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68
167화 녹림은 손님 대접을 이따위로 하나?
백진성 아저씨의 설명에 따르면 최근 구파와 그로 인한 녹림의 움직임에 대한 여파로 작년 가을과 겨울 사이 칼 들고 설치는 놈들이 많았다고 한다.
덕분에 표국 입장에서는 실력의 고하에 따른 구분이 명확하게 이뤄졌고, 실력 있는 표국은 오히려 의뢰가 늘어나면서 웃돈을 얹어서라도 고용하려는 현상이 벌어졌다고 했다.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몰아치고 난 이후로는 태풍전야의 고요함처럼 조용한 상황이 이어지는 중이라고 하셨다.
그 영향인지 별다른 문제 없이 여로가 이어졌다.
‘없는 건지, 없어진 건지.’
하지만 백진성 아저씨의 말이 전적으로 수긍되지는 않았다.
백진성 아저씨보단 설아 누나를 따르는 기색이 강한 한영이라는 양반과 설영이라는 이들이 이따금 일행에서 떨어져 나갈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자극이라도 받았는지 종 노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마인들도 이따금 일행에서 떨어져 주변을 돌다 오고는 했다.
종 노인을 따르는 마인들도 보통이 아니다.
중립을 표방하는 이들이 모인 것이라 소속이 중구난방이긴 하지만, 그 구성원 중에는 마교 최강의 정예 중 하나라는 천마수신위(天魔守身位) 소속의 무인도 있다고 했다.
천마의 주변에서 천마를 모시고, 지키기 위해 육성된 이들이니만큼 마교의 모든 역량이 투입된 기재들이자 고수들이다.
당연히 천마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천마의 적에 대한 무한한 증오로 똘똘 뭉쳐있는 존재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문제가 될 수 있다.
아무리 이쪽에 고수들이 많다고 해도 녹림 모든 세력이 밀집해 있는 상황에서 싸움을 거는 건 악수(惡手)다.
문제는 우리 일행이 천자산에 당도했을 때 반응이다.
머저리가 아니라도 극진한 대접을 받지 못할 것임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아마 초대장을 보낸 놈들도 ‘진짜 왔다고? 미친 거 아냐?’라는 반응을 보이며 헛짓거리를 하는 놈들이 있으리라는 것에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 자신이 있다.
그 이후에 사람들이 꽤나 죽어 나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어쨌든.
내심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야 어차피 그쪽으로는 이골이 난 몸이고, 조금만 참으면 일이 잘 마무리될 수 있어.’
천상에 계신 천마 사부께서 내가 여기에서 얻어야 할 게 있다고 하셨다.
뭘 얻어야 할지는 모르지만, 장삼풍 사부도 인과가 크게 소모되어 길게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하신 만큼 범상치 않은 것임이 분명했다.
나는 나대로 좋은 것을 얻고, 백가표국은 호북의 표국들을 쥐락펴락할 명분과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그렇게 끝나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
‘쯧! 왜 갑자기 윤시후 그놈이 생각나냐.’
괴롭힘당하는 일에 이골이 났다는 생각을 해서 그런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윤시후가 떠올랐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 윤시후에게 괴롭힘과 조롱을 당하는 것보다 무당산에서 내 편이 없었다는 것이 더 힘들고 괴로웠던 것 같다.
‘그놈도 그러려나?’
무당파를 도망치듯 야반도주한 녀석이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덕풍 윤가의 비호도 사라진 지금, 윤시후가 기댈 곳은 없다.
오히려 덕풍 윤가의 생존자라고 하면 인면수심의 악인이자 혈교의 잔당으로 공적(公敵) 취급당하게 될 것이다.
장삼풍 사부를 만난 뒤, 뚜렷하게 실력이 갈리게 된 이후부턴 굳이 녀석에게 신경 쓸 이유가 없었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가슴 한편이 후련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
별다른 사건 사고 없이 목적지가 가까워진 가운데, 일행의 선두에 선 백진성 아저씨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퍼졌다.
“다들 놀러 온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 지금부턴 언제 성가신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마음 단단히 잡아라!”
왜 그런가 싶었는데, 어느 경계를 기점으로 주변의 풍경이 확 달라졌다.
그 경계선 역할을 하는 것은 무언가가 주렁주렁 걸려 있는 커다란 나무였다.
“하나, 둘, 셋…… 어우 쓰벌! 몇 개야 저거?”
녹림칠십이채의 산적들은 누가 쳐들어와도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의 발로로 산길 입구에 산채의 표식을 새겨놓는다.
그 표식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는 것이었다.
수십 개의 표식이 걸려 있는 모습은 음산하고 으스스한 주술적인 느낌마저 들게 할 정도였다.
“와…… 소름!”
그에 반해 백무호는 진짜 충격과 공포인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는 만큼 두려운 것이라고, 녹림산적들과 불가근불가원 관계에 있는 표국 입장에서는 경기를 일으킬 만한 모습이긴 하겠다.
“저 정도면 이 주변 치안은 완전히 끝장났겠네요.”
“당연하지. 산적 새끼들이 수천인데 정상일 리가 있겠느냐.”
도적들이 대거 몰려들어 있는 상황이다.
물론 사람이 없는 산속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지만, 수천을 넘어 만 단위에 육박하는 도적들이 모여 있다면 제멋대로 날뛰는 망둥이들이 없는 것이 이상할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만한 도적들이 모여 있음에도 군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 때문인지, 아니면 무서울 정도의 머릿수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생각 없는 도적놈들은 후자라고 간주하며 환호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 천자산에 얌전히(?) 머무르고 있지만, 언제 산에서 내려와 주변 마을이나 도시를 털지 알 수 없다.
“이야, 이런 곳에서 깃발 들고 있으면 그냥 살아 움직이는 과녁이겠는데…….”
“그러냐?”
“어. 산적 하면 보통은 도끼나 박도를 떠올리는데, 제대로 된 산채는 활 쏠 수 있는 놈을 꼭 따로 키워 놓더라고.”
“확실히 그렇겠네.”
실제로 화산 인근 화성촌에서 궁기병의 성가심은 직접 경험해 보았었다.
천마 사부의 힘을 펼쳐내지 못했다면 크게 낭패를 봤을 것이 분명했다.
같은 의미로 지켜야 할 대상이 있는 표국 역시 원거리에서 쏘아대는 공격이 성가실 수밖에 없다.
“그런데, 너 지금 표국 깃발을 누가 들고 계시는지 깜빡한 거냐?”
“엉?”
누구 말마따나 졸지에 살아 움직이는 과녁 신세가 된 백진성 아저씨가 심히 불편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고 계셨다.
“어어…….”
졸지에 불타는 효놈(不孝子) 꼴이 된 백무호였다.
“우리 아들, 백가표국 국주 자릴 빨리 계승 받고 싶나 봐?”
“아뇨! 그럴 리가요!”
“정말이지?”
“예!”
“다행이구나. 옛다!”
백진성 아저씨가 백무호에게 백가표국의 깃발을 넘겼다.
백무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버지?”
“빨리 앞으로 튀어 나가야지, 아들놈아. 너랑 가까이 붙어 있으면 이 아비도 같이 과녁 신세가 되지 않겠니?”
확실히 백무호 조지는 솜씨가 능숙하시다.
“재미있는 아해구나.”
그 광경을 바라보던 신승 어르신이 빙그레 웃으며 백무호를 평했다.
열에 아홉은 불타는 효놈 소리 들을 백무호일 텐데 뭔가를 눈치챘다는 듯 말씀하시는 신승 어르신이다.
나는 신승 어르신을 돌아보며 검지를 입술로 가져갔다.
“너무 알아주면 싫어합니다. 적당히 모른 척해 주세요.”
“허허! 그런 성격이구나. 오호라, 그렇다면 백 국주도?”
“당연히 아시겠죠.”
“재미있는 부자로다. 허허. 선재, 선재라……. 아미타불.”
깃발을 넘겨받은 백무호가 투덜거리며 앞장서자 신승 어르신이 빙그레 웃으며 작게 불호를 외웠다.
***
표식들이 걸려 있는 경계를 넘어선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사방에서 시선들이 느껴졌다.
바글바글할 정도다.
“이건 뭐, 사람 반 나무 반이네.”
선두에 선 백무호의 평가다.
과장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헤아리면 마냥 틀렸다고 말하긴 어려울 정도였다.
기척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진짜 왔다고?”
“미친놈들인가? 여길 와?”
“그냥 멋모르고 지나가는 놈들인 거 아냐?”
“멍청아! 올라오는 중에 표식들 다 봤을 거 아녀. 저거 표국 깃발인데, 그걸 모르겠냐!”
다행히 할아버지의 명예는 지켜졌다.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표국에서 손님이 올 수도 있다는 지시가 내려오긴 했나 보다.
표국을 상징하는 깃발이 휘날리고 있음에도 영업활동이 없는 걸 봐선 나름 손님 대접을 하려는가 보다.
뭐, 그것보단 신기한 구경거리를 지켜보는 느낌이 더 강하지만.
그래도 대충 이럴 것임은 예상하고 있었기에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불쾌함은 지울 수가 없었다.
나를 씹어대는 거야 참을 수 있는데, 내 주변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은 참기 힘들었다.
“입이 거치네.”
특히 설아 누나와 이화에 대한 패담은 참기 어려웠다.
그리고 패담은 점점 수위를 높여 가며 음담패설로 발전해갔다.
“이야, 저년…….”
“야, 저건 내가 먼저 찜…….”
“여기 모여 있는 사람 숫자가…… 다…… 견딜 수 있…….”
이건 선을 넘었다.
콰직!
내 몸이 본능대로 움직였다.
깔끔하게 턱뼈를 쪼개 버리는 소리가 산중에 울려 퍼졌다.
“꾸엑!!”
방금까지 역겨운 말들을 쏟아내던 주둥이에서 듣기 좋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아! 여기까지. 이 정도면 더 참는 게 병신이지.’
청명심법이 열심히 일하는 것이 느껴졌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맑은 내 이성(理性)이, 저 주둥이에서 나온 말들을 듣고 판단을 내렸다.
그러니까, 이건 절대 충동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다.
다들 생각은 같았던 모양이다.
내가 턱뼈를 쪼개 버린 놈을 중심으로 주변 놈들이 피거품을 물며 줄줄이 고꾸라졌다.
모두 주둥이가 더러웠던 놈들이다.
예를 들면, 어딘가에서 날아온 돌멩이가 이빨을 싹 날려버렸다든가.
예를 들면, 벼락처럼 떨어진 깃대가 뚝배기를 뽀개버렸다든가.
예를 들면, 누가 펼쳤는지도 모를 권경이 얼굴을 피떡으로 만들었다든가.
“이 새끼들이 선빵을 쳐?”
“니들만 참았냐? 우리도 참았다! 십장생들아!!”
기다렸다는 듯 주변에 가득하던 녹림 산적들이 무기를 들었다.
머릿수를 믿는 듯 자신만만하다. 우리 따윈 간단하게 밟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야! 싹 다 죽……!?”
진짜 존재감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쿠오오오오!!
살기가 터져 나오고 기세가 솟구쳤다.
특히 신승 어르신이 뿜어내는 기세는 남달랐다.
무림 정점에 다다른 무인의 기세다. 입만 산 잡것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씨발, 뭐야!”
오줌이라도 지린 꼴로 엉덩방아를 찧는다.
주변에서 지린내가 나는 것을 보면 몇몇은 진짜로 지린 것 같다.
적어도 더 이상 개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손을 써야 할 거라면 확실하게 쓴다.’
“종극.”
보통이라면 종 노인이라 칭했을 것이나, 나는 그의 이름과 성을 그대로 불렀다.
종 노인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옆에 섰다.
“참으라고 했던 말들은 다 취소합니다. 교전이 시작되면 싹 다 죽이세요.”
“분부대로.”
신승 어르신에 이어 종 노인이 기운을 풀었다.
콰아아아아아!!
마인답지 않게 성품이 진중한 종 노인이지만, 그 본연의 기운은 마공을 기반으로 한 마기다.
본능적인 두려움을 주는 것이라면 신승 어르신보다 한 수 위다.
“흐익!”
“뭔데! 미친! 뭐냐고 이거!”
두려움에 휩싸인 이들이 벌레처럼 기어서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순식간에 천자산이 아수라장이 됐다.
그때서야 그나마 두 거인의 기세를 버텨낼 수 있는 이들이 전면으로 나섰다.
“손님으로 초대받아 왔으면 손님답게 굴 것이지! 이게 무슨 패악인가!!”
우리가 도발을 참지 못하는 것을 기다렸던 주제에 하는 말이 굳어진 표정만큼이나 곤궁하다.
이 정도 고수들인지는 몰랐다는 기색들이 역력했다.
“녹림은 손님 대접을 이따위로 하나?”
당연히 참을 생각이 없는 우리도 말을 아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