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을 포착했습니다. 묵천문과 환영문, 천황문입니다.”
“장로들도 그 사실을 아는가?”
“아직 모르고 계십니다. 아마도 세 문파는 무림맹과는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움직이려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모습을 드러내기가 껄끄러울 테니까요. 문제는 그런 문파가 갈수록 늘어나리란 점입니다. 만약, 규보의 무덤이 사실이고, 그것이 밝혀지는 날이면 큰 혼란은 피할 수 없을 듯합니다.”
노여움, 혹은 질책인 것 같았다. 맹주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
“명문정파라는 작자들이 어찌 사파와 다를 바가 없나. 이래서야 맹의 위신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겠는가.”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리 생각하시는가?”
“규보의 무덤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맹주님이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많은 무림세력이 달려들 겁니다. 특히, 규보의 무공이 그곳에 있다면 정사는 물론이고, 마교까지도 관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규보는 인간의 굴레를 벗어던진 자라고 했으니까요. 그런 자가 만든 무공이라면 대단하다 생각할 수밖에 없겠죠.”
“규보가 죽고 난 직후 비급이 떠돌기도 했었지. 결국,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고 들었네만. 백일홍이라 했던가!”
“맞습니다.”
“사라진 비급이 무덤에 보관되었을 리 없을 걸세. 발이 달려서 무덤으로 기어들어갔다면 또 모를까.”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비급은 두 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덤에 하나가 있을 거라더군요. 아무튼, 전설에 따르면 백일홍은 어떤 것보다 빠른 속성을 이룬다고 전해집니다. 독보천하(獨步天下) 할 방법이 거기에 담긴 셈 아닙니까!”
“해서 분쟁을 막기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겐가?”
맹주는 한참이나 혀를 차며 명령처럼 말했다.
“조사단을 통하여 하루속히 진상을 파악하시게. 구파일방의 협조도 있어야 할 것 같으니 연락하고.”
“구파일방은 이미 그 일을 요주시하고 있습니다.”
맹주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구파일방이?”
“그 정도로 이번 일이 무림을 위협하는 큰 사안이라고 판단한 것이겠죠. 어쩌면 그들은 이미 소문의 사실여부를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장로회를 소집해 주시게. 구파일방이 끼어들었다면 큰 걱정은 없겠으나, 정파가 이 일에 끼어드는 것만이라도 사전에 막아야겠네. 소문이 번지는 것도 힘이 들겠지만 막도록 해야겠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때 아닌 불청객 때문에 회의는 소집되지 못했다. 사내가 회의실을 나가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린 것이다.
정문을 지키는 수문장임을 알아본 사내는 인상을 구겼다. 무림맹의 모든 일을 관리하는 사내, 맹의 두뇌라고 불리는 혁련후(赫連嗅)와 맹주의 밀담을 방해해도 좋을 자는 장로들을 제외하고는 총단엔 없었다. 자연스럽게 생긴 불문율 같은 것인데, 이렇게 예고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때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혁련후는 무사를 질책하지 않았다. 안색으로 보아 중요한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
무사가 난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급히 나가보셔야겠습니다.”
혁련후와 맹주는 대답 없이 무사만 바라보았다.
왜?
의문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자 무사가 급하다는 듯 말했다.
“황실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혁련후는 놀란 눈이 되어 맹주를 보았다. 맹주 또한 무사에게 시선을 거두어 혁련후를 마주 보았다. 뜻밖의 방문인 것이다.
무림맹의 두뇌. 그것은 혁련후에겐 맞지 않는 옷과 같았다. 남들이 상상하는 신통방통한 꾀를 부리지도 않을뿐더러, 실제로 비상한 두뇌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고지식해서 가까이하는 사람마다 답답함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혁련후의 고지식한 면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만의 재능이라 할 수 있었다. 단점을 장점으로 바꿀 수 있는 진정한 능력이 그에겐 있었던 것이다.
남에게 단점이 되는 부분은 그래서 그에겐 장점이 된다.
신중한 면에서는 아주 고지식하여 결코 실수가 없다. 맡은 일에 태만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확실한 결과물을 얻어낸다. 드러나는 모든 부분이 타인의 모범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신중한 사람이 책임을 다하면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이기도 하다.
물론, 단점도 있었다. 다른 면에서도 고지식하다는 점이 그의 단점이었다. 어떤 이에게는 장점이 될 능력이 그에게는 단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 신분고하를 철저히 따지는 버릇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지금 아주 불쾌해하고 있었다. 단점을 숨기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황실에서 왔다던 마차를 보았을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애송이를 보고난 후에도 무덤덤했다. 단지, 이곳에 왜 왔는가 궁금했을 뿐. 그러나 무림의 첫째로 손꼽히는 권력자, 배분으로도 무공으로도 어떤 이보다 높은 맹주가 직접 마중 나와 공손히 인사하는데도 코웃음을 치는 애송이의 형태를 보고는 인상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대개 관리란 무리가 소소한 감투라도 막상 머리에 쓰게 되면 어르신 대접을 받는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하남총독이라도 맹주 앞에서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데 말이다.
도대체 이 애송이는 무슨 물건인가!
그런 빛이 분명한 혁련후의 두 눈이 애송이를 쏘아보았다.
무림에 대해 모른다 해도 무림맹주에 대해서는 들어 보았을 터. 하물며 맹을 찾아온 관리라면 맹주가 어떤 인물인지, 그가 무림에서 가지는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사전 조사라도 했을 것이다.
혁련후는 애송이를 유심히 살폈다. 먼 길을 왔던 때문인지 관복은 찾을 수 없고, 편해 보이는 복장을 입고 있었다. 화려한 옷감과 여성스러운 얼굴 때문에 꽤나 영민해 보이는데, 한 번 밉게 보니 화려한 외모조차 고깝게 여겨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섣불리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앞의 애송이는 맹주를 못 알아보았을지도 모른다. 관리를 자극하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에 무사들까지 떼어놓고 나왔으니 가능성 있는 추론이었다. 허름한 백의에 호위도 없이 입구까지 마중 나온 노인을 맹주라고 생각지 못했을 수 있다.
“이분이 무림을 관리하시는 맹주님이십니다.”
그렇게 맹주의 신분을 알려주었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가관이었다.
“무림을 관리한다? 하하, 재밌는 발상이다.”
“……!”
애송이는 비웃음이 분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가 그대에게 황실의 대신보다 높은 권한을 주었나?”
혁련후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더 불쾌해진 것이다.
이때 경험 많은 노인, 맹주가 만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우물 안의 개구리일 뿐이지요. 어찌 관직에 몸담아 백성을 보살피는 분보다 높을 수 있겠습니까.”
애송이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무튼 들어가지. 할 말이 있어서 왔으니!”
혁련후는 다시 한 번 불쾌해졌다. 이쪽이 정중히 소개했으면 녀석도 자신을 밝혀야 할 것이 아닌가. 다짜고짜 제안하고는 자신이 주인인 냥 맹주를 앞질러 내성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오만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그 뒤를 호위라고 하나가 따라가는데, 역시 황실의 무사인 듯 상관처럼 뻣뻣해서 더욱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2
무림맹에 대한 사자비의 느낌은 의외로 차분하다는 것이었다. 열일곱 개의 명문정파에서 백여 명에 달하는 고수를 파견했으니 이천 명에 달하는 인원이 갖춰진 셈이고, 맹에서도 자체적으로 고수를 키워냈다 했으니 모두 합치면 그 두 배가 넘어갈 것이었다. 그런데도 맹의 내부에는 그다지 많은 무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조용하고 차분해서 한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맹주의 첫인상도 그랬다.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성격 좋은 옆집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랄까!
그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사내도 비슷했다.
사내가 혁련후라는 사실은 이미 눈치를 챈 상태였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맹주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혁련후는 맹의 대소사를 모두 관리하는 두뇌였으며 뛰어난 모사라 했다. 그런데 그조차도 영악한 책략가라기보다는 글공부에 심취한 문사 같은 느낌만 풍긴다. 가끔 도발적인 언행을 보일 때마다 미미하게 표정을 구기는데, 심중을 잘 숨기는 그런 유의 사람도 아님이 분명하다.
모든 것이 상상하고 예상했던 바를 벗어났다. 그러나 사자비는 당황하지 않았다. 곰곰이 헤아려보면 지금 보고 느끼는 것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무림맹은 정도 최고의 통제기관. 이름만으로도 위엄이 장식처럼 따라붙는 곳이었다. 크게 위세를 과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조용하고 한산한 모습이 더욱 그들의 강함을 강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맹주도 그런 방식인 것 같았다. 맹주라는 자리는 정도 최고의 입김을 가진다. 크게 보면 무림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작게 보아도 정도 전체의 판도를 말 한 마디로 움직이는 자다. 그런 사람의 복장과 외모가 지극히 평범하면 어떠랴.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을 테고, 맹주로서의 위엄이 될 터였다.
맹주를 보좌하는 총관 혁련후도 마찬가지다. 그는 무림에서 이미 맹주만큼이나 알려진 인물이었다.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하고, 그런 자리에 있다.
사자비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해했던 모든 것의 원인을 빠르게 파악한 탓이다. 그건 타성이었다. 벽라도패 송무광이라 했던가. 맹주 직을 삼십 년째 차지하다 보니 절로 그 자리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위엄에 익숙해져버려서 이젠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평범해 보이는 것이리라.
무림맹 내부도, 혁련후도 그런 형태로 비쳤다. 정도 최고라는 자리를 삼백 년이나 이어오다 보니 굳이 무사가 돌아다니며 기강을 보이지 않아도 절로 삼엄하게 느껴진다. 무림천하가 뒤바뀔 수 있다는 이변 따위는 잊은 지 오래일 것이고, 맡은바 일에만 충실해도 자리를 지킬 수 있는 혁련후. 그조차 알게 모르게 타성에 젖은 느낌이었다.
사자비는 왠지 기분이 좋았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았다. 이런 자들은 손안에 쥐고 흔들기 쉽다. 오히려 허섭한 방파의 인물이 이들보다 백배는 더 대하기 까다롭다. 그들은 밑바닥에서 항상 불안에 떨기 때문에 의심이 많고, 재는 것도 잦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이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속였다 하더라도 당장 이해득실에 약간의 변화가 생겨도 결정을 번복하고 배를 갈아타 버린다.
‘얼마나 제시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에 도착해 있었다.
‘弱肉强食(약육강식).’
건물 입구에는 이런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살 떨리는 말이로군.”
사자비의 시선을 따라 현판을 바라본 맹주가 미소를 머금은 채 설명했다.
“노부도 마음에 들지 않아 바꾸려고 했으나, 아직도 방치된 채입니다.”
“무림맹의 의지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정의도 힘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뿐이지요.”
“정의도 힘이 있어야 지킨다?”
사자비는 피식 웃고는 건물로 들어가 버렸다.
방으로 안내된 그는 들어서자마자 곧장 상석을 차지했다. 그 뒤로 갈천이 호위하듯 기립했다.
사자비가 손짓으로 자리에 앉으라는 표시를 주었다. 일백 세가 넘는 무림의 패자가 그의 손짓에 따라 순한 양처럼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 탁자에 섰던 혁련후도 조심스럽게 앉는데, 사자비는 그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불쾌한 표정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이다.
사자비는 가소롭다는 조롱의 미소를 한 번 보여주고는 입을 열었다.
“황실에서 왜 사람이 왔는지 궁금하겠지?”
맹주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리고, 혁련후가 대신 대답했다.
“혹시, 어수선하게 떠도는 소문 때문인지요?”
“소문?”
“항주와 영주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자비는 거만한 표정을 보였다.
“황실의 관리가 그리 한가한 줄 아는가. 그런 하찮은 일 때문에 내가 직접 무림맹을 찾을 이유는 없지. 혹, 사과라도 하고자 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그런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나, 처음부터 지금까지 보였던 사자비의 행동 때문에 일찌감치 접어버린 상태였다. 혁련후는 신중하게 생각한 후에 입을 뗐다.
“저희가 황실에 근심거리라도 안겨주었던가요?”
“그렇게 생각하는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혁련후는 대화를 회피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신중함에 있어서는 뛰어난 자임이 분명한 것 같았다.
“말씀을 해주시면 시정하겠습니다.”
단지 그렇게만 대답하는데, 듣던 사자비는 소리 내어 웃은 후 시비가 가져다준 차를 홀짝 마셨다. 이어 탁자에 손을 올려 검지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톡! 톡! 톡!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가 침묵에 잠긴 실내를 어지럽혔다. 아마도 노인과 사내는 이 소리가 꽤 거슬릴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두드리며 맹주와 혁련후를 뜯어보듯 살피던 사자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발언이 그 입에서 흘러나왔다.
“황실은 무림맹의 협조를 원한다.”
“협조?”
“자네들 말로는 협의라고 해야 하는가? 아무래도 좋아. 할 수 있겠나?”
혁련후도 그랬지만 맹주의 표정도 미미하게 굳었다. 황실과 무림이 별개의 길을 걷어왔음은 오래전부터 이어져오던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이유는 무림이 정치에 관련되어 뒤끝이 좋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무림은 약자의 입장이었고, 토사구팽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데, 앞의 관리가 협조, 혹은 협의를 구하고 있다. 말만 그럴듯할 뿐, 실질적으로는 압력이라 해야 할 것이다.
“뜻은 알겠습니다만, 본맹의 사정이 지금 그리 좋지 않습니다.”
혁련후의 대답이었다.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하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 말투였다. 이해한다. 지금 무림 최고의 통제력을 가지고 있는데, 굳이 섶을 질 필요는 없겠지.
사자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대들은 폐하의 백성이 아닌가! 그간 폐하의 은덕에 힘입어 이런 세력을 갖추었으면서도 황실이 내민 손을 거절하겠다?”
“거절이 아니오라 능력 밖의 일이라는 뜻이지요.”
“들어보지도 않고 하는 거절이라…….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혁련후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어떤 일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거절할 요량으로 던진 물음일 것이다. 그러나 사자비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을 두 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입을 열어 혁련후와 맹주를 경악하게 했다.
“이십만 냥. 그것도 금으로 이십만 냥이 걸린 일이다.”
금의 가치는 언제나 변하지만, 통상 은으로는 스무 배를 가치를 따지곤 한다.
뿌리칠 수 없는 이야기가 곧바로 이어졌다.
“이 일을 성공하면 일 할의 보수를 보장하지.”
은으로 사십만 냥을 대가로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꿀 같이 달콤한 제안이었으나 맹주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반면, 혁련후는 그 놀라운 거액을 떠올리고는 입을 벌렸다. 사십만 냥이라면 무림맹과 관련된 문파에 자금지원을 받지 않아도 이십 년은 족히 버틸 수 있는 금액이었다. 뛰어난 무사를 초빙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고수를 양성하는데 들어가는 자금이 만만찮은데, 그것조차도 쉽게 해결되는 금액이었다. 지금보다 몇 배나 많은 후기지수를 받아들여 수련을 시킬 수 가 있었다. 그렇게 이십 년 후면 맹은 무림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사파도 맹의 운영방침을 따라야 할 정도로 거대해질 것이 분명했다.
혁련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 사이 맹주가 원론적인 물음을 던졌다.
“어떤 일인지요?”
“최근 몇 년 동안 북방의 이민족이 자주 침범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그리 들었습니다.”
“올해도 국경수비대와 몇 번 부딪친 적이 있었지.”
“그 일에 무림이 끼어들 여지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없지 않은가!”
“…….”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맹주와 혁련후는 침묵을 선택했다.
사자비가 말을 이었다.
“중원 곳곳에 기근이 일어 그곳에 군사를 파병할 사정이 여의치 않다네. 대규모의 군대를 투입하면 당장 비게 되는 자리를 지방군으로 채워야 하는데, 그럼 징집이 떨어진 백성의 원성이 있을 것이 아닌가. 해서 예전부터 폐하께서는 고려와의 화친에 꽤 신경을 쓰셨지. 그리고 이번에 고려와 연합하여 약간의 병사를 침범이 잦은 지역에 배치할 생각을 하셨네. 병사는 여유가 있는 고려에서 지원하고, 군량과 자금은 우리가 대기로 했다는 말일세. 그 대가로 고려에 금 이십만 냥과 군량을 보내야 하는데, 문제는 북방의 도적떼를 자극하지 않도록 표물을 운송해야 한다는 것일세. 이동 수단에 군대가 끼어들면 아무래도 불안하지 않나. 적이 우리의 의도를 눈치 채고 미리 방비할 수도 있는 일이니.”
곰곰이 생각하던 혁련후는 침중한 목소리가 되었다.
“금이라면 모르겠지만, 군량까지 운송해야 한다면 수레와 마차가 아주 많을 텐데요. 그 많은 짐을 호위하자면 최소한 일천 명이 넘는 인원이 필요합니다.”
“군대가 운송한다면 그 몇 배의 인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그 인원이라면 나눠서 움직이더라도 눈에 띌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결국, 표물 운송이로군요.”
“상단으로 위장하여 두 개로 나누어서 간다면 큰 문제가 없을 듯하네만!”
“상단이라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이민족이 아니라 중원의 도적이나, 비적이 눈독을 들인다는 것이지요.”
“자네들 실력이야 유명하지 않은가. 무림맹이 호송하는 짐을 털 간 큰 녀석들이 어찌 있으려고. 자네들도 쉽고, 황실도 수고로움을 벗어던질 수 있으니 모두 편하리라 생각했는데, 아닌가? 그래서 협의와 협조라고 한 것일세.”
맹주는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거절하더라도 저희가 곤란해지는 일은 없겠군요.”
놀랍게도 사자비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때문에 혁련후와 맹주가 오히려 당황하는 빛을 드러냈다.
사자비는 웃었다. 거절? 웃기지도 않는 소리. 너희는 거절할 수가 없어. 그런 눈빛이 그의 눈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거절하지 못할 결정적인 말을 해서 두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대들이 거절하겠다면 서운하지만, 하는 수 없지. 흑월회에 부탁하는 수밖에. 이미 그곳으로도 사람을 보내었다네.”
“흑, 흑월회?”
혁련후의 얼굴이 더 이상 심할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흑월회에 사십만 냥의 자금이 흘러들어 간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지금도 흑월회의 세력이 무림맹을 앞선다. 정파를 움직일 수 있다는 거대한 이점 때문에 맹의 위세가 그들을 압도하지만, 만약 흑월회가 거금을 확보할 수 있다면 십 년 후, 이십 년 후에는 확실하게 달라진다. 무림의 판도가 바뀌는 것이다.
“거절할 텐가?”
사자비는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대답이 없는 두 사람을 보고는 지겹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런 행동이 혁련후를 조급하게 했다.
“시간을 주십시오. 이 일은 장로회를 거쳐야지만 결정될 수 있는 큰 사안인 듯합니다.”
사자비가 조소를 흘렸다.
“무림맹도 배가 부른 모양이로군.”
그의 행동에는 미련이 없었다. 그대로 방을 나가려 했다.
혁련후가 조심스럽게, 하지만 조급하게 말했다.
“내일까지 답변 드리겠습니다.”
사자비는 걸음을 멈추고 맹주를 보았다. 어차피 결정은 맹주의 몫이다.
맹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그럼, 정주지부에서 기다리지. 거기서 하루 머물 생각이니, 결정하고 사람을 보내어 알려주게.”
“이곳에서 머무는 것이……. 숙소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그리 한가해 보이나!”
질책처럼 말하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갈천이 뒤를 따르고, 맹주와 혁련후 역시 일어나서 사자비를 배웅했다. 그렇게 무림맹 정문을 나왔을 때, 마차에 오르는 사자비를 보며 혁련후가 물었다. 막 말을 타는 갈천을 향해서였다.
“정주지부에서 누구를 찾으면 대인을 만날 수 있습니까?”
신분을 알아보고자 함인데, 갈천의 표정은 처음처럼 변화없이 무뚝뚝했다.
혁련후는 앞의 무장이 평범한 관리의 호위가 아님을 알아보았다. 묘한 기운이 상대의 전신에서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동창 친황대 총감을 찾아라.”
마차가 달리고, 갈천도 말배를 차서 마차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제야 혁련후는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멀어지는 마차를 망연히 바라보며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 정도 신분이면 좀 더 예를 갖춰야 했던 것이다.
중앙권력의 중심, 공포의 대상인 동창을 손안에 쥐고 흔드는 인물이라면 맹주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만한 행동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아마도 몇 번이나 불쾌한 표정이 드러났을 텐데……, 숨기기보다는 의도한 바가 컸다. 그렇게 무림맹을 무시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를 보였으니 말이다. 이게 혁력후의 가장 큰 실수였다.
그는 등골이 오싹했다.
때마침 맹주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그를 일깨웠다.
“위험한 자일세.”
혁련후는 맹주를 돌아보았다. 표정을 살피자 맹주는 처음부터 애송이의 신분을 어느 정도 예상한 듯했다.
“왜 제게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맹주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자네까지 고개를 숙이면 맹의 위신이 어찌 되겠는가.”
혁련후는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우선, 장로님들을 부르겠습니다.”
“그러시게. 하나,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맡을 것 같군.”
“내키지 않으십니까?”
“자네 생각은 어떤가?”
“거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의외라고 생각한 모양, 맹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런고?”
“이유가 너무 그럴듯하니까요. 그래서 더욱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자네에게 결정권한을 주면 허락하겠지?”
혁련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에 하나, 황실의 의도가 순수한 것이라면 흑월회에 넘길 수는 없는 제안입니다. 물론, 다른 의도가 있을 가능성이 있으나 대비를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미 대비책 선 것 같네그려.”
맹주는 몸을 돌려 맹으로 걸어가며 명했다.
“그러면 나는 여유를 부려도 되겠군. 잠시, 혼자 있고 싶으니 저녁에 회의를 잡으시게.”
“알겠습니다.”
☆ ☆ ☆
쉼 없이 원을 그리던 마차바퀴가 속도를 줄이더니 대로에서 멈춰 섰다. 정주로 가는 길목이었다. 마차 문이 열리고 관복을 입은 약관의 청년이 걸어 나왔다. 사자비였다.
그는 대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삭막한 금빛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끝에 힘을 잃은 태양이 숨넘어갈 듯 기울어지는 모습이 그의 눈에 걸렸다.
“이대로 가면 해시쯤에 정주지부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갈천이 말에서 내려 그렇게 말했다.
사자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의미를 알아들은 얼굴로 갈천이 대답했다.
“꽤 의심이 많은 사람 같더군요.”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하락하겠지.”
“흑월회에 그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기를 원치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갈천은 회의적인 반응을 비췄다.
“이 계획에 의미가 있습니까? 굳이 그들에게 이런 중대한 일을 맡길 필요가 없을 텐데요.”
“물론, 그럴 필요가 없지. 그리고 그들은 꼭 실패한다. 그들에게 맡긴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실패하기 때문에 맡긴다?’
갈천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보였다. 분명 무림맹에 사십만 냥이나 되는 돈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확신하고 있었다. 어쩌면 도중에 친황대를 비적으로 위장시켜 그들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했다. 친황대게 끼어들려면 이미 움직였어야 했다. 고려로 가는 길목으로 출발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총독과 총감은 어떤 시지도 내리지 않았다.
“실패할 이유가 있습니까?”
사자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옛 총독과 다른 부분이었다. 조 총독은 시지만 내릴 뿐,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의문 자체를 거부한다. 그러나 사자비와 총독은 대주들의 요구에 따라 때론 자세한 설명을 곁들인다.
믿음을 준다고나 할까!
작전의 목적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하여 대주들이 확실한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느낌도 들었다.
“흑월회에 사람을 보냈다는 건 알고 있겠지?”
“같은 제안을 하고자 보낸 것이 아닙니까?”
놀랍게도 사자비는 아니라는 의미의 표정을 지었다.
“단지 정보를 알려주고자 함이다.”
“정보?”
갈천의 표정이 굳었다.
“그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 일에 끼어들 여지가 높다.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도 무림맹에 위세가 밀리는 실정. 거대한 자금줄이 무림맹으로 흘러가기를 꺼리는 것은 그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거기다 그들은 승냥이 같은 무리다. 뒤로 몰래 하는 일이 수적질에 도적질이니 그냥 지나칠 리가 없지.”
장강수로연맹과 녹림채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래도 표물의 내용이 황실의 재산입니다. 간덩이가 붙지 않고서야.”
“상단으로 위장하도록 유도하지 않았던가. 표면적으로는 황실의 재산이 아니다. 단지, 상단의 물건을 운송하는 무림맹을 공격하는 격일 뿐.”
갈천은 실소를 흘렸다. 적을 교란하기 위한 위장이 아니라 흑월회를 끌어들이려는 계책의 일환이었다니, 기가 막힌 것이다. 과연 이 계획은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왔을까.
“총독께서는 자네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분이다.”
사자비는 그렇게 이번 계획을 주도한 인물을 알려주었다. 물론, 세밀한 계책은 사자비가 세웠지만 이런 식으로 총독을 띄워 줌으로써 대원의 믿음을 살 필요가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비소를 머금으며 단정 지었다.
“아주 멋진 그림이 그려질 거다.”
갈천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의 힘이 확실히 줄어들겠군요.”
“아니. 그것이 전부라면 의미가 없겠지.”
“달리 목적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우리가 대회에 참가한 동안 총독께서는 황 부영반을 축으로 무림맹과 흑월회에 대한 조사를 하셨다. 결론은 흑월회와 달리 무림맹은 걸고넘어질 여지가 없다는 것이었지. 모든 불법적인 것들을 아주 잘 숨겨놓았다더군.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조사를 할 형편도 되지 않았으니……. 여러 가지 문제점이 많았지.”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는 뜻입니까?”
“그런 것이다. 무엇보다 무림맹을 압박할 명분이 없어진 셈이 아닌가. 이번 작전은 그 명분을 만들고자 함이다. 무림맹은 황실의 재산을 도적에게 내주었다. 흑월회는 황실의 재산을 털었다?”
사자비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무사들도 꺾여서 통제력도 잃을 텐데, 황실이 간섭할 빌미까지 준다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에 더 없는 이익. 무림맹과 흑월회를 해산시키고 무림의 결속력을 와해하려는 시작이라고 보면 되네.”
“하나, 군량과 자금은 진짜가 아닙니까?”
“회수해야지. 물론, 그들이 그 물건을 탐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갈천은 사자비의 표정을 보고 그와 총독이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계획했으리라 확신했다. 이런 면에서는 총감과 총독이 비슷한 유형이었다. 죽도 잘 맞는 것 같았다.
‘권모술수가 능한 책략가와 뛰어난 지략가가 만난 격이로군.’
갈천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무림은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두 사람을 적으로 둔 셈이었다. 그것도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강력한 권력과 친황대라는 거대한 힘을 가진 두 사람을.
제4장 흑각철기대
1
무림맹 돌풍대(突風隊) 총대주 여호랑(余虎郞)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보름 전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 요동 동북으로 이동 중인 고려 철기대에 황실에서 내어준 군량을 전달하라는 내용 때문이었다. 갑자기 장로회에서 결정되어 그에게 명령이 하달되었고, 그 즉시 대원을 이끌고 북경으로 이동해야 했다.
밥을 먹다가 갑자기 말에 올라 북경으로 달렸다는 사실이 기분 나쁜 것은 아니다. 의문조차 드러낼 시간도 주지 않고 급히 움직이라는 명령이 그를 불쾌하게 한 것이다.
‘도대체 왜 우리가 이런 일을 맡아야 하는가.’
그는 북경 북쪽 대로에 서서 칠십여 개의 수레와 이십여 개의 마차를 둘러보았다.
급히 불러들인 대원이 모두 칠백여 명. 적풍대(赤風隊)에도 비슷한 명령이 떨어졌다니 대충 일천오백 명이 이 일에 투입된 셈이었다. 맹의 주력 삼 할이 쌀 배달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제일대주 동한기(東寒器)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곁으로 다가와 불만을 드러냈다.
“도대체 상부에서 무슨 생각을 한 겁니까? 맹이 군부의 일에 끼어들다니, 이유를 알 수 없군요.”
“그보다 더 알 수 없는 지시가 있으니 문제일세.”
“따로 명령이 주어졌습니까?”
여호랑은 보름 전 받았던 명령서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명령서를 읽던 동한기의 표정이 똥 씹은 사람의 그것처럼 변했다. 사신으로 따라가는 황실의 관리를 주시하라는 내용이 마지막에 있는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문제는 돌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를 앞세우라는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인질로 사용하라는 의미가 다분해서 기가 막혔다.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까지 적혀 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질 경우 맹은 무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총대주와 그가 함구하면 알려질 일도 없겠지만……. 명령서대로 대처한다면 문제 될 일은 없어 보였다.
여호랑이 충고처럼 말했다.
“이 명령은 자네만 알고 있게. 입단속을 할 필요가 있어.”
“알겠습니다.”
때마침 고급스런 마차 한 대가 접근했다.
마차에는 관복을 입은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 거만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형식적으로나마 군량호송을 책임지고 호위대의 지휘를 맡은 자였다. 그는 창문으로 빠끔 얼굴을 빼내어 총대주 여호랑을 향해 출발하라는 표시를 주고는 곧바로 창문을 닫아버렸다. 말을 섞기도 귀찮다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역력히 드러난 후였다.
여호랑은 젊은 관리의 오만한 작태를 보고 인상을 구겼으나 관직에 몸담은 이를 자극할 수 없어서 분을 삼켰다.
“출발한다.”
분노가 담긴 때문인지 매서운 외침이 메아리쳐서 마차와 수레를 움직였다.
북경을 빠져나간 마차와 수레는 준화(遵化)를 거쳐 지렁이 같은 만리장성을 타고 요녕성으로 행군했다. 그렇게 엿새 만에 산해관(山海關)에 도착하여 구릉, 고원지대로 진입하게 되었는데, 그쯤 모두 긴장한 티를 드러냈다. 동북으로 계속 움직이면 국경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비교적 느슨한 국경수비 때문에 외적이 자주 출몰하여 사람을 죽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표사들은 그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정작 그들의 걱정은 비적이었다.
“일 개 대를 선발대로 보내어 길을 트게 한다. 제삼돌풍대가 그 역할을 담당해라.”
잠깐의 휴식 끝에 여호랑이 제삼대주에게 명했다.
삼대주 홍두망(烘頭輞)이 대답과 함께 대원을 이끌고 일 각을 먼저 출발했다. 그 뒤로 본대가 출발하고, 두 개 조를 남겨 후미를 경계하도록 했다. 그것을 지켜본 젊은 관리가 역시 창밖으로 고개를 빼어 물었다.
“뭘 하는 건가?”
출발 직전에 마차로 다가온 여호랑이 대답했다.
“도적의 출몰이 잦은 곳입니다. 미리 척후조를 보내어 위기 상황에 대처하려 함이니 허락해 주십시오.”
관리는 묘한 미소를 드러내더니 뚱딴지같은 질문을 했다.
“그런다고 대처가 되겠나?”
요진량이 뭐라 대답하려했지만 녀석은 손을 휘휘 저어보이고는 언제나처럼 창문을 닫아버렸다.
여호랑의 표정이 굳었다.
‘건방진!’
황실 요직에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면 단단히 혼을 내주었을 텐데……. 그보다 정체부터 궁금했다. 맹을 출발하기 전에 동창의 관리가 책임자로 따라 붙을 것이라 듣기는 했다. 한데, 저런 애송이가 올 줄 몰랐다. 방어 진형과 표물 운송에 대한 전반적인 형식을 알고나 있을까!
하긴, 상관없지. 어차피 녀석은 형식적인 책임자일 뿐이니까.
여호랑은 지휘를 위해 말을 몰아 선두로 나갔다. 그리고 하루 뒤에 최초의 적을 만났다. 또한 사흘 동안 한 번의 적을 더 만났다. 중원의 복장과는 전혀 다른 녀석들. 언어도 다르고, 생김도 약간 틀린 녀석들이었다.
녀석들과의 교전은 대체적으로 쉬웠다. 간략하게 쫓아버림으로써 깔끔하게 마무리 지은 것이다. 그러나 닷새째가 되는 날, 오전에 만난 녀석들은 달랐다.
두두두두!
서른 기의 말이 먼지를 피워 올리며 빠르게 접근했다.
여호랑은 얼굴을 굳혔다. 오는 방향이 정면인 것이다. 이미 척후조로 제삼돌풍대가 앞서간 상태. 그런데도 녀석들이 오는 방향이 같다면 척후조는 제압되었다고 봐야 한다.
과연 고원을 무대로 약탈을 일삼는 무리가 팔십여 명에 이르는 돌풍대원을 제압할 수 있을까?
숫자로 밀어붙인다면 가능하겠지만 쉽게 당할 돌풍대가 아니었다. 적어도 연락병을 보내어 적이 나타났음을 알릴 수는 있었을 것이다.
여호랑은 직감적으로 판단했다. 연락도 보내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상대라면 적은 무공을 익힌 녀석들이다. 제삼돌풍대 만큼의 실력을 가지고, 압도적인 숫자를 자랑하는 녀석들이어야 가능하다.
그는 접근하는 기마대의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복장은 위장할 수 있어도, 무기는 위장할 수 없다. 익숙한 무기를 사용해야 십 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녀석들도 그랬다. 맹의 고수를 상대로 손에 맞지도 않는 무기를 사용할 수는 없었던 모양, 그들이 든 무기는 중원의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무림이 사용하는 것들이었다.
여호랑의 입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터졌다.
“일대와 오대는 전방을 맡는다.”
동시에 자신은 나머지 인원을 수습하여 호위대형으로 수레와 마차를 보호했다.
삼십 기의 적과 돌풍대가 부딪쳤다. 하지만 적들은 전투가 목적이 아닌 것 같았다. 대충 무기를 섞는 척하더니 그대로 돌풍대를 뚫고 수레로 달려들었다.
“핫!”
여호랑이 말배를 차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 뒤로 이십여 기가 따라붙었다. 여호랑은 검을 뽑아들어 앞으로 뻗었다. 순간 그의 검이 붉게 빛나더니 강렬한 검기를 만들고, 검기는 벌떼가 날아가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쏘아졌다.
검기 하나로 선두로 달려오던 말과 그 위에 탄 녀석이 뒹굴었다. 동시에 검기가 채찍처럼 움직여 뒤따르던 또 다른 녀석의 목까지 베었다. 그리고는 적과 아가 뒤섞였다. 하지만 이 다툼 역시 적들에게는 무의미 했던 것 같았다. 상당한 피해를 보았는데도, 돌풍대를 상대할 생각은 않고 수레 지척까지 달려갔다. 그때 녀석들은 이미 절반이나 바닥에 피를 뿌린 후였다.
남은 절반은 다시 수레를 지키던 돌풍대와 뒤섞였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분명해졌다.
남은 절반 중 다섯 명이 행렬 중앙에 있는 마차로 달려들어 맹의 표사와 부딪히더니, 그 사이 남은 일곱 명이 마차까지 도착했다. 돌풍대 몇 명이 활을 날렸지만 녀석들의 행동을 저지할 순 없었다. 안장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마차 밑으로 집어 던지는 간단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콰콰쾅!
그리 큰 폭발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차 바퀴를 부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몇 번의 폭발 뒤로 여덟 대의 마차가 바퀴를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중 몇 개는 문짝까지 부서져서 안에 있던 내용물을 쏟아내었다. 내용물 대부분은 금빛과 은빛으로 찬란한, 주먹크기의 덩어리였다. 문제는 폭발 때문에 잠시 대형이 흔들렸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 몇 명이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추격하라!”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지만 여호랑이 막았다. 추격해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보다 부서진 마차를 수리하는 것이 시급했다. 금덩이를 마차에서 꺼내어 무게를 줄이고, 바퀴를 간 뒤에 다시 금덩이를 싣는데, 두 대의 마차는 버려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여분의 바퀴가 떨어진 것이다.
“대인, 수레 세 개에 담긴 군량을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여호랑은 상관에게 그렇게 제안했다.
마차 안에서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약속된 군량에서 한 점도 뺄 수 없다.”
“그러나 마차 두 대가 이미 부서져서, 거기에 담긴 금을 수레로 옮겨야 합니다. 금을 버리고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금도 버리지 못하지만, 군량도 버리지 못한다. 모두 가져갈 수 있는 방법을 간구해라.”
그것으로 끝이었다. 몇 번이나 어려운 사정을 말했으나, 마차 안에서는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하는 수 없이 세 개의 수레에 담긴 군량을 다른 수레에 적당히 쌓아 올린 다음 빈 수레에 금을 채워넣었는데, 그 모든 과정을 마치자 밤이 되어 있었다. 결국, 그곳에서 야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려하던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불을 피우면 불나방이 달려든다. 해서 불을 피우지 않았다. 이리 같은 녀석들이 어디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금에 대한 욕심은 어두움을 대낮처럼 보이게 하는 모양이다. 달도 없는데, 사방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황량한 벌판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하늘을 매웠다.
마지막 비명은 전투가 시작 된 지 반 시진이나 지난 후에 울렸다. 표사들의 승리였지만 얼마나 많은 적이 왔는지 알 수 없고, 얼마나 많은 동료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상대의 무공이 만만찮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닌, 시작이었던 모양이다. 어둠에 기대어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을 때, 또다시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흔든 것이다.
“빌어먹을!”
여호랑은 이를 갈았다. 척후조까지 합하면 이미 절반에 가까운 동료를 잃었다. 적들은 더 많은 수의 동료를 잃었을 텐데, 두렵지도 않은가. 도대체 얼마나 죽어야 그만 둘 것인가. 무림에서 문파의 사활을 건 전투가 아니면 이렇게 상대를 핍박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것도 자신과 동료는 정도무림의 우상인 무림맹의 기치를 걸고 있었다. 감히, 무림맹을 상대로 이렇게 저돌적으로 달려들 녀석이 있을까!
‘흑월회!’
그에 대한 언급이 명령서에 있었다. 그렇다면 작전대로 이젠 해야 한다. 흑월회라도 황실의 관리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불을 밝혀라.”
수하 하나가 부적절함을 지적했다.
“그러면 적들의 공격이 거세질 겁니다.”
“밝혀라.”
명령은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순식간에 행렬 주위가 환해지고, 말발굽 소리는 수하의 말대로 더욱 빨라졌다. 그러나 요진랑에겐 상관이 없었다. 그는 옆에 있던 제일대주 동한기를 보며 말했다.
“대인께 나오시라고 전하게.”
동한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거부하면…….”
“팔을 꺾어서라도 데리고 나와야지.”
“알겠습니다.”
동한기가 마차로 향하자, 요진랑은 제육돌풍대주에게 명했다.
“도주할 수 있는 인원을 정비하여, 전투가 시작되면 곧장 중원으로 달릴 준비를 해라. 도중에 적풍대를 만나면 방향을 돌려 회군하라고도 전해야 한다.”
육대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희만 도망치라는 겁니까?”
“명령에 따르라는 뜻이다. 이미 총관께서 이 일을 예측하셨다. 대비책이니 명에 따라라.”
그제야 사십대 후반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동한기가 사색이 되어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대인께서는?”
“없습니다.”
“뭐?”
“대인이 마차에 안 계십니다.”
“일행은?”
관리의 수발을 들고자 따라왔던 작은 관리와 하인, 하녀를 뜻했다. 동한기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도 없습니다.”
여호랑은 잘게 몸을 떨었다. 수하 몇 명을 시켜 감시를 했지만 첫 번째 기습 때 어둠과 혼란을 틈타 몰래 빠져나간 것 같았다.
‘당했다.’
설마 도망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행동 때문에 더욱 확실해졌다.
황실과 흑월회는 밀약을 맺었다.
관리를 앞세워 황실의 표물임을 알리고 흑월회를 물러나게 할 계획이었다. 여차하면 흑월회를 제압하고 관리를 죽여 흑월회에 뒤집어씌울 차선책까지 세워진 상황이다. 이러나저러나 관리가 절실한 시점인데, 그가 도망갔다니 흑월회와 짜고 움직였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어쩌면 첫 기습의 목적이 그것일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력을 나누어 두 번 기습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허탈함이 밀려왔다. 그래서인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적의 소음이 전보다 배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표물을 버리고 빠져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동한기가 급히 제안했다.
“무림맹이 적을 두고 도망간다? 그것도 도적의 무리가 무서워서?”
여호랑은 동한기를 노려보며 검을 뽑았다.
스르릉!
횃불에 반사된 검신이 싸늘하게 웃었다.
“도주해서 무슨 의미가 있나!”
당장은 수하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끝은 좋지 않았다. 황실의 의뢰를 실패했다는 치욕은 둘째로 치더라도, 그 대가가 적지 않을 것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실은 이번 일을 기회로 맹을 곤란한 지경에 빠뜨릴 계획임이 분명해 보였다. 거기다 흑월회와 황실의 함정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 도망쳐서는 증거를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적의 섬멸을 목적으로 하되, 몇 명은 생포하라.”
여호랑의 외침이 주위에 울려 퍼졌다.
동한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정면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없겠지. 모두 쓰러뜨리고, 후발대로 오는 적풍대와 합류하여 군량을 전달하면 문제될 것이 무엇인가!”
하지만 동한기를 비롯하여 대원들은 그 일이 쉽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했다. 심지어는 여호랑조차도 몇 명이나 살아남을지 장담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갈 길은 이미 정해졌다. 총대주가 결정을 했다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따르는 것이 그들의 생리였다.
스릉!
삼백여 개의 짧은 검명이 마치 하나처럼 울렸다. 순식간에 수레 주위가 돌풍대의 지독한 살기로 뒤덮였다.
2
“쓸어버려!”
외침 같은 짧은 한 마디가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혹월회로 짐작되는 도적떼는 돌풍대를 포위하는 귀찮은 형식조차 건너뛰고 그대로 수레를 향해 달려들었다.
수레에 걸린 삼십여 개의 횃불에 의지하여 벌어진 치열한 전투는 일 각을 넘기고, 이 각도 넘겼다. 죽고, 죽이는데 모두 익숙한 몸놀림, 주저 없이 상대를 죽이고자 혈안이 된 모습이 마치 악귀와도 같았다. 그런 악귀 일천 마리가 삼 각이 되었을 때 절반으로 줄었고, 남은 절반은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퍽!
둔탁한 소리는 여호랑의 어깨에서 들렸다.
여호랑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때린 물건이 낭아곤(狼牙棍)임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왼쪽 어깨가 걸레처럼 너저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럴 정신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분노했다.
“크아악!”
비명 같은 기합을 한차례 터뜨린 후, 마주한 상대의 가슴을 검끝으로 찌르고, 발로 밀쳤다. 동시에 반동을 이용하여 몸을 돌리더니 어깨를 때린 녀석을 노려보았다. 녀석은 다시 그의 머리를 향해 낭아곤을 휘두르고 있었다.
여호랑은 급히 뒤로 물러서서 천근추의 수법으로 발을 땅에 밀착시키고, 이어서 땅을 박차 놈과의 거리를 순간적으로 좁혔다.
스팟!
검이 불을 뿜으며 아래에서 위로 검로를 그렸다. 그 결과 낭아곤은 바닥에 떨어져 구르고, 그것의 주인은 몸이 갈라져서 바닥에 쓰려졌다.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불렀다. 적을 죽였으나, 건너편에서 동료가 죽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는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는 중에도 적과 마주쳐서 금세 그곳으로 갈 생각을 잊고 놈들에게 집중했다.
지옥 같은 시간은 언제나 느리지만 결국 같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전투는 이미 반 시진을 넘겼고, 서서히 새벽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즈음 지옥도는 끝난 상태였다. 놀랍게도 승리의 여신은 돌풍대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물론, 상처만 남긴 씁쓸한 승리였다. 이제 백 명도 남지 않았고, 남은 이도 성한 자가 없었다. 여호랑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적을 죽이고 주저앉은 그는 왼쪽 팔이 잘렸다는 것도 의식 못 한 채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온몸이 적의 피와 자신의 피로 범벅이 되었는데 상처를 돌볼 생각도 않고 숨만 몰아쉬었다.
체력도 떨어졌지만, 내공도 바닥난 상태였다. 다시 적이 온다면 그때는 그냥 목을 내줄 생각마저 했다. 검을 들 힘도 없으니 저항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적은 다시는 오지 못할 것이다. 상당수가 도망쳤지만 악에 받친 돌풍대의 기세에 질렸음을 도주하던 녀석들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여호랑은 혈도를 짚어 지혈한 후에 대상 없이 말했다.
“놈들 중에 부상자가 있으면 치료하고 포박해라.”
그리고는 일어서서 언덕에 걸린 태양을 바라보았다.
‘잡히면 가만두지 않는다.’
도망친 관리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이 일이 누구의 머릿속에 나왔는지 모르지만, 기필코 알아내어 그자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였다. 그때, 등 뒤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열 명의 부상자를 확보했습니다. 더 있지만 가망이 없어 보여서 확인사살 했습니다.”
동한기였다. 그의 꼴도 말이 아니었다. 여호랑처럼 전신이 피로 물들어서 어디를 다쳤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사지는 멀쩡해서 다행인데, 애처롭게도 한쪽 눈을 잃은 모습이었다.
“이제 무엇을 합니까?”
“적풍대를 기다려야지.”
“그사이 적들이 오면 지금 인원으로는 막기 어렵습니다. 잠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 많은 수레와 짐을 어떻게 움직인단 말인가.”
“열 명의 증인이 있습니다. 굳이 짐을 지키지 않아도 될 텐데요. 우리는 할 만큼 했습니다.”
여호랑은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그러니 마무리까지 확실히 해야지. 적이 다시 여길 찾는다면 또 죽여주면 그만 아닌가.”
동한기는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적풍대는 해가 중천에 도착했을 때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 여호랑의 예상대로 적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제법이군!”
동이 틀 무렵, 돌풍대를 바라보던 사자비는 감탄했다. 그는 흑월회에서 스무 개의 문파가 이 일에 개입했음을 알고 있었다. 모두 이천 명의 고수가 투입되었고, 그 실력 또한 상당한 자들이었다. 그건 첫 교전 때 충분히 알아보았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주력이었다. 그런데 돌풍대는 세 배나 많은 적을 쓰러뜨렸다. 기습을 당했고, 사방이 트인 평지에서 소수로 다수를 맞았으니 최악의 조건이었을 텐데도 일백 명이나 살아남았다.
“왜 무림맹이 정도를 이끄는지 알겠군요.”
옆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던 친황대 대원이 말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사자비가 물었다.
“그 정도인가?”
“물론 허점도 많습니다. 특히, 병력 배치가 아주 어설픕니다. 소수 병력으로 이루는 진법은 괜찮은 것 같지만, 그걸 나누어 호위대형을 갖춰서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 같군요. 이런 형태의 전투는 경험이 없어 보입니다.”
“그럴 수밖에. 저들은 군대가 아니지 않은가.”
“만약 친황대의 방식으로 적을 막았다면 지금보다 두 배는 생존율을 높였을 거라 생각되는군요. 부상자도 훨씬 줄어들었을 겁니다.”
“만약, 친황대가 저 상황이었다면?”
대원은 주저함이 없었다.
“어찌 우리와 비교하겠습니까. 개개인의 실력차이부터 확연한데요.”
자부심이 잔뜩 담긴 목소리였다.
“그렇게 떨어진다고 보지는 않는데.”
“총대주나 대주급들의 실력이 생각 이상으로 뛰어나지만, 단지 그것뿐입니다.”
사자비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평지를 달려오는 또 다른 대원이 있었다. 그는 사자비에게 다가와서 예를 갖춰 보고했다.
“도적의 잔당을 모두 처리했습니다.”
“생존자는 있겠지?”
“지시하신 대로 몇 명을 생포했습니다.”
“그들을 신문하여 배후에 흑월회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게. 나중에 요긴하게 쓰일 테니.”
“알겠습니다.”
“참장은?”
“병력을 이끌고 이동 중입니다.”
사자비는 쉬고 있는 돌풍대를 지켜보며 명했다.
“계획보다 시간이 조금 걸릴 듯하니, 행군을 늦추라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대원은 다시 어딘가로 달려갔다.
사자비가 남은 대원을 향해 물었다.
“적풍대와 합류하려면 얼마나 걸리겠나?”
“오늘 저녁쯤이면 저들과 합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내일 아침이 좋겠군.”
사자비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얼마나 대단한지 꼭 보고 싶었지.”
다음날 새벽, 군량을 실은 수레 행렬이 바퀴를 움직였다.
지휘자는 적풍대 총대주 오국상(吳菊尙)이었다. 여호랑 등 돌풍대원 대부분이 부상을 입어서 자연스럽게 결정된 일이었다.
행군은 생각보다 훨씬 더뎠다. 빠른 운송을 위해 일꾼이나 쟁자수(爭子手)조차 포함하지 않은 표행. 당연히 돌풍대의 표물까지 적풍대가 움직여야 해서 느림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느려도 움직일 수 있을 때가 좋았다. 불평도 살아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두두두두두!
지축이 흔들리자 선두에 있던 오국상이 검을 들어 올렸다. 정지하라는 신호였다. 행렬이 멈추고 표사들이 분주히 움직여 수레를 양옆에서 보호했다. 짐짝처럼 수레에서 쉬고 있던 돌풍대원들도 벌떡 일어서서 무기부터 챙겼다.
“무슨 소리인 것 같소?”
오국상의 낮은 목소리였다. 심상찮은 소리 때문에 옆으로 다가온 여호랑에게 던진 물음이었다.
“말발굽 소리 같소.”
그것을 몰라서 묻나. 대상이 누구냐는 것인데, 여호랑이 다시 대답했다.
“흑월회일 가능성이 높소.”
오국상의 얼굴에 긴장한 티가 역력히 드러났다. 지금은 언덕도 없는 평지에 그들이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가 세상의 끝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적의 모습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건 아주 멀리 있다는 의미였다.
“보이지도 않은 거리에서 이런 소리가 들릴 정도면 도대체 적의 숫자가 얼마나 된단 말이오?”
“나도 모르겠소. 이럴 리가 없는데…….”
여호랑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잘린 왼팔을 더듬었다. 소리의 크기로 보아 적은 상당한 규모였다. 어젯밤 흑월회와의 교전에서 흘린 피가 강을 이룰 정도인데, 그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 같았다.
아무리 수적으로 무림맹을 압도하는 흑월회라지만 강남에 있는 그들이 수천 리나 떨어진 국경 오지까지 그 많은 고수를 보낼 수는 없다. 어젯밤의 인원만으로도 상당한 무리를 감수했음이 분명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소.”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옵니다.”
모두 그의 시선을 쫓았다. 지평선에서 아지랑이니 피어오르는데, 거기에 검은 그림자가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숫자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반 각이 지났을 때, 표사들의 얼굴에는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무림에서 이런 숫자의 대규모 전투는 없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그랬다. 지옥교가 무림일통을 외치며 사방으로 손을 뻗칠 때의 이야기가 이랬던 것 같지만, 그나마도 머나먼 시절의 얘기일 뿐이다. 여기 있는 모두는 지옥교가 활동할 당시 막 무공에 입문한 어린아이였거나 한창 수련을 하는 후기지수였을 뿐이었다.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는 더욱 커져서 귀를 괴롭힐 정도가 되었다. 상대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아직도 정확한 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확실한 한 가지는 있었다.
“흑월회가 아니오.”
여호랑이 말하고 오국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지척까지 다가온 검은 무리가 그들을 몇 겹으로 포위했을 때는 다시 긴장했지만!
그들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검은 무리를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우선 검은 갑옷이 인상적이었다. 투구가 얼굴까지 가리고 있어서 두 눈을 제외하고는 신체부위를 볼 수 없는 갑옷이었다. 놀라운 점은 갑옷을 입은 자의 크기였다. 덩치가 크지 않음은 키로 알 수 있는데, 거인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갑옷의 두께가 상상보다 훨씬 두텁다는 뜻일 게다. 사람까지 크게 보일 정도로.
놀라운 점은 갑옷이 모두 쇠라는 것이다. 저런 갑옷이라면 무기에 내공을 실어 공격해도 충격조차 주지 못할 것 같았다. 더욱 놀라운 점은 갑옷만큼이나, 어쩌면 갑옷보다 훨씬 두꺼울지도 모를 방패를 하나씩 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방패 앞면에는 몇 개의 예리한 뿔까지 달려서 방패로 밀어붙이기만 해도 적에게 상당한 위협이 될 것 같았다.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저런 걸 입고 움직일 수나 있나!’
하지만 검은 무리는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러워서 정말 무게가 나가는 갑옷일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지친 몸을 달래고자 씩씩거리는 말의 투레질 외에는 어떤 소음도 없었다.
침묵을 이용하여 오국상이 전음으로 물었다.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 것 같소?]
이 질문은 오히려 여호랑이 하고 싶었다. 흑월회가 아님은 분명한데, 소속을 알 도리가 없었다.
우선, 중원의 군대는 아니다. 저런 갑옷으로 중무장한 군대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북방의 이민족인가!’
그것도 가능성이 없다. 십여 년 전 북방은 여러 부족이 규합하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지금은 서너 개의 큰 부족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지역의 특성상 기동전을 중요시한다. 마상전을 즐기지만 기동성 때문에 갑옷을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려군이 아닐까 하오.]
오국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고구려와 발해의 뒤를 이어 그들도 기마민족이었으니, 이런 기마대가 이해된다. 한때는 고구려의 철기기마대가 대륙을 떨쳐 울렸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갑옷을 입은 누군가가 중원의 말을 했기 때문이다. 발음이 어설프지도, 느리지도 않은, 중원 사람이 자기 말을 하는 듯이 자연스러운 언어였다.
“책임자가 누구냐!”
오국상과 여호랑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 바라보았다. 의외라는 얼굴인데, 대답은 해야 했다.
“나요!”
오국상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와 물었다.
“그대들은 누구요? 무슨 이유로 우리를 포위했소?”
돌아오는 대답이 가을의 아침처럼 싸늘하고 메말랐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오국상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무슨 뜻이오?”
“따르지 않으면 응징만 있을 뿐이다.”
그 말을 끝으로 상대가 무기를 들어 방패를 때렸다. 순간 수천의 기마대가 방패를 들어 올리고 무리를 세웠다. 그 모습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고 동일해서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오국상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밑도 끝도 없이 이게 무슨 소린가!
상대의 신분도 모르는데, 그저 항복을 하라니!
“지금 그대는 매우 곤란한 제안을 하고 있소. 우리는 황실의 의뢰를 받아 고려군에 군량을 전달하고자 이동 중이오. 그런 우리에게 항복을 하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는 있소?”
투구 안으로 드러난 상대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항복이냐, 죽음이냐, 선택은 너희 몫이다.”
그 말 뿐이었다.
이건 오국상에게 더 없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간단한 말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오늘 처음 알았다. 지금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를 맛본 기분이었다.
이때, 검은 무리의 한쪽이 부산스러워졌다. 마병이 양옆으로 조금씩 이동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 그곳으로 작은 길 하나가 만들어지고, 그 사이를 뚫고 평범하지만, 검은 무리에 섞여 있어서 전혀 평범해 보이지 않은 젊은 청년이 말을 몰아 나왔다.
“여기까지 군량을 운송한다고 수고했다만, 이제부터는 우리가 맡아야겠다.”
그를 본 오국상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복장으로 보아 황실의 관리 같은 것이다. 여호랑의 외침이 그것을 증명했다.
“이따위 비열한 짓을 해서 황실이 얻을 게 무엇이오?”
도망친 관리에 대한 분노는 폭풍 같았다.
여호랑의 눈빛은 관리를 잡아먹을 듯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의 거센 기세에 겁부터 집어먹었을 텐데……, 젊은 관리는 포함되지 않는 듯했다. 태연한 모습이 산책이라도 나온 모습이었다.
“비열하다?”
관리는 비웃는 듯 조소를 흘렸다.
“내가 지금껏 보아온 무리 중에 가장 비열했던 녀석들이 바로 너희 같은 무림인이다. 네놈들은 약육강식이라 주장하겠지만, 정작 눈이 있다면 알 것이다. 약자를 누르고 강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여우 같은 족속이라는 것을.”
그리고는 코웃음을 치며 말머리를 돌렸다.
“만약, 약육강식이 맞다면 너희 방식대로 처리하려는 것이니 원망하지 마라.”
“놈!”
여호랑의 노도(怒濤) 같은 포효가 하늘을 찔렀다. 그의 손은 허리에 걸린 예리한 보검을 뽑고, 발은 신법을 밟아 관리의 뒤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네 피를 받아 수하들의 제사를 지내리라.”
하지만 마음만 앞섰을 뿐, 그럴 수 없었다. 몸을 돌린 관리의 간단한 동작에서 주변을 얼릴 듯한 차가운 빛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여호랑은 상대의 지척에 도착하기도 전에 몸이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관리는 바닥에 널브러진 그를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표사들 향해 입을 열었다.
“무법천지를 바로잡고자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면 황실은 당연히 그럴 것이다. 적어도 네놈들의 희생이라면 길가에 굴러가는 동전 한 닢의 가치도 없는 것이니까.”
말과 함께 그는 기마대 틈으로 묻혀 버렸다. 곧이어 기마대가 움직여 관리가 지나간 길을 없애고, 군대의 삼엄함과 굳센 기상으로 무장했다.
오국상은 어쩔 수 없이 검을 뽑았다. 항복해도 살려줄 기미가 없으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오직 저항만 있을 뿐인데, 대원들도 마찬가지 생각인 모양이었다. 시키지 않았는데도 대열을 갖추어 철기대를 상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몇 겹으로 포위한 기마대가 서서히 대형을 좁히자 그들은 숨통을 조르는 심한 압박만 받았다.
“한 놈이라도 더 죽여라!”
오국상의 외침을 신호로 맹의 표사들이 사방으로 달려들었다.
이미 기마대의 포위대형을 빠져나온 사자비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감탄 섞어 말했다.
“어찌 저리 무모한가!”
옆에 있던 대원이 대답했다.
“그래도 쉽게 당하지는 않겠다는 자신감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가상한 것은 기세뿐이다. 사자비도 놀랐다. 무림에서도 수준급의 고수들이 공격을 퍼붓는 대도 흑각철기대는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단단할 줄은 몰랐다. 흑각철기대의 방패는 검기에 맞아도 끄떡없었다. 물론, 타격에 대한 충격이 심해서 방패수를 태운 말이 뒤로 밀려나고 있었지만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방패부대가 뒤로 밀리자, 곧이어 뒤를 받치던 창병이 장창을 앞세웠다. 방패 사이사이로 예리하게 뻗은 창끝이 쇄도하니 이번에는 표사들이 물러났다. 목표를 두지 않고 허공을 향해 마구 찌르는 창은 그들에게도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표사가 거리를 벌리자 방패부대는 완전히 뒤로 빠졌다. 그 틈을 이용한 창병이 앞으로 달려나가 원형을 좁혔다.
표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두꺼운 갑옷을 입은 창병도 상대하기 벅찬데, 뒤로 빠진 방패부대가 방패를 안장에 걸더니, 활을 꺼내어 쏘았기 때문이다. 상당한 연습을 했는지, 그들이 잰 화살은 창병 사이를 뚫고 표사들의 급소만 노렸다. 누구 하나 실수가 없을 정도로 정확해서 표사들은 창병을 정면에 두어 그들을 방패 삼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 행동범위가 한정될 수밖에 없고, 그만큼 창병의 공격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압도적이군!”
흑각철기대는 무림고수를 상대하는 가장 실리적인 방법만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 앞에서는 무공 초식이 소용없어 보였다. 단지 힘으로 파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불행히도 흑각철기대는 무거운 갑옷과 방패를 가졌고, 또한 내공도 어느 정도 사용하는 고수였다. 압도적인 숫자도 큰 장점이었지만, 그보다 한 사람이 움직이는 듯한 통일된 동작이 표사들에게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듯했다.
그 증거가 결과로 나타났다. 전투가 시작된 지 이 각 만에 표사들의 수는 삼 할로 줄어 있었다. 물론, 흑각철기대도 온전하지는 않았다. 첫 교전에서 방패수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지기도 했고, 두 번째 교전에서 창병이 갑옷과 갑옷을 잇는 틈새를 공격받아 다치기도 했다.
“이제 끝나겠군요.”
전투를 바라보던 대원의 중얼거림이었다. 사자비도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창병이 뒤로 빠지고 있었다. 동시에 마지막 포위대형을 갖추던 기병대가 말에 내리더니 한 손으로 방패를 앞세우고 다른 한 손으로 대도를 들어 표사들을 향해 천천히 압박해갔다. 이미 무리한 내공을 사용해서 힘이 떨어진 녀석들을 쉽게 끝내려는 모습이었다. 그들을 피해 위로 뛰어오른 표사들도 있었으나, 대기하던 궁수에 의해 고슴도치가 되었을 뿐이고, 요행히 화살을 쳐냈어도 아래서 기다리던 철기대에 의해 무참히 처리되었다.
“명하신 대로 섬멸했습니다.”
맹의 고수를 모두 쓰러뜨린 뒤, 붉은 깃털을 투구에 세운 장수가 다가와 그렇게 보고했다.
분주히 전투 흔적을 지우는 병사들을 보며 사자비가 공을 치하했다.
“수고하였소, 참장!”
“수고랄 것까지 있습니까, 피해가 생각보다 커서 송구할 뿐입니다.”
“피해가 크다고 했소?”
사자비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참장의 생각은 진짜인 듯했다.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서른 명이 전사했고, 부상도 백여 명이나 있습니다.”
“지금 그대가 상대한 무리는 무림에서도 알아주는 고수들이오. 그걸 생각한다면 정말 미약한 피해일 뿐이지. 오늘 흑각철기대에 감탄했소. 이 소식을 들으신 폐하께서도 아주 흡족해하실 것이오.”
참장은 투구를 벗어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의외로 삼십대 후반의 젊은 장수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대인!”
“진심이오. 그보다 일부 병력을 빼어 고려군에 군량을 전달하고, 나머지는 회군하여 다음 명을 기다리시오.”
“저희와 같이 가지 않으십니까?”
“대장군께는 안부 전해주시오. 하루속히 복귀를 해야 해서 어쩔 수 없소.”
“그럼, 호위대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사자비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산해관에 도착하기도 전에 호위를 돌려보냈다. 그를 기다리던 친황대를 만났기 때문이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이지?”
갈천은 사자비를 발견하기 무섭게 다가와 총독의 지시를 전달했다.
“총단으로 복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곧장 사천으로 총감을 모시고 가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사천?”
“네. 이미 수군에 연락하여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대련에서 절강으로 바닷길을 이용하고, 거기에서 장강을 타면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듯합니다.”
“꽤 급한 것 같은데, 이유가 있나?”
“구채구에 무림 세력이 모이고 있습니다.”
사자비는 웃음을 흘렸다.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규보에 대한 정보였다. 물론, 듣고 바로 흘려버렸다. 무림이 규보에 관심이 많은 이유는 그의 무공, 백일홍 때문일 텐데 그것은 이미 황실에서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그와 친황대원이 익힌 무공이기도 했다. 관심을 둘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무림에서 소리 소문 없이 떠도는 정보라 더욱 그랬다. 만약 정보가 사실이고 황실이 알았다면, 정확히 동창이 그 사실을 파악했다면 이미 그곳을 차지했을 것이다.
사자비가 알기론 황실은 결코 그곳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잘못된 정보이거나, 진짜라 해도 이미 황실이 오래전에 그곳의 중요한 물건을 빼돌렸을 가능성이 컸다.
“굳이 구채구에 몰려드는 무림을 상대할 필요가 있나!”
친황대가 가지 않아도 규보의 무덤을 차지하고자 무림 고수들이 수많은 피를 흘릴 테다. 이건 어부지리였다. 나설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이었다.
“총독께서는 실적을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십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것이 더 나을 거라 판단되는군. 이용할 가치가 충분하지만 지금 나서봤자 인력낭비가 아닌가. 할 일도 태산인데!”
“총독께서도 같은 생각이셨지만…….”
“심중의 변화가 생겼다?”
“사실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뭐지?”
“구채구의 정보가 진짜라는 겁니다.”
사자비의 눈이 잠시 커졌다.
“사실이라?”
“그렇습니다. 총독께서는 규보의 무덤이 무림인에게 흘러들어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건 폐하의 뜻이기도 합니다.”
사자비는 더욱 놀랐다.
“폐하의 지시가 있었단 말이냐!”
갈천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그는 확신했다.
‘그렇다면 진짜라는 말인데…….’
순간 사자비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무공에 대한 욕심이 가슴 깊은 곳에서 머리를 쳐드는 것 같았다.
요즘 무공에 대한 한계를 조금씩 느끼던 참이었다. 설혼마녀와의 만남에서도 그랬고, 강혈대마와의 대결에서도 그랬다. 만약, 규보의 무덤에 또 다른 무공비급이 잠들어 있다면…….
어쩌면 백일홍의 완벽한 수련방법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오래전 황궁무고에서 가능성만 믿고 막연히 계획했던, 탈혼진공을 이용한 위험한 수련방식이 아니라 한빙지체가 되는, 보다 확실하고 쉬운 지름길이 숨겨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확보해야지.’
물론, 아무것도 없을 가능성도 있지만 시도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여겼다.
제5장 꿈을 좇는 자들
1
사천은 풍요로운 곳이었다. 중원 전체가 가뭄과 기근으로 몸살을 앓는다지만 이곳만은 다르니……. 가을, 겨울에도 따듯한 기후 때문에 얇은 옷을 입고, 밤에도 이불을 걷고 잠을 자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중원에서 가장 큰 곡창지대를 가지고 있어 다른 지방이 비해 비교적 배를 곯는 사람이 적었다.
사자비도 사천을 잘 알았다. 구천검문 때문에 발걸음을 한 적이 있어서였다. 그러니 지상낙원이 사천 성도를 중심으로 퍼져 있을 뿐, 서북쪽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서북지방은 지독했다. 사람의 발길이 잘 닫지 않는 천연의 요새로 유명하고, 험난한 산악지대의 연속이며 초원과 늪지대로도 악명이 자자했다. 독초와 독충이 우글대고, 맹수가 먹이를 찾아 두 눈을 번뜩이니, 약초꾼이 아니면 발을 들여 놓을 사람은 없었다. 오죽하면 산적도 없을까!
“정말 없나?”
“그러믄요!”
사자비의 물음에 쥐같이 생긴 오십 줄의 중늙은이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는 천통달(天通達)이라 했다. 길 안내를 맡았는데, 사천 북쪽을 무대로 약초를 캐어 파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동창이 이번 일에 사용하고자 고용한 자였다. 원래 이름은 동달(動達). 빨빨거리며 잘 돌아다닌다는 것인데, 그는 스스로 천통달이라고 불렀다. 사천 북쪽의 험난한 곳을 모두 돌아보아서 하늘이 아는 만큼 그도 지리를 잘 안다는 억지였다.
억지인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름길을 잘 아는 것만은 분명했다. 고민 한 번 없이 이동하기 편한 길만 골라 가는 것이다. 그 능력 때문에 사자비와 열 명의 대원은 큰 어려움 없이 구채구를 향해 속력을 낼 수 있었다.
“왜 그런가?”
“말도 마십쇼. 어찌나 지형이 험난한지 신강으로 몰래 빠져나가려는 도망자가 아니라면 그곳을 지나는 사람이 없지 않겠습니까. 도적이 있다면 딱 굶어 죽기 십상이죠.”
사자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건 뭔가?”
모든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거기엔 보기에도 험악한 열 명의 사내가 길목을 막고 서 있었다.
천통달이 이럴 리가 없는데, 하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다가 한 마디 했다.
“미친 산적도 있는 법이죠.”
그다지 신빙성 없는 소리 같았지만 사자비는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앞을 보고 말했다.
“우리에게 볼일이라도 있나!”
무리는 생긴 것 답지 않게 양순한 가축처럼 도리질을 치고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길을 터주었다. 한눈에 보아도 불순한 맘을 품은 녀석들이 분명했지만 사자비와 일행을 알아보았는지 그저 길가로 바짝 붙는 행동만 보였다.
사자비가 천통달을 보았다.
“역시, 산적은 없는 것 같군. 하지만 조심해야겠는걸!”
천통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올 때는 다른 길로 와야겠는뎁쇼.”
“그러던가!”
그는 유유히 무리를 지나 깊은 산중을 바라보며 움직였다. 이틀만 더 가면 구채구가 나오고, 구채구를 가로질러 서북쪽으로 가면 목적지였다.
사자비가 지나간 자리에 열 명의 사내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들은 처음처럼 길을 막는 형태를 취한 후, 멀어지는 사자비와 일행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중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노인이 중얼거렸다.
“첩첩산중이라더니!”
중얼거림을 들은 모양, 대답이 있었다. 놀랍게도 나무 위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였다.
“정말 놀라운 자야!”
노인은 맑은 고성을 쫓아 시선을 들었다.
하늘을 가린 나뭇가지 사이로 이십대 중반의 여인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보기 드문 미색을 자랑했다. 그러나 혜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초록색과 검은색으로 얼굴과 옷을 덕지덕지 칠해 놓은 것이다. 위장술의 일환이지만 대로에서 여인을 본다면 대개는 더럽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녀가 이런 모습으로 돌아다닐 리는 없겠지만!
“아가씨도 느끼셨습니까?”
여인의 입가가 뒤틀렸다.
“여기 그걸 못 느낄 정도로 바보가 있던가!”
노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일이 쉽지 않겠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의미 하겠는걸요.”
“하는 수 없지. 차선책을 고르는 수밖에. 하지만 혹시 모르니 계속 지키고 있어야 할 거야.”
“노부가 보기에는 그조차 무의미할 것 같습니다만.”
곰곰이 생각하던 여인아 수긍의 뜻을 보였다. 그러나 진실은 때론 거짓보다 따갑게 느껴진다. 지금 그녀의 얼굴이 딱 그런 심정을 포함하고 있었다. 심하게 일그러져서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옥의 저승사자, 살수 세계에서는 사신으로 군림하는 살막(殺幕)의 작은 주인이 그녀였으니 말이다.
살수 단체는 의뢰를 받아 살인을 저지르지만, 확실한 일이 아니면 움직이질 않는다. 의뢰금이 아무리 많아도 삼킬 수 있는 먹이가 아니면 손조차 뻗지 않는다. 살수에게 가장 중요한 수단은 무공의 고하보다는 깔끔한 마무리이기 때문이다. 증거를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 그들의 최종 목표였다.
무림에는 오대 살수단체가 자주 거론되고, 그 속에 살막도 들어가지만 누구나 이렇게 말하고는 한다.
살막이 최고다.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지금껏 살막은 의뢰를 거절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자든 죽인다. 살막의 일원들은 그렇게 확신했다.
물론, 액수가 맞아야겠지만 살막이 마음을 먹었을 때 누구도 그들의 마수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살막이 나서면 맹주도 죽일 수 있다고. 시도한 적도 없고, 감히 맹주를 죽이라 의뢰할 대담한 자도 없어 증명할 방도가 없지만, 살막과 거래를 할 때 가장 처음 거론되는 말은 의뢰인들에게 그런 믿음을 주었다.
– 누구를 죽이고 싶소? 말만 하시오. 세상천지에 우리가 처리하지 못할 자는 단 한 사람밖에 없소.
그리고 그 하나를 황제라고 말한다. 물론, 거기에도 전제가 붙는다고 했다. 궁에 있는 황제라는 것이다. 궁 밖만 나오면 황제도 가능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런 단체의 작은 주인이 지금 기분이 잔뜩 상한 채였다. 첩첩산중이라는 노인의 말대로 그녀 또한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우선 그녀가 생각하는 산은 네 개였다. 산도 거대한 태산이다.
첫 번째는 검은 장삼을 휘적이며 구채구를 돌아다니는 웃긴 산이다. 살막이 오기도 전부터 구채구를 이 잡듯 뒤지고 다녔는데, 그녀는 그가 사람들이 말하는 흑룡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걸음걸이에서 풍기는 기도로 짐작했을 때, 살막의 뛰어난 정보력조차 그의 진짜 실력을 과소평가 했다는 것을 이 기회에 확실히 알았다. 그는 소문도 대단하지만, 소문보다 실체가 더욱 대단한 사람이 분명했다. 그 예가 우연히 부딪힌 마교의 고수 여덟을 단숨에 제압해 버린 일이었다. 그 후로도 그의 정체를 모르고 달려든 고수들을 모두 제압했는데, 아주 단순한 호신술만 사용했을 뿐이었다. 어떤 고수도 그의 진짜 실력을 끌어내지 못했고, 삼 수 이상을 받아낸 사람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은밀히 받치는 자들, 상상조차 하기 싫은 녀석들이 이번 사건에 관여했다는 것도 알았다. 바로 구파일방이 규보의 무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 산은 얼마 전에 도착한 무림맹이었다. 무림맹 자체도 상당한 위협거리지만, 그녀는 그들의 지휘자를 확인하고는 황당한 기분마저 느꼈다. 맹주가 아닌가. 맹주가 직접 맹의 고수를 이끌고 이 궁벽한 오지까지 들어온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 할 일이 그렇게 없나!
그보다 규보의 무덤이 그만큼 중요한 것일 지도 모른다. 무림에서 철저히 유령으로 살아가는 살막까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왔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어떤 누가 와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 산을 생각하면 더욱 기가 막혔다.
세 번째 산을 본 그녀는 정녕 놀랐다.
흑룡이 마교의 고수를 쓰러뜨렸을 때, 마교도 이곳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미 그들도 오래전부터 구채구로 들어온 것 같았다. 흑룡을 상대했던 녀석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보다 더 대단한 자, 바로 잔월신교의 교주 수라천군이 구채구에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것도 팔대장로 중 둘이나 데리고, 한때 무림을 떨쳐 울렸던 세 명의 제자까지 함께하고 있단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네 번째는 상마쌍괴(狀魔雙怪)였다. 그들은 사파의 십존 중 둘인데, 둘이 하나가 아니라 그 두 사람 모두 십존에 들어가는 인물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항상 둘만 행동하던 그들이 녹림채의 고수들과 같이 돌아다닌다는 점이었다. 상마쌍괴가 녹림십팔채와 손을 잡았다? 이건 경악할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규보의 무덤으로 짐작되는 장소가 광범위하다는 것이었다. 살막조차도 구채구와 거기에 이어지는 북쪽 산악지대를 전부 파악할 수 없었다. 얼마다 더 대단한 고수들이, 혹은 은거했던 녀석들이 이 일대를 누비고 있을지 모른다. 그 증거로 방금 지나간 녀석들을 들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하나 상당한 고수였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요기를 풍기는 고수들이었다. 정상적이지 않은 수련을 거쳤다는 것은 민감한 살수의 본능으로 알아차렸고, 무림의 그것과는 쾌를 달리한다는 것도 보자마자 짐작했다. 그중에 선두에서 말을 몰던 자는 가공할 기운을 내뿜었다. 걸어올 때는 몰랐는데, 살막을 마주하자마자 뿜어내는 기운이, 괜히 덤벼서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지 않게 하라는 압력을 주는 듯했다. 단지, 기운만으로 그런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고수라면 어떤 수련을 거친 것일까? 그것도 이제 막 솜털을 벗은 애송이처럼 보였는데!
복장도 평범해서 그들이 속한 문파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 개인적으로 살수행을 펼치라면 자신 있지만, 이런 오지에서 저런 녀석들과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면 막주가 직접 오지 않는 이상 필패였다.
“아무래도 정보조직을 좀 더 깔아 명확한 정황을 파악해야겠습니다. 대책은 그 후에 간구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노인의 말이었다.
부막주 막거희(莫巨熙)는 그 말조차 인정했다.
구채구로 들어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지만 숨겨진 샛길은 네 개. 하나는 설산으로 가는 방향이며 험난하기 그지없어 길을 잃을 우려가 있었다. 신강으로 빠져나가려는 자가 아니라면 거칠 이유가 없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감숙성의 난주로 이어지는데, 방향조차 잡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직 아무도 모르는 길이었다.
또 하나는 이곳이었다. 살막이 길을 막는 이유였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길을 막고 있는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규보의 물건을 차지한 이가 이곳을 통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섞여 있었다. 그렇게 해야 마지막 남은 길을 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막이 짜놓은 진정한 의미의 사지가 바로 거기였다. 진법과 요술을 가미한 살막의 장소, 죽음의 길이었다.
문제는 잔월신교부터 시작하여 무림맹 등이었다. 그들은 대단한 위세를 자랑해서 규보의 비급을 얻을 가능성이 아주 큰 무리였다. 그들이라면 규보의 보물을 취하더라도 굳이 샛길을 통해 숨어서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많은 고수를 데려왔기 때문에 살막이 쳐놓은 죽음의 길을 택한다 해도 정작 살막이 막을 방도가 없었다.
결국, 전체적인 계획을 대폭 수정하는 수밖에.
처음부터 삐거덕거리니 한숨만 나온다. 그러나 며칠 후 다시 그곳을 지나는 무리를 보고는 한숨마저 사라졌다. 여느 무리처럼 요행을 노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백발을 휘날리는 여인, 설혼마녀와 백궁의 고수까지 구채구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입구입니다요.”
구채구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천통달이 말했다.
이곳을 찾은 많은 사람이 그랬지만, 사자비 역시 구채구에 대해서는 몰랐다. 정보가 있다고는 해도 거친 산은 정보만으로 돌아다니기엔 부족했다. 지도조차 없는 오지라 더욱 그랬다.
“크기가 얼마나 되나?”
“구채구 자체도 아주 방대하고 깊어서 저도 잘 모릅니다요. 산세가 아주 거칠어서 이동하기도 어렵거든요. 대충 남에서 북으로 가로지르는데 열흘은 족히 걸립지요. 거기다 주변 일대에도 산과 늪지대가 이어져 있어 구채구의 경계를 구분 짓기도 힘듭니다요. 길을 잃어버리기도 쉽고. 하지만…….”
천통달이 자부심 가득한 미소를 드러냈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정보가 사실이라면, 그 비슷한 곳을 몇 알고 있습죠.”
“황금산이 입을 벌리는 곳?”
“네!”
“구채구에 황금산이 있다는 건가?”
“황금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황금처럼 보이는 산 몇 개를 보긴 했습죠, 헤헤! 물론, 정확히 찾을 수는 없지만요.”
“알고 있다면서 찾을 수 없다니, 무슨 소린가?”
“아침에 해가 떠오를 때 일 각 정도만 그 장소를 알아볼 수 있거든요. 해가 동녘에서 떠오를 때 암석이 빛을 반사해서 반짝이는 산을 몇 개 본 적 있습죠.”
“그럼, 입을 벌리는 곳은?”
“그 산 중에 동혈이 있는 곳이 있지 않겠습니까요?”
“과연! 사전에 동창이 자네를 포섭해 놔서 천만다행일세.”
천통달은 헤벌쭉 웃으며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공자님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요.”
그러면서 잊으면 안 된다는 듯 강조했다.
“그곳을 찾으면 선수금의 스무 배를 주신다는 약조는 꼭 지키셔야 합니다요.”
“물론일세.”
“그리고 한 가지 명심하셔야 합지요.”
“뭔가?”
“여기에는 소수민족이 살고 있습죠. 아홉 개의 부족인데, 그들은 오랜 시간 단절된 삶을 살아서 외부인에 대해 경계심이 아주 심합니다요. 사람을 잡아먹기도 한다는데, 그들을 만나면 간섭하지 말고 그냥 모른 척 지나치세요. 신기한 듯 보지도 마시고, 말도 걸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요.”
“새겨두지.”
사자비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갈천을 보았다.
“대원들은 어디에 있나?”
“송반에서 오는 중일 겁니다. 아마 이틀은 걸릴 겁니다.”
“어쩔 수 없지. 자넨 여기에서 대기하다가 그들과 합류하게. 그리고 일부는 입구에 숨겨서 신호를 기다리게 하고, 일부는 샛길에 매복시키는 게 좋겠어. 나머지는 자네와 소천룡 대주가 이끌고 표시를 따라오면 나와 만날 수 있겠지.”
“기다렸다가 같이 움직이지 않으시고요?”
“늦었으니 빨리 움직이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 사이 누가 무덤을 발견했을 수도 있으니.”
“하나 구채구에는 무림 세력이 잔뜩 깔렸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나?”
“그들의 목적은 규보의 무덤. 그것을 얻고자 혈안이 된 녀석들입니다. 구채구에서 대인을 만난다 해도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인적이 없는 오지라 마음 놓고 대인을 위협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자비는 관심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보다 동창을 이용하여 구채구 전체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것을 잊지 말도록. 혹, 먼저 규보의 무덤을 찾은 자가 있다면 결코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되네. 매복은 그때를 위한 것이니 책임자에게 주의를 주게.”
갈천은 여전히 내키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사자비의 단호한 표정을 보고는 명을 받들었다.
“조심하십시오.”
사자비가 웃으며 말했다.
“나를 따라오는 중에 무림인을 만난다면 모두 처리를 하게. 증거도 완벽히 없애고.”
“존명!”
☆ ☆ ☆
구채구 동북쪽 산림 중앙에 천막 수십 개가 장방형으로 진형을 그리고 있었다. 그 중앙 진채에 인자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찌 되었소?”
맹주는 막 휘장을 걷고 지휘소에 들어온 노인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노인은 맹주와 달리 건장한 체격에 구 척이나 되는 키를 자랑했다. 붉은빛이 감도는 얼굴은 고집을 말하는 듯하고, 각진 매부리코는 강단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숱이 많은 수염이 가슴까지 드리워져 전체적으로 관운장을 연상시키는 노인이었다. 무기 또한 관운장의 그것처럼 큰 대도를 들고 있는데, 맹의 좌석을 차지한 묵천문의 총관, 전윤옥(錢潤屋)이었다. 물론, 총관직은 다른 이에게 물려준 지 오래. 지금은 맹의 십칠 장로 중 하나였다.
전윤옥은 고개를 저었다.
“그곳도 틀렸습니다. 아무래도 구채구 전체를 뒤집지 않는 이상 찾아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소. 말 몇 마디를 믿고 규보의 무덤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어쩌면 거짓 정보일 수도 있을지 모르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정보로 알려진 바가 너무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그런 정보가 아무런 증거 없이 떠돌 리도 없거니와, 무덤을 뜻하는 문장을 누가 지어냈다고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틀림없이 이곳에 있을 겁니다.”
“문제는 찾아야 할 범위가 너무 넓고, 지형이 거칠다는 점이 아니겠소. 노부의 생각으로는 이만 포기하는 게 좋겠소. 이미 구파일방도 발을 뺀 것 같으니…….”
“구파일방이 포기했습니까?”
“그들은 한 달 반 전에 구채구에 들어와 무덤을 찾아다녔다 하오. 지금까지 무덤 비슷한 것도 보지 못했다니 어쩔 수 있겠소!”
“하지만 아직 뒤지지 못한 곳이 많습니다. 그리고 무덤이 꼭 구채구에 있다고는 단정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혹시, 장로께서는 짐작 가는 바가 있소?”
“저는 북쪽으로 좀 더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맹주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곳도 구채구의 깊고 깊은 곳. 산세가 거칠고 험악하여 보통 사람이라면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쪽은 더 심하다. 북으로 갈수록 고도가 높아지고 거칠어진다. 물도 문제였다. 구채구가 호수지대라 폭포와 계곡이 많지만 북쪽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 위로 이동하면 할수록 물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더욱 문제는 지리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곳에 정착하기까지 무림맹도 세 번이나 길을 잃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구채구 중앙 어디쯤이라는 것만 알 뿐, 어딘지 짐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남쪽으로 가면 구채구를 나갈 수 있다는 막연함과 귀소본능만 있을 뿐이었다.
“이젠 본래의 목적에 충실할 수밖에 없겠소.”
맹주는 그렇게 말해서 무덤에 대한 관심을 멀리 던져버렸다.
맹의 애초 목적이라면 유혈사태를 최소로 줄이는 것뿐이었다. 규보의 무덤을 찾는다고 구채구를 들쑤시고는 있지만, 그 역시 목적에 크게 벗어난 행동은 아니었다. 맹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무림세력 간의 다툼을 줄이는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역효과도 있었다. 사파와의 시비였다. 이곳에 정착한 보름간, 다섯 번이나 크고 작은 교전이 벌어졌으니 무림맹의 위세를 생각하면 생각 외로 잦았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그 또한 그것대로의 의미는 있었다. 적들을 압도적으로 눌러버렸으니 소문이 퍼진다면 맹의 고수를 만나는 순간 겁을 집어먹고 구채구를 나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전 장로의 생각은 어떻소?”
맹주의 결정이 섰으니 장로는 따르는 일이 최선일 것이다. 전윤옥은 규보에 대한 욕심을 한숨 한 번으로 털어버리고 물었다.
“구파일방과 함께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노부도 같은 생각이오. 들리는 소식마다 문파끼리 충돌하여 피를 흘렸다는 소리이니…….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은 소식까지 더하면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생겼겠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겠지.”
“맞습니다. 더는 정사를 한 곳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될 겁니다. 제가 지금 구파일방의 진영에 다녀오지요.”
“그래 주시겠소?”
전윤옥은 대답 대신 맹주에 대한 예를 취한 후 물러섰다. 하지만 휘장을 걷기도 전에 무사 하나가 달려 들어와 놀란 표정으로 소리를 높였다.
“큰일 났습니다.”
그는 잔뜩 흥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2
“동혈 하나가 발견됐습니다.”
비조처럼 날아온 흑의 사내가 바닥에 부복하며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 앞에 이십대 후반의 젊은 청년이 있었다. 네모진 턱에 다듬어지지 않은 짧은 턱수염은 청년을 시골에서 농사만 지었을 법한 순박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진짜인가?”
청년의 목소리도 외모처럼 굵고 부드러웠다.
흑의 사내가 청년을 한 번 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동천문이 어제 아침에 발견했답니다.”
“동천문? 귀주에 세력을 떨치는?”
“그렇습니다.”
“어디에서 발견했다던가?”
“본진에서 칠십 리 서북쪽으로 가야 합니다.”
청년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구채구에서 칠십 리면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칠십 리를 가는 동안 아마도 거친 산과 늪지대를 수없이 거쳐야 할 텐데, 둘러가야 하는 경우까지 계산해야 한다면 실제보다 두세 배는 더 먼 거리일 수 있었다. 거기다 사방이 모두 적이다. 작정하고 규보의 비급을 노린 자들이 천지에 깔린 것이다. 정사의 다툼도 팽팽하지만 이곳에서는 그것조차 무의미한 것 같았다. 지금이야 잔월신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연히 마주쳐도 모른 척 지나치지만, 목표가 눈앞에 드러났을 땐 득달처럼 달려들지도 모른다. 잔월신교의 아성이 아무리 대단해도 두려움 때문에 비급을 포기할 순진한 녀석은 이곳 구채구에는 없을 테니까. 모두 동등한 경쟁자일 뿐이었다.
청년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관심을 둔 교주, 사부이자 절대존자인 수라천군의 결정을 반대했었다. 어떤 무공보다 빠르게 대성하는 신기한 마공이 교내에 산재해 있는데, 왜 규보의 무공 따위를 얻고자 움직여야 하나!
청년은 그 사실이 내키지 않아 몇 번이나 반대하다가 수라천군의 핀잔을 들었다.
– 영원한 강자는 없는 법이다. 그걸 모르는 이상 너는 강자가 될 수 없을 게다. 된다 한들 한때 빛을 뿌리고 사라지는 반딧불과 다를 바 무엇이겠느냐!
수라천군은 규보의 무공이 다른 세력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 같았다. 무림이 잔월신교를 위협할 여지를 애초에 잘라버리겠다는 심산이었다.
청년은 씁쓸한 표정을 하고 흑의 사내를 보았다.
“동혈이 무덤인 것은 확실한가?”
청년, 십오 년 전에 정도가 득세하는 하남을 혈혈단신으로 가로지르며 수많은 정파 기인을 쓰러뜨려 강호를 놀라게 했던 수라천군의 셋째 제자 환몽영(幻夢影)이 신중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런 오지에 동혈 몇 개 없을까. 단지, 동혈 하나가 발견되었다 하여 교도 전체가 움직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흑의 사내는 달리 말했다.
한창 설명을 듣던 환몽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를 드리는 수밖에 없겠군.”
그는 몸을 돌렸다. 이곳 대부분의 무림세력이 그렇지만, 잔월신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리를 몰라서 본진을 하나 두고 조를 나누어 사방으로 정찰을 보내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환몽영은 몸을 돌리는 순간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쾌속한 신법을 전개한 것은 아니다. 그는 정말로 사라졌다. 땅 밑으로 다니기 때문에. 그건 무형환신법(無形幻熺法)의 절정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신체를 연기처럼 만드는, 무림의 상식으로도 이해 불가한 이동술의 대가였다.
그가 연기처럼 바닥으로 꺼진 후, 흑의 사내도 하늘로 날아올랐다. 동시에 몸을 숨겼던 여덟 명의 동료도 본진을 향해 경공술을 전개했다. 순간적으로 숲을 뒤덮은 지독한 마기(魔氣)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 ☆ ☆
팡-!
빛이 공기를 때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는 것 같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수십 줄기로 나뉜 폭포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여파는 일곱 구의 시체를 바닥에 남겨 놓았다.
유성검(流星劍) 강원학(姜元鶴)의 솜씨였다.
그는 널린 시체를 보며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구룡문이라면 사천에서도 알아주는 무림세력으로 당문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아미파를 비롯하여 구천검문 등 사천오대명문이 있다면 삼천악(三川惡)이라고 해서 삼대 사파도 있는 것이다. 구룡문은 그중 으뜸이었다.
유성검 강원학은 구룡문주의 동생이었다. 그는 규보의 비급을 얻고자 구채구에 발을 디딘 상태였다. 그게 이십일 전의 일이니 꽤 시간이 지난 셈인데, 악재가 연이어 겹치고 있었다.
시작은 좋았다. 구채구에 온 지 이틀 만에 정찰조에 의해 무덤으로 짐작되는 장소를 알아냈으니 말해 무엇 하랴. 문도를 데리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여섯 개의 문파가 아귀다툼을 벌인 후. 어부지리까지 얻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불운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큰 희생 없어서 그런가. 그곳은 규보와는 전혀 상관없는 장소였다. 실망도 이런 실망이 없지만, 문제는 다른 문파가 끼어들었다는 점이었다.
강원학은 미련 없이 발을 빼려 했다. 얻을 것 하나 없는데, 그곳을 지키고자 싸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들은 구룡문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건 오해에서 비롯된 싸움이었다. 구룡문이 이미 규보의 물건을 취한 후 도망치는 것이라 짐작했던 것이다.
구채구가 아니라면 감히 저항조차 하지 못할 녀석들이 아귀처럼 달려드는 통에 강원학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문도를 잃어야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불운이 찾아왔다. 바로 구파일방이라는 거대한 산이었다.
그들은 구룡문을 검열하길 원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갑자기 찾아와서 규보의 물건이 있는지 조사하겠다는 노골적인 의도를 내비쳤다. 당연히 강원학은 거절했고, 결국 손속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구룡문이라도 구파일방을 무시할 수는 없는데, 여기가 어딘가. 구채구 아닌가. 잠시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던 것을 지금은 후회하지만 당시에는 분노했었다. 사파가 구파일방의 일방적인 요구를 왜 들어줘야 하나. 그런 생각과 판단 착오가 결국 문도를 꺾이게 했지만, 다행히 구파일방은 승려와 도인으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그들은 격돌에서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주었다. 문제는 부상자가 너무 많았다는 것이었다. 문도 절반 이상이 승려와 도인들에게 맞아서 팔과 다리가 부러졌으니, 이래서는 당분간 움직이기도 힘들게 되었다. 성한 사람보다 부상자가 많은데 어떻게 이동한단 말인가. 거기다 강운학의 체면도 바닥에 떨어졌다. 사천 남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그가 검은 장삼을 휘날리는 애송이에게 단 일 검도 제대로 놀려보지 못하고 제압당했으니……. 문도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상대가 흑룡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비참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제압당해서 한평생 가졌던 자존심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꺾여버렸다. 그러나 그간 겪었던 불운은 오늘만큼 참담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당당히 구룡문의 실력을 증명했는데도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이유는 광풍련이다.
하필 이곳에서 광풍련을 만날 이유가 무엇인가!
우연이기는 우연인데, 왜 구채구에서, 그것도 지금 만나게 된 것인지…….
구채구는 구룡문에게 불운만 안겨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같은 사파라지만 원한이 깊은 광풍련은 구룡문을 보자 깜짝 놀라더니 곧장 달려들었다. 구룡문과 강원학 또한 강서성의 장자 광풍련과 마주하자 검부터 뽑아들었다. 삼십 년간 이어져온 원한은 싸울 이유도 필요 없게 만들었다.
“이제 어찌하렵니까?”
천룡대주가 다가와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강원학의 어깨도 힘이 빠져서 축 쳐졌다. 부상자를 제외하고 대부분 광풍련과의 전투에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이제 온전히 걸을 수 있는 인원이 열 명도 채 안 된다. 이래서는 규보의 비급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비급이 그들의 손에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야 할 형편이었다. 비급이 품에 들어오는 순간 득달처럼 달려들 적이 사방에 깔렸다. 그들 모두를 상대해서는 살아서는 구채구를 나갈 수 없을 것이었다.
초승달처럼 굽어진 거대한 폭포수를 보며 강원학이 한숨을 쉬었다.
“포기해야지.”
더 있다가 광풍련처럼 원한 맺은 무리를 또 만나면 그땐 상상조차 싫은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무덤을 포기하고 어서 나가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천룡대주는 상황에 맞지 않게 환한 표정이 되었다. 그도 속히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얼굴이었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러게.”
곧이어 시체를 치우고, 진채를 뽑아 폭폭 아래로 던져버렸다. 진채와 천막뿐만 아니라 짐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버렸다. 이후 열 명의 대원이 길을 열고 부상자가 쩔뚝이며 뒤를 따르는 방식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하나같이 걸음이 빨랐다. 구채구를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들의 발걸음에 생기를 불어 넣은 것 같았다. 그러나 구채구는 녹록지 않았다. 거친 지형은 그들을 곱게 벗어나도록 두지 않았다. 끝내 그들에게 악재를 남겨주었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시는가!”
폭포를 벗어나기 무섭게 이틀 동안 남서쪽으로 이동 중인데, 누군가가 튀어나와 진로를 막았다. 질릴 대로 질린 구룡문이라 일제히 무기부터 뽑아들었다. 동시에 강원학이 선두로 걸어나와 상대를 살폈다. 검붉은 피풍을 뒤덮어 사내, 얼굴도 알아보기 어려운 녀석이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거기에 서 있었다.
강원학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혈의인은 대답 없이 한참 동안 웃기만 했다.
강원학은 한 걸음 다가가 검을 들어 상대를 겨누었다. 별호답게 그의 검이 유성처럼 빛을 뿌렸다.
“사천 구룡문을 들어보았을 터. 우리에게 볼일이 없다면 비켜라.”
그제야 혈의인이 입을 벌렸다. 웃음만큼이나 음산한 목소리였다.
“왜 구채구를 나가려는 게냐?”
강원학의 표정이 구겨졌다.
“네놈이 상관할 바 아니다.”
눌러 덮은 혈의 사이로 사내의 입가가 드러났다. 사내는 비웃음이 분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런 이런!”
사내는 양팔을 벌리고 고개를 저었다.
“주인이 초대한 손님이 이유 없이 떠나려 하니, 어찌 상관을 안 한단 말인가!”
“주인? 초대?”
이건 무슨 소린가!
강원학은 혈의로 덮은 상대의 얼굴을 알아내려고 애썼다. 언뜻언뜻 보이는 눈이 빛나는 것 같았다. 몸 전체에서 풍기는 기운도 요사하다. 하늘도 가린 풍성한 나뭇가지 아래서 괴이한 기운이 밝게 빛나는 느낌이었다.
“이곳의 부족이냐?”
가능성을 믿고 던진 물음은 아니다. 아홉 개의 부족이 구채구를 둥지 삼아 살아왔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묘족과 장족의 피를 이어받은 그들은 은둔생활을 하며 외부의 발길을 거부했다. 언어도 다르다. 그런데 상대는 중원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무공, 혹은 그 비슷한 무언가도 익힌 것 같았다. 웃고 있지만 내면에 억눌린 막강한 기운도 느낄 수 있었다.
“말이 필요 없겠군!”
강원학의 몸이 앞으로 움직였다. 이미 경고를 했고 상대는 대답조차 않았다. 신분도 밝히지 않는 상대라면 무시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사지에서 무인끼리 마주한 상태라면 결국 한 가지 선택만 가능했다.
쐐애액!
유성검이 공기를 찢으며 파공음을 흘렸다. 별호처럼 유성검은 빛 무리를 잔상처럼 남기며 혈의 사내의 덮어버릴 듯 쏟아져나갔다.
혈의 사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서서 유성검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거대한 검기가 그의 지척에 도착했을 때 신형이 흔들리는 듯했다.
콰콰쾅!
유성은 혈의사내를 뚫고 그 뒤를 받치던 나무와 바위까지 부숴버렸다. 순간 소리에 놀란 들짐승이 뛰쳐나오고, 산새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강원학의 두 눈이 커졌다.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던 혈의 사내를 확인한 것이다. 그림자라도 되는 것일까. 분명히 검기에 뚫렸는데, 상대는 상처하나 없을 수 있나!
혈의인이 두 손을 움직였다. 움찔한 강원학이 뒤로 물러섰지만 혈의인은 단지 머리를 덮고 있던 천을 뒤로 젖힐 뿐이었다.
그는 노인이었다.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은 인자한 노인이었다. 그리고 웃고 있었다. 웃음 뒤로 음산한 목소리가 노인의 주름진 입에서 흘러나왔다.
“클클클, 유성검 강원학! 사천에서 알아주는 고수라더니…….”
순간 노인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잔뜩 기대를 했건만, 실망이지 않은가!”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강원학이 으르렁거렸다.
“날 알고 있었나!”
유성검이 다시 검명을 쏟아내며 주위를 울렸다.
“그렇다면 진짜 실력도 알려줘야겠군!”
그의 몸에서 내공이 폭발하더니 강렬한 기운이 뻗어나왔다. 그러나 노인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피풍 자락을 휘날리는 소리만 사방을 어지럽힐 뿐인데, 순식간에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모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경악했다. 온통 검붉은 그림자가 파도처럼 그들을 덮쳐왔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그림자가 그들을 덮고 나서 흑진주처럼 까맣게 변했다. 구룡문도를 반구형으로 덮은 것이다. 그 속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검은색 막은 거울처럼 주변을 반사할 뿐,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리는 있었다. 아주 경미한 소리였고, 잠시 후에는 그것조차 사라져 버렸다.
침묵 뒤로 반구형의 물체가 연기처럼 흩어지는 모습이 신기했다. 동시에 사라진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조금 전 그 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뒷짐은 진 채 구룡문도를 바라보는 모습이 흡족한 표정이었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이가 그의 앞에 널려 있으니 즐거운 모양이었다.
흥건하게 바닥을 적신 피는 조금 전 그곳에 사람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유일한 증거였다. 그때 노인과 삼 장 정도 떨어진 나무가 흔들리더니 껍질이 벗겨졌다. 거기서 사람 하나가 튀어나왔다. 덩치가 산만해서 곰 같은 느낌의 노인이었다.
그 덩치로 어떻게 나무 안에 숨어 있었는지 신기할 뿐이지만, 구룡문을 바라보던 노인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곰 같은 노인은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피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인자한 노인이 물었다.
“어떻소?”
늙은 곰이 불만 가득한 투로 말했다.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았으니 놀라울 뿐이외다. 중원의 쓰레기들을 상대로 그런 무공을 사용하다니…….”
“소리 소문 없이 다수를 죽이기엔 최상의 무공이 아니겠소.”
늙은 곰은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흑로대군(黑路大君)께서는 자중하시오. 이 증거가 발각되는 날이면 우리의 존재가 탄로 날 수 있음을 왜 모르시오.”
“무림의 개 눈깔이 어찌 이걸 알아볼까!”
늙은 곰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흑로대군의 행동을 나무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보다 구채구를 나가려는 무리가 부쩍 많아지고 있소. 아직 주술을 펼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들었소.”
흑로대군이 입맛을 다셨다.
“아쉽게도 주문을 새길 정확한 장소를 파악하기가 힘드오. 조금의 실수가 있어도 주술이 발동되질 않을 테니, 세밀하게 조사하는 수밖에 없겠지. 해서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소만.”
“사흘!”
“……?”
“사흘 후에 그분께서 이곳을 방문할 것이오.”
순간 흑로대군의 눈이 커졌다.
“그, 그분께서 직접?”
“그렇소. 무림일통이 시작되는 역사적인 장소이니, 그 순간을 지켜보시겠다 하셨소이다. 그러니 그 안에 끝내주시오.”
“흐음!”
흑로대군은 잠시 침음을 흘리다가 중얼거렸다.
“들었겠지?”
흑로대군과 같은 복장의 혈의인이 대답하듯 번쩍이며 나타났다.
“네!”
“인원을 더 풀어서라도 사흘 안에 완성하도록.”
“존명!”
사내는 나타날 때처럼 잔상을 남기며 사라져버렸다.
대상을 잃은 흑로대군의 시선이 늙은 곰에게 향했다.
“최대한 노력할 것이오.”
늙은 곰, 무웅대군(無熊大君)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놈은 어찌 되었소? 태인의 부탁이라 소홀함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혈야대군이 사지로 데려가고 있지 않겠소. 그 일은 내 권한 밖이니 직접 확인하시오.”
☆ ☆ ☆
구채구를 가로지르며 북으로 이동하던 사자비는 숲과 언덕의 경계에서 걸음을 멈췄다. 천통달이 안내한 장소를 돌아보았으나 이미 세 번이나 허탕친 후였다.
“거칠다더니…….”
언덕을 바라보며 탄성처럼 말을 흘렸다.
“아름답구나!”
그는 이런 풍경을 본 적 없었다. 엿새간 보았던 구채구는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름답다 못해 이런 곳이라면 신선이 살고 있지 않을까,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한 것 같았다. 산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구채구는 모든 것을 겸비한 듯했다. 가는 곳마다 새롭다고나 할까!
석회암이 계단처럼 나열된 언덕 호수가 있을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계단마다 고인 수면은 무지개빛깔을 띠고 있었다. 어떤 것은 하늘색이고, 어떤 것은 초록색. 어떤 것은 검고, 어떤 것은 희었다. 계단 사이사이로 우뚝 솟은 나무 또한 장관이었다. 흡사, 작은 섬나라 같은 느낌이다.
“도대체 여기는 어딘가?”
대원들도 사자비처럼 감탄 어린 시선으로 언덕호수를 바라보았다. 대답은 천통달이 했다.
“구채구 북쪽입니다만, 왜 그러십니까요?”
“자네가 설명했던 것과는 영 달라서 그러네. 말대로라면 아주 지독한 곳이어야 하는데, 가는 곳마다 절경이지 않은가.”
그리고 손을 들어 언덕 끝을 가리켰다.
“저기 걸린 나무집은 이곳에 사는 부족의 것인가?”
“네. 그냥 지나가는 게 좋습죠.”
“아쉽군.”
사자비는 정말 아쉬운 표정이 되었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은 어떤 사고를 하는지 말을 섞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돌연히 등장한 한때의 무리의 때문에 기분을 망쳤다.
이십 장 앞선 곳에서 수면이 파문을 일으켰다. 옆 숲에서 뛰쳐나온 청색 무인들이 원인이었다. 그들은 수면과 계단을 형성한 석회석을 밟으며 좌에서 우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뒤이어 황색 무복을 입은 십여 명의 무리가 같은 방향에서 튀어나와 청색 무리를 뒤쫓았다.
사자비는 운치를 방해한 녀석들을 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운치 안에서 살인이라!
감성적이 된 것일까. 그는 쫓고 쫓기는 무리가 이상하게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런 모습을 한두 번 본 것은 아니다. 구채구에 들어온 후부터 수많은 무림인을 만났고, 대개는 소규모로 구성된 정찰조였다. 규보의 무덤을 찾고자 사방을 누비는 그런 녀석들이었다.
녀석들은 대부분 모른 척 지나치기 일쑤였다. 구채구 내에서 암묵적으로 허가된 관행처럼 서로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정찰조끼리 부딪치는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아마도 시비를 가리기 힘든 일에 부딪혔거나 복장만으로도 상대를 알아볼 수 있는 자들, 잊을 수 없는 원한을 가진 자들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위로 올라갈수록 부쩍 이런 전투가 자주 벌어지는 것 같군요.”
대원 하나가 피바람을 일으키는 두 무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황색 무리가 도망치던 청색 무리를 포위하고 죽이는 행동만 있었다.
사자비가 실소를 흘렸다.
“도대체 어떤 원한을 가지면 저렇게 마구잡이로 죽이는 건가.”
문파와 문파가 원한을 가져도 거기에 소속된 무사는 상관이 없을 텐데, 녀석들은 악착같았다. 씨를 말리겠다는 듯 조금의 사정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전투는 전과 조금 달랐다. 청색 무리가 모두 쓰러졌을 때, 황색 무리는 사자비와 일행을 노려보았다. 하나같이 경계하는 빛이 가득한 눈을 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요.”
과연, 대원의 말대로 녀석들이 다가왔다. 계단을 건너뛰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들의 손에는 피 묻은 병장기가 들려 있었다.
녀석 중 하나가 적의가 가득한 투로 물었다.
“어느 쪽이냐?”
뜬금없는 물음이 사자비는 천통달을 비롯하여 대원들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하지만 대원들이라고 알 리 있을까. 모두 묵묵부답인데, 그들의 반응을 살핀 황색 무리가 살기 띤 표정을 지었다.
처음 입을 열었던 녀석이 입가에 비소를 담았다.
“아무래도 우리 쪽은 아닌 모양이군!”
그것으로 행동은 결정되었다. 일시에 병장기를 앞세우고 사자비와 일행을 포위하는 것이다.
“좋은 경관을 진창으로 만들더니, 이젠 상관도 없는 우리를 위협을 하시겠다?”
그들이 하는 냥을 가만히 관망하던 사자비의 질문이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녀석이 코웃음을 쳤다.
“구채구를 찾은 녀석치고는 순진한 물음이구나!”
대답이 충분히 되었겠지?
그런 얼굴을 보이고는.
“정 알고 싶다면 염라대왕에게 물어보려무나!”
포위망을 탄탄히 좁히고 비웃음을 흘렸다.
이번에는 사자비가 코웃음을 쳤다. 무림을 처리할 명분을 먼저 제시해주니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 아닌가. 그 사실을 녀석들은 알까!
“난 네놈 입으로 꼭 듣고 싶구나. 뼈마디 몇 개 부서지면 뭐라도 불겠지.”
귀찮은 듯 손을 휘젓자 여덟 명의 대원이 거기에 반응하여 포위대형과 마주 섰다.
녀석이 황당한 듯 실소를 흘렸다.
“미친놈!”
그는 신호를 주고 곧장 신형을 움직였다.
“쳐라!”
나머지도 무기를 휘두르며 친황대를 덮쳤다.
유령문 황호대(黃虎隊) 대주 신추평(愼秋萍)은 앞이 노랬다. 우선 그가 달리는 기세에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마주 오는 요사한 녀석을 보고는 당황했다. 상대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검을 내지를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리고 어깨에 일 권을 맞았다.
뼈가 부러진 듯했다. 아니, 으깨진 듯했다. 맞는 순간 팔이 덜렁거렸으니 조각조각으로 나뉘었을 것이다. 두 번째 충격은 오른쪽 다리였다. 무엇으로 어떻게 당했는지 보지도 못했다. 그저 느껴지는 고통으로 부러졌다는 것만 알았다. 그리고 세 번째 충격이 몰려왔다.
복부였다. 숨이 턱 막힌다.
신추평은 그렇게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 뒤로 둔탁한 소음이 이어지고, 수하들의 얕은 비명이 들렸다.
그는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생각대로 상대는 상상 이상의 고수들이었고, 그런 만큼 황호대 삼 조를 순식간에 바닥에 뉘였다. 쓰러진 녀석들은 일절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숨을 쉬면 당연히 일렁여야 할 가슴 또한 고요했다. 모두 즉사한 것이다.
신추평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는 자신을 제압한 녀석까지 포함하여 세 명만 주위에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나머지는 처음의 그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고작 세 명이서 유령문 열손가락 안에 드는 자신과 황호대 한 개 조를 처리할 수 있을까!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지만 그런 고수를 부리는 단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상관없게 되었다. 상관하고 싶지도 않았다. 당장 그가 봉착한 문제가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곤란한 지경에 빠졌음을 민감하게 느꼈다. 원인은 이들의 상관이었다. 이제 갓 스물이 되었을 애송이는 공방을 주고받기 전에 무언가를 물어보겠다고 했다. 구채구까지 들어와 무엇이 궁금한지 모를 일이지만, 지독한 행위가 자행되리란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 않았다. 그러나 고통은 두려워했다. 비단, 그만 아니라 모든 무인의 공통분모일 것이다. 고통은 참을 수는 있으되,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인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명예롭게 죽을 수 없기에. 끝내 고통 앞에서 비굴해지는 인간이기에. 그건 하수에게 지는 것보다 더한 치욕이고, 모욕이었다. 살려달라고 적에게 빌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엄지발가락부터 하나씩 으깬 후에 시작하지.”
자극적인 목소리가 신추평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뻔한 말을 외쳤다.
“죽여라!”
하지만 상대는 크게 웃었다. 가소롭다는 듯 한참이나 웃더니 천천히 다가와 그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말한다.
“죽이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신추평의 표정이 석상처럼 굳었다.
뭐 이런 잔인한 녀석이 있나!
그런 그에게 애송이는 상큼한 미소를 한 번 보여주고 일어섰다.
신추평이 급히 입을 열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
“내가 처음 던진 물음과 비슷하군. 물론, 네가 했던 대답을 기억하겠지?”
“……!”
“때론 이유 없는 행위도 필요한 법이지.”
신추평의 얼굴이 새파랗게 들떴다. 그러나 아직 죽을 팔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왜 날 공격했는지, 저기 있는 녀석들은 왜 죽였는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소상히 알려주면 관대해질 용의가 있다.”
애송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회를 얻었다는 기쁨보다 바위에 머리를 부딪친 듯 멍해진 신추평이었다. 의미심장한 애송이의 물음이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었던 것이다.
잠시 후, 그는 속으로 탄식했다. 후회가 밀려왔다. 이놈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을 지나고 있었다. 지금 동혈 주위로 모인 문파와는 전혀 상관없는 녀석들이었다.
그렇다면 공격할 이유가 없었는데…….
오해와 섣부른 판단 때문에 수하들만 억울하게 죽은 셈이 아닌가.
“그, 그것만 말하면 되느냐?”
“말 못할 비밀이라도 더 있나?”
급히 도리질 친 신추평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걸 지켜보던 애송이, 사자비가 입을 열었다.
“이 근방은 무림 세력이 자주 부딪히는 것 같은데, 그 이유도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군.”
신추평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었어!’
제6장 백웅의 계곡
1
얼마 전에 동천문에 의해 동혈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간 몇 개의 동혈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번 것은 조금 달랐다. 지축을 울린 폭음이 이유였다. 규보의 무덤을 독식하려던 녀석들이 동혈로 들어갔다가 폭발에 휘말린 것이다.
천연의 동굴에 기관이 설치되어 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누군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음을 뜻한다. 또한 그 안에 기관을 설치할 정도로 중요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뜻이다.
폭발은 너무 커서 들짐승처럼 구채구를 뒤지던 정찰조를 유혹했다. 소문은 그들에 의해 퍼져 나갔다. 곧장 전서구가 날고 무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동혈이 발견되고 그 주변에 걸레처럼 널브러진 동천문도를 보았다는 정보는 많은 문파를 불러 모았다. 거기다 다수 세력이 한 곳으로 이동하니, 자연 다른 정찰조에 걸릴 수밖에 없었고, 그들 또한 사실을 파악한 후 본진으로 연락하였다.
삽시간에 동혈 주변으로 무림 세력이 몰리게 된다. 그렇게 하루 만에 모인 문파가 삼십여 개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만한 숫자를, 혹은 더 많은 숫자를 세야 하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동혈을 차지하기 위한 아귀다툼이 벌어졌다. 합의도 양보도 없는 마구잡이 싸움, 적아(敵我)의 구분도 없고, 승자도 패자도 없는, 그저 죽고 죽이는 다툼이었다. 문제는 갈수록 찾아오는 문파가 많아진다는 것이고, 그들까지 싸움에 가세한다는 점이다. 자연 걷잡을 수 없는 큰 전투가 빈번히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이 신추평의 설명이었다. 경쟁자가 많아짐을 우려하여 미리 도착한 문파끼리 협약을 맺었다고 했다. 다른 정찰조를 발견하면 죽여서 입을 막기로 했다는 것이다.
“기관이 설치되었다면 뭔가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신추평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거기가 진짜 규보의 무덤이더냐?”
“아직 모르오.”
“협약을 맺었다면서? 다른 문파가 끼어들기 전에 동혈 내부를 파악하고자 했던 게 아닌가?”
“그걸 시도할 간 큰 문파는 이제 없소.”
“무슨 뜻이지?”
“기관이 아직 남아 있어서 해체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상태였던 것 같소. 그걸 모르고 처음에 몇 개 문파가 몰래 동혈을 조사하려다가 다른 문파에 발각되어 협공을 받았소. 심한 타격을 입고 물러났지.”
“그렇다면 그림의 떡이 아닌가!”
사자비는 피식 웃었다.
“아무튼 규보의 무덤을 나눌 수는 없을 터.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무덤을 양보할 녀석도 없을 테고. 결국, 다른 세력이 정보를 얻지 못하게 정찰조만 솎아낸다?”
“그렇소.”
“하지만 한계가 있을 텐데!”
신추평은 한숨을 쉬었다. 사자비의 말대로 모두 막을 수 없었다. 어떤 때는 정찰조를 상대하다가 당하기도 했다. 녀석들도 그들이 속한 문파에서 정예 중 정예였기에 무공 실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곧 협상이 이뤄질 거요.”
“그게 가능한가? 처음보다 문파가 늘어났다고 하지 않았나. 뒤늦게 끼어든 문파와 나눠 같기는 싫을 텐데.”
“어쩔 수 없소. 더 지체하다가는 무덤을 공유해야 할 문파만 많아질 뿐이니까. 그리고 구파일방과 무림맹이 동혈로 접근 중이라는 정보를 얻었소. 그들이 오기 전에 해결해야 하오.”
“동혈의 위치는?”
신추평은 잠시 침묵하다가 사자비의 싸늘한 눈빛을 받고서야 입을 열었다.
“백웅의 계곡!”
“백웅?”
신추평이 놀라운 말을 했다.
“그곳엔 진짜 백웅이 살고 있소. 그래서 모두 그렇게 부르오.”
“진짜 백웅이란 말인가?”
사자비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천통달을 보았다.
천통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본 적이 있습죠.”
사자비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정말 구채구는 신비로운 곳이로군. 백웅이 실체 한다니, 그런 곳이라면 중요한 물건을 숨길만 하겠어. 한데, 그곳도 자네가 말한 장소인가?”
“비슷한 장소가 맞기는 한데, 가봐야 정확히 알 것 같은뎁쇼.”
“다른 장소는 어딘가?”
“여기에서 북서쪽으로 삼십 리 정도는 더 가야 하는데, 왜 그러십니까요?”
사자비는 잠시 고민의 빛을 띤 뒤 대원들에게 명했다.
“너희는 천 노인을 따라가라. 난 동혈을 찾아갈 테니.”
“저자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거기는 위험합니다. 차라리 따라오는 갈천 대주와 합류하여 움직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선 내가 직접 가서 상황부터 파악해야겠다. 친황대가 끼어들만한 일인지 아닌지는 그때 결정해야겠지.”
“그럼, 저희도 몇 명 동행하겠습니다.”
사자비도 그것까지는 거절하지 않았다. 동추(董椎)라는 대원을 남겨 표식을 따라올 후속부대에 지시를 전달케 하고, 네 명을 호위 삼아 데려가기로 했다. 나머지는 천통달과 함께 본래 목적지로 이동하게 했으며 그곳이 진짜일 경우 신호탄을 쏘아 알리도록 했다.
사자비가 동혈에 도착했을 때, 생각보다 많은 문파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부분 은밀한 장소에 진용을 갖추고 주위를 경계했지만, 그 수가 워낙 많아 숨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가는 곳마다 발에 걸리는 것이 무림세력이었다.
그들은 진영 앞에 무슨 문이니, 방이니 하는 깃발을 내걸어 다른 이의 침범을 철저히 거부했다. 그러나 버려진 곳도 있는데, 다른 문파와의 다툼에서 이미 꺾인 것 같았다. 어쩌면 무덤을 차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돌아갔을 수도, 어부지리를 얻고자 어딘가로 숨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사자비는 그중 몇 개의 천막을 챙겨 동혈에서 꽤 떨어진, 그래서 무림인을 자극하지 않을 위치에다가 세웠다. 큰 천막 하나를 치고 주위에 다섯 개의 작은 천막을 두른 조촐한 진영이었다. 터도 좋지 않고 수맥까지 흐르는 음습한 곳이었으나 주변의 관심을 받지는 않을 듯했다.
진영이 정해지자 다음은 복장.
평범한 무복이라 그와 일행의 신분이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얼굴을 아는 자가 있을지 모르기에 가려야 했다. 이건 무림대회 때문이었다. 무림 전체로 보면 대회에 참가한 무인은 소수에 불과했으나, 그 안에 포함된 문파가 많았던 것이다. 혈리금도문 때문에 그의 신분과 얼굴을 아는 자들이 다수 도망쳤으니 조심하는 것이 좋았다. 용모파기를 사방에 뿌려 한동안 몸을 사리는 게 정상이겠지만, 혹시 그중 몇 명이 구채구로 들어왔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황실이 구채구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심한 견제를 받게 될 터. 아직 규보에 대한 확실한 물증이 없는 만큼, 황실의 개입은 비밀로 하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복면이었다. 궁여지책이지만 얼굴을 가리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마지막은 후속부대가 진영을 찾기 쉽게 약속했던 표시를 남기는 일이었다.
“다채롭군!”
모든 일을 마친 후, 사자비는 중앙천막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신추평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신추평은 구채구에 모인 문파를 털어놓다가 뚱한 표정으로 사자비를 보았다. 부상을 당한 상태인데, 혈도까지 짚고 포박까지 해서 천막에 던져놓듯 밀어 넣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규보의 비급이 무덤에 보관되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누가 그것을 그냥 내버려두겠소. 당연히 정보를 얻은 무인이라면 천리만리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오겠지.”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비급이라도 모두 아는 것이라면 쓸모없지 않은가. 너도나도 강해질 텐데, 무슨 소용이 있나.”
“이렇게까지 소문이 퍼졌는지 누가 알았겠소. 본문도 정확한 정보를 아는 단체는 그리 많지 않을 거라 믿어서 천봉문(千峰門)과 함께 정예고수 백 명만 보낸 것이었소. 이럴 줄 알았다면 문주님께서는 아마 오백 명은 투입했을 거요.”
“오백 명 가지고 될까?”
사자비가 비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신추평은 처지를 잊고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유령문을 우습게 보는 거요? 본문은 강서에서 알아주는 사파요. 어느 누구도 우리를 무시할 수는 없소.”
그러나 사자비의 웃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 휘장이 열리며 정찰을 나갔던 대원이 급히 들어왔다. 떠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사자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이상한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이상한 움직임?”
“네. 갑자기 무림인이 동혈 쪽으로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았나?”
대원은 고개를 저었다. 우선 소식부터 전하고자 온 것 같았다.
사자비가 다시 물었다.
“얼마나 이동하고 있나?”
“대부분입니다. 어떤 곳은 진영을 아예 비워놓고 동혈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진영을 비울 정도면 동혈에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사자비는 대원 하나를 남겨 신추평과 진채를 지키도록 하고 나머지와 함께 동혈로 향했다.
과연 대원의 말은 맞았다. 꾸역꾸역 한 곳으로 몰려가는 무림인이 산더미 같았다. 그들과 섞이자 사자비 또한 산더미 속의 일부가 되었지만, 그 때문에 누구도 그들에게 관심을 주지는 않았다. 그저 규보의 무덤을 노리는 또 다른 녀석들이겠거니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동혈은 계곡처럼 갈라진 큰 바위절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래에서부터 십 장 높이인데, 옆으로 폭포가 형성되어 거센 물줄기를 눈물처럼 흘리고 있었다. 폭포 주위에는 넓은 웅덩이, 그리고 웅덩이의 물은 남쪽으로 뻗은 천연의 수로를 통해 흘러갔다.
계곡 주위에는 대부분 평평한 바위로 가득 차 있었다. 군데군데 뿌연 석회함을 뚫고 나무가 자라 있었지만 황량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큰 공터 같은 느낌이랄까! 그나마 곰 두 마리가 호수에 발을 담근 채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어 볼거리이기는 했다.
무인들은 계곡 주위를 병풍처럼 친 원형의 숲을 경계선으로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공터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숲에 서서 한 곳만 바라볼 뿐이었다.
사자비도 거기에 도착하여 그들처럼 나무 아래에 섰다. 그리고 실소를 흘렸다. 많은 줄을 알았지만 한 곳에 모이니 뭐가 이리 복잡한가! 무인이 너무 많아서 호수 주위를 둘러친 숲이 나무숲인지, 인간 숲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다.
복장은 대부분 무리를 지어 통일되었지만, 그런 무리 또한 많아서 번잡해 보였다. 붉고, 검고, 희고, 누렇고, 푸르고……. 가지각색의 복장이 끼리끼리 모여 있었다. 이렇게 여러 문파의 여러 고수가 사천오지에 모였으니 재밌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자비의 관심은 다른데 있었다. 그는 경계의 빛을 띠며 무인들을 구경하는 백곰 두 마리를 유심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사실 다른 어떤 것보다 거기에 시선을 빼앗겼다는 말이 맞았다. 흰 털을 가진 곰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생각했던 것처럼 온전히 희지는 않았다. 팔과 다리는 검은 털이고, 앙증맞게도 두 눈과 작은 귀도 검을 색을 띠었다. 크기는 보통의 것보다 두 배는 커서 역동적으로 보였지만, 검은 털이 섞여서인지 귀여운 느낌이었다. 보아하니 물고기를 잡으러 온 것 같은데, 때를 잘못 만나 인파에 갇힌 꼴이 된 두 마리 곰이었다.
그들은 사방을 경계하며 한쪽으로 이동하더니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크게 포효했다. 털을 세우고 가슴을 펴자 몸체가 더욱 커진 느낌이었다. 앞을 막은 무인들을 적이라 생각하고 위협하려는 모습이었다.
무인들은 곰에게 관심 없는 듯 그냥 길을 터주었다. 그러자 곰은 그곳으로 부리나케 도망쳐 사자비의 볼거리를 뺏었다.
“곰 두 마리를 구경하러 오지는 않았을 텐데.”
숲으로 사라진 곰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걸 들은 모양, 옆에서 조롱의 목소리가 대답처럼 들려왔다.
“이곳에 와서 고작 본다는 게 곰이라니!”
한심하다는 투였다.
사자비는 힐끔 옆을 보았다. 남청색 무복을 입고, 가슴에 거마(巨魔)라는 글자를 새긴 무리가 거기에 있었다. 입을 연 자는 같은 복장으로 선두에 있는 무사였다. 눈에 검흔이 있어 날카롭게 보이는 사십대 후반의 사내였다.
사내의 시선이 사자비와 마주쳤다. 사내의 입가에 더욱 짙은 비소가 담겼다. 옆의 여인도 마찬가지. 이십대 중반쯤 보이는 그녀는 사자비를 향해 의미심장한 말을 톡 쏟아 붙였다.
“원한이 많은가 보죠?”
복면을 쓴 모습을 비꼬는 것이다.
사자비는 숨기지 않았다. 어색해하는 모습은 오히려 의심을 살 우려가 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느냐는 듯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렇소만.”
여인은 잠시 황당한 표정을 한 뒤, 얕은 코웃음을 치고는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말을 섞기 싫다는 뜻이었지만, 혼잣말을 톡 쏘아내었다.
“겁쟁이!”
사자비도 한소리 했다.
“원수에게 칼 맞는 것보다 낫지.”
돌아갔던 여인의 얼굴이 다시 사자비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혐오스러운 벌레를 본 얼굴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며 또 혼잣말을 했다.
“그러고도 무인이라니!”
이번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엉뚱한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안면을 텄으니 모인 이유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곰 말고 볼 게 더 있소?”
사내에게 그렇게 물었다.
여인이 대꾸하지 말라는 뜻으로 사내의 팔을 찔렀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이미 손을 들어 절벽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들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오?”
사자비는 시선을 들어 절벽을 보았다. 거기에도 많은 무인이 있었다.
“저들 때문에 이렇게 벌떼처럼 모였단 말이오?”
사내는 놀란 듯, 혹은 기가 막힌 듯 말했다.
“구채구에 왔다면 정보력이 꽤 있다는 뜻인데, 어찌 구파일방을 모른단 말이오?”
“구파일방?!”
사자비는 다시 절벽에 시선을 주었다. 이번에는 안력까지 키워 자세히 살폈다. 우선 도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반들반들한 대머리 중도 보였다. 이곳에 모인 많은 무리 중 하나라 생각하여 관심을 주지 않았더니, 사내의 말대로 가사와 도복을 입은 구파일방의 고수였다. 그리고 또 다른 무리, 승려와 도인 사이에 섞여 있는 백의(白衣) 무사들이 있었다. 무림맹의 고수였다.
신추평의 말로는 시간이 조금 걸린다고 했는데, 문파끼리 협상도 하기 전에 먼저 도착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모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무림에서 무림맹을 무시할 자는 없고, 구파일방의 입지는 압도적이라 했다. 그들이 도착해서 절벽을 차지하니 당연히 위협을 느꼈으리라.
생각대로 여인이 절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필 이렇게 빨리 올 게 뭐람!”
사내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젠 규보의 무덤을 차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욕심쟁이의 그것처럼 탐욕에 물든 빛을 띠었다. 눈앞의 먹이를 절대 놓칠 수 없다는 그런 눈빛이었다.
“아니, 왜 그렇게 결론이 나는 거죠?”
“그럼 어찌하겠습니까. 설마, 무림맹과 구파일방을 공격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흥! 무림맹과 구파일방의 위세가 대단하다지만, 어차피 정파. 우리가 양보할 이유는 없죠. 더욱이 여기까지 와서!”
사내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은 정사의 문제를 벗어났습니다. 물건 하나를 다수가 차지하려는데 정과 사가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세력이 큰 쪽이 우선이겠지요.”
“그러니 우리가 더 유리하다는 거예요. 저쪽과 우리의 숫자는 상대가 되지 않아요. 모두 힘을 합치면 구파일방이라도 막을 수는 없을 거예요.”
“구채구에서의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무림맹의 공적으로 낙인찍히고, 구파일방과 원한이라도 맺으면 뒷감당을 어찌하겠습니까. 결코 무림에서 발을 붙일 수 없게 될 겁니다. 저들이 작정하고 보복하려는데, 누가 도움의 손길을 빌려주겠습니까.”
“어차피 비급을 얻는 순간 모두 적이 되는 거니 상관할 필요 없어요. 이렇게 넋 놓고 구경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정적으로 죽은 사람은 말을 하지 못하죠. 증인이 없으면 어떻게 보복을 하겠어요?”
그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걸요?”
하지만 사내는 여전히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다.
“우선 저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의도를 알아야 대처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여인도 수긍의 뜻을 보였지만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때 절벽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아래로 뛰어내렸다. 절벽 위는 동혈에서도 훨씬 높은 곳이라 이십 장은 족히 되는데, 두 인영은 나는 새처럼 떨어지며 폭포수 옆 바위에 내려섰다. 중인들이 살피니 눈이 가는 노승과 흑색 장삼을 입은 청년이었다.
그들은 다시 도약하여 물가로 이동했다. 널찍한 공터에서 노승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사방을 보며 공손히 반장했다.
“아미타불! 빈승은 소림의 혜각(惠覺)이라 합니다.”
다소 미안해하는 목소리였지만 구름처럼 모인 무인들의 반응은 놀랍다는 듯했다.
“혜각?”
몇몇이 실소를 흘리며 경탄했다.
“장격각주(藏經閣主)의 그 혜각 대사?”
모두 감탄한 눈으로 노승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경외에 찬 시선이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무림인이라면 장경각의 주지승, 혜각에 대한 평가가 남달랐다.
장경각주, 혜각!
구파일방이 강호를 멀리하여 그리 알려진 바 없지만, 혜각에 대해서는 풍문이 많았다. 특히 불법의 깊이로 유명한데, 그는 수십만 권의 서적을 읽었다고 했다. 그 서적 대부분이 불도에 관련된 것이겠지만, 장경각주가 어디 불서만 읽었을까. 장경각 안에는 천 년 동안 사마(邪魔)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무림맹, 혹은 구파일방이 모아 봉인한 비급이 산재했고, 아마도 그것까지 읽었으리라는 게 강호의 중론이었다. 무림인이라면 목숨과도 바꿀만한 신공, 마공 등을 보았을 사람. 그중 몇 개는 익히지 않았을까 하는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사람, 그게 혜각이었다.
그가 지금 사람들 앞에 서 있었다. 소문으로 떠도는 것과 달리, 사람들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소심한 모습으로.
“흉악망측한 물건이 나타나 강호를 어지럽히니, 소림사를 비롯하여 구파일방이 봉문을 풀고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뭇 시주들께서는 소문에 현혹되지 마시고 이만 돌아가 주시면 구파일방을 대표하여 빈승이 고개 숙여 감사드리겠습니다. 아미타불!”
그를 바라보던 경외의 시선이 한순간 적의로 돌변했다. 짐작은 했지만, 구파일방이 규보의 무덤을 차지하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니 모두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결국, 구파일방도 이곳에 모인 무리와 다를 바 없는 경쟁자 중 하나인 것이다.
문제는 그들의 힘이고, 무림에서의 입지와 평가였다.
구파일방은 무림의 뿌리다.
과연, 그들을 제치고 규보의 무덤을 차지할 수 있을까?
그들 뒤에는 무림맹까지 있는데?
가장 압력을 받는 무리는 어쩔 수 없이 정파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절대 구파일방과 무림맹을 적으로 돌리지 못한다. 겁도 나지만, 그보다는 하극상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림맹에 힘을 실어준 정도 문파가 맹의 행보를 막으면 어쩌나. 그건 이미 무림맹을 중심으로 체계가 잡힌 강호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무림맹 때문에 사파보다 우위에 서고 있는데, 그 위치가 바뀔 여지가 있었다. 무림맹은 언제나 정파의 우두머리여야 했고, 상징이 되어야 했으며, 그들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정파의 힘을 보여야 했다. 사파가 감히 정도를 누를 꿈도 꾸지 못하게. 자연히 정파의 무리는 난감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데, 구파일방이 앞을 가로막으니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듯 표정만 굳힐 뿐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이들은 사파의 무리. 그들은 정파와 달리 기분 나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부탁하는 혜각의 어조는 포장일 뿐, 실상은 떠나라는 포고와 다름없는 것이다.
“흉악망측한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 일, 구파일방이 함부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어디선가 우렁찬 외침이 튀어나왔다. 계곡에 모인 모든 시선이 소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왼쪽 숲, 큰 나무 위에 오연히 선 노인이었다.
그는 노한 눈으로 혜각을 노려보고 있었다. 허름한 옷 위로 청색 장포를 걸치고, 길게 뻗은 장도를 무기처럼 들고 있는 노인은 시선이 모이자 대표라도 된 것처럼 가지를 밟고 장내로 뛰어들었다. 폭포수가 흐르는 십 장 넓이의 계곡을 경계선으로 둔 후, 혜각과 마주 선 노인이 따지듯 소리쳤다.
“중이면 중답게 절간에서 목탁이나 두드릴 일이지, 왜 여기까지 와서 훼방을 놓는 거냐? 따지고 보면 너희도 규보의 무공이 탐나는 것이 아니겠느냐. 원하면 힘으로 뺏으면 그만, 어쭙잖은 말로 명분을 세우지 마라.”
듣고 있던 혜각이 얕은 한숨을 쉬었다.
“아미타불! 시주의 존성대명을 알지 못하나 빈승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소림사에는 규보의 무공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 많은 무공서적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한데, 어찌 이런 상스럽지 못한 물건에 욕심을 내세우겠습니까. 구파일방은 강호의 혼란을 조금이라도 막아보자는 의도일 뿐, 다른 뜻은 없음을 이해해주십시오.”
“이해하라?”
노인은 조롱하듯 콧방귀를 꼈다.
“무엇을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너희는 무조건 옳고, 너희와 다르면 틀렸다는 걸 이해해야 한단 말이냐? 혼란? 그 혼란이 너희가 끼어들면서 더 심해졌다는 걸 모른다 하겠느냐?”
“아미타불, 아미타불!”
혜각은 더는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거기에 힘을 얻은 노인이 당당히 외쳤다.
“막고 싶다면 막아보아라. 난 저 구멍으로 들어가 원하는 것을 가져가겠으니. 모두 날 따라라.”
그러자 그의 수하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서른 명인데, 그것을 지켜본 청년, 검은 장삼의 청년이 앞으로 나와 짧게 외쳤다.
“멈춰.”
소리는 메아리만 남겼다. 외침을 쫓아 혜각 뒤로 시선이 모였지만 청년은 이미 그곳에 없었던 것이다. 뒤늦게 노인과 그를 따르는 무리를 막아선 모습을 보곤 중인들이 모두 경악했다. 놀랍게도 십 장이나 되는 계곡을 눈으로 쫓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넘어 버렸으니, 사라졌다가 나타났다는 식인 것이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선 복장이었다. 청년의 복장은 검은 가사 같기도 하고, 평범한 흑색 장포 같기도 했다. 젊은 녀석이 소림에서도 배분 높기로 유명한 혜각 대사를 모시고 있다는 점 또한 주의할만했다. 무엇보다 고수가 산더미처럼 쌓인 곳에서 그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이동한 놀라운 신법이 더해지면 어떨까!
모든 이들이 공통된 한 가지를 떠올렸다.
“설마……!”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사자비가 옆에 있는 중년 사내를 보았다. 중얼거림으로 보아 청년을 아는 듯해서였다.
“저자를 아시오?”
이번에도 사내는 어이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도대체 아는 게 뭐요?”
곁에 있던 여인도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무식도 이런 무식이 없네.”
“그럼, 유식한 소저가 말해 보시오. 저자가 누구요?”
여인이 낮게, 하지만 짜증이 잔뜩 묻어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흑룡도 모르고 어찌 무림인이라고 할 수 있죠?”
“흑룡?”
“뛰어난 경공술. 젊은 나이에도 혜각 대사를 수행할 수 있는 중 아닌 중이라면 누가 있을까요?”
그러면서 청년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흑룡은 검은 옷만 입어서 흑룡이라는 별호가 붙었어요.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무슨 색이죠?”
“검소만!”
“그러니까요.”
사자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은 했지만 확신은 못했던 그였다. 검은 옷만 입고 다닌다는 정보도 오늘 처음들은 터였다.
여인은 이제 사자비를 한심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그런데 사자비가 더욱 기가 막힌 소리를 해서 그녀를 긁었다.
“생각보다 제법이군!”
그 반응이 거슬렸던 것 같다.
“제법? 흑룡을 보고도 제법이라고?”
그녀는 따지듯 사자비를 노려보았다.
정사를 떠나 젊은 무인 사이에서 동경의 대상인 흑룡이었다. 그녀 또한 소문으로만 접했고, 한 번 쯤 보고 싶다는 바람만 품었을 뿐이지만 여타 후기지수와 마음이 다르지 않았다. 물론, 직접 확인한 모습이 꿈에서 상상하던 것과는 달라 약간의 실망도 있었으나, 어디 천외천의 무인을 외모로 평가한다던가. 본 것만으로도 영광이요, 신법을 직접 구경했다는 사실(실제로는 혜각 대사의 존재에 가려져 관심도 주지 않았고, 너무 빨라 경공술을 보지도 못했지만.)만으로도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다. 그런데 옆에서 계속 엉뚱한 소리를 하니 불쾌할 수밖에. 자신이 대단히 높게 평가하던 것을 누군가가 내려다보듯 한다면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느 문파 소속이죠?”
도대체 얼마나 촌구석에 처박혔으면 흑룡에 대해서 모를까 하여 던진 물음이었지만 사자비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에 관심도 없는 듯, 흑룡을 향해 시선을 주며 흥미로운 빛만 드러내었다. 그녀도 사자비에게 관심을 거두었다. 어차피 경쟁자고, 서로 죽여야 할지도 모르는 적이다. 계속 대화를 주고받다가는 껄끄러워질 것 같아서 그녀 역시 상상으로만 그리던 흑룡만 주시했다. 그 순간 흑룡을 마주한 노인이 손을 움직였다.
이때 사자비의 눈이 빛을 발했다. 생각 외로 장도를 뽑는 노인의 실력이 대단해 보여서였다. 발도(拔刀)도 빠르지만, 그보다 장도를 뽑는 즉시 뻗어나오는 예리한 기운이 상당했다. 나이를 짐작했을 때, 보통 무인보다 내공이 당연히 깊겠지만 사자비는 노인이 그 이상의 실력을 갖췄다고 확신했다. 왜 구파일방을 상대로 위축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저런 자를 과연 흑룡이 막을 수 있을까.
그는 흑룡의 반응부터 살폈다.
흑룡은 동혈로 다가가려는 노인과 무리를 가로막고 헤픈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2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시면 곤란하죠, 어르신!”
돌연히 나타나 앞을 막은 행동 때문에 얼굴 전체에 노기를 담은 노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도 상대의 신분을 대충 짐작한 모양이지만 크게 위축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세를 타고 꾸짖었다.
“네놈은 무슨 물건인데, 어르신 앞을 막느냐?”
청년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찮은 중생의 이름을 알아서 무얼 하시게요. 아무튼 전 받은 명이 있어 아무도 동혈로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드러나고, 미소 안에는 살기가 담겼다.
“내 짐작이 맞다면 네놈 실력이 대단할 터. 과연 소문이 사실인지, 이 어르신의 일초를 막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보겠다.”
미소는 어느새 사라졌다. 그리고 장도가 움직일 때, 지켜보던 무인 중 하나가 탄성을 흘렸다.
“흥해쾌도(興海快刀) 당도강(黨刀强)!”
그 소리에 모두 놀랐다. 흥해쾌도라면 청해성 흥해 일대에서 가장 강한 고수로 주목받는 자였다. 별호만큼 속도를 장기로 하며, 화경에 근접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과연 그의 장도가 움직이자 무시무시한 속도를 자랑했다. 한 번 내지르는데 십여 개의 도신이 공기를 찢어내는 듯했다.
초식에 의한 잔상이 아님은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열 개의 도신은 한순간에 열 번을 베면서 나타난 실체였다. 남들이 두어 번 움직일 시간에 열 번이나 그것도 정확히 형체와 동선을 남길 정도면 그가 얻은 별호는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일격필살의 기세처럼 형체마다 매서운 검기가 서려서 흑룡을 난자할 듯했다. 그러나 흑룡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놀라워했다. 쾌도보다 빠른 신법이라니. 무기를 휘두르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 행동이 더딘 것은 불변의 진리였다. 하물며 무기를 휘두르는 손은 흥해쾌도의 것이었다. 신법이 쾌도의 무기보다 빠를 수 있을까.
흑룡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려는 것 같았다. 그의 신형은 삽시간에 다섯 개로 늘어나 있었다. 빠른 것도 있지만 움직이고 잠깐 멈추는 시간에 내공을 흘려 잔영을 남기는 신법이었다. 자연스럽게 피하는 순간마다 형체가 남아서 흡사, 환영술을 펼친 것처럼 무인들의 시선을 현혹했다.
“저, 저럴 수가!”
흥해쾌도의 장도가 더욱 빨라졌다. 그는 약간 놀란 듯했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다. 더욱 속도를 내어 수십 가닥으로 장도를 늘리더니 사방을 긁었다. 피할 곳도 없을 만큼 촘촘히, 그물을 던진 것처럼 섬세하여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냈다. 하지만 역시 흑룡에게는 역부족이었다.
흑룡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공격동선을 기막히게 피하며 끊임없이 잔상을 남겼다. 잠깐 후에는 그의 신형이 열 개로 늘어나더니 그 수를 점점 더했다.
그 시기 싸움을 관찰하던 사자비의 표정이 다른 무인들과 비슷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도 놀란 것이다. 저런 특이한 신법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뿐만 아니라 실천에서 저렇게 움직임마다 정밀하게 내공을 분할하여 사용할 수 있다면 대단히 많은 실전 경험이 필요하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는 기술도 막상 실천에 놓이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협 때문에 아득해져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인 것이다. 만약,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들이 말하는 천재일 것이다. 흔히 말하는 천재가 아니라 진짜 천재.
사자비는 비소를 지었다.
‘재밌는 놈이군!’
그는 긴박하게 흘러가는 두 고수의 싸움을 정확히 파악했다. 흑룡은 여유를 부리는 중이었다. 이건 경고였다. 나 이렇게 빠르다. 누구도 내게 손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 제발 덤비지 마라. 귀찮다. 흑룡은 그런 경고를 하는 듯했다. 그건 다음 행동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어느 순간 그의 잔상이 모두 사라지자, 때를 놓치지 않고 흥해쾌도가 흑룡의 옆을 베었다. 순식간에 다섯 개로 늘어난 장도는 목과 어깨, 팔꿈치, 팔목, 허리까지 동시에 베려는 듯 쏟아져 나갔다. 그때 흑룡의 왼팔이 들렸다. 손바닥을 펴서 아래로 방향을 주는데, 올라갔다고 생각되는 동시에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탕-!
번개 같은 장도가 떨어지는 흑룡의 장심에 부딪혔다. 다섯 개로 늘어난 칼날은 흑룡을 건드리지도 못하고, 빠른 속도 또한 무색할 정도로 일시에 무너졌다.
타타탕!
쇳소리가 귀를 찢을 듯 울리고, 장도가 부러질 듯 휘어졌다. 그리고 정말로 부러졌다.
칼날이 다섯 개라지만 원래는 하나. 발꿈치를 베려는 세 번째 장검까지 장심에 닿은 후에는 그 아래 두 개의 칼날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다만, 두 동강 난 도신만 바닥에 떨어진 후 튕겨 올랐다.
흥해쾌도가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섰다. 내공이 충만히 들어간 철도가 부러질 정도의 타격이니 팔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음이 분명했다.
구경꾼들은 하나같이 경악성을 흘렸다. 맨손으로 빠른 쾌도를 정확히 때린 것도 놀랍지만, 그걸 부러뜨리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한 표정이었다. 흥해쾌도도 마찬가지. 심하게 당황한 기색을 비쳤다. 그러나 흑룡은 멈추지 않았다.
휘릭!
장도가 부러지자 그는 장삼을 휘날리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의 손은 이미 흥해쾌도의 한쪽 어깨를 짚고 있었다.
흥해쾌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을 주어 몸을 띄운 흑룡이 반대 손을 사용하여 장도를 부러뜨릴 때처럼 올렸다가 아래로 내려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흑룡의 손은 정확히 그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다행히 흥해쾌도는 신법도 빨랐다. 어깨를 짚은 손을 급히 뿌리친 후, 떨어지는 손을 피해 훌쩍 뒤로 물러섰다.
퍽!
둔탁한 소리였다. 종이 한 장 차이를 두고 스쳐간 흑룡의 장심이 도중에 멈추며, 거기에서 쏟아진 황금색 기공이 지면을 때린 소리였다. 그리 큰 소리가 아니었지만 파괴력은 대단했다. 바위로 만들어진 평평한 바닥에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바위를 부수는 일은 내공을 어느 정도 갖춘 무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힘을 사용하면 바위를 부수지 않고 구멍을 뚫는다. 힘의 분배까지 할 줄 알고, 훨씬 강한 내공을 쏟아내면 구멍만 뚫을 뿐, 주위에는 흠집조차 남기지 않게 된다. 두부에 구멍을 뚫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흑룡이 내공만으로 그걸 해냈다. 그는 바위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리고 면적이 넓은 손바닥으로 해냈다. 진흙에 손바닥을 대고 지그시 누른 듯 깨끗한 구멍만 있는 것이다.
구멍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다는 게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바위에 새겨진 자국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가까이 있는 흥해쾌도 또한 그 깊이를 알지 못했다. 구멍을 통해 연기만 모락모락 올라오는데, 도대체 얼마나 깊이 뚫린 걸까!
흥해쾌도는 그걸 망연히 보며 진땀만 흘릴 뿐이었다.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했다 해도 저걸 그대로 맞았다가는 머리에 구멍이 났을지도 몰랐다. 손바닥만 한 구멍이라면 구멍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머리의 형체는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자비는 이걸 두고 두 번째 경고라 생각했다. 일부러 흥해쾌도를 맞추지 않았다. 힘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난 빠르기만 하지 않다. 누구보다 강하다. 구파일방을 적으로 돌리려면 나부터 꺾어야 한다. 그런 의미를 무인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경고를 보았다.
물러선 흥해쾌도가 넋 놓고 있는데도 흑룡은 다시 그를 향해 육박해갔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그를 끝내 꺾어버리겠다는 의도였다.
퍽!
수하들이 흥해쾌도를 보호하기도 전이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그가 턱을 맞고 쓰러졌다. 바닥에 누우면서 신음조차 흘리지 않는 것을 보면 아픔보다는 놀라움이 큰 모양이었다. 공명정대한 소림의 제자가 이렇게 기습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덤비면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건가!’
사자비는 그렇게 해석했다. 모든 무인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놈, 흑룡!”
노기가 쩔쩔 끓는 목소리가 사방천지를 들었다 놓았다. 너무 커서 모두 움찔할 정도, 혜각의 일갈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던 그가 한 번 노성을 터뜨리자 같은 사람이 맡나 싶을 지경인데, 흑룡도 놀랐는지 움찔했다.
“어찌하여 물러선 시주께 사정을 두지 않았느냐! 사백께서 그리 가르쳤더냐!”
흑룡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잠시 후에 미소를 지으며 크게 대답했다.
“방장께서 장문인들과 의논하여 살생의 금제를 풀었는데, 이 정도도 안 된다고 하시면 어쩌라는 겁니까!”
“너의 마음이 정녕 악귀에 물들었구나. 이를 어찌할꼬. 아미타불, 아미타불!”
“너무 그러지 마세요. 어차피 저는 승려도 아니잖아요.”
혜각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어 흑룡을 노려보았다.
흑룡이 급히 시전을 피했다. 당황한 듯했지만 그들을 번갈아 보던 사자비는 웃음만 흘렸다.
‘뻔한 수작!’
이게 마지막 경고라고 생각했다. 여차하면 구파일방도 충분히 잔인해질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뻔한 만큼 효과는 확실한 것 같았다. 대부분 굳은 표정으로 갈등의 빛을 보였다. 흑룡도 상대하기 무섭지만 뒤에는 구파일방의 고수들이 금제까지 푼 상태로 대기하니 껄끄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거기다 구파일방의 경고에 힘을 더하는 사람까지 나섰다.
“구파일방의 뜻이 맹의 뜻과 일치하오.”
은은히 울려 퍼지는 음성과 함께 절벽에서 또 다른 인영이 떨어졌다. 그를 확인한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것처럼 경악한 눈이 되었다. 사자비도 예외는 아니었다.
‘맹주가 직접 끼어들어?’
지금쯤이면 군량을 대고자 떠났던 표사들에게 소식이 끊어져 노심초사해야 할 때였다. 사자비는 구채구에 맹주가 직접 올 줄은 짐작조차 못했다. 어쩌면 표사들이 흑각철기대에 의해 처리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었다.
사자비는 절로 몇 걸음 물러서 나무 옆으로 이동했다. 복면을 썼기에 알아볼 리 없겠지만, 아는 사람을 대하니 조심스러워진 것이다. 때마침 맹주가 혜각 대사 옆으로 다가서서 무인들을 향해 포권지례를 취했다.
“노부는 얕은 재주로 무림맹의 맹주를 맡은 송 아무개라 하오. 혜각 대사께서 말씀하신 바를 조금이라도 거들고자 노부와 맹이 힘을 더하기로 했으니, 여러 군웅께서는 이만 돌아가 주었으면 하오.”
정중한 말투와 표정은 여기까지였다. 맹주의 안색은 평소의 그와는 전혀 달랐다. 겨울바람처럼 차갑게 변해있었다.
그는 사방을 찬찬히 둘러보며 아는 인물이 있는지 확인한 후, 표정만큼이나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곳에 정파가 여럿 섞여 있구려.”
순간 정파와 사파의 무리가 확연히 구분되었다. 난감한 듯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맹주의 시선을 피하는 이들은 대부분 정파의 고수일 것이다. 그중에 얼굴까지 붉히는 자는 아마도 맹주와 서로 안면이 있거나, 친분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맹주는 그들에게 돌려 말하지 않았다.
“이틀 말미를 줄 터이니 진영을 거두고 떠나시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맹주로의 지시임을 상기하였으면 좋겠소. 만약, 이틀 후에도 남아 있다면, 그들은 정파로 인정하지 않겠소이다.”
그리고 사파에게도 경고를 잊지 않았다.
“유혈사태를 피하고자 노부는 온 힘을 다할 것이오. 정도를 걷지 않는 자는 그 점을 깊이 생각하였으면 좋겠소. 또한 맹은 결코 사리사욕을 부리지 않을 것이니, 무덤에서 나온 모든 것을 장경각에 봉인하기로 결정했소. 맹의 결정이 불만이라면 강호의 법칙대로 힘을 앞세워도 무방하오. 노부가 직접 모두 상대해 드리리다.”
맹주는 입을 여는 순간 왜소한 모습과 달리 거대한 산악의 기세를 내뿜었다. 목소리만으로도 수많은 고수를 압도하는 힘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인물이었군.’
맹주를 주시하던 사자비의 생각이었다. 물론 구파일방의 힘을 등에 업은 탓도 있겠지만, 맹주라는 직책이 가지는 힘이 무림에선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결국, 정파는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파 또한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할 듯했다.
그는 사파로 짐작되는 옆의 사내와 여인을 보았다. 굳은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이 재밌어 보였다. 아마도 계산을 하고 있겠지. 이 상황에 대처할 방법을 찾는 중일 것이다.
‘그런 게 과연 있을까!’
사파가 일시에 달려든다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많은 무리 중에도 분명히 뛰어난 고수가 있을 테고, 그 숫자도 만만찮을 테니까. 전체적인 숫자도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사전 협의도 거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무리가 한마음 한뜻일 수 있을까? 가능하지 않다. 만에 하나, 마음과 손발이 맞는다 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바로 정파의 고수였다. 사파가 무림맹과 구파일방을 공격한다면 그들이 가만히 지켜볼 리 없었다. 오히려 기회라 생각하여 곧장 사파를 덮칠지도 모른다. 그 증거로 정파가 물러서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여기까지 와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포기하려니 많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정사는 절대 이 상황을 돌파할 수 없다.
그게 사자비의 판단이었다. 그때, 무림맹의 고수들이 동혈로 진입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모두 인상을 찡그리며 그 모습을 망연히 지켜볼 때, 사자비의 귀로 전음이 들려왔다.
[대인, 차라리 잘된 일 같습니다.]
옆에 있던 대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나?]
[무림맹와 구파일방을 상대할 자들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무덤을 차지하게 한 후에 후속부대를 기다렸다가 뺏으면 될 듯합니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것 같다.]
[무슨 말씀이신지?]
[당장은 저들을 상대하지 못하겠지만 곱게 물러나지도 않을 거라는 뜻이다. 특히, 사파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다.]
[그럼,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생각보다 처리해야 할 무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 정도 숫자를 친황대 세 개 대로 상대했다가는 피해가 클 듯한데, 동창이 가세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사자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무림인이 무공비급에 이렇게 미쳐 있는 줄 몰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나 많은 무림 세력이 구채구 안으로 몰려온 것 같았다.
[정공(正攻)을 택하게 해야지.]
[정공이라시면……?]
[사파가 구파일방과 무림맹을 정면으로 공격하게 유도하는 것.]
[가능하겠습니까? 정파가 완전히 물러가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정면으로 달려들지는 못할 겁니다.]
[바보만 있는 건 아닐 테니, 분명히 방법을 짜내겠지. 안 되면 되게 만들면 그만이고. 어차피 기관이 아직 남아있어 무림맹도 당장은 무덤을 확인하지 못할 테다. 그리고 무덤이 진짜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아서 놈들이 하는 냥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진짜가 아니라면 섣불리 친황대가 나서서 피해볼 이유는 없으니까.]
그때 몇 개의 무리가 슬며시 몸을 빼고 있었다. 당장은 방법이 없으니 진영으로 돌아가 고민해보겠다는 듯했다. 그들이 고수들을 물리자 나머지도 하는 수 없다는 듯 하나둘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자비도 더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들과 섞여서 숲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진영에 도착한 그는 곧장 세 명의 대원에게 지시를 내려 주변을 정찰하도록 했다. 사파와 정파의 움직임을 파악해야 계획을 짜는데 용의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날 밤 이 경(二更:밤9시에서 11시).
“지금 비천십팔방의 진영으로 작은 무리 다수가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정찰 중이던 대원 한 명이 돌아와 알렸다.
“비천십팔방? 그들이라면 호남 사파의 거두가 아닌가!”
“맞습니다.”
“진영을 찾은 자들은 대부분은 사파무리의 책임자들이겠지?”
“그런 것 같았습니다. 동혈에서 보았던 사내와 여인도 진영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대책회의를 하려는 것 같습니다.”
“몇 명인가?”
“오십 명 정도는 되는 듯했습니다. 최소한 이십여 개의 무리가 모였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사자비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대로 움직이는군. 잘 됐어!”
그러면서 일어섰다. 대원이 놀란 듯 물었다.
“그곳에 갈 생각이십니까?”
“그래야지.”
사자비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막사를 나가며 말했다.
“우리도 한 다리 걸쳐야지 않겠나.”
☆ ☆ ☆
때는 겨울로 접어들 무렵, 다른 지방보다 비교적 따뜻한 사천이라지만 고도(高度)가 높은 구채구는 예외였다. 수많은 능선을 넘어 골짜기로 숨어든 밤바람은 매섭기만 했다. 바람결에 붉은 깃발이 쉼 없이 몸을 떨고, 추위로 바닥이 얼어 넘어지기만 해도 크게 다칠 것 같은 밤이었다.
“어찌할 생각이오?”
묵천문 진영에 걱정 담긴 목소리가 낮게 새어나왔다. 진영 중앙에 있는 막사였다.
손님석에 앉은 노인이 묻고, 주인석에 앉은 중년인이 대답했다.
“맹주께서 직접 오셨는데, 고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내일 돌아가기로 결정 내렸습니다.”
노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묵천문이 이렇게 나오면 나머지는 어찌해야 하오.”
“그들은 그들의 내린 결정을 행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굳이 본문의 결정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습니다. 장 선배께서도 우리와 상관없이 귀문을 위해 결정하고 행동하십시오.”
노인은 한숨부터 쏟아냈다. 얼굴에는 도와달라는 빛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묵천문 비응대(悲鷹隊) 대주 백상상(白上上)은 확고했다. 오늘 낮, 구파일방과 함께 절벽 위에 서서 노여운 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붉은 얼굴의 노인 때문이었다. 흡사, 관운장을 연상시키는 노인은 그때 ‘나에게 아무런 보고도 없이 왜 묵천문이 이곳에 왔느냐?’라는 질책의 시선을 한참이나 주었던 것이다.
백상상은 노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맹에 파견 나가있으나, 원래는 묵천문의 총관이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묵천문의 정신적인 기둥, 전대 문주인 묵천검황의 의제, 현 묵천문주의 스승이자 청룡도의 주인.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붙는 전윤옥 무림맹 장로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백상상은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필 무림맹이 구채구에 들어올 이유가 무엇이며, 또 전 장로까지 데려올 것은 무엇인가!
사실, 구채구에 들어온 순간부터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은밀히 알아낸 정보라 재빨리 움직였는데, 구채구에 들어와 보니 생각과는 영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규보의 무덤이 구채구에 있는 걸 알았을까. 이 많은 무림 세력이 정보를 알고 찾아왔다는 게 의아할 지경이었다.
백상상을 가만히 살피던 노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찌 무림맹에 속한 문파는 모두 같은 소리를 하시오.”
백상상이 미소를 지었다.
“맹은 정파의 머리입니다. 맹주께서 직접 방문하여 돌아가라는데, 그걸 어기고 어찌하겠습니까. 아마 다른 분들도 나와 생각이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소.”
“……?”
“돌아가겠다는 문파도 있지만, 시간을 두고 관망하겠다는 문파도 있었소. 혹은, 진영만 십 리 정도 물리겠다는 곳도 있었으니 말이오.”
“그럼, 선배님께서는 계속 있겠다고 결정한 모양이군요.”
백상상은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그러지 마시고 우리와 함께 내일 떠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상대는 무림맹과 구파일방입니다. 맹주까지 직접 오셨는데, 어찌 그들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꼭 그런 문제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오. 노부도 정파 소속인데, 어찌 무림맹을 적으로 두겠소.”
“달리 문제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사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소. 우리가 모두 빠지면 사파만 남게 되는데, 아무리 구파일방과 무림맹이라도 이곳에 모인 엄청난 수의 사파를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오.”
노인은 걱정이라는 듯 말하고 있었다. 물론, 그걸 더없이 바라는 노인이었다. 사파의 무리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무림맹과 구파일방을 제압하려면 상당한 힘이 꺾일 것이었다. 그때 정파가 복수를 핑계로 슬쩍 나서면 일거양득이 되는 것이다.
“그럴듯하군요.”
말과 달리 백상상의 얼굴은 냉담하기만 했다. 이래저래 핑계를 대지만 결국 규보의 비급을 포기할 수 없다는 뜻으로 비쳤기 때문이었다.
그는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하셨습니다.”
“……?”
“오합지졸로 무림맹을 꺾을 수도 없을뿐더러, 저들도 하나만을 노리고 있습니다. 서로 원하는 목적이 같으니, 절대 진심으로 힘을 합하지는 못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맹주님도 맹주님이지만, 전 장로님과 흑룡까지 버티고 있으니, 그런 고수를 저들이 상대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구파일방의 승려와 도사들도 만만치 않은 고수들인데요?”
그는 확신하며 말을 맺었다.
“다 같이 죽자고 덤벼들지 않는 이상 사파는 무림맹을 꺾지 못합니다. 덤빌 엄두도 못 낼 것이고, 혹 뒤로 꿍꿍이를 품는다 해도 마음먹은 대로 되진 않을 겁니다. 괜한 호기부리다 맹의 의심을 받지 마시고 내일 아침 우리와 함께 구채구를 나갑시다.”
회유하러 왔다가 오히려 회유당할 위기에 처한 노인이 난감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우선, 좀 더 심사숙고하여 아침에 알려 드리겠소.”
그렇게 말하고 급히 진영을 나가갈 수밖에 없었다. 더 있다가는 정말 돌아가겠다고 약속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진영을 빠져나온 노인은 이후로도 다른 진영을 찾아다녔다. 뜻을 함께할 다른 정파가 있는지 찾아보고자함이었다.
제7장 몰려드는 강자들
1
“크아악!”
비명이 숲을 뚫고 메아리쳤다.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 사내의 비명이었다. 모두 마흔여덟 명. 이제 죽었으니 마흔여덟 개의 주검이라 해야 할 것이다. 주검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 가운데 어둠에 물든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로써 다섯 번째였다. 구채구로 들어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다섯 번이나 무리지어 다니는 무인들을 만났고 모두 찢어버렸다.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구채구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길을 잃어버린 탓이었다. 여기 가도 산이요, 저기 가도 산이니, 처음부터 구채구 지리를 모르고 들어온 상태에서 돌아가는 길까지 애매해져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애초에 제갈세가가 흘린 정보에 눈이 멀어 구채구까지 달려온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물론, 후회하지는 않았다. 무공이 탐나지는 않았지만 돈은 탐이 났으니까. 규보의 무공만 가져다주면 삼십만 냥을 주겠다고 했으니 그녀로서는 충분히 움직일 이유가 되었다.
그녀는 거금을 제시한 제갈세가의 꿍꿍이를 알고 있었다. 백궁이 항주에 마수를 뻗치니 한숨 돌리고자 했을 것이다. 가소로웠지만 문제는 그녀 또한 돈이 필요했다는 점이었다. 황실과의 거래에서 상당한 액수를 보장받았으나 당장 큰돈을 만질 수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제갈세가의 제안을 하락하여 구채구로 들어왔는데, 막상 와보니 규보의 비급은커녕 길까지 잃어버려 난감했을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구채구를 누비는 오십 명의 무리를 만났다. 그 뒤로도 계속 만났다. 그녀는 그들에게 규보의 무덤을 물었고, 말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어쩜 돌아오는 대답이 다 같을까. 대응은 달랐으나 마무리는 대부분 비슷한 욕설로 맺었다.
“미친년!”
그게 지금의 결과였다. 그녀는 만난 무리마다 한 녀석도 살려두지 않았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무사들을 표정을 즐기면서 모두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
가만히 시체를 둘러보던 그녀를 향해 홍의를 입은 두 여인이 다가왔다. 같은 복장에 혁대와 머리를 묶은 모양까지 똑같아서 꼭 쌍둥이 같은 느낌의 여인이었다.
왼쪽 여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 명 챙겨두었어요.”
붉게 물든 얼굴이 수줍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백발이 피로 물든 여인, 설혼마녀는 얼음장 같은 표정이었다.
“왜?”
이번에는 오른쪽 여인이 말했다.
“모두 죽이시니 자꾸 길을 잃어버려서…….”
설혼마녀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여인은 움찔하더니 쪼로록 달려가 나무 뒤에 숨겨놨던 무사를 들고 왔다. 사내는 이미 점혈 당해서 꼼짝도 못하는 상태였다.
여인이 사내를 앞세우며 말했다.
“고문이라도 하면 불지 않을까 해서요.”
설혼마녀가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 몸을 돌렸다. 알아서 하라는 뜻이라 해석한 쌍둥이 여인이 사내의 점혈을 풀고 양팔을 뒤로 꺾었다. 그런데 재밌는 일은 알고자하는 것을 묻지도 않고 고문부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창 고문에 열중하더니 왼쪽 여인이 ‘아차’ 하며 말했다.
“미안!”
그리고는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규보의 무덤이 어디에 있지?”
신기하게도 고문부터 시작했던 행동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무사는 고민 한 번 않고 곧장 대답했다.
“모, 모르오. 다만, 정찰조가 가져온 소식을 듣고 동북쪽으로 이동 중이었소.”
“동북쪽이 어느 쪽인데?”
사내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그것도 모르고 어찌 구채구를 돌아다녔느냐는 듯 실소를 흘렸으나, 뚫어지라 바라보는 쌍둥이 여인을 보고는 급히 턱짓했다.
“저쪽이오. 여기에서 이십 리를 더 가면 계곡이 있다고 했고, 거기에 무림인들이 모여 있다고 들었소.”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어? 말했으면 이렇게 죽이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그러자 옆에 있던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무덤을 두고 싸워야 할 적인데, 죽이지 않았을까?”
순간 두 여인의 시선이 설혼마녀에게 향했다. 그녀는 수림에 반쯤 가린 달빛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은 두 여인이 충분히 그랬을 것이라 확신하는 얼굴로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은 사내를 보고 맑게 웃었다.
“아무튼 고마워!”
말과 달리 행동은 전혀 고마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둘은 쌍둥이처럼 똑같이 말하고는 그대로 사내의 목에 손가락을 가져가 데었다. 목을 툭 건드리는 단순한 행동이었지만 사내는 부르르 몸을 떨고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궁주님, 동북쪽으로 이십 리 정도 가면 된다고 했어요.”
설혼마녀는 대답 없이 걸음만 옮겼다. 그 뒤로 쌍둥이 여인이 따르고, 열 명의 궁녀들도 함께했다. 하지만 방향을 찾기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혹시 방향이 틀어질까 봐 나무 위를 밟으며 직선으로 이동했는데,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산 몇 개를 넘자 또다시 산이고, 옆으로 비켜가자 이번에는 송곳처럼 뾰족하고 거대한 절벽이 가로막았다. 그렇게 몇 번 이동하는 동안 다시 방향이 애매해져 버린 것이다. 결국, 한참 동안 주위를 살핀 뒤에 계곡을 찾아 상류로 올라가기로 했다.
계곡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한참을 따라가니 다른 쪽으로 흐르는 계곡과 겹치는 부분이 보였다.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이 어떨까요?”
그리 힘들어보이지는 않은데, 씻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설혼마녀를 바짝 뒤따르던 왼쪽의 홍의여인이 두 줄기의 계곡이 교차하여 큰 웅덩이를 이룬 곳을 보며 그렇게 제안했다.
설혼마녀는 말없이 웅덩이 쪽으로 다가가 수면에 떠오른 달빛을 보았다. 그녀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달 아래로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며칠간 상대했던 무리 때문에 온몸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데, 외모 또한 냄새만큼이나 형편없었다. 구채구로 들어온 뒤로 얼굴에 물 한 번 묻혀본 적이 없으니 당연하겠지만, 머리카락조차 피에 엉겨붙어 더러웠다. 어쩌면 궁색해 보인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잠시 쉰다.”
궁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웅덩이로 뛰어들려는 모습이 물 만난 고기 같았다. 그러나 아무도 물에 몸을 담글 수 없었다.
순간 동작을 멈춘 궁녀들의 몸에서 강렬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들은 반대쪽으로 갈라진 계곡을 노려보고 있었다. 접근하는 기척을 느꼈다.
잠시 뒤에 발소리가 들렸다. 많으면 열 명, 적어도 다섯. 작은 무리가 이동하는 소리는 점점 커지는 듯했다.
“잘 됐다.”
설혼마녀가 짧은 한마디로 침묵을 깨고 두 홍의 여인에게 말했다.
“한 놈은 챙겨 놔라!”
길을 물어보겠다는 것 같았다. 쌍둥이 같은 두 여인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가로 걸어 나오는 녀석들은 모두 여덟 명. 세 명의 노인과, 삼십대 초반의 청년 하나, 그리고 중년인이 넷이었다.
놈들은 딱 보아도 신분고하가 확실했다. 선두에서 길을 여는 두 중년인은 가장 아랫사람일 것이다. 가장 뒤에 있는 두 명도 마찬가지, 길을 열며 뒤를 보호하는 호위역할이라 무리에서 가장 지위가 낮은 자들이 분명했다. 반면, 무리의 우두머리는 금색 봉황이 수놓인 비단 흑포를 입고, 검은 전립(戰笠:벙거지와 비슷한 모자)을 쓴 노인 같았다. 다른 두 노인도 같은 흑포를 입었지만 모자를 쓰지 않았고, 전립 노인처럼 옷에 봉황이 없는 것이다. 거기다 전립 노인의 양옆에 나란히 서서 측면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위치를 고수하니 수장과 아주 밀접하면서도 수족처럼 부려지는, 하지만 무리에서 상당한 신분을 차지한 자들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남은 이는 청년. 그는 평범해 보이는 외모였지만 무리에서 특별한 존재 같았다. 노인보다 처져 걷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꽤 자유롭게 위치를 바꾸는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모두 칙칙한 검은 옷이고, 풍기는 기도는 예리해서 남달랐다. 가장 기운이 살아있는 자는 역시 선두에서 길을 여는 두 중년인이었다.
그들도 백궁을 발견했는지 웅덩이까지 다가와서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담긴 의미는 하나같았다. 이런 깊은 산중에 여인들끼리 모여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표정들이었다.
서로 침묵하고, 서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아쉬운 건 설혼마녀라 침묵을 깬 사람 역시 그녀였다. 예의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듣는 이로 하여금 울화가 치밀 게 하는 그런 말투였다.
“규보의 무덤이 어디에 있나? 알면 주저 없이 말해 보아라.”
이제 갓 스물을 넘겼을 법한 계집이 그렇게 나오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앞선 두 중년인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동시에 몸에서 스멀스멀 살기가 피어나오는데, 지독한 독기를 동반하고 주변을 울리는 듯 강렬했다. 그걸 뒤에 있던 전립의 노인이 말렸다.
“거두어라.”
순간 중년인에게서 뻗어 나오던 사이한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두 사내를 뒤로 물린 노인은 설혼마녀를 보며 인자한 미소를 보였다.
“얼굴은 귀인상인데, 어찌 입에 칼을 문 듯한가!”
설혼마녀의 목소리가 매서워졌다.
“알아 몰라?”
“확실하지는 않으나, 가는 곳에 무덤으로 짐작되는 동굴이 있다고 들었다네.”
“자세히 말해 봐.”
전립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우리와 적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걸 어쩌나!”
설혼마녀는 코웃음을 쳤다.
“입을 찢어놓으면 말할까?”
순간 전립 노인 옆의 노인이 실소를 흘렸다. 기형적으로 키가 작아 난쟁이처럼 보이는 그는 끝이 몸통만큼이나 크고 둥근 철퇴를 들고 있었다.
“이 어린 것아, 어찌 사람 보는 눈이 그리 없느냐! 혼나고서 눈물 짜지 말고 썩 돌아가라!”
도박적인 말이 심기를 건드린 모양, 궁녀들이 설혼마녀를 중심으로 벌려 섰다.
그들에게 뿜어지는 강렬한 기운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고 전립 노인의 얼굴에 약간의 흥미가 담겼다.
“그대들도 살기를 거두었으면 좋겠네. 본좌를 따르는 교도들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나, 본좌는 싸움을 즐기지 않는다네. 꼭 해야 할 싸움이 아니면 피하고 싶으니…….”
노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촹!
시원한 소리가 수면을 가르는 다섯 개의 가는 강기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립 노인은 그냥 서 있기만 했다. 그를 보호하는 자기 있었으므로 막을 필요조차 없다는 듯했다.
강기를 가로막은 사내는 청년이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노인들 앞에 나타나서 다가오는 강기를 푸르게 빛나는 손으로 튕겨버렸다.
쾅!
산산이 부서지는 강기파편을 보며 청년은 다소 놀란 듯 설혼마녀에게 시선을 던지고 이어 자신의 팔을 보았다. 호신강기로 뒤덮인 손이 꽤 아픈 듯 떨리고 있었다. 그때 설혼마녀가 경고처럼 말했다.
“마지막 기회를 주지. 말할 테냐, 이곳에서 죽을 테냐.”
구겨진 청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살기로 범벅된 두 눈이 강렬한 빛을 발하는 듯했다.
“흑룡을 만나기도 전에 괴물 하나를 또 만났군!”
의미 모를 말을 던지고 두 주먹을 허리로,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린 청년이었다. 그 자세를 취하자 평범해보이던 그는 더 이상 평범하지 않았다. 붉은빛이 그의 전신을 휘감더니 곧이어 거대한 호랑이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빛 사이로 공기가 떨려 사방을 진동시켰다.
전립 노인의 감탄이 흘러나왔다.
“홍호천하(紅虎天下)! 벌써 구(九) 성에 이르렀구나!”
하지만 노인은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나, 아직은 이르다. 특기를 버리고 잔재주로 상대할 여인이 아니다.”
그러면서 청년에게 다가가 붉은빛을 뚫고 손을 내밀었다.
노인의 손은 청년의 어깨를 짚었다. 그 순간 무시무시했던 기공이 줄어들더니 붉은빛이 완전히 흩어져 버렸다.
“사, 사부님!”
“힘을 아껴두어라. 네 상대는 흑룡이 아니더냐!”
말과 함께 청년을 뒤로 당겨 물러서게 한 후, 반대로 노인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본 두 노인이 경악한 얼굴을 하고, 중년인들도 안색을 붉히며 감격한 표정이 되었다.
“교주님, 저 어린 계집을 직접 상대하시려는 겁니까?”
“무림맹과 구파일방을 만나기도 전에 희생을 따라서는 안 될 걸세. 본좌는 자네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걱정하는 것일세.”
“그 정도로 저 계집을 인정하시는지요?”
초식 없이 강기를 사용했다면 화경의 고수라는 뜻. 어린 여인이라는 점을 생각했을 땐 놀라운 성취요, 상상 이상의 고수가 분명하긴 했으나 여기 있는 모든 이의 생각은 변함없었다. 전립 노인이 손수 나설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첫 상대가 결정된 설혼마녀가 지축을 뒤트는 강렬한 기운을 쏟아낼 때까지는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팡!
공기를 때리듯 설혼마녀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공력이 뻗어 나왔다. 푸르게 빛나는 기운은 내공이 응집되어 폭발할 듯 요동쳤고, 그 속의 여인은 백발을 사방으로 휘날려 귀신같은 형상을 뽐냈다.
“화경을 넘었다.”
난쟁이 노인의 중얼거림이었다.
옆에 있던 노인, 나이답지 않게 상당한 미모를 자랑하는 노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가 직접 나섰다면 승부를 짐작할 수 없었겠소.”
그러면서 청년에게 말했다.
“공자! 거리를 두고 지켜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싸움에 휘말리면 위험할지도 모르니.”
고개를 까딱거리는 행동으로 대답을 대신한 청년은 훌쩍 물러섰다. 남은 이들도 계곡을 벗어나 나무 위로 올라섰다. 그때 설혼마녀의 신형이 전립 노인에게 뻗어갔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그녀의 머리카락이 뇌전을 흘리며 노인을 삼켜버릴 듯 덮쳤다.
전립 노인의 얼굴에 이채가 띠었다.
노도처럼 밀려오는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내공을 싣고 매섭게 쏟아지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용이 수염을 휘날리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구경만 할 처지가 아닌 듯 노인이 발을 살짝 들어 올렸다.
쿵!
올라간 발은 바닥을 찍었다. 단순하고 가벼운 행동이었지만 여파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콰콰쾅!
우선 땅이 뒤집혔다. 노인이 발로 찍은 부위는 약간 패였을 뿐이지만, 그 앞은 지진이라도 난 듯 허물어지며 솟구쳐 올랐다. 지면과 닿은 수면도 마찬가지. 웅덩이에 고인 물 전체가 뒤집히듯 솟구치며 덮쳐오는 머리칼을 되레 삼키고 설혼마녀까지 덮으려 했다.
설혼마녀의 입에서 기합성이 흘러나왔다. 순간 빛나던 몸이 폭발하기 직전의 그것처럼 응집되더니 신형이 빨라졌다. 그녀는 빛을 잔상처럼 뿌리며 올라오는 수면을 뚫고 섬전처럼 뻗어나갔다. 그녀의 손에는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다섯 가닥의 손톱이 바짝 약이 올라 튀어나와 있었다.
‘죽이기 아까운 인물을 만난 건 두 번째로세!’
노인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의 손은 검은 뇌전으로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설혼마녀와 부딪히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 ☆ ☆
“수라천군과 만난 적이 있었던가?”
맹주는 혜각 대사와 대화를 나누다 그렇게 물었다. 막 휘장을 걷고 지휘소로 들어오는 흑룡을 향해서였다.
흑룡이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물음이냐는 듯 맹주를 보고, 이어 혜각 대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혜각 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은 아니었지만, 굳이 들추고 싶지 않은 옛일을 맹주에게 말한 모양이었다.
흑룡은 잠시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만났었죠. 오래전에!”
놀란 맹주의 얼굴이 더욱 기괴해졌다.
수라천군은 무림에서도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로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인물, 맹주조차도 그를 만난 기억이 없었다. 그런 면에선 흑룡하고도 닮아 있었다. 구파일방만 돌아다녔을 뿐, 무림에 얼굴을 내민 때가 극히 제한적이어서 흑룡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났다니 맹주의 얼굴에 호기심이 짙게 깔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떤 사람이었던고?”
이미 무공의 고하를 벗어던진 맹주였으나 의식은 되는 모양이다. 언제나 비교 대상이었던 둘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정도 최고의 무림맹주, 사파의 최고봉 수라천군이 아닌가!
하지만 흑룡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인상만 쓰다가 맹주가 재차 묻고서야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보다보다 그런 노인네는 첨 봤죠.”
“어떤 면에서?”
“이건 뭐…… 거대한 산을 상대하는 것 같지 뭡니까. 아무리 두들겨도 부러지지 않을 것 같은……. 질려서 싸움을 포기한 경우는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맹주의 눈이 커졌다.
“그, 그와 무공을 겨뤘단 뜻인가?”
흑룡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맹주는 망연히 흑룡을 보았다. 이건 정말 놀라운 정보였다. 그러나 더 경악할 정보가 있었다.
“우연히 만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화산파로 가던 길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왜?”
“자기 제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둔기에 맞은 표정이 이럴까!
맹주는 황당한 듯 한참이나 실소를 흘리더니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대단한 늙은이로세.”
그는 다소 어이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자네가 소림사의 제자인 걸 모르진 않았을 텐데, 마교가 구파일방의 제자를 뺏으려 했다니 재밌는 일이 아닌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만나보고 싶네그려.”
“웃을 일은 아니었죠. 그때는 정말 심각했거든요.”
“무공을 겨룬 후에 자네를 인정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게 문제였습니다. 첫째 제자와 먼저 붙었거든요.”
맹주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어떻게 되었나?”
흑룡이 다시 경악할 말을 했다.
“죽일 의도는 없었는데…….”
“주, 죽었더냐?”
“어찌하다 보니……. 수라천군과의 대결은 그다음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론 비겼지만, 실제로는 그냥 저를 놓아준 거였죠. 웃기게도 남은 제자들이 복수하겠다고 제게 달려드는데, 그 노인네가 말리더라고요. 아무튼, 그리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습니다.”
입맛을 다시는 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담겼다. 그러나 맹주는 다른 면으로 계산한 것 같았다.
“노부는 자네의 실력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네. 그런 자네의 말이 사실이고 그가 진짜 수라천군이라면, 무림에서 그를 당할 자는 없을 걸세. 노부도 어렵겠는 걸.”
흑룡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두웠던 얼굴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저 멀리 떠나보내고 자부심 가득한 표정만 한가득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어지는 실없는 미소!
“에이, 그날 이후로 제가 얼마나 수련했는데요. 그때가 벌써 팔 년도 넘었으니, 지금 만나면 또 모르죠.”
“들어보니 실력차이가 꽤 컸던 것 같네만.”
흑룡이 번쩍 한 손을 들어 펼쳤다.
“과장을 좀 섞어서 그때보다 딱 다섯 배 강해졌습니다.”
그리고는 헤픈 웃음, 덧없는 허풍이었다.
“나를 이길 자 무림에 없죠. 하하하하하!”
맹주도 자신감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지 따라 웃었다. 흑룡을 몇 번 만나지는 않았던 맹주지만 실없는 농담을 자주 하는 성격이 비슷해 맹에 올 때마다 밤새 술자리를 갖은 그들이었다.
껄껄거리며 한참 웃는 그들을 보며 혜각만 염불을 중얼거렸다. 그를 보며 맹주가 물었다.
“마교가 구채구에 들어왔다고 했소만, 수라천군이 직접 왔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지 않겠소, 대사?”
“구채구에서 만난 마교도는 수라천군이 구채구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했습니다. 불리했던 상황이라 허세를 부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만날 가능성도 있겠구려.”
“큰 불행이지요. 제발 이곳에는 오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아미타불!”
혜각은 습관처럼 염불을 외우고 흑룡을 보았다.
“그를 만나면 되도록 피하되, 피치 못할 사정이라면 그걸 사용하도록 하여라.”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전 자신 있는데요.”
“놈! 허세부리지 말라고 사백께서 누누이 말씀하셨거늘! 이곳에서 일어나는 시비는 네가 아니라 무림 전체를 위한 것임을 가슴에 새기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흑룡은 대답 없이 머리만 긁적였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혜각은 더 이상 꾸짖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고문으로 흑룡을 따라왔을 뿐, 실제로 구채구에 투입된 구파일방의 책임자는 흑룡이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평소와 같이 행동하는 흑룡의 맘을 잘 알고 있었다. 동생의 죽음은 흑룡의 어깨에 더 없는 무게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평소와 너무 같아서 오히려 걱정스러운 혜각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맹주는 흑룡과 혜각을 번갈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처음 생각과 달리 흑룡의 자신감이 단지 허풍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두 사람이 말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소림사가 인정하는 것만도 분명했다. 대화로 보아 흑룡만 사용할 수 있는 것 같은데, 그만큼 그를 믿고, 기대를 걸고 있다는 증거였다.
‘흑룡이 별다른 문제없이 잘 성장만 해준다면 정도의 앞날이 밝으리!’
☆ ☆ ☆
비천십팔방으로 향하던 사자비는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갑작스런 행동 때문에 뒤따르던 대원이 물었다.
사자비는 몸을 돌려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가린 별들이 꼭 반딧불 같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느끼지 못했나?”
잠시 생각하던 대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을…….”
사자비는 침묵했다. 사실 그도 딱히 뭐라고 짚어낼 수 없었다. 미세한 떨림이었던 것 같은데, 확신이 가지 않았다. 잘못 느낀 것이 아니라면 지진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진이라기엔 느낌이 이상한 것이다. 아주 먼 곳에서 엄청난 힘이 폭발한 느낌이랄까. 물론, 그것도 정확하지는 않았다. 다른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조용히 숨죽이는 구채구라 사소한 소리도 크게 느꼈을 가능성이 있었다.
“착각이었나!”
침묵하는 구채구를 둘러보며 사자비는 피식 웃었다.
‘그 정도 고수가 있을 리 없지.’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겨 비천십팔방으로 향했다.
2
“정말 너무하는군요.”
거령문의 금지옥엽, 소요요(素嶢謠)는 실망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비천십팔방의 호출에 응했더니, 한다는 소리가 ‘빠지는 척하자.’ 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규보의 비급을 얻은 후, 돌아가는 구파일방을 급습하자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실소마저 튀어왔다.
과연 그런 방법이 먹히기나 할까?
구파일방이 바보 멍청이도 아닌데?
아마도 그런 경우를 생각하여 충분히 대비를 해놓을 것이다. 사람 한둘을 먼저 보내어 몰래 비급을 빼돌릴 수도 있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와서 찾아갈 수도 있었다. 그들은 변수로 작용할 많은 선택의 폭을 가진 셈이었다. 그것을 피하자면 그들이 기관을 해체하여 비급을 얻기 전에 제압하여 무덤을 확보해야 했다.
문제는 또 있다. 소규모의 추적이라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랬다가는 구파일방과 그들을 호위하는 무림맹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전부가 쫓아가야 한다는 말인데…… 아무리 숨어 이동하기 좋은 구채구라도 이렇게 다양한 문파의 고수들이 추적하면 녀석들의 촉각에 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차라리 소림사를 공격해서 장경각을 털지 그러세요? 그게 더 쉽겠군요.”
명백한 조롱이었다. 그것이 비천십팔방의 책임자, 동북사룡당(東北死龍堂)의 주인 동도백(東道百)의 이맛살을 구겨지게 했다.
그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누군 몰라서 그러나. 매우 어렵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다. 아버지 믿고 까불지 마라, 이 철부지야! 감히, 어른들 자리에 끼어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그녀를 바라보던 동도백의 눈빛에는 많은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사실, 그도 말이 안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구파일방이 무덤을 확인하기 전에 공격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달리 대안이 없었다.
그는 시선을 풀고 어린아이 타이르듯 입을 열었다.
“소저는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하는구려.”
소요요가 불쾌한 듯 물었다.
“제가 뭘 모른다는 거죠?”
“소저가 원하는 바가 무엇이오? 우선, 그것부터 말씀해 보시겠소?”
“좋아요. 저는 무림에도 역할이 있다고 배웠어요. 숨어서 뒤를 치는 건 녹림도가 하는 일이죠. 우린 도적집단이 아니에요. 어차피 어려운 일이라면 정면을 뚫어야지, 왜 뒤에서 강탈하려고 하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디선가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누군가가 웃음을 터뜨리려다 말고 급히 입술을 깨무는 소리였다. 모두 바라보자 야악문(夜惡門)의 장로 안표(安杓)였다.
사파는 괜히 사파가 아니다. 대부분 도둑질과 강탈이 주 무기로 삼는 무리였다. 정파보다 사파가 빨리 망하지만, 그만큼 빨리 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크다. 거령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이야 사파에서 손꼽히는 명문이라 그런 짓을 하진 않지만, 예전에는 강탈을 일삼던 무리였음을 안표는 잘 알고 있었다. 표국을 열어놓고 경쟁 표국의 표물을 몰래 턴다거나, 남의 영역을 침범하여 시비를 걸고, 그것을 빌미로 세력 다툼을 벌여 아예 뺏어버린다거나 하는 그런 형태의 일을 거령문은 수없이 벌였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데, 그곳의 철없는 딸이 그걸 알지 못하고 꼭 정파의 후기처럼 말하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하오. 재밌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얼버무리며 시선을 뿌린 친 그가 소요요에게 직접 물었다. 무안함을 벗고자 함이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시오? 정면으로 공격하는 방법이?”
소요요가 퉁명스럽게 톡 쏘아붙였다.
“불가능할 것도 없다고 봐요.”
듣고 있던 동도백의 표정이 묘하게 뒤틀렸다. 비웃음이라 생각한 소요요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제가 잘못 말했나요?”
“그렇소.”
그녀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뭐가요?”
동도백은 여전히 타이르는 듯했다.
“원론적으로는 소저의 말이 맞소. 몰래 쫓아가서 비급을 빼앗는 행동은 아주 힘든 일이지. 성공했다고 해도 이미 비급을 미리 빼돌렸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 방법은 가능성이라도 있지, 정공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오. 그건 구파일방과 무림맹만 우리의 적이 아니기 때문이오. 그들을 우리가 제압할 수 있다고 해도 피해가 적지 않을 텐데, 동혈을 주시할 정파는 누가 상대한단 말이오? 어쩌면 그들은 우리가 구파일방과 싸우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오. 그리고 우리가 이기기를 바라겠지. 그래야 자신들이 나설 명분이 생길 테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이번에는 소요요가 묘한 표정이 되었다.
“절 바보로 아시는군요.”
“달리 생각하는 바가 있다는 뜻이오?”
“제가 그것도 모르고 말을 꺼냈을 것 같았나요?”
모두 흥미로운 빛을 띠었다.
동도백이 대표로 말했다.
“혜안을 넓혀주시구려.”
“우선 정파만 없어지면 뒤를 걱정하지 않고 구파일방과 싸울 수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들을 없앨 수는 없어요. 힘으로 몰아내는 것도 지금은 불가능하고요. 결국, 구채구 밖으로 몰아내야 한다는 건데,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그게 무엇이오?”
“우리가 나가면 돼요. 그러면 저들은 맹주의 말을 무시할 수 없게 되겠죠. 눈총을 받으면서까지 남으려 해도 얻을 이익이 전혀 없으니까요. 설마, 정파가 구파일방을 공격하지는 않겠죠. 이곳을 포기하고 떠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재밌는 발상이구려. 하나, 우리가 떠나야 한다면 역시 아무것도 얻지 못하지 않겠소.”
“그러니 모두가 나갔다고 믿게 해야죠. 크게 소란을 피우며 진채를 뽑고 돌아간다면 믿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어차피 문파마다 얼마의 고수를 데려왔는지 파악조차 되지 않은 상황. 일부만 그럴듯하게 허장성세를 부려 떠나는 것처럼 보내고, 나머지는 몰래 동쪽의 절벽 숲에 숨어 때를 기다리면 되지 않겠어요?”
동도백이 웃었다.
“그럴 듯하오만, 역시 불가능한 말이오.”
“왜죠?”
“정파가 있든 없든, 구파일방과 무림맹을 제압할 수 있으리란 확신을 할 수 없기 때문이오. 뒤를 치는 일이야 비급을 뺏는데 주력하면 그만인 일이지만, 동혈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방식은 녀석들을 모두 제압해야 한다는 뜻이오. 전력을 기울여도 모자를 때에 일부를 빼고 남은 자들만으로 공격한다? 정파를 속일 정도로 빼려면 일부라도 상당한 숫자가 될 텐데? 너무 귀문의 실력을 자신하는 건 아니오, 소저?”
“본 거령문은 정예 중의 정예만 가려 뽑아 왔어요. 여기 있는 대부분 어르신들께서도 마찬가지죠. 숫자도 정파만 빠진다면 우리가 삼분의 일을 빼더라도 압도적인데, 이런 상태에서 미리 겁먹을 필요가 있나요?”
동도백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경험도 없는 철부지에게 졸지에 겁쟁이로 비친 것이다.
그는 가소로운 듯 실소를 한 번 흘려주고 말을 받았다.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이보시오, 소 소저. 무림의 싸움을 얼마나 겪어 보았소? 대규모 전투를 해보기나 하셨소?”
요요요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동도백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개 무림의 싸움은 간단하지만, 대규모로 벌어지는 혈전은 머릿수에 크게 영향받지 않소. 고수들의 실력차이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오. 소저의 말처럼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세력이 정예를 끌고 온 건 사실이나, 상대는 맹주가 직접 데려온 무림맹의 정예요. 또한 구파일방은 어떻소? 그들의 실력은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아무도 모르고 있소. 도대체 얼마나 강한 고수들인지 파악조차 안 된다는 말이오. 몇 배 많다고 해서 장담할 수는 없는 일.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면 문제되지 않소. 오히려 해볼 만하겠지. 규보의 비급이 걸린 일임에야 그런 부담 떠안지 못할까. 실력이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닌 이상 숫자의 유리함도 작용하는 법이니 말이오. 그러나 정작 여기 있는 모든 분의 걱정은 선두에 서서 무리를 이끌 고수의 실력이오.”
그는 다시 차분한 어조가 되었다.
“다수와 다수와의 전투에서는 사기가 가장 중요하오. 무림의 싸움은 더욱 그렇소. 그래서 실력차이가 결정적인 것이오. 상대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순간 자신의 실력의 절반도 내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오. 무림의 세력이 왜 뛰어난 고수를 초빙하고자 혈안이 된 줄 아시오? 전투에서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요. 실력이 압도적으로 강한 고수가 상대편에 서서 달려든다면 곤장 전의를 상실하는데…….”
말과 함께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곳에 맹주를 대적할 고수가 있소? 오늘 낮에 보니 흑룡의 실력이 아주 대단했소. 그는 어떻소? 또한 맹주를 보좌하던 대도를 든 노인은? 나는 그를 알고 있소. 그는 무림맹에서 맹주 다음가는 고수로 알려진 청룡도 전윤옥이오.”
모두 놀란 얼굴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혜각 대사도 문제요. 그의 실력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생각 이상으로 강한 고수일 가능성이 크오.”
동도백은 한탄하듯 말을 맺었다.
“도대체 그중 하나라도 붙잡아둘 고수가 이곳에 있을지 의문이오.”
막사가 잠시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소요요는 입술을 깨물고는 잔뜩 자존심이 상한 얼굴을 비쳤고, 나머지도 할 말이 없는 모양으로 망연히 시선만 주고받았다.
침묵을 깬 사람은 가장 끝에 앉아 있던 노인이었다. 귀음방(鬼音幇)의 장로 조벽사(趙碧絲)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장내의 인물을 향해 한 가지를 제안했다.
“잔월신교를 끌어들이는 것이 어떻겠소? 그들이 이곳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얻은 적이 있소.”
몰랐던 자들은 놀라고, 알았던 이들은 인상을 썼다.
안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들이라면 무림맹, 구파일방과 다를 바 없는 무리요. 욕심이 많은 자들이니 결코 규보의 무덤을 나눠 가지려 하진 않을 것이오. 양떼를 지키고자 승냥이를 데려다 놓는 격과 무엇이 다르겠소.”
모두 수긍의 뜻을 드러냈다. 하지만 조벽사의 제안에 영향을 받은 안표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차라리 녹림십팔채(綠林十八寨)는 어떻겠소? 이곳에 오는 중에 그들의 진영을 지나친 적이 있소.”
동도백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녹림도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들이라면 도움이 안 되지. 하나, 거기에 두 사람을 끼워 넣으면 결과는 전혀 달라질 것이오.”
“녹림총표파자(綠林總瓢把子)와 부총표파자(副總瓢把子)라도 직접 왔다는 말씀입니까?”
안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상마쌍괴!”
“상마쌍괴?”
의아해하는 시선들이 쏟아졌다. 안표가 설명했다.
“그렇소. 그들과 함께 있는 녹림도를 보았소. 이곳에 오지 않은 걸 보면 아직 정보를 듣지 못한 모양인데, 사람을 보내어 사정을 알리고 협조를 구하면 도움을 줄 것이오.”
일순 장내의 눈빛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해볼만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 두 사람만 도와준다면, 가능한 일이지요. 하지만 두 명이라면 약간 무리가 있을 것 같은데…….”
안표가 미소를 지었다.
“그 두 사람은 항상 같이 다닐 뿐만 아니라, 같이 싸운다고 들었소. 십존에 드는 두 고수를 합치면 무적이라는 소문이 있으니, 믿을 수 있지 않겠소?”
모두 수긍의 빛을 보였다.
“지금 즉시 사람을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또한 수긍했다. 우선 그들을 불러 자세한 계획을 세우자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둔탁한 소음 몇 개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장내의 시선이 휘장으로 향할 때 복면을 쓴 젊은 애송이와 삼십대 초반의 사내가 막사로 걸어들어왔다.
“누구냐? 밖의 소음은 네놈이 만든 것이냐?”
모두 인상을 쓰고 두 사내를 주시했다. 복면까지 하고 있어 경계하는 이도 있었다. 반면, 그들을 아는 자가 막사에 있었다.
“당신들이 여기엔 무슨 일이오?”
누가 가소롭다는 듯 외쳤다. 소요요와 동석했던 거령문의 거마대주(巨魔隊主) 진궁한(振穹寒)이었다.
그를 알아본 애송이, 사자비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대부분의 사파를 부른 듯한데, 우리만 초대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불청객이 되지 않았겠소.”
초대를 관장했던 동도백이 진궁한에게 물었다.
“아는 분이오?”
대답은 소요요가 했다. 불만 가득한 목소리였다.
“낮에 동혈근처에서 잠깐 보았을 뿐, 알 리가 없죠.”
이런 녀석을 내가 왜 알고 있어야 하냐는 투인데, 그래도 경계의 시선은 누그러졌다. 그녀가 분명히 알고 있는 듯했으니까.
동도백이 불청객을 향해 물었다.
“어느 방파에서 오셨소?”
“방파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군요.”
다시 경계의 시선이 날을 세웠다.
“그럼?”
“용병이오. 대항군림대(隊抗君臨隊)이라고도 불리죠. 들어 보셨는지?”
“대항군림대? 호위를 전문으로 단체요?”
방어가 으뜸이라는 의미가 섞여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사자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문파를 내세우지 않은 이유는, 전국에서 모인 사파가 한 자리에 있어서였다. 어느 지역의 어느 문파를 말해도 들통 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작은 문파를 지어냈다가는 의심을 사기 딱 좋았다.
“그런 일이 특기이기는 하지만,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라지 않고 모두 뛰어듭니다.”
그러나 의심은 아직 거둬지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조벽사가 장내의 인물들을 대신하여 물었다.
“용병대가 이곳에는 왜 왔소?”
사자비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의뢰를 받았으니 왔지요.”
“의뢰?”
“규보의 비급을 가져다주기로 했습니다.”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의뢰를 했소?”
“이곳에 와도 눈치만 볼 수밖에 없는 군소방파의 연합체죠. 그 이상은 말씀드릴 수 없군요.”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는지 별다른 의심은 사지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안표가 따져 물었다.
“복면은 왜 하셨소?”
“직업이 용병이다 보니 세력 다툼에 자주 끼어들었는데, 여기저기 원한을 많이 샀죠. 어쩌면 여기 막사에도 저와 원한 있는 문파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복면을 벗으면 알아볼 수도 있으니, 이해하시길.”
“그걸 이해 못할 정도로 소인배는 이 자리에 없소. 하나, 얼굴을 모르는 자와 함께할 수는 없겠소.”
복면 밖으로 드러난 사자비의 눈은 웃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신중할 줄은 몰랐지만 여유 있는 태도는 항상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웃고 있는 눈은 그냥 웃는 것이 아니다. 아주 빠르게 주위를 훑는 중이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복면을 벗어주시오.”
“그럼, 끼워주시겠습니까?”
대화를 하면서도 그의 눈은 드러나지 않게 장내의 인물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대원들이 파악한 바에 의하면 이곳에 있는 사파 중에도 대회에 참가했던 문파가 몇 개 있었다. 아마도 북경으로 연행되다가 도망친 녀석들의 문파도 있을지 모른다.
모두 동도백을 보았다. 그가 소집했으니 결정도 그가 내리라는 시선이었다.
동도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까지 밝힌다면 끼워 드리겠소.”
“좋습니다.”
사자비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런 자리, 이런 상황에서 망설이는 건 바보짓이었으므로. 물론, 속은 편치 않았다. 그럴 가능성은 극히 적지만, 정말 알아보는 자가 있으면 모두 죽이고 계획을 다시 짜야 하기 때문이다.
툭!
머리 뒤로 묶은 매듭이 풀리자 복면이 아래로 내려갔다.
목소리, 눈빛, 피부로 나이를 짐작했던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사자비의 외모가 더 젊은 것을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저런 애송이와 어찌 함께 일 하냐는 의미가 분명했다. 그 때문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다행히 사자비를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젠 도움이 되는지를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이다.
“한데, 몇 명의 고수를 데려오셨소?”
“저까지 합쳐서 다섯입니다.”
사자비는 솔직하게 대답했고, 예상대로 돌아오는 반응이 거칠어졌다.
“다섯? 고작 다섯을 데려왔다는 말인가?”
이젠 아주 아랫사람 대하는 듯하다. 하긴, 다섯으로 슬쩍 같은 배에 올라 규보의 비급을 취하려 하니 끼워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수가 문제가 되던가요?”
사자비는 자신 있게 말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소요요가 비웃으며 끼어들었다.
“숫자에 구애받지 않을 실력이 있다고 자신하는 건가요?”
“이미 증명했소. 더 무엇이 필요하오?”
“증명했다고?”
사자비는 그녀에게 시선을 거두고 동도백을 보았다.
“진문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세 번의 경계를 지났죠. 입구에서 한 번, 막사 두 개째를 지나서 한 번, 그리고 여기 막사 입구에서 한 번.”
그리고는 웃었다.
“마지막의 소란은 우리가 왔다고 알리고자 인기척을 낸 것뿐입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제압했다는 뜻이었다. 돌연한 등장 때문에 잠시 망각했던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 동도백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즉시 뒤에 기립해 있던 무사에게 손짓했다.
무사는 즉시 막사를 나갔다가 돌아와서 동도백의 귀에다 무어라고 속삭였다.
“막사 앞을 제외하고는 모두 혈도가 제압당했습니다. 굳은 자세로 보아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고 혈도를 찍힌 것 같았습니다.”
동도백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기습의 유리함을 사용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쉽게 당할 녀석은 비천십팔방에 없었다. 적어도 구채구에 데려온 고수 중에는 확실히 없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차라리 살수로 전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렇게 말하고는 달갑지 않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무튼 그대들의 실력은 잘 알았소. 이만, 돌아가시오. 계획이 세워지면 알려 드리리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계획을 짜는데 빼겠다는 의미였는데도 사자비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막사로 들어오기 전에 가장 중요한 대화를 들은 터였다. 막사 앞의 경계무사를 소란스럽게 쓰러뜨린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가 왔다는 기척을 내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조금 일찍 와서 대화를 엿들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사자비와 사내가 나가자 소요요가 결국, 불만을 터뜨렸다.
“저런 용병까지 끼어들게 하실 작정인가요?”
그러자 동도백이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그렇소. 하지만 고작 다섯을 지원하면서 규보의 비급을 나눌 수는 없지 않겠소?”
“그럼?”
“꽤 실력이 있는 듯하니,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오. 작전회의에 뺀 이유도 그 때문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뒤가 구린 작자들이로군요.”
진영으로 돌아가던 중에 대원이 말했다.
사자비는 웃었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우리도 녀석들을 이용할 텐데.”
“그래도 조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꿍꿍이가 많은 작자들 같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한 일이다. 굳이 내가 나서서 정파를 따돌릴 계책을 짜지 않아도 될 것 같으니. 알아서 잘들 하는 것 같더구나.”
말과 함께 그의 입가에 비소가 걸렸다.
“그런 녀석들일수록 치사한 계획을 잘 짜지. 그보다 상마쌍괴가 이곳에 왔다니 재밌어질 것 같지 않나? 그들이 맹주와 흑룡을 상대하게 될 텐데, 아마 좋은 눈요기가 될 거다.”
대원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자비가 명했다.
“진영에 도착하거든 한 명을 더 데리고 와서 이곳을 철저히 감시해라. 혹 우리가 모르게 움직일 수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제8장 원한을 가진 자
1
해가 뜨면 낮이 되고, 달이 뜨면 밤이 된다. 당연히 밤이 지났으니 해가 뜰 것이고, 날도 밝을 것이다.
사자비는 밤새 한잠도 자지 않았다. 비천십팔방 등 사파가 세울 수 있는 모든 계획의 가지 수를 예상하고, 그 변수까지 파악하여 하나하나 대책을 짜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벽녘이 밝을 무렵 잠시 명상에 잠겼다가 눈을 떴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동추입니다.”
무지개 계곡에 남겨두고 왔던 대원이었다.
“들어와라.”
잠시 후, 막사로 들어온 동추를 향해 사자비가 말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대인께서 가신 후, 그날 밤에 후속부대가 도착해서 바로 움직였습니다.”
“지금 어디 있나?”
“이곳으로 오던 중에 숨을만한 장소를 발견하여 그곳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리 멀지 않습니다.”
“내가 지시 내린 대로 구채구 밖에 매복해놨다던가?”
“네. 들어오고 나가는 녀석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수상한자는 즉각 처리하여 물건을 확인하라고 명령했답니다.”
사자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부터는 이동하지 말고 그곳에서 대기하라고 전해라. 그리고 신호를 쏘면 일 각 후에 출발해서 동혈에 남은 잔당을 처리해야 한다고도.”
“잔당이라면 누굴 말씀하시는지?”
“누가 될지는 아직 모르지. 다만, 그곳에 있는 모든 녀석을 처리해야 함은 분명하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전에 철저히 주위를 경계하고, 혹 정찰하는 놈들에게 발각되면 확실히 입을 막도록.”
“존명!”
동추를 돌려보낸 사자비는 막사를 지키던 대원을 시켜 사파를 감시하는 대원을 불러들이게 하는 한편, 인근의 동향도 살펴보게 했다. 한참 후에 대원들이 돌아왔다. 우선 밤새 사파를 감시했던 두 대원의 보고부터 들었다.
“회의가 끝난 후에 모두 돌아가고, 이른 새벽부터 진채를 뽑는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자비는 자기가 예상했던 계획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전에 상당수가 빠져나가지 않았나?”
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밀하게 빠져나갔습니다.”
“미행은?”
함께 감시를 맡았던 자가 대답했다.
“제가 했습니다. 동쪽 숲으로 이동하더군요. 협곡이 있고, 절벽이 숲처럼 솟아있는 곳인데, 많은 인원을 숨기기 좋은 장소였습니다. 아마 거기에 병력을 숨겨두고, 나머지는 돌아가는 것처럼 꾸미려는 듯합니다.”
“단순하지만 가장 그럴듯한 방법이다. 이틀밖에 말미가 없으니 정파도 신중을 기할 여유가 없을 테고.”
사자비는 흡족한 표정으로 다른 대원을 보았다.
“정파는 어떤가?”
“말씀대로입니다. 사파 대부분 진채를 뽑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는지 그들도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만간 떠날 것 같습니다.”
맹주가 이틀의 말미를 주었다지만, 벌써 하루가 지났으니 정파도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사파가 어떠한 반응을 보여주길 기대했겠지만, 믿었던 그들이 떠나니 이젠 남으려 해도 구실이 없어진 상태가 되었다. 계속 시간을 끌다가는 무림맹에 대항하려는 정파로 낙인찍히는 셈이라 하는 수없이 진채를 뽑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상마쌍괴를 앞세워 공격할 수 있겠군.’
생각과 함께 사자비가 물었다.
“동혈에서의 소식은 없나?”
“아직 기관을 해체하지 못한 듯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막사로 접근했다. 기척을 굳이 숨기지 않고 소리 내어 진영으로 들어오는데, 사자비와 대원들은 신추평의 아혈을 제압한 후 밖으로 나갔다.
침입자는 비천십팔방의 무사였다. 그는 동도백의 말을 전하고 할 일을 끝냈다는 듯 급히 돌아갔다.
“생각보다 신중하군!”
사자비는 인상을 찡그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가 예상한 대로 움직일 태세였으나 가장 껄끄러운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상마쌍괴를 먼저 보내어 무림맹과 구파일방의 간을 보고나서 움직이겠다고 했다. 만약, 그들이 흑룡과 맹주를 제압하지 못하면 괜히 공격하여 피해를 보기보다는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겠다는 의미와 다름없었다.
“섣불리 나서지 않겠다는 뜻이군요.”
옆에 있던 대원이 말하며 걱정스럽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상마쌍괴가 쓰러진다면 그냥 돌아갈 텐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또 다른 대원이 말했다.
“차라리 사파까지 돌아가기를 기다려 홀로 남은 무림맹과 구파일방을 공격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사자비는 고개를 저었다.
“흑룡과 맹주가 동시에 이끄는 무리라면 우리도 피해가 없을 수 없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무덤을 확보해야 할 판이지만, 만에 하나 규보의 무덤이 아니라면 쓸데없이 힘만 소모하는 격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최상의 결론은 사파가 구파일방을 제압하고 무덤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기관을 해체하여 무덤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후에 무덤이 진짜라 판단되면 친황대를 투입하여 힘 빠진 사파를 제압하면 간단한 일이요, 가짜면 조용히 빠져나오면 되는 일이었다.
반대의 경우도 원하는 만큼은 아니지만 상관은 없었다. 구파일방이 동혈을 지켰다 해도 수적인 우세를 앞세운 사파를 상대로는 상당한 피해를 본 상태일 테니까. 물론, 천통달과 함께 갔던 대원이 신호탄을 쏘아 올리면 당장 몸을 빼도 상관없겠지만, 문제는 소식이 없다는 점이었다. 아직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무덤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결국, 신호탄이 올라올 때까지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상마쌍괴가 이기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래야 힘을 얻은 사파가 동혈로 밀고 들어갈 수 있다.
사자비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혹시,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이미 그런 변수도 염두에 둔 바였다.
“되게 하면 그만!”
그가 대원들을 향해 명했다.
“한 명만 남고 모두 동쪽 숲으로 이동한다. 미행자가 붙지 않게 각별히 주의하도록.”
그러자 세 명의 대원이 간단히 짐을 챙겨 진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사자비가 진영을 나오며 남겨진 대원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진영을 허물고, 밤을 틈타 동쪽 숲으로 와라.”
“인질은 어찌할까요?”
사자비는 실소를 흘렸다. 그걸 왜 묻느냐는 듯!
“무림인이다. 그리고 우리를 죽이려 했던 자다. 성인군자라도 되고 싶나?”
대원이 눈빛을 날카롭게 했다.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 ☆ ☆
생각보다 비천십팔방의 동도백은 더 이기적이고, 더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대항군림대의 실력이 뛰어나니 전투에서 가장 선두에 서라는, 누구라도 속을 뻔히 알 수 있는 요구를 해왔다.
발뺌하지 말고 앞장서서 활약해라. 믿을만한 사람인지 계속 지켜보겠다. 그러다가 모두 죽으면 더욱 좋고, 살아남아도 너희에게는 비급을 줄 수 없다. 그런 의미가 잔뜩 깔려서 사자비는 속으로 웃었다. 물론, 이 또한 예상했던 바라 흔쾌히 허락했다. 누가 이겨도 상관없으나 사파에 힘이 실리면 조금 더 편해지는 입장, 약간의 활약은 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완전히 적아가 뒤섞이면 그때 살짝 몸을 빼어 친황대를 불러들일 계획이었다. 별다른 피해 없이 상황은 그렇게 종료될 것이다.
사자비는 불빛도 새어나오지 않는 막사를 빠져나왔다. 뒤를 돌아보자 막사는 어둠에 가려 절벽 일부분처럼 보였다. 막사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허장성세를 위해 일부 고수들이 이미 진채를 거둬 떠났기 때문인데, 은폐엄폐를 위해서라도 나무숲이나 절벽에 숨어 밤이슬을 맞아야 했다.
공격은 내일 아침. 하지만 시간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고 했다. 아직 미련을 떨치지 못해 동혈을 떠나지 않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까지 완전히 물러나면 우선 녹림맹이 상마쌍괴를 앞세워 동혈로 접근할 것이고, 고수들끼리의 대결을 유도하여 흑룡을 비롯해 맹주 등을 상대할 것이다.
상마쌍괴가 승리를 거머쥐면 즉시 전력으로 밀고 들어간다. 이기지 못하더라도 흑룡 등 고수들의 체력을 빼놓았다고 판단되면 마찬가지로 공격하기로 했다. 만약, 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때는 그냥 물러난다는 소극적인 계획이었다.
“우리가 선두에 선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서 몸을 숨긴 대원들에게 사자비가 말했다.
“아무래도 신호탄이 올라오지 않는 것을 보면 천 노인이 갔던 곳에는 무덤이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곳이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말이군요.”
“기관이 설치된 것을 보면 그렇겠지.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 집중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까지 쉬어라.”
무겁다고 느껴질 정도로 위에서 짓누르는 찬 기운이 뼈를 애일 듯 했지만 대원들은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몸의 피로를 풀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새벽, 동쪽 하늘이 검푸르게 물들더니 서서히 날이 밝았다. 때를 기다린 사파의 책임자들이 지휘소로 하나씩 모여들었다. 사자비도 그중 하나였다.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계속 복면을 쓸 이유가 있나요?”
불만 섞인 목소리가 지휘소로 향하는 사자비의 등을 찔렀다.
뒤를 돌아보자 소요요와 진궁한이 지휘소로 걸어오고 있었다.
사자비는 눈으로 웃었다. 이곳의 책임자들이야 자신의 신분을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들이 이끄는 수많은 수하까지 그렇다고 확신해서는 안 된다. 공격이 시작되면 가장 눈에 띄는 선두에 있어야 하므로 복면은 계속 쓰고 있는 것이 좋았다.
“추워서!”
핑계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고 슬며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숫자도 적은 우리가 왜 선두를 맡아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소.”
딴에는 불만이 가득한 투였다. 그 모습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소요요가 코웃음을 쳤다.
“그 정도도 하지 않고 규보의 비급을 얻으려 하다니 욕심이 많군요. 여기 있는 대부분은 적게는 오십 명에서 많게는 백 명이 넘는 정예를 투입해요. 생각보다 전투가 치열해지면 큰 피해를 보게 되죠. 한데, 고작 다섯 명을 가지고 능구렁이처럼 끼어들면서 그런 소리를 해요?”
“숫자는 중요하지 않지. 실력이 중요한 거요.”
“하하,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원한이 무서워서 복면도 벗지 못하는 주제에.”
사자비도 웃었다.
“하하, 원한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귀찮아서 그런 거지. 달려들면 또 죽여야 하고, 그러면 더 많은 녀석이 나에게 또 원한을 품을 테니까.”
소요요는 ‘아! 그러세요?’ 하는 표정을 얼굴에 담아 조롱과 비웃음을 던졌다.
“활약 기대하죠!”
‘제일 먼저 죽을 테지만!’
그녀의 생각은 얼굴에 담기지 않았다. 하지만 사자비는 예리하게 읽을 수 있었다. 가소롭다고나 할까!
‘널 제일 먼저 죽여주마!’
그런 생각을 하며 지휘소에 도착했을 때, 이미 문파의 대표들이 양옆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자비는 가장 끝자리에 앉아 면면을 살폈다. 전에 보았던 것보다 인원이 더 늘어나 있었다. 아마도 후에 도착하여 끼어든 문파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찌어찌 정보를 얻어 오늘 찾아드는 불청객도 있을지 모른다. 그 점을 소요요가 짚어냈다. 아주 욕심 가득한 얼굴로, 더 이상 규보의 무공을 다른 이에게 나눠주기 싫다는 심술궂은 표정이었다.
“그들은 어찌하죠?”
동도백은 이미 그런 문제도 생각한 듯했다.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하루가 멀다고 문파가 찾아온다지만, 이젠 시간이 꽤 지나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소. 알 만한 문파는 다 알았다는 것이지. 많아도 서너 개를 넘지 않을 거요. 어차피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면 반 시진 이상 넘기지 않을 터, 그들이 끼어든다고 해도 문제 될 일은 없소.”
“변수도 생각해야죠, 딱 그 시기에 동혈을 알고 찾아온 녀석이 있다면 어쩔 거예요? 전투가 끝난 후라면 우리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그래 봐야 백 명 정도가 고작일 텐데, 우리를 당해낼 수 있겠소? 그러질 않길 바라지만, 만약 소저의 말대로 그 시간에 동혈로 접근하는 무리가 있다면 모두 달려들어 처리할 생각이오.”
“그들이 구파일방을 도울 가능성은?”
사자비가 끼어들었다.
“규보의 비급에 욕심이 있는 자라면 절대 그러질 못하지.”
동도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파일방이 동혈을 두고 사파의 무리와 싸우고 있다면 서로 품은 의도는 뻔한 일. 구파일방을 도와 동혈을 차지한들, 그들이 고맙다며 규보의 비급을 주는 일을 없을 것이었다.
“왜 전투에 끼어들어 피해를 자처하겠소? 차라리 전투가 끝난 후를 기약하겠지. 그건 차라리 잘된 일이오. 계획대로 전투가 끝난 후, 그들까지 처리하면 되는 일이니 말이오. 아무튼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소.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것뿐.”
장내의 모든 얼굴이 결연한 표정을 드러냈다. 이때 장막 안으로 무사가 뛰어들어왔다.
“모두 돌아갔습니다.”
오늘이 맹주가 약속했던 마지막 날. 끝내 무림맹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기로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소식을 접한 조벽사가 눈을 번뜩이며 좌중을 향해 말했다.
“이제 시작해야지 않겠소?”
동도백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무사에게 명했다.
“시간을 조금 두고 남았던 녀석들이 완전히 근방을 벗어났다고 판단될 때 동혈로 진입하라고 전하게.”
“존명!”
무사는 들어올 때처럼 나는 듯 달려나갔다. 그리고 반 시진 후, 다시 그가 와 알렸다.
“동혈로 이동했습니다. 조만간 동혈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러자 동도백이 일어서며 말했다.
“각자 데려온 고수들을 점거하여 언제든지 동혈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한 후에 다시 모이도록 합시다.”
2
상마쌍괴를 앞세운 녹림맹이 홀로 동혈로 접근한다는 방식은 여러 가지 이점을 고려한 계획의 일부였다. 첫째로 이쪽이 수적으로 우세하여도 진짜 고수는 저쪽이 많으니 다수의 혼전이라면 피해가 커질 가능성을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위험부담이 더 따른다는 것인데, 그걸 피하고자 함이었다.
둘째로는 구파일방과 무림맹이 상대라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정파의 뿌리인 열 개의 문파가 모였으니 체면상 소수를 핍박하지 못할 것이었다. 고수끼리의 대결을 제안하면 분명히 받아들인다는 게 사파의 생각이었다.
셋째로는 흑룡 등을 각개격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넷째는 녹림맹만 들어갔으니 상마쌍괴가 무릎을 꿇는다 해도 구파일방이 끝까지 공격하지는 않으리란 점이었다. 패배를 시인하고 물러난다면 피해 없이 끝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까지 이렇게 숨어 있어야 했다. 사실이 알려지면 괘씸해서라도 곱게 물러나도록 지켜보지만은 않을 테니까.
아무튼 상마쌍괴의 활약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었다. 그들이 맹주와 흑룡을 제압해준다면 더욱 바랄 것이 없고, 덤으로 전윤옥과 혜각 대사까지 제압하면 대성공이었다. 만약 그렇게까지 못한다 해도 전투에서 활약하지 못하도록 힘만 빼면 되는 일이었다. 아쉽겠지만 그 정도만 되어도 구파일방을 제압할 가능성은 생기는 셈이다.
이후부터는 아주 단순한 방법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하던 고수를 몰아 동혈을 중심으로 이(二)면으로 돌격해 들어가면 되는 일이었다. 절벽이 있으니 실제로는 삼면으로 몰아칠 수 있지만, 아무래도 구파일방이 상대이다 보니 도망칠 곳은 터주는 것이 이롭다고 판단한 것이다. 적들이 끝까지 버티면 사실 이쪽도 괴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배수진을 치지 못하도록 심리적으로 여유를 주자는 야악문 안표의 제안은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녹림십팔채가 동혈에 도착했습니다.”
녹림도로 가장한 무사가 몰래 동혈을 빠져나와 보고했다. 빠른 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무사 몇 명을 녹림도로 변장시켜 수시로 이곳을 오가며 정황을 알리도록 한 상태였다.
그가 돌아가고 다른 무사가 급히 와서 소식을 전했다. 기쁜 소식이었다.
“구파일방이 녹림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순간 장내의 모든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가장 염려했던 부분이 해결된 것이다. 하긴, 고수끼리의 대결이라면 구파일방으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었다. 녹림도 전체를 상대하기보다는 상마쌍괴를 제압하는 편이 더 손쉽다고 판단했을 테니까. 흑룡과 맹주의 실력도 자신했을 테고.
“다행이군요.”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이제 상마쌍괴가 활약해주기만을 기다리는 일만 남은 상태. 모두 불안 반, 기대 반으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때 또다시 무사가 와서 알렸다.
“흑룡이 첫 상대로 나섰습니다.”
조벽사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혼자서?”
“네!”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건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십존에 들어가는 두 고수를 상대로 흑룡만 나선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승부를 포기한 건가!’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장내의 인물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흑룡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고수이거나,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멍청이이거나, 둘 중 하나다.
모두 후자를 생각했다. 아무리 흑룡이라도 화경의 고수 둘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는 없다. 그건 오만이었다. 상마쌍괴 두 사람이라면 무적이라는 소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도 화경의 고수 둘을 동시에 상대할만한 고수는 무림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맹주도 있고, 전윤옥도 있는데, 굳이 홀로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그 점이 모두를 불안하게 했다.
☆ ☆ ☆
쿠웅-!
아련한 소리가 땅을 울리고 진동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땅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굴절된 기운이 공기를 타고 구채구에 퍼진다는 느낌이었다.
‘뭐지?’
환몽영은 걸음을 멈추고 능선을 넘어오는 소리를 쫓아 시선을 돌렸다.
그의 표정을 읽은 교도가 대답했다.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 같았습니다.”
“폭발?”
환몽영의 표정이 구겨졌다. 폭발이라고 하기에는 소리가 달랐다. 그도 벽력탄이나 화폭이 터지는 소리를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건 귀를 찢는 소리다. 터지는 화기가 공기를 연이어 삼키며 밖으로 번지는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것은 달랐다. 거대한 힘이 주변 공기를 밀어내는 소리 같았다.
“내공의 여파다!”
구겨졌던 표정에 은근한 미소가 담겼다.
그는 교도들과 함께 선발대 역할을 맡아 길을 여는 중이었다. 문제는 길을 잃은 지 한참이나 지났다는 것인데, 느낌으로는 동혈 근처까지 온 것 같지만 지금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도 몰라 난감한 터였다.
‘내공의 고수가 혼자 무공을 펼칠 일은 없겠지.’
그렇다면 누군가와 중요한 이유를 가지고 다툰다는 뜻일 게다.
그는 눈을 감고 소리의 크기를 떠올렸다. 그것으로 거리를 예측할 수 있다. 잠시 후, 눈을 뜬 그가 교도 한 명을 지목했다.
“사제가 이끄는 본대를 찾아가 이곳으로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사내는 비조처럼 날아올라 남서쪽으로 향했다. 그 방향으로 산 두 개를 돌아가면 잔월신교의 본대가 나온다. 물론, 그전에 또 다른 정찰대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본대와 떨어져 나온 잔월신교의 주인과 그를 호위하는 팔대장로의 무리였다.
“어딜 가나?”
난쟁이 노인이 사내를 발견하고 물었다.
사내가 급히 바닥에 내려서며 부복했다.
“동혈로 짐작되는 방향을 찾았기에 본대에 알리고자 가는 길입니다.”
난쟁이 노인, 제삼장로 오천대마(烏天大魔)는 곁에 있던 전립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교주님!”
오천대마와 함께 팔대장로의 일석을 맡고 있던 오장로 귀령대마(鬼靈大魔)의 물음이었다.
“본좌의 섣부른 판단이 훗날 본교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나 않을까 모르겠네.”
그 심중을 파악한 모양, 귀령대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도 그 아이에 대해 생각을 하십니까?”
전립 노인, 통칭 마교라 불리는 잔월신교의 교주 수라천군은 미소를 지었다. 전체적인 분위기에 중후한 무게감이 흘러서 도저히 악명 높은 마교 주인의 모습이라기에는 어려운데, 외모만큼이나 목소리도 맑고 느긋했다.
“차라리 제가 걱정을 덜어 드리고 오겠습니다.”
오천대마였다. 그도 설혼마녀 같은 고수를, 그것도 앞으로 성장가능성이 누구보다 많은 젊은 고수를 살려준 일이 내키지 않은 터였다. 마음 한편에는 두려움마저 자리하고 있었다. 절대적으로 믿었던 수라천군을 그렇게까지 곤란하게 만든 가공할 위력이라니. 그건 기억하기 싫은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요우후(堯雨后)!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공을 뽐내게 했던 수라천군의 상대이자 지옥교의 주인인 아수라대천성(阿修羅大天成). 아수라신공을 십성까지 익혔던 무시무시했던 내가고수!
그녀는 그를 떠올리게 했다. 방어를 버리고 오로지 공격에만 주력하는 저돌적인 몸짓조차 흡사한 것 같았다.
‘십 년 후라니!’
피기도 전에 꺾어버렸으니 다행이지만, 다시 피어오를 때 얼마나 더 강한 고수가 되어 나타날지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그런 애송이를 수라천군은 살려주었다. 십 년 후, 마교로 찾아와 복수하라는 말과 함께. 물론, 단서를 달아두었다. 그때도 꺾이면 마교도가 되라 했으니…….
‘인재에 대한 욕심이 그렇게 크셨나!’
지금 제자들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도대체 무엇이 두려운 건가!’
흑룡을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했을 때도, 그가 첫째 공자를 죽였을 때도, 그런 그를 살려주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오천대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훗날 잔월신교의 발목을 붙잡게 될 제목들을 방관하는가. 그럼에도 경쟁자를 없애겠다며 규보의 무덤을 차지하고자 구채구로 들어온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불쑥 끼어든 오천대마가 다시 말했다. 그를 보며 수라천군은 여전히 선이 굵은 미소를 흘렸다.
“상처 입은 맹수를 처리할 정도로 약해졌던가!”
땅딸막한 몸통 위의 둥글한 얼굴이 붉어졌다.
수라천군이 타이르듯 말했다.
“무림은 넓다네. 그리고 지금이 어느 때보다 많은 신진 고수가 튀어나와 들끓는 때일세. 무림의 앞날이 밝은 셈이지.”
그러면서 뒤에 있던 청년을 바라보았다.
“학아!”
청년, 수라천군의 둘째 제자 공명학(公鳴鶴)이 옆으로 다가왔다.
“예, 사부님!”
“십 년 후, 너와 네 사제들이 그녀를 꺾어야 한다. 힘을 합치라는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야. 순수한 개인의 능력으로 꺾어야 하느니라. 그리고 그녀를 아래로 두어라. 본교에 큰 힘이 되어줄 게다.”
공명학은 눈을 번뜩이며 수라천군을 바라보았다. 그를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제자만의 특권이었다.
‘목표를 주고자 함인가!’
그런 것 같았다. 수라천군은 이렇게 말했다.
“흑룡도 마찬가지다. 지금 그가 구채구에 있다 하여 너와 싸우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첫째에 대한 복수는 더더욱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 그럼…….”
“한계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공명학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목표를 세워야 한다. 목표가 있는 자는 강해질 수밖에 없으니……. 얼마나 네 힘이 보잘 것 없는지 흑룡과 겨루어 여실히 깨달아 보아라.”
공명학은 충격받은 얼굴이 되었다. 자존심까지 상한 표정이었다.
그는 사부의 뜻은 짐작하고 있다. 하나, 이렇게 제자를 무시할 수 있을까!
벌거벗은 듯한 느낌을 받은 공명학은 얼굴을 붉혔다. 그 짐을 덜어주려는 듯, 수라천군이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팔 년 전이었던가. 그때의 흑룡은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 하나, 그날 이후 달라졌다면, 그리고 그가 떠날 때 언급했던 그것을 몸에 익혀 두었다면.”
수라천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현 무림에서 그는 무적이다.”
“사부님!”
“말 안 해도 안다. 네가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십 년 후를 기약해야 한다. 그리고…….”
수라천군은 뒷말을 씹어 삼켰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 듯한데, 결국 먼 하늘을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그때가 되었을 때, 그가 무림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야. 너희가 성장하여 힘을 합쳐야 한다. 그리고 그를 쓰러 뜨려야 한다. 설혼마녀도, 첫째를 죽인 원한을 가슴에 묻고 흑룡을 살려둔 것도 그때를 위한 포섭이다.’
그 말이 하고 싶었다.
그때 차라리 죽였더라면 이런 걱정이 없었을 텐데!
요마(堯魔)라고 했던가. 요우후의 하나뿐인 혈육. 이제 갓 열 살이 되었을 법한 녀석 앞에서 요우후를 죽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생사를 가늠하는 대결이라 손속에 사정을 둘 여유조차 없었다. 까딱 잘못했더라면 바닥에 누웠을 사람은 수라천군 자신이 되었을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그때 주위에 잔월신교의 교도들이 있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고, 결국 약해진 마음이 시키는 대로 요마를 살려주었다.
요마는, 열 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 아이는 도망치면서도 분노한 눈으로 말했다. 꼭 복수하겠다고. 자신이 고수가 되어 세상에 나오면 모두 두려움에 떨어야 할 것이라고. 그 첫 번째가 잔월신교가 될 것이라고. 그리고 비급 하나를 챙겨 떠났다. 그것이 지옥교주만 익힐 수 있다던 밀전(密傳), 아수라대천성임을 수라천군은 알고 있었다. 요마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는 절대 죽지 말아요. 제가 할아버지의 아수라대천성을 십이 성까지 모두 익힐 때까지 꼭 살아있어야 해요.”
그리고 비밀 통로로 사라져 버렸다. 그날 이후 지옥교의 총단은 무너졌고, 외부에 나가 강북무림을 공략하던 지옥교의 고수들도 갑자기 잠적해버렸다.
수라천군은 요마가 흑룡과 버금가는 재능을 가진 아이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런 아이가 아수라대천성을 완성한 후라면 어떨까. 규보 이후 최강의 고수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앞서나간 생각일 수도 있다. 익히기도 전에 객사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사정으로 포기했을 수도 있다. 그러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십니까?”
말을 멈추고 망연히 하늘을 보던 수라천군을 향해 귀령대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자에게 내릴 금과옥조 같은 조언을 멈췄으니 기다리던 공명학을 위한 반응이었다.
수라천군은 다시 공명학을 보았다. 애착이 가득 담긴 그의 시선을 받은 공명학의 얼굴에 걱정이 담겼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수라천군이 말했다.
“무인에게 좌절은 곧 죽음이다. 흑룡에게 지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그는 그 정도의 남자다.”
모두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그렇게 흑룡을 인정하는 줄 몰랐다는 듯했다.
본진으로 가고자 했던 교도는 이미 몸을 날려 사라진 상태였다. 수라천군은 제자에게 미소를 한 번 보여주고 몸을 돌렸다.
“셋째가 동혈의 위치를 파악한 듯하니, 이제 그 녀석에게 가보세.”
수라천군이 걸음을 옮기고 주위에 있던 두 장로와 네 명의 마교도도 진형을 유지하고 이동했다. 하지만 공명학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동안 멀어지는 수라천군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순간 눈빛을 번뜩였다.
‘항상 절대의 자리를 지켜왔던 사부님은 모르십니다.’
대사형이 흑룡에게 죽었을 때, 그는 크게 흔들렸다. 충격, 공포, 사부를 상대로 두려움 없이 모든 실력을 발휘하던 흑룡에 대한 경외, 복수심. 모든 것이 한순간에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이미 그는 그때 좌절을 한 번 맛보았었다.
‘저 혼자만의 대결이라면 져도 상관없습니다만.’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 뒤에 사제들이 지켜본다면 질 수가 없습니다. 이젠 제가 대사형이니까요”
꾹 거머쥔 그의 주먹에서 자색의 기운이 일렁거렸다.
그는 그간 숨겨왔던 비기를 이곳 구채구에서 흑룡에게 사용할 생각을 마음에 품었다.
☆ ☆ ☆
쾅-!
거대한 굉음이 절벽을 떨쳐 울렸다. 모두 경악한 눈으로 폭발의 중심을 보았다. 녹림도도, 구파일방도, 무림맹도, 절벽에 선 맹주조차도 믿을 수 없는 듯 두 눈을 부릅뜬 상태였다.
“저, 저게…….”
맹주는 흑룡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옆에 있는 혜각을 향해 물었다.
“항마십팔금룡장(降魔十八金龍掌)이오?”
혜각도 숨을 멈추고 흑룡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도 지금 처음 보는 듯,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혜각마저 그렇다는 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항마십팔금룡장!
그것은 소림사의 칠십이 종 절예와 함께 대표적인 무공으로 알려졌지만, 기실 실전에서 드러난 적이 없는 장법의 일종이었다. 소림사의 무승이라면 누구나 펼칠 수 있으나 십팔금룡장이라는 뜻이 무색할 정도이기 때문인데, 완성되지 않은 무공을 실전에서 쓸 수 없다는 것이 큰 이유가 되었다. 현 방장도 항마십팔금룡장을 사용할 때 열 마리의 용밖에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은 재밌는 일일 것이다. 오죽하면 흑룡의 스승인 원효 대사조차도 제대로 만들어내질 못할까. 그런 면에서는 항마십팔금룡장은 무림의 알려진 상식과 달리 완벽하게 구현할 수 없는 불완전한 무공으로 두어야 했다. 그런데 오늘, 이 구채구에서 흑룡에 의해 완전한 무공으로 탄생했다.
혜각은 감격했다.
“그,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목소리까지 떨리는 듯했다. 반면, 맹주의 표정은 굳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일장에 열여덟 마리의 황금용이 튀어나와 주변의 모든 사마를 제압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세어보았다.
“항마십구금룡장이라 불려야 옳겠소.”
“……!”
대답 없는 혜각을 두고 맹주는 계속 흑룡을 보았다. 지쳐 보였다. 아무래도 상마쌍괴 둘을 동시에 상대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정녕 이 정도로 성장했을 줄은 몰랐다. 맹주도 상마쌍괴를 동시에 상대하라면 자신 없었다. 한수도 손해 보지 않고 이기라 한다면 불가능하다고 손을 저었을 것이다. 한데, 흑룡이 그걸 해냈다. 바로 눈앞에서!
갑자기 머리가 간지러웠다. 오래전에 버린 습관이 지금 다시 밀려오는 것 같았다. 자존심이 상했을 때 행했던 버릇, 두 손으로 머리를 북북 긁는 행동이었다.
맹주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머리에 올려 아플 정도로 소리 내어 긁었다. 흡사, 이라도 기어다니는 모습이었다.
그는 얼마 전 흑룡에게 했던 말이 떠올렸다.
– 노부는 자네의 실력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네.
진심이었고, 아직은 자신을 넘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구파일방에서 떠도는 소문이 너무 대단해서 일각에선 맹주보다 강하다는 소문을 돌았을 때도 있었다. 그는 그것을 대외적으로 인정하기도 했지만 진심으로는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생긴 강한 자의 여유라고나 할까! 무공을 벗어던진, 초연해진 사람의 습관이랄까!
그런데 흑룡이 상마쌍괴를 혼자 대적하겠다고 나섰다.
맹주는 자만이라고 생각했다. 무림에서 잠깐 활약했다지만 실전경험이 너무 적어서 착각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반대하지는 않았다. 진짜 실력이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한 번 벽에 부딪혀 세상이 그리 만만찮다는 경험을 쌓아 보라는 뜻도 담겨 있었다. 그가 지더라도 전윤옥이 있고, 자신도 있으니 양보해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머리를 간지럽게 만들다니…….’
번뜩 정신을 차린 맹주였다. 맹주씩이나 되는 인물이 보는 눈도 많은 장소에서 인상을 구긴 채 머리를 빡빡 문지른다면 꼴사나운 모습으로 비칠 것이었다. 그것을 전윤옥이 소맷자락을 슬쩍 건드려줌으로써 상기시켜준 것이다.
맹주는 난감한 표정으로 재빨리 사방을 훑었다. 다행히 그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허허허, 절대 흑룡에게 질투가 나서 그런 건 아니라오.”
맹주는 너털웃음을 흘렸지만 전윤옥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그도 맹주에게 관심을 줄 정도로 여유가 있진 않았다.
그는 흑룡 앞에 쓰러진 두 노괴를 살폈다.
저 중의 하나라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
그 정도로 상마쌍괴의 실력은 뛰어났다. 십존으로 알려진 소문답게 둘 다 화경을 넘은 고수로 강력한 힘을 과시했다. 문제는 흑룡을 상대로는 제대로 실력발휘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내공대결로 들어갔던 자체가 실수였던 것 같았다. 어린 녀석의 내공이 그 정도로 강력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테다. 전윤옥도 입이 벌어질 정도로 흑룡의 내공에 놀랐으니까.
혜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양쪽 모두 별 피해 없이 끝나서 다행입니다, 아미타불!”
상마쌍괴가 쓰러졌지만 죽지는 않았다. 녹림도들도 감히 저항할 생각을 포기한 표정들이었다.
일 각이 넘도록 침묵한 채 흑룡과 상마쌍괴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맹주는 그들의 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마 구파일방과 무림맹이 없더라도 저들은 달려들지 못할 것이다. 이미 상마쌍괴를 상대하여 지친 흑룡이지만 그가 보여준 압도적인 힘이 후광이 되어 등 뒤에 버티고 선 것처럼 보일 테니까.
맹주는 확신했다.
‘시간을 두고 성장을 지켜볼 필요조차 없어졌군. 이미 나를 넘어 정도의 최고가 되었다.’
“아쉽지만!”
그는 전윤옥을 향해 말했다.
“이번 임무를 끝으로 노부는 은퇴를 생각해야 할 것 같소. 더 있다가는 후배에게 밀린 퇴물 소리를 들을 테니.”
“맹주, 어찌 그런 말씀을!”
“사실인데 뭘. 주변을 둘러보시오. 여기 있는 모든 눈이 흑룡만 바라보고 있소. 우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지.”
그때 녹림도 중에서 오십 중반의 무식하게 생긴 중늙은이가 걸어나왔다. 나이답지 않게 얼굴만큼이나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그는 맹주와 혜각이 서 있는 절벽 위를 향해 포권해 보였다.
“녹림십팔채 사천 농아채(聾啞砦)의 채주 악일량(岳一量)이라하오. 상마쌍괴 두 어르신이 이미 쓰러졌으니 여러분의 처분을 따를 뿐, 결정해 주시면 우리 입장이 편하겠소. 어찌할 생각이오? 끝내 싸우자면 그렇게 할 것이요, 선처해주면 고이 물러나 훗날 녹림의 도의를 지켜 은혜에 보답할 거요.”
남의 행낭이나 터는 녹림의 무리에게 과연 도의라 할만한 것이 있기나 한지 의문이지만, 결론적으로는 이랬다. 무서워서 도망치겠다는 것이었다.
뻔한 수작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게 분명한데, 상대가 먹힐만한 사람이었다. 정명공대하기로 유명한 소림의 혜각이었으니 말이다.
혜각이 너그럽게 대답했다.
“이미 고수의 승패에 따라 물러나기로 했으니, 시주께서는 괘념치 마시고 물러가도록 하십시오. 구파일방은 결코 뒤를 치지 않을 겁니다.”
다행이라는 듯 악일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수하들에게 상마쌍괴를 부축하게 하고 다시 혜각을 향해 감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그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디선가 화살처럼 날아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멈춰라!”
복면을 쓴 사내가 나무와 나무를 밟으며 계곡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내공 실린 목소리는 그의 것이었다.
제9장 맹주와 사자비
1
“이건!”
땅이 떨리는 것 같았다. 동혈까지의 거리를 계산한다면 이 소리는 실제로 엄청난 폭발을 동반했을 것이었다.
출정 준비를 마치고 지휘소에 모였던 사파 대표들은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긴장까지는 아니지만 사자비도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혹시, 변수가 생기지는 않을까!
때마침 기다리던 무사가 휘장을 뚫고 들어왔다.
참지 못했던 소요요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나요?”
무사는 소요요를 본 후, 곧이어 좌중을 훑으며 동도백에게 마지막 시선을 주었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목소리 또한 표정만큼이나 굳었다.
“사, 상마쌍괴 어르신들이 쓰러졌습니다.”
모두 입을 벌렸다.
동도백이 황당해하는 얼굴을 숨지지 않고 물었다.
“어떻게? 맹주는? 설마, 흑룡 혼자서 나서지는 않았겠지?”
그전에 다음 고수와 싸웠다는 보고가 없었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쏟아지는 질문을 무사는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모두 알아들은 듯 실소를 터뜨렸다.
“어찌 십존의 둘을 흑룡 혼자서 꺾을 수 있단 말이오!”
“어르신들이 함께 흑룡을 상대한 건 확실한가?”
무사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한결같이 낭패한 얼굴들이었다. 흑룡을 꺾지도 못했고 맹주는 버젓이 맹의 고수와 구파일방을 데리고 동혈을 지키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차라리 숫자로 밀어붙여보는 것이 어떻겠소?”
안표가 냉정함을 잃고 무리한 제안을 했지만 말을 꺼낸 본인도 알고, 다른 이들도 알고 있었다.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맹주가 선두를 맡고, 전윤옥과 혜각 대사가 그 뒤를 받친다면 숫자로 밀어낸다고 해도 큰 피해가 예상된다. 어쩌면 그들의 명성에 눌려 무사들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젠 어쩔 수 없게 되었소.”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그렇게 말했다. 유일하게 사자비의 반응만 달랐다. 그는 좌중이 하는 냥을 가만히 지켜보며 심하게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비록 복면 밖으로 드러난 눈빛이 여러 사람의 그것과 같았으나 가려진 부분은 분명히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고 있었다.
‘짜증스럽군!’
결국, 가장 꺼리던 방법까지 써야 할 시기까지 온 셈이었다. 사파를 붙잡아 두고 무림맹과 아귀다툼을 시키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사자비가 물었다.
“그래서 흑룡은 어떻게 되었소?”
모두 그를 돌아보았다. 무사가 대답했다.
“두 어르신을 상대하느라 상당히 지쳤습니다.”
동도백이 무슨 상관이냐는 듯 말했다.
“그걸 알아서 무얼 하려고?”
“그렇다면 이제 맹주의 힘만 빼놓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소요요가 끼어들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이곳에 있나요? 맹주까지 힘을 소모하면 나머지는 어찌어찌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겠죠. 하지만 누가 그걸 하죠?”
규보의 무덤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예민하게 했던 모양이다. 이젠 숨기는 티도 없이 노골적으로 사자비를 조롱하고 나섰다.
“당신이 할 수 있나요? 할 수 있다면 해보세요, 그럼.”
“그러지!”
사자비는 쉽게 대답하고 쉽게 일어났다. 정말로 막사를 나가 동혈로 가려는 태세라 모두 기겁했다. 사자비의 죽음을 걱정해서가 아니다. 그가 가면 구파일방과 무림맹이 눈치를 챌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사파가 뒤에서 녹림도를 조종하고 공격할 때를 기다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해지는 것이다. 그걸 피하고자 이렇게 숨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동도백이 하인 부리듯 꾸짖었다.
“기고만장하지마라 애송아. 하는 짓이 가상해서 끼워주었더니 일을 그르쳐도 크게 그르칠 놈이구나.”
막사를 나가려던 사자비가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입가에 걸린 비웃음!
“그렇게 겁이 많아서 무슨 일을 하겠소? 내가 맹주를 처리할 테니, 늦지나 마시오.”
“뭣, 뭣이라?”
동도백 뿐만 아니라 모두 분개했다.
“그대로 이곳을 벗어나면 네 목이 잘릴 게다.”
조벽사가 으름장을 놓았지만 사자비는 걸음을 떼었다.
조벽사가 벌떡 일어났다. 언제 뽑았는지 그의 손에는 몸이 얇은 협봉검이 들려 있었다. 동시에 쾌국출검(快駶出劍)의 수법이 발휘되었다. 거센 기세를 일어서는 힘에 담아 검을 내지르는 초식으로 이름이 약간씩 다르지만 검과 도를 사용하는 무공이라면 빠지지 않고 들어 있는 수법이었다.
조벽사의 초식은 깨끗하고 빨랐으며, 나이에 맞게 완숙한 면까지 곁들여 있었다. 내공 또한 상당히 들어간 이번 기습은 앉았다고 방심했다간 누구라도 당할만한 완벽한 솜씨였다. 하지만 오늘 쾌국출검의 상대는 다른 때와는 조금 달랐다.
탁!
조벽사의 몸이 검을 내지른 상태로 정지되었다. 그의 두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어 협봉검을 맨손으로 잡아낸 사자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예기와 공력이 서려 돌덩이가 닿아도 잘렸을 검신이 여인의 그것처럼 부드러운 손에 잡혀 옴짝달싹 못하니 놀랄 수밖에. 장내의 모든 시선도 충격에 빠져있는 듯했다. 이때 사자비의 손이 약간 비틀렸다.
땅!
반치 정도 회전했을 뿐인데 거기에 잡힌 협봉검을 부러뜨리기에는 충분했다.
조벽사가 움찔거리며 균형을 잃고 뒤로 물러났다.
사자비의 비웃음이 뒤따랐다.
“잔치나 보고 음식이나 얻어먹으면 좋으련만.”
조벽사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지고 일그러져서 꼭 발에 밟힌 홍시(紅柹)처럼 변했다. 경쟁자라면 경쟁자라고 할만한 사파의 고수들이 만원인 실내에서 애송이에게 이게 무슨 망신인가!
“이놈!”
붉어진 얼굴만큼이나 매섭게 낮은 노성을 지르며 사자비에게 달려드는 조벽사였다. 그러나 하지 않음만 못했다. 곧이어 사자비의 한발에 차여 개구리처럼 패대기쳐졌으니까. ‘꾸엑’ 하는 비명과 함께 붉은 보료가 깔린 바닥에 엎어진 그는 한동안 일어날 생각도 못했다. 망신살이 장신구처럼 전신에 매달린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장내의 인물들이 소리없이 입을 벌렸다. 초식도 없는 단순한 발동작 하나로 강북 사파의 일축을 차지하는 귀음방의 장로를 떨쳐버릴 고수가 과연 장막 안에 있을까?
제압을 할 수는 있어도, 단순한 동작으로는 누구도 어려웠다.
가장 놀란 사람은 소요요였다. 엎드린(아마도 정신없는 척하고 있을) 조벽사에게서 시선을 거둬 사자비를 돌아보는데, 목뼈가 경직되어 고개를 돌리는 행동조차 힘겨울 지경이었다. 어렵게 사자비를 보았을 때, 무시무시한 눈빛을 발견하고는 더욱 놀랐다.
모두 침묵했다.
침묵은 사자비 때문에 깨어졌다. 그는 동도백을 비롯하여 좌중을 둘러보고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일 각 !”
‘알 각? 그게 뭐?’
모두 의문의 시선을 던질 때 사자비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동혈로 고수들을 이끌고 오시오.”
동도백이 떠듬거렸다.
“어, 어째서 그래야 하오?”
전력을 다해 동혈로 달려간다고 해도 일 각이라는 시간 동안 맹주를 쓰러뜨리는 일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자비는 가능하다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맹주는 이미!”
그는 손을 들어 조벽사를 가리켰다.
“저렇게 되어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는 장막을 걷어내고 달렸다. 일순간 막사에 있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달렸다고 생각되는 순간 이미 점이 되어버린 사자비를 보며 경악성을 내질렀다. 경공술이 내공과 꼭 비례하지는 않지만, 아주 상관없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저런 경공이라면 아무리 낮게 실력을 가늠하더라도 짐작할 수 없는 고수가 분명했다.
“저런 자가 왜…….”
소요요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용병 따위나 하고 있는 거죠?”
옆에 있던 거마대주 진궁한이 고개를 저었다.
“뭔가 있는 작자임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충분히 의심해볼 여지가 생겼으나 지금 상황에서 그걸 따질 사람은 없었다. 희망은 언제나 불안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없었던 기회가 생겼다. 확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애송이의 말대로 혹시 맹주가 쓰러진다면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 곧장 움직여야 한다. 그런 다급함이 무덤을 차지해야 한다는 욕심과 맞물려 사자비에 대한 의심을 희석하는 작용을 했다.
사자비가 그걸 노렸다는 것도 모른 채, 그들은 다시 무사들을 점고하기에 바빴다. 일이 뜻처럼 풀리지 않았을 때 급히 구채구를 빠져나가려는 의도도 섞인 행동이었다.
☆ ☆ ☆
“멈춰라!”
소리를 내지르기 전에 사자비는 이미 탈혼진공을 이용하여 기운을 바꾼 상태였다. 백일홍의 냉기를 가두고 양기에 약간의 한기를 섞어 뽑아낸 것이었다. 자연히 경공이 느려졌지만, 여러 가지 작용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목적은 확실했다. 그는 맹주와 드잡이를 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실력을 뽐낸다느니, 호승심을 내세워 무인 특유의 만족감을 얻겠다느니 하는 생각은 애초부터 멀리 떠나보낸 상태였다. 무림인을 제압하여 실적을 올릴 필요가 없는 만큼 빠른 승부가 관건인 것이다. 그러자면 맹주가 실력을 발휘하기 전에 쓰러 뜨려야 한다. 손 한 번 움직이지 못한 채 자신의 한 수에 쓰러져야 한다. 소문으로는 맹주가 탈반경에 들어섰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화경의 경지는 넘었을 테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 시간도 아까운 사자비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방심을 유도하는 것뿐이다. 어설픈 몸짓이 아니라 진정으로 맹주가 속도록 전신을 기만자세로 둘러쳐야 했다. 맹주정도 되는 고수라면 상대의 실력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했을 테니까.
사자비는 탈혼진공을 이용하여 최대한의 내공을 사용했다. 백일홍을 숨긴 거짓과 전력을 다하겠다는 진실을 적절히 섞은 사기행각이었다. 이러면 아무리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맹주라도 속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행위는 또 다른 작용도 유도하게 된다.
맹주는 그의 얼굴을 알고 있다. 복면을 쓰기는 했지만 혹시 알아볼지도 모른다. 적어도 체격과 전신의 느낌이 비슷하게 남아서 의심을 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걸 철저히 숨길 수 있게 된다.
무림맹에서 맹주를 보았을 때 은근히 기도를 드러낸 적이 있었다. 맹주는 굳이 밝히려 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신분을 짐작한 표정이었다. 당시 사자비는 예민하게 그걸 간파했다.
탈혼진공을 사용하면 그때의 기도는 완전히 사라지고 완벽히 다른 기운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복면 때문에 얼굴을 가려지고 기운과 느낌마저 달라진다면 충분히 속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또한 방심을 끌어내는 한 부분으로 작용한다.
팟!
숲과 계곡의 경계를 구분하는 나뭇가지를 밟고 장내로 진입한 사자비는 곧장 바닥에 내려서 절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맹주가 있었다.
이건 또 무슨 물건이냐는 시선이 쏟아졌다. 계획에도 없는 녀석의 등장에 녹림도도 당황한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자비는 선수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상마쌍괴가 졌으나 이쪽도 고수가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가지도 오지도 못하는 악일량을 향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녹림도라면 산은 넘는 행인의 행낭을 털어야 하는데, 직업을 특성상 짐 속에 돈이 있는지, 있다면 얼마나 있는지를 겉만 훑고도 파악하는 눈치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녹림채의 채주정도면 그 정도 눈치는 충분히 있을 터. 하지만 악일량은 바보인 듯했다. 혹은, 흑룡의 무공에 눌려 잠깐 멍청이가 되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뭐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향해 사자비는 한 번 눈짓을 주고 분연히 외쳤다.
“한 번의 승부로 무덤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채주님!”
“그렇기는 한데…….”
악일량은 동혈과 사자비를 번갈아 보았다. 순간 그의 두 눈이 번뜩였다. 이제야 눈치를 챈 듯, 그의 눈동자가 기밀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자비의 생각대로 악일량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사파 진영에서 상마쌍괴의 패배를 대신할 대책을 세웠다 판단하고는 안면몰수, 조금 전 녹림의 도의 운운했던 말까지 싹 바꾸었다. 이럴 때는 확실히 녹림도 채주 같은 뻔뻔함이 있는 것 같았다.
“맞는 말이오.”
그리고는 크게 소리친다.
“상마쌍괴 어르신들이 패배했다고는 하나, 단지 한 번의 패배일 뿐. 우리에게는 아직 고수가 남아 있소.”
이미 흑룡이 지쳐 있으니 맹주까지 같은 상태로 만들면 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럼, 애초의 계획대로 되는 셈이었다.
“농아채에 숨겨진 고수가 있으니, 바로 이 사람이오. 이 사람까지 패배를 시인한다면 깨끗이 포기하리다.”
악일량은 사자비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절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맹주의 표정에 웃음이 담겼다.
“무언가가 있는 것 같지 않소?”
전윤옥이 굳은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녹림이 비무를 통해 순수하게 동혈을 차지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군요. 뒤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녹림도 중에 한두 명이 쉼 없이 어딘가를 왔다갔다한다 했더니 이곳 상황을 나른 것이었구려.”
맹주가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난 또, 녹림도는 참 소변을 많이 보는구나 했지.”
전윤옥이 인상을 찌푸릴 때 맹주가 잠시 헛기침을 쏟아낸 후, 가소롭다는 웃음을 흘렸다.
“흑룡 등 고수의 힘을 빼겠다는 수작인 것 같소.”
“그런 것 같군요. 뭉치기 전에 몰아쳐 각개격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럴 필요 있겠소?”
말과 함께 갑자기 절벽 아래로 신형을 날리는 맹주였다. 돌덩이 떨어지듯 무겁게 지면과 거리를 좁히던 몸은 어느새 깃털처럼 변하여 사뿐히 바위 위에 올려졌다.
전윤옥의 얼굴에 불만스러운 표정이 드러났다.
‘적의 의도대로 행동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하지만 맹주의 의도를 파악한 혜각의 설명 때문에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저들도 작정하고 계획을 세운 만큼 쉽사리 물러나지는 않을 겁니다. 굳이 우리가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저들도 힘으로 저항할 테니 모두에게 손실이지요. 맹주께서는 그 점을 우려하신 것 같군요.”
‘적들의 계획을 무공으로 파괴하겠다는 뜻?’
전윤옥은 흥미로운 빛을 띠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맹주는 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확신은 맹의 고수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 생각대로라면 적들의 계획은 시작부터 어그러지는 격이 된다. 이후에는 사기가 완전히 꺾여 대항할 엄두조차 내질 못할 것이다.
‘맹주님다운 생각이시로군.’
마음이 편해지자 약간의 기대심리가 가슴에 자리 잡았다.
맹주의 무공을 구경할 기회는 그리 흔치 않았다. 맹의 장로인 전윤옥조차도 소문으로만 접했을 뿐, 맹주의 무공을 일초 반식도 구경해본 기억이 없었다.
과연, 벽라도패라는 명호를 얻자면 어떤 수준의 도법을 구사해야 할까?
그런 기대감은 전윤옥만의 것은 아니었다. 혜각을 비롯하여 구파일방과 맹주를 지켜보던 모든 이의 관심을 끌었다. 그때 맹주가 한 걸음 자리를 옮겨 시선을 집중시켰다.
“녹림에 이렇게 용감한 젊은 영웅이 있는 줄 몰랐소이다.”
그는 한 걸음 더 떼어 사자비와 거리를 좁혔다. 어떠한 꼼수도 다 써보라는 듯 느긋함이 걸음걸이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사자비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빛도 달라졌다. 유심히 바라보는 맹주의 시선은 꼭 속을 꿰뚫는 형태였다.
‘어디서 본 듯한데…….’
하지만 여느 청년무사가 그렇듯 뒤로 빗어 넘긴 평범한 머리모양과 가려진 얼굴 형태만으로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상대에게 폭발적으로 흘러나오는 기운도 아주 평범했다. 양기와 음기가 적절히 뒤섞여 정파 같기도 하고, 사파의 후기지수 같기도 했다. 짐작되는 나이에 비해 아주 높은 내공을 지녔지만 기억에 남아 있을 정도로 특별하진 않았다.
맹주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2
사자비도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악일량이 전음으로 작전을 물었으나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신경은 맹주의 반응에만 집중되었을 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순간 움찔했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노회한 눈빛과 시선이 마주친 때였다. 그는 즉시 폭발시키듯 내공을 쥐어짜냈다. 진짜 고수를 상대하려는 자만심 가득한 애송이의 그것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먹혔나?’
기억을 반추하는 맹주의 눈빛이 사라진 듯했다.
사자비는 속으로 웃었다. 비무를 할 생각은 없다. 군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는 공격방법을 사용할 작정이었다.
그도 한 걸음, 맹주도 한 걸음 움직였다. 두 걸음이 순간적으로 좁혀지고, 다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누군가가 놀리 듯 소리쳤다.
“어르신께서 저런 애송이를 직접 상대한다니, 소문나면 체면이 말이 아니겠는데요.”
흑룡이었다. 그 때문에 맹주의 걸음이 움찔거렸다. 그럴 듯한 말인 것이다. 반면, 복면 안에 숨겨진 사자비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하지만 아니다.
‘기회!’
구겨졌던 표정에 힘이 들어갔다. 눈빛도 붉은빛으로 번뜩였다. 흑룡을 힐끔 보는 맹주의 시선이 흔들렸음을 정확하게 간파한 것이다. 맹주는 순간적으로 무방비 상태가 되어 있었다.
사자비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의 기운이 거짓말처럼 뒤바뀌고, 동시에 ‘팡’하는 소리와 함께 몸에서 극음극한의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발은 이미 땅을 박찬 뒤였다.
팟!
발을 디딘 부위 암반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튀었지만 이미 사자비의 신형은 그곳에 없었다.
“이건!”
갑자기 피부에 와 닿은 냉기 때문에 놀란 맹주의 시선이 사자비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마라겸은 벌써 뽑혀서 무서운 속도로 그를 찔러오고 있었다. 맹주는 급히 도파(刀把:칼을 잡는 부위. 손잡이)를 잡았다.
윙!
도는 뽑히는 즉시 칼집에서부터 뇌전을 쏟아내며 도로에 걸린 공간을 모조리 찢어놓았다.
마라겸은 찔러오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공기를 얼려서 뱀 같은 괴음을 자아냈다.
콰쾅!
쾌속한 겸과 기밀한 도가 한 번 부딪쳤을 뿐인데 생각 이상의 굉음이 짧게 터져 나왔다가 사라졌다.
파팟!
옷이 터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피분수가 쏟아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핏방울은 붉은 무지개를 수놓았다.
모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상황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 듯했다. 사자비가 맹주의 방심을 노리고 재빨리 움직였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피바람이 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피바람의 주인은 믿을 수 없게도 맹주였다.
“저게 어떻게 된…….”
쿵!
어깨에 피를 쏟아내는 맹주의 한쪽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계곡을 중심으로 들어찬 무인들이 경악하며 입을 벌렸다. 정파의 지주라는 무림맹의 맹주가 애송이에게, 그것도 한칼에 쓰러졌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겁한 기습이었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맹주가 아닌가!
이렇게 쉽게 당할 수 있나!
보는 사람 모두 놀란 상태가 되었다. 심지어 녹림도조차도 반기기보다는 돌연한 사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한 표정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릎 꿇린 맹주의 표정은 오히려 담담하기만 했다. 어깨에서 콸콸 피가 쏟아지는데도 그는 바닥에 닿은 자신의 무릎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맹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이미 한 박자 늦은 출도였다. 생각 이상의 속도와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상대의 무기를 확인하고, 벽천도(劈天刀)를 뽑으면서도 패배하리라 예상했었다. 그래서 도를 뽑을 때 본능적으로 몸을 아래로 살짝 내렸던 것이다. 발도를 자신하여 그대로 낫을 향해 휘둘렀다면 어깨가 아니라 심장이 두 동강 났을 것이다.
피가 쏟아지는 만큼 가벼워져야 할 몸은 오히려 물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했다. 맹주는 시간이 흐를수록 천근만근의 무게를 느꼈다. 요행히 죽음은 피했지만 치명상이었다. 그래도 맹주의 체면에 이렇게 있을 수 있나!
“흐음!”
그는 얕은 기합을 지르며 무릎을 펴고 꼿꼿이 서서 사자비를 돌아보았다.
“감쪽같이 노부를 속이셨군요.”
사자비의 눈은 웃고 있었다.
“비겁하다고 욕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나마 현실적인 사람인 것 같군.”
“이런 오지에 볼일이 있었던가요?”
맹주는 시선으로 동혈을 가리켰다.
“저런 것에 관심이 있는지 몰랐군요.”
“하도 말들이 많기에 뭐 별거 있나 싶어서 와봤지. 아무튼, 잘 가게. 그만큼 살았으면 당장 죽어도 장수했다 할 테니 원망 말고.”
마라겸이 들렸다. 그때까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망연자실했던 흑룡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사자비에게 다가왔다. 그가 움직이는 순간 스무 걸음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탁!
흑룡의 손이 사자비의 어깨를 눌렀다.
“이봐!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나 있나?”
순간 사자비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 ☆ ☆
소요요는 심각한 표정으로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대담한 척했으나, 막상 전투에 참가하려니 두려운 마음이 든 탓이었다. 무덤에 대한 욕심과,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뒤섞여 심란한 상태였다. 그렇게도 바라던 계획이 성공할지 모르는데, 왜 실패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함께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때마침 동혈로 진입과 남쪽으로 후퇴가 동시에 가능한 위치를 찾아 대원들을 배치한 거마대주 진궁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그에게 물었다.
“성공할까요?”
돌아오는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그럴 가능성이 크지는 않다고 봅니다. 그가 상당한 고수인 것 같기는 했지만 상대는 무림맹주, 정파의 중심인물입니다. 소문으로는 탈반경에 올랐을지도 모른다던데, 그런 맹주를 제압할 수 있다면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일 겁니다.”
그 말이 소요요의 불안은 진정시켰다. 재밌게도 마음이 진정되자 다시 강렬한 욕심이 찾아왔다.
“그렇다면 규보의 비급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앙칼진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뿐만 아니라 우리 정체가 발각되어 구파일방의 추격을 받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변수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것으로 보아 달리 작전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소요요의 얼굴에 다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때 옆이 소란스러웠다. 다른 문파가 대기하는 곳이었다.
소요요와 진궁한의 시선이 마주쳤다.
‘무슨 일이지?’
급히 시선을 돌린 진궁한이 대원에게 지시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아라.”
잠깐 사이에 바위 숲을 빠져나온 대원이 말했다.
“이동입니다.”
소요요가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이동이라니?”
대원이 믿지 못할 말을 했다.
“맹주가 쓰러졌답니다.”
소요요뿐만 아니라 진궁한조차도 경악해서 입을 벌렸다.
“어, 어떻게?”
대원이 자신의 위치로 달려가며 대답했다.
“대항군림대의 고수가 일초에 맹주를 베어 넘겼다고 했습니다.”
“이, 일초에……?”
두근! 두근!
소요요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 ☆ ☆
“흑룡, 조심하게!”
맹주가 낮게 경고했지만 사자비가 더 빨랐다. 그의 팔꿈치는 흑룡의 명치를 가격하고 있었다.
퍽!
맹주는 끌끌 혀를 찼다.
‘이런 데서 경험 없는 티를 내는구먼!’
생각 중에도 명치를 얻어맞은 흑룡이 턱까지 가격당해 절벽으로 날아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흑룡이었다. 동시에 사자비가 마라겸을 들고 접근했다.
놀랍게도 흑룡이 벌떡 일어서서 외쳤다.
“모두 맹주님을 보호해라!”
외침이 절벽 아래와 위에서 대기하던 구파일방과 무림맹의 고수들을 움직였다. 그들은 흑룡이 시키지 않아도 그럴 생각인 듯 사자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도 넋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적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조금 있으면 도착할 지원을 믿는 듯 녹림의 고수 또한 마주 달려왔다.
순간 사자비의 신형이 빨라졌다. 맹주를 완전히 끝낸 후에 혼란을 틈타 몸을 빼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황대를 기다리면 상황은 모두 정리 될 것이다. 그런데 맹주를 베어 넘긴 마라겸에 걸리는 느낌이 없었다.
‘뭐지?’
사자비는 흐릿한 인형이 맹주를 스쳐 지나간다는 느낌을 받고 안력을 돋웠다. 순간 그의 표정이 구겨졌다. 절벽에 있던 흑룡이 어느새 다가와 맹주를 낚아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급히 경공술을 발휘해 흑룡을 뒤쫓았다. 하지만 녀석의 신법은 놀라웠다. 쫓을 수 없을 속도는 아니지만, 요리조리 피하는 움직임이 미꾸라지처럼 부드럽고 현란해서 잡기가 쉽지 않았다. 거기다 녹림도와 구파일방 등 다수의 고수가 뒤섞인 사이로만 도망 다니는 통에 길이 사라지고, 때론 막혀서 사자비의 진로를 방해하고 있었다.
‘뭐 저런 놈이!’
정면승부를 피하는 걸 보면 아직 상마쌍괴를 상대로 소모했던 내공이 회복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 상태로 저런 경공술을 발휘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아니, 불가사의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자비는 추격을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자신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몰려오는 사파의 무리를 발견해서였다. 이쯤에서 슬쩍 빠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는 선두에서 달려오는 대원을 찾아 턱짓을 보였다.
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도 모르게 폭죽 하나를 품에서 꺼내 공중으로 던졌다.
팡!
제법 큰 소리. 그러나 붉은 연기를 뿌리며 아래로 떨어지는 폭죽에 관심을 둔 사람은 없었다. 잠깐 사이에 녹림도 절반을 바닥에 쓰러뜨린 구파일방과 무림맹을 대적하고자 모두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바빴던 것이다.
사자비는 곧장 옆으로 이동하여 다툼에서 빠져나왔다. 사파의 숫자가 많으니 그들을 상대하는 정파의 고수로서는 물러나는 그에게 신경조차 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한 번의 견제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숲으로 이동할 수 있었는데,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이봐요!”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관전하는 태도처럼 절벽과 거리를 둔 소요요가 거기에 있었다. 처음 이곳으로 달려올 때부터 사자비를 눈여겨보다가 가까이 오자 아는 척 말을 건넨 것이다.
“소저는 왜 싸우러 가지 않소?”
사자비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소요요는 손을 들어 절벽을 가리켰다. 이미 그곳은 고수들로 가득했다. 꾸역꾸역 밀고 들어온 사파 때문에 발 디딜 틈도 없어보였다. 사자비가 빠져나온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좌충우돌, 난잡한 사태로 변한 것 같았다.
“들어가도 싸울 상대가 없으니 기다리는 수밖에요.”
“무서운 건 아니고?”
소요요의 표정이 구겨졌지만 평소처럼 입에 칼을 물진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놀랐다는 듯했다.
“어떻게 한 거죠?”
“뭘 말이오?”
“맹주요. 그를 한 수에 쓰러뜨렸다는데, 사실인가요?”
약간 상기된 목소리였다.
사자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방심을 노렸지.”
소요요는 사자비를 유심히 살폈다.
그녀는 믿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자비의 말처럼 기습이 먹혔다고 확신했지만, 그것도 천운이 따라주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맹주 같은 고수가 잠시 방심했다 하여 하수에게 당할 정도로 어수룩한 사람은 아닐 테니 말이다. 특히, 사자비를 피해 달아나는 흑룡을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그럼, 흑룡은?”
“싸우기 싫었겠지.”
“당신을 피해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던데요.”
“도망?”
사자비가 하하거리며 웃었다. 흑룡은 절대 도망치려던 것이 아니다.
“십존의 고수 둘을 한꺼번에 제압한 고수가 왜 날 무서워하겠소?”
“하지만 뚜렷한 이유가 없잖아요.”
“맹주를 안고 있는 걸 못 봤소? 상태가 위급하니 응급조치를 하고자 자리를 피하려는 행동이었소.”
“짐짝처럼 들고 다니던 사람이 맹주였나요?”
“그렇지.”
“그럼, 흑룡은 다시 오겠군요.”
사자비의 시선이 계곡으로 향했다. 전체적으로 사파보다는 무림맹의 고수가 뛰어났지만 숫자에서는 확실히 상대가 되질 않았다. 관운장을 연상시키는 노인이 대도를 휘두르며 눈에 띄는 활약을 하고 구파일방 또한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하지만, 역시 시간이 문제로 보였다. 어떤 고수도 내공을 무한정 사용할 수 없으니 끝내 지치게 될 것이었다. 결국, 승리의 여신은 사파의 손을 들어줄 것 같았다. 물론, 상황이 정리되면 사파 또한 상당한 피해를 당한 상태겠지만.
‘어쩌면 양패구상이 될지도!’
그 정도로 얼굴이 붉은 노인과 구파일방이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으며 착실히 적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완전히 달라질 가능성이 있지만, 지금 기세로는 한동안 사파를 괴롭힐 것 같았다.
‘계획대로 되겠어!’
신호를 보고 일 각 후에 출발할 테니, 오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이 각에서 삼 각 사이에 친황대가 도착할 듯했다. 그쯤이면 정파와 사파, 둘 다 상했거나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제압한 후일 것이다.
사자비는 이제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전투를 관전했다. 그리고 소요요의 물음에 답했다.
“상마쌍괴를 제압하고도 상당한 내공이 남은 듯했으니 와서 돕겠지.”
사자비는 그래 주기를 바랐다. 그가 끼어든다면 좀 더 큰 피해가 날 것 같아서였다.
“어떻습니까?”
출혈이 심했던 탓에 맹주는 정신을 잃은 모습이었다.
지혈을 하고 상처를 돌보던 혜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처가 아주 깊구나.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뻔했다.”
흑룡이 인상을 썼다.
“괜찮겠죠?”
“우선 따뜻한 곳으로 옮겨야 할 것 같구나.”
그러자 흑룡이 맹주를 안아 들더니 혜각에게 건넸다.
“받으세요.”
“내, 내가?”
“그럼 어찌합니까, 대사께서는 사람에게 무공을 사용 못하시잖아요. 저라도 빨리 가서 사태를 수습해야죠.”
“벌써 내공이 돌아왔느냐?”
상황에 맞지 않게 흑룡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천부적인 재능이 어디 가겠습니까!”
혜각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도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다. 흑룡은 심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체질상 자연스럽게 단전에 내공이 쌓인다는 것을. 그리고 그 속도가 보통 사람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무공을 사용하는 중에도 내공이 회복된다고 하니, 얼마나 부러운 신체인가. 무인이라면 누구라도 꿈에 그리는 완벽한 몸이 분명했다.
이런 건 재능이라기보다는 천성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상마쌍괴를 상대하며 온 힘을 짜낼 정도로 내공을 소모했는데, 이렇게 빨리 회복할 줄은 혜각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부처님의 은덕이 네게 있구나!”
“그런 소리 마시고, 어서 맹주님을 모시고 진영으로 돌아가세요.”
맹주를 받아 든 혜각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거라. 되도록 살생은 피하고.”
“예!”
순간 혜각의 신형이 황금빛을 뿌리며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던 흑룡이 깍지를 끼고 앞으로 꺾었다. 이내 뼈마디에서 ‘두두둑’ 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다음으로 목까지 꺾어보였다.
흑룡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그럼, 대사도 없으니 진짜 실력을 발휘해 볼까!”
말과 함께 그의 눈이 금빛으로 물들어 괴이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 복면 녀석, 아주 박살을 내주지!”
맹주가 기절하기 직전에 그를 건드리지 말라고 속삭였던 충고도 흑룡은 이미 잊어버렸다.
☆ ☆ ☆
먼저 정찰을 나갔던 두 명의 교도와 환몽영이 비조처럼 날아왔다. 떨어져 행동하던 잔월신교는 이미 본대와 합류한 상태였고, 수라천군을 비롯하여 삼백 명의 교도들이 음산한 마기를 풍기며 부산한 소음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환몽영의 등장 때문에 이동은 잠시 멈췄다. 선두에서 걸음을 멈춘 공명학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곳이 확실한가?”
환몽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형!”
“이 소란의 정체는 무엇이냐?”
“절벽에 동혈 하나가 있는데, 그걸 두고 싸우는 듯했습니다.”
“어떤 자들이?”
“딱 하나로 지목하기 어렵습니다만, 전체적으로는 정파와 사파의 다툼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구파일방도 있더군요. 무림맹도 있었고.”
“무림맹까지?”
굳어진 공명학의 시선이 수라천군에게 향했다.
“사부님!”
수라천군이 혀를 찼다.
“무림맹까지 이런 일에 끼어들었나!”
아무래도 껄끄러운 표정이었다. 무림맹과 잔월신교가 부딪히면 자칫 정사의 분쟁으로 번질 우려가 있었다. 수라천군은 그걸 걱정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환몽영에게 물었다.
“구파일방이 있으니 흑룡도 있었겠구나!”
“맹주 때문에 어딘가로 급히 갔지만, 곧 돌아올 듯했습니다.”
“어떠하더냐?”
“네?”
“그때보다 많이 성장한 것 같더냐?”
“그, 글쎄요……. 맹주가 당하는 것밖에는 보질 못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오천대마가 침묵을 깨뜨리고 물었다. 꽤 놀란 목소리였다.
“공자께서 지금 맹주가 당했다고 하셨습니까?”
“그러하네.”
“도대체 누구에게……?”
“거리가 있어서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복면을 쓴 자였어.”
그러자 귀령대마가 끼어들었다.
“교주님, 우리에게 운이 따르는 듯싶습니다. 맹주가 없다면 무림맹은 별것 아닙니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 난 오히려 맹주보다 흑룡을 더 높이 평가한다네. 그가 전보다 더 발전했다면 마지막 승자는 분명히 구파일방이 될 걸세.”
흑룡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공명학 등 제자들의 표정이 굳었다.
공명학이 참지 못하고 수라천군에게 제안했다.
“사부님, 이대로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왜 그리 조급해하느냐.”
“사부님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상처 입은 맹수를 건드리는 건 약한 자가 하는 일. 우리는 강합니다.”
수라천군은 미소를 지으며 제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잠시 후에 그의 고개가 아래로 움직였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기다릴 수 없겠구나.”
그러면서 공명학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흑룡은 네가 맡거라.”
공명학은 주저하지 않았다.
“네!”
“가자!”
수라천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삼백 명의 마교도가 그 일대를 지독한 마기로 뒤덮어 버렸다.
☆ ☆ ☆
“뭘 그렇게 생각하죠?”
갈천을 바라보던 홍면노를 향해 설지하가 다가왔다.
홍면노는 시선을 돌려 설지하를 바라보았다.
“조금 이상해서 그런다.”
“뭐가요?”
“붉은 연기가 올라온 지 벌써 일 각이 지났지 않았느냐. 그런데 움직일 생각을 안 하니 이상한 일이지. 대주의 표정도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 같고.”
설지하는 홍면노의 시선을 따라 갈천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표정이 상당히 심각한 듯했다. 원래 차분하고 냉정한 인물이지만 홍면노의 말처럼 평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이건 그녀와 홍면노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나찰귀로 전원이 그런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찰귀로를 제외한 친황대 전체가 다른 때와 분위기가 달랐다.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요?”
“글쎄다!”
그때 어디선가 기척이 다가왔다. 일순 대기하던 친황대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살기를 뿌렸다. 잠시 후, 주위를 경계하는 그들을 향해 침입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침입자는 검붉은 피풍을 덮어써 얼굴도 알아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누구냐?”
친황대 몇 명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피풍으로 가려진 얼굴에서 밝은 안광이 쏟아졌다가 사라졌다. 그 아래 자리한 입가는 길게 늘어져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갈천 대인과, 소천룡 대인을 찾아왔습니다, 나으리들!”
귀 기울이고 있었던 모양,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갈천이 뒤를 돌아보았다.
“지옥교의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대인!”
“따라와라!”
그리고는 소천룡과 함께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혈의인도 마찬가지, 대원들을 지나쳐 그들을 따라갔다.
그들은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갈 때는 혈의인과 함께였는데, 올 때는 갈천과 소천룡 밖에 없었다. 밀담을 나누고 돌려보낸 듯했다.
“지금부터 상부의 명령을 하달한다.”
갈천이 전원 불러놓고 그렇게 서두를 열었다. 뒤이어 소천룡이 말했다.
“지금부터 사냥을 시작한다.”
이어지는 말이 나찰귀로를 충격에 빠지게 했다.
“대상은 반역자, 총감이다.”
나찰귀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 이게 무슨 뜻인지…….”
홍면노도 경악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총감이 왜 반역자인가!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데, 오직 수라금룡대원들만 이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나찰귀로는 크게 동요했다. 그들을 향해 갈천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선택권을 주기로 결정했다. 빠질 사람은 지금 빠져라. 불이익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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