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28
127화 갑자기 이러기 있기?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할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만 갔지만, 지금은 잠시 그 궁금증을 접어 두었다.
일단 중신상회가 우선이다.
덕풍 윤가의 일도, 명운표국의 장래와 은원 등 모든 문제들이 중신상회와 엮여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시간적 여유도 없다.
‘개방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홍무문은 움직일 생각이 있는 것 같다 했으니까.’
어쩌면 이미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도 움직여야 할 때다.
명운표국 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자 중심이 되는 사람이 기거하는 곳으로 향했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아니요. 그간 많이 바쁘셨다 들었습니다. 그리 말씀하시면 오히려 제가 민망하지요.”
우지혜. 명운표국의 안주인이자 중심.
우 부인은 나를 깍듯하게 대하며 예를 갖췄다.
나도 그런 우 부인을 존중하는 태도를 고수했다.
현재 명운표국에서 내 영향력이 우 부인을 능가하는 것도 맞고, 명운표국의 미래가 내 손에 달려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걸 이유로 무례하게 굴고 싶진 않았다.
무당산에서 힘없던 시절을 겪어봤기 때문일까?
이것도 윤시후 그놈이 남겨 준 흔적이라 할지 모르겠다.
그 인연의 한 자락을 일부나마 거둘 때가 왔다.
“중신상회가 무너질 겁니다. 덤으로 홍무문도 뭉개질 것 같고요.”
거두절미하고 딱 해야 할 말만 풀어냈다.
우 부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만한 곳들이 갑자기 무너질까요?”
“몇 가지 일들이 겹치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힘 좀 있던 곳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건 무림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니까요.”
따지고 보면 명운표국도 그렇다.
우 부인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지 주먹을 꾸욱 움켜쥐었다.
“보러 가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바로 채비를 갖추시지요.”
“제가…… 말인가요?”
“예. 시간이 그리 여유 있는 편이 아니라, 빨리 답하셔야 할 겁니다.”
“그게…… 저, 괜히 짐이 돼서 방해가 되진 않을지…….”
당장 내가 건넨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눈치다.
하지만 그로 인해 폐가 되는 것이 아닐지를 걱정한다.
배려가 자연스럽게 몸에 밴 사람이다.
무림에 어울리는 자질은 아니지만, 내부를 지탱하며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것도 나쁘진 않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작은 수고 정도는 감수할 만하다.
“괜찮을 겁니다. 밀린 밥값을 하셔야 할 분도 있으니까요.”
겸사겸사 잉여 인력도 부려먹으면 좋지 뭘.
***
다른 이들에게도 현재 돌아가는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 범각이나 장소월 소저의 경우는 올 것이 왔다는 정도지만, 명운표국에 적을 두고 있는 주소란이나 명일서 등은 등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흥분해 달아오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다만 한 사람.
“비싼 밥값이군.”
장문경 선배만은 반응이 달랐다.
고저 없이 툭 내뱉은 말은 대놓고 불평이다.
솔직히 쫄았다.
하지만 장소월 소저가 슬쩍 다가와 알려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저거, 농담하시는 거야.”
“…….”
아~ 농담이구나~.
장문경 선배는 농담을 저런 식으로 하시는구나~~.
그렇구나~~~~.
‘사람 목을 날려 버리겠다고 말할 때도 딱 저런 목소리일 것 같은데…….’
내 귀에는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그래, 사교성도 적어 보이시는 분인데, 저 정도 농담쯤이야.’
전혀 농담으로 들리진 않지만, 어쨌거나 진짜 농담이라면 장문경 선배도 나름 나를 편하게 대한다는 소리니까.
좋게, 그저 좋게만 생각하자.
그렇게 출발 준비를 하는데, 선두에 선 주소란이 깃발을 들어 올렸다.
열자 정도 되는 장대에 걸린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자 [명운]이라는 글자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기억에 있는 깃발.
“아.”
내가 처음 무림의 참혹함을 목도했던 순간. 배가 갈라진 시신들 위에서 펄럭이던 깃발이다.
비참하게 죽은 명운표국의 표사들 사이에서 홀로 남아 울부짖듯 펄럭이던 그 깃발이 맞다.
명운이란 글자 사이에 묻어 있는 핏자국이 그를 증명했다.
중신상회와 홍무문이 상잔(相殘)하는 자리에 이 이상의 것은 없을 거다.
“가죠.”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울음을 애써 참는 주소란의 모습이 비장해 보였다.
주소란이 씩씩하게 앞장서 걸으며 휘날리는 깃발을 드높였다.
***
중신상회가 위치해 있는 곳은 혜화현의 옆, 마을의 규모를 넘어 도시 수준의 크기를 가진 곳이었다.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선 주소란의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깃발이 달린 장대를 들고 움직이는 건 고된 일이다.
하물며 주소란은 한 번도 깃대를 땅에 대지 않았다.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본인이 짊어지겠다는 독기가 엿보여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한계가 왔고, 깃발과 함께 휘청이자 명일서가 나서서 깃대를 잡았다.
“그만하면 됐다.”
“명 표두…… 아저씨…….”
“기는 증표일 뿐이다. 너는 이 표국의 중심인 국주이고. 국주는 총괄하는 자이지 깃발을 드는 이가 아니다. 우리라는 손발을 잘 이용하는 것이 너의 일이야. 너는 이 깃발 아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해.”
명일서는 주소란에게 깃발을 넘겨받았다.
“국주님을 모셔라.”
“옛!”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쭉 지켜보고 있었는지 명일서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오리 오형제가 일제히 대답하며 주소란을 보필했다.
“……이제야 백 국주의 말을 온전히 알겠다.”
명일서가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나를 바라봤지만, 마음에 담아 둘 일은 아니었다.
짧은 휴식만을 취한 채 여정을 이은 이틀째가 되어서야 목표한 도시를 앞에 둘 수 있었다.
도시의 입구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 몇몇이 명운표국의 깃발을 보고 잠깐 얼굴을 굳혔다.
명운표국은 과거 중신상회와 많은 일을 함께했었다고 하니 알아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제지는 안 하네.”
“그러게. 하오문 정보가 맞긴 맞나 봐.”
사실 도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거나, 검문을 이유로 지체되는 일을 걱정하긴 했었다.
관에서는 발을 뺄 생각이라더니, 그 정보가 사실인 모양이다.
이후로는 거리낄 것 없이 움직일 수 있다.
이제 이 일은 무림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무림의 법에서 원(怨)은 피로 씻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비무 도중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일이 허다한 것이 무림이다.
도시 내부에서 살인이 일어나도 민간에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 관에서도 눈감아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귀찮은 짐 하나를 덜어낸 기분이다.
앞장선 명일서 표두의 뒤를 따라가자 인파가 모여 있는 곳이 있었다.
“사람이 많네.”
“선객이 있는 모양이야.”
아마 홍무문일 터.
인파를 헤치고 진입하자 으리으리한 장원 앞에 두 세력이 대치 중인 것이 보였다.
장원 대문 앞에는 종인걸이 안절부절못한 채 서 있었고, 그런 종인걸의 옆에는 범상치 않은 노인이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덕풍 윤가겠군. 그렇다면…….’
반대편에 있는 이들이 홍무문일 것이다.
그 선두에는 중년의 끄트머리에 닿아 있는 사내가 서늘한 기세를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다.
‘저 사람이 홍무문의 문주 홍문강이겠군.’
“그래도 늦진 않았네.”
발품 판 보람이 있었다.
대치 중인 둘은 설전을 주고받고 있었다.
특히 홍무문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었다.
홍무문 문주 홍문강의 입에서 중신상회의 추악한 면모들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의외로 달변인데.”
명운표국에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과격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모습이다.
홍무문의 입에서 나오는 중신상회의 추문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술렁였다.
백무호가 콧방귀를 뀌었다.
“덕풍 윤가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돌격해서 싹 다 죽였을걸? 하지만 덕풍 윤가가 도착해 있는 지금은 계산이 다르다는 거지.”
“설령 패하더라도 중신상회를 쓰레기로 만들어 놓겠다는 거네.”
“홍무문도 이젠 뒤가 없으니까.”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기 때문인지 홍무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하지만 방관자 역할은 오래가지 못했다.
“종인걸 당신은 명운표국의 일에도 책임이 있지!”
“명운표국의 일이라니! 그건 네놈들이 저지른 일이잖느냐!”
“맞다! 우리가 저질렀다! 바로 네 책략에 당해서! 우리가 그들의 피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진 않는다! 허나 그들을 죽음으로 유도한 것이 바로 너희 중신상회! 종인걸! 너라는 점 역시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증거 없는 상황에서 설득력을 얻고자 할 때 가장 쉽게 통용되는 방식 중 하나가 본인의 잘못을 숨김없이 인정하며 꺼내는 것이다. 저렇게까지 숨김없이 이야기를 하는데, 거짓말을 하겠냐는 심리적 선입견을 준다.
“명운표국은 어찌 생각하시는가!”
홍문강의 일갈에 종인걸은 그때서야 우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홍무문 문주 홍문강과 설전을 벌이는 일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는지 우리를 뒤늦게 발견한 모습이다.
피 묻은 깃발 아래 서 있는 우리가 전면으로 나서자 종인걸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종인걸의 반응에 좌중들이 한 차례 더 술렁였다.
‘서 대인 잔치 때도 그랬지만, 저 늙은이는 결정적인 부분에서 허술한 부분이 있네.’
기회다. 그리고 그걸 알아본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나 백무호! 백가표국의 장남으로서 말한다! 홍무문 문주 홍문강의 주장은 모두 사실이다! 종인걸 저자는 백가표국에도 표행을 의뢰했고, 그 표행 속에 수작을 부렸으며, 홍무문이 명운표국을 공격할 것을 알고 그를 유도한 정황이 분명 존재했다!”
주변의 이목이 집중된 순간, 시기적절한 순간에 나선 백무호의 한마디가 완전히 판을 무너트렸다.
백가표국의 위명은 작지 않다. 그것을 판돈으로 올린 순간 무게추가 쏠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홍무문의 주장에 끌려갈 마음도 없었다.
“계속해.”
“알아, 인마.”
내 재촉에 백무호가 콧방귀를 뀌며 투덜댔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홍무문 편인 것도 아니다! 홍무문은 명운표국의 원수다!”
사람들이 편을 들어야 할 쪽은 홍무문 쪽이 아니다.
우리다!
판을 주도해야 하는 것 역시도 우리다! 명운표국이다!
“쐐기를 박아 주실 차례 같은데요?”
백무호가 시기적절하게 나섰지만, 완벽하게 결정을 지어 놓을 필요가 있다.
침묵을 지키던 장문경 선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싼 밥값이군.”
“하하하…….”
또 농담을 하신다.
‘……농담인 거 맞겠지?’
갑자기 목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지만, 착각일 거다.
물론 그다음 드러난 것은 전혀 착각이 아니었다.
후확!
“으앗!”
“뭐야!”
거대한 기세가 일어나 주변을 집어삼킨다.
무림 최정상에 이름을 올린 자의 존재감.
천하십검의 위용이 일부나마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 몰려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리와 거리를 벌렸다.
좀 더 명확하게 우리들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 덕풍 윤가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노인이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어, 어찌 그대가!”
명운표국이 가진 패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덕풍 윤가의 고수 몇몇으로는 어림도 없다. 덕풍 윤가 전체가 나서도 답이 없는 상대가 바로 이 괴물이다.
덕풍 윤가로서도 경악할 수밖에 없다.
‘생각대로 잘 풀렸…….’
“소천룡의 청이 있어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해두지.”
……응?
그런데 이 양반이 갑자기 이상한 소릴 하신다.
“소천룡이라면…… 근래 무림 제일의 기재라는?”
“그냥 뜬소문 아니었어? 실존인이라고?”
주변에 무림인들이 몇몇 있는지 민간의 사람이라면 모를 이야기들이 오간다.
아니면 내 이야기가 민간에도 퍼져 있다던가?
아니, 그런데 왜 갑자기 이야기가 이쪽으로 흘러?
“네 이야기지 않나.”
순간적으로 장문경 선배의 입가에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느끼는 순간.
“나가 봐.”
갑자기 등에서 느껴진 압력이 내 몸을 밀었다.
거의 튀어나온 수준으로 떠밀린 내 몸이 졸지에 가장 선두에 놓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어…….”
……저기요?
갑자기 이러기 있기?
장문경 선배가 끌어 올린 주목도를 내가 다 떠안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