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74
173화 이것도 팔자려니
종 노인 휘하의 마인들도 그랬지만, 한영과 설영들 역시 백가표국에 있을 때처럼 은연중에 우리가 머무는 거처 주변을 보호하고 주시해 왔다.
빠르게 주변 상황을 파악한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어째 녹림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파투 날 분위기니 일을 저질러버리자는 건가?”
충격이란 파문과도 같은 것이다. 보통 첫 번째가 가장 눈에 띄지만, 그 파장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뻔히 보였다.
“허!허!허! 부처님들께서 오늘 많이 바빠지시겠구나.”
‘그렇게 손 푸시면서 말씀하시면 다 때려죽이겠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분명 누군가를 염려하시며 한 말씀일 뿐인데, 왜 듣는 내가 소름이 돋는 건지 모르겠다.
‘설마 이걸로 천마 사부가 날 씹으시는 건 아니겠지?’
무척이나 불합리한 일이지만, 왠지 귓가에 천마 사부의 잔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필사적으로 항변할 자신이 있다.
문제는…….
‘이 상황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란 말이지…….’
내게는 여기서 중론을 모으는 사람들과 다른 입장이 있다.
신녀 이화 및 금강철마존 종극에게 인정받은 천마의 계승자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혼란을 내게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이경천.
마공을 접한, 혹은 본래부터 마인 출신이었던 녹림들을 이끌고 있는 인물.
어설프게 대통합을 이룬 녹림이라면, 이경천은 그저 녹림 내에 산재해 있는 파벌 중 하나의 수장일 뿐이다.
언젠가 내부의 경쟁을 이겨내고 녹림의 정점에 오른다고 해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 뻔하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다르다.
‘여기라면 종 노인과 천마수신위를 움직이는 데 제안이 덜하다. 어차피 개판인 상황에 손 좀 보태면 되는 거 아닌가?’
가능성을 점검하면서 감정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감각이 온몸을 휘감는다.
뭔가 막후의 지배자 같은 것이 된 기분이다.
작은 일에도 동분서주하며 쩔쩔매던 애송이가 무슨 재주로 막후의 지배자씩이나 되겠냐만.
“나쁜 생각 할 때 얼굴이네?”
“……응?”
청량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머릿속까지 씻어낼 듯한 목소리가 눈가에 머물고 있는 무겁고 가라앉은 감정을 씻어낸다.
금방이라도 내 볼을 꼬집을 것 같은 설아 누나가 정면에 서 있다.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했을까?”
설아 누나의 손길에 꼬집혀진 볼따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뭐야, 좋은 계책이라도 떠올린 거야?”
백무호가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젊은 놈이 벌써 귀가 맛이 갔나?
“방금 설아 누나는 ‘나쁜 생각하는 얼굴’이라 했던 것 같은데?”
“그게 좋은 계책이지. 뭔데? 후딱 풀어봐.”
나는 잠시 방금 떠올렸던 방법을 풀어서 정리해보았다.
-사실 내가 진짜 천만데, 저기 녹림에 지가 천마라고 하는 놈이 있어. 그놈 때려잡고 내가 그 파벌 먹어버리려고. 어때, 좋은 생각이지?
언젠가 삶에 꿈도 희망도 없어졌을 때 해보면 괜찮을 창의력 넘치는 자폭이다.
일단, 이 내용을 다른 표현법으로 바꿔놓을 필요가 있다.
“좋은 도적은 죽은 도적이지.”
“……닮아 가냐?”
백무호가 슬쩍 신승 어르신을 살피며 독설을 뿜어댔다.
이놈 보소. 다 꼰질러벌라.
“허!허!허!”
굳이 꼰지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이미 다 들으셨다.
그렇게 우리는 나름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외부에서 침입자가 들어올 때까지.
“잠깐 실례 좀 하겠…… 항복!”
선자불내내자불선이라고 했다. 하물며 건물 바깥에는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환영받기 힘들다.
설령 칼을 거꾸로 들고 있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빠르시네……,’
백진성 아저씨가 뽑은 검이 문을 열고 들어온 단야흔 채주의 목에 닿아 있다.
천의무봉 장문경 선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상당한 실력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움직임이다.
“미안하군. 바깥 상황이 좀 안 좋다고 들어서.”
“……목에 닿아 있는 이건 좀 내리고 말해줬으면 좀 나을 것 같은데.”
“하긴, 이건 너무 협박 같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속에 정다움이 가득하다.
“뭐, 다들 들어오게. 마침 듣고 싶은 말도 많았다네.”
순순히 검을 거둔 백진성 아저씨가 불청객을 받아들였다.
그 부름에 단야흔과 가까이 지내던 만산호 채주를 비롯해 같은 파벌로 보이는 채주들이 들어왔다.
다만.
“벨 걸 그랬나?”
“하하…….”
그들 중에는 아직 의식이 없는 거록채주 악군패를 업고 있는 자도 있었다.
혼란스러운 내분 상황 중에 제일 노리기 쉬운, 저들에게 있어 가장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우리에게 던져진 꼴이다.
‘어째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네.’
이것도 팔자려니 해야 하는 부분인 것 같다.
***
아침에 이어 오후에도 정보를 물어다 주는 신세가 된 이 불쌍한 뻐꾸기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니 쉽게 상황이 파악되었다.
천신채주가 한껏 커진 채주들의 욕심에 불을 질렀다.
한 가지가 해결되자 뒤이어진 의문이 생긴다.
“왜 여기로 온 건가?”
나와 같은 생각인지 백진성 아저씨가 단 채주에게 물으셨다.
단야흔 채주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여기가 제일 안전하니까?”
“웃기는 대답이긴 하군. 녹림도가 표국이 가장 안전하다고 말하니 말일세.”
“하하하하하!”
단야흔이 크게 웃었다. 마치 희극을 즐기는 사람 같은 웃음이다.
“저 바깥에서 칼질, 도끼질할 놈들이 어떤 놈들일까?”
과제의 문답 같은 말이다.
하지만 단야흔은 다른 사람의 답을 듣지도 않고 본인의 해답을 풀어냈다.
“욕심이 가득한 놈들이야.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을 쥐겠다고 칼을 휘두르는 놈들이지. 녹림왕이라도 된 것처럼 병신 짓을 하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이곳이 안전한 것이지.”
“우리가 돈줄이 되어 줄 테니까?”
“맞아. 녹림왕이 되었을 때를 생각하며 움직이고 있는 데다 녹림 내부의 문제니, 이곳과 굳이 척을 질 필요가 없거든. 오히려 잘 다독여야지. 천자산에 오를 만큼 정신 나간 담력이 있는 표국은 찾기가 쉽지 않거든.”
잦아든 웃음이 조롱으로 바뀐다.
“멍청하지 않은 작자들이 멍청한 경극의 꼭두각시마냥 움직이고 있어. 타인의 손에 놀아나는 주제에 녹림의 왕을 꿈꾼다니. 지들끼리 싸우면 마지막에 누가 이득을 보게 될지 정말 모르는 건지 원. 하하하! 댁 말이 맞는 것 같아. 이건 웃긴 이야기야.”
파안대소하고 있지만,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은 웃지 않고 있다.
“강무채주는 미친놈이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미친놈이지. 아마 이 친구 말대로 될 거다.”
만산호가 단야흔에 호응하며 말을 보탰다.
다른 채주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듣고 있는 입장에서는 헛웃음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왜 선택을 지들이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우리의 힘은 절대 약하지 않다.
당장 이곳에 있는 힘도 만만하지 않지만, 외부에서 끌어올 수 있는 힘을 고려하면 녹림이라 할지라도 우릴 무시할 수는 없다.
하나가 된 녹림이 무림의 판도를 흔들 강대한 세력이 될 것임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건 제대로 된 통합을 이뤘을 때의 이야기다.
이런 식으로 제 살을 깎아 먹는다면 설령 하나가 될지언정 전체적인 힘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내부에 산재한 불만과 반발을 조율하는 데도 적지 않은 힘을 소모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힘을 소진한 상태로 우리를 강압적으로 찍어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어제의 사건과 오늘 아침에 있었던 비무로 우리의 힘을 보여줬을 텐데?
내 의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다들 욕심으로 정신줄을 놔서 그래. 욕심에 먹혀버린 인간들은 무슨 짓을 해도 놀랍지 않지. 사람이 합리적으로만 움직인다면 이 세상에 도박으로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있겠어?”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바람잡이를 넣어둔 것 같아. 천신채주가 은근히 다른 채주들이랑 접촉하는 낌새가 있었거든. 녹림 대통합을 위한 노력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행동들이 다르게 보이네.”
바로 이해가 되었다. 떠올려보면 처음 천자산에 오를 때 우리를 도발했던 얼간이들도 그랬다.
사람을 심어놓고 조종하는 것이 벽지심이란 작자의 특성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벽지심이란 작자에게 이 싸움은 질 수가 없는 싸움이란 거군.”
결정적인 순간에 칼끝을 돌릴 것들이 각 산채 내부에 알음알음 심겨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 좋은데…….’
그 정도로 판을 짜놨다면 이 싸움은 벽지심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경천이 패한다는 이야기다.
그리되면 천마 사부가 전해준 정보를 쫓아 천자산에 온 이유가 사라진다.
그것을 떠나 한발 더 나아가 생각하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아무래도 학이 녹림에 접근했다면, 벽지심이란 작자와 손을 잡았을 것 같단 말이지.’
이경천과의 대화를 통해 외부의 수상한 세력이 녹림과 접촉했다는 확답은 얻어냈다.
정말 그 외부세력이 학이라면 벽지심은 적이다.
이번 일을 벽지심의 생각대로 흘러가게 둔다면 학에게 녹림이라는 거대한 세력을 넘겨주는 꼴이 된다.
“단 채주.”
“헐…… 그런 어조로 부르면 꼭 골치 아픈 일이 생기던데…….”
“이미 골치 아픈 상황이니 헛소리 그만하시고요.”
안 그래도 복잡한 상황에 머리 아픈데 쓸데없는 일에 심력 낭비 좀 안 했으면 좋겠다.
“현재 녹림의 파벌은 얼마나 됩니까?”
“파벌이라……. 가만있어 봐…….”
단야흔이 두 손을 들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양손을 모두 쓰고도 부족했다.
“열셋?”
“……많네요.”
왜 녹림 대통합이 그동안 지지부진했는지 알겠다.
목소리를 내는 파벌이 저렇게 많으니 의견 통합이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이렇게 유도를 한 건가?’
의견을 통합하는 것에 있어서는 최악의 상황이지만, 반대로 각개격파를 생각하고 있다면 최적의 조건이다.
야망이 생긴 채주들도 이를 노렸을 가능성이 크다.
잘게 갈라진 파벌들을 하나둘만 먹어도 다른 파벌들보다 배는 큰 세력을 거느리게 된다.
그렇게 커진 덩치를 눈덩이 굴리듯 남은 파벌들을 각개격파하여 먹어 치우면 녹림왕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거기까지 노리고 설계를 짠 거라면 벽지심은 겉보기와 다르게 음험한 심계를 가진 자다.
“말이 통할 만한 파벌이 있습니까?”
“그건 왜?”
“끌어들여야죠.”
“그럼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는데.”
단야흔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백진성 아저씨 쪽을 바라봤다.
“같은 생각?”
“챙길 몫이 커질 테니 나쁜 생각은 아니지.”
“댁들이 우릴 끼고 이 개판에 뛰어들면 이 기묘한 안전지대도 사라진다는 건 알고 있지?”
단야흔을 비롯한 채주들의 노림수다.
누가 이길지 모르는 혼란한 상황에 휘둘리기 전에 발을 뺐다가, 최후의 승자 쪽에 붙을 생각이었던 거다. 실리적인 판단이다.
“주도권을 가진 쪽이 선택한 거라고 보면 될 것 같군.”
“우릴 선택하시겠다? 그럼 계획이 많이 달라지는데……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헛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걸 보면 만만치 않은 양반이다.
어떤 의미로 안심이 되었다.
‘그럼 이경천 그 양반이 무너지기 전에 움직여야겠는데.’
이제 곧 천자산이 개판으로 변할 거다.
그 난리통에서 이경천이 무사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면 가급적 빨리 움직이는 것이 좋다.
그렇게 마음먹은 때였다.
바깥에서 날카로운 쇠 울음소리와 누군가의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의 소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교전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바깥을 돌아보던 설영이 보고했다.
아무래도 좀 늦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