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208
207화 나를 부른 거 아니었나?
이원군 대장로를 설득하겠다던 이원보 장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천마혈족의 장로들은 마음을 굳혔다.
“역시나 대장로를 설득하는 일은 지난한 것 같소.”
“뻔한 일 아니겠소이까. 대장로 성정이 어디 보통이오? 나는 처음부터 이리될 줄 알고 있었소이다.”
“허허! 시간의 여유가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거늘.”
천마혈족 장로들은 슬슬 말을 돌려가며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직설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방향성은 동일했다.
서로 눈치를 살피며 반대 의견이 없는지를 살피던 천마혈족 장로들은 마침내 의견이 취합되었음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같은 시국에 그 둘만 보고 갈 순 없는 일 아니겠소?”
“한시가 급한 상황에 이리 뭉그적거리기나 하고 있다니…….”
“일단 우리끼리라도 움직여 봅시다.”
이원보 장로가 남겼던 경고는 공염불로 돌아갔다.
고삐가 풀려버린 천마혈족이 제멋대로 방향을 잡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연청운이 보여준 무위는 마장급 무인들을 상대한 것과는 격이 달랐다.
천마를 자처할 만큼 재능과 기량이 있음을 증명했다.
반천파는 환호했고, 순천파는 갈등했다.
연청운의 영향력이 천마신교 전체에 깊이 파고들었다.
누군가는 현 상황을 두고 음모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연청운의 움직임은 입천신마존의 지시하에 이뤄지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은 입천신마존이 천마위에 오르기 위한 사전준비라는 이야기다.
연청운이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입천신마존과 대립하고 거래하는 모습조차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이야기가 나돌 만큼 연청운의 행보는 파격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파격이 남긴 그림자가 닿는 곳.
“하아…….”
하루가 지나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밤의 어둠 사이에서 지독히도 쓴 무언가를 입에 물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던 이경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까지 썩어 문드러졌는가!”
순천파를 이끄는 장로회의 천마혈족은 수족을 보내 이경천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청운이 천마의 머리통을 부숴버린 첫날부터 은근히 접촉해오더니 오늘은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이 요구하는 바는 간단했다.
-천마의 피를 이은 혈족이라면 한 식구일 터. 천마신공을 가지고 넘어와라. 그럼 천마위에 올려주겠다.
“……이것이 구걸과 무엇이 다르지?”
천마혈족의 제안은 구걸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스스로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으니 외부의 손을 빌리고 싶다는 거다.
“아니, 구걸이란 말조차 사치인가.”
구걸을 하는 거지는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하지만 천마혈족이라는 자들은 무의미한 자존심으로 가득했다. 헛소리를 너무나도 당당하게 했다.
현실도 미래도 없이 과거의 유산에 취해 있을 뿐인 쓰레기들.
순천파라는 자들의 실체였다.
“어처구니가 없군. 저런 자들을 그리워하며 권토중래를 꿈꿨던가…….”
언젠가 반드시 마교로 돌아가 천마위에 앉으리라 각오를 다졌던 시기를 떠올리니 헛웃음만 나왔다.
그토록 바라던 천마위가 하찮아 보일 정도였다.
이경천은 고민할 것도 없이 신녀의 신당으로 향했다.
“으음! 오늘도 천마께선 자리를 비우셨나?”
천마 연청운은 최근 밤마다 자리를 비웠다.
이경천이 다음으로 찾은 사람은 신녀 이화다.
아직 소녀티를 다 벗지 못한 어린 나이었지만, 실질적인 무리의 이인자는 신녀였다.
금강철마존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과 힘이 있지만, 성정 때문인지 아니면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권력과는 한발 거리를 두고 있다는 느낌이다.
‘믿어지진 않지만, 천상에 거하고 계신 초대 천마님에게서 신탁을 받아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현 천마를 찾아갔다는 이야기가 있지.’
하지만 이따금 보여주는 이능을 보면 마냥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결정적으로 천마신교의 신녀가 천마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천마의 주변에선 현실성 없는 일들이 가득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무공의 성취라든가, 정파 무인 출신이면서 완벽한 천마신공을 사용하는 점이라든가, 천산의 신조가 따르는 일이라든가.
하나하나가 신화 속 전설 같은 놀라운 이야기들뿐이다.
무엇보다 이따금 연청운이 혼잣말을 하는 모습을 보면 흠칫하고 놀랄 때가 많았다.
‘만약 신녀 이화가 말한 일화가 사실이라면…….’
초대 천마께서 등선하시어 천상의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놀랍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착잡한 생각도 들었다.
정말 천마께서 신이 되셨다면, 어찌하여 그 피를 이은 후손들이 이토록 비루한 꼴로 망가지도록 방치하셨단 말인가!
‘설마 이 또한 초대 천마님의 안배인 것인가?’
더 나은, 더 훌륭한 자질을 지닌 새로운 천마의 완성을 위해 위대한 존재가 개입한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
지나치게 끼워 맞췄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애초에 미욱한 인간 따위가 인지를 뛰어넘는 존재를 가늠하려는 것부터가 무리다.
“생각이 많으신 얼굴이네요.”
온갖 억측이 복잡하게 뒤엉킨 가운데 아이다운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가 이경천의 사고를 일깨웠다.
이경천은 바로 정신을 수습하고는 담아뒀던 말을 꺼냈다.
“순천파의 천마혈족이 접촉해왔다.”
“그랬나요?”
“천마신공과 내 배신을 바라고 있더군. 알려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예.”
이화의 말과 행동에는 아무런 흐트러짐도 없었다.
너무나도 무덤덤한 모습에 이경천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전혀 놀라지 않는군. 알고 있었나?”
“예.”
“……알고 있었다고?”
이경천이 놀라자 비로소 이화가 미소를 머금었다.
“경천 아저씨께 접근하던 그들은 마치 알아차려달라는 듯 대놓고 움직였더군요. 주변을 경계 중이던 천마수신위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랬습니다.”
“……써그럴!”
비밀리에 접근해 온 척했지만, 사실은 알아차려달라는 식으로 티 나게 움직였다는 이야기다.
일부러 행적을 드러냈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이간계(離間計)라니…….”
이경천이 내부에서 의심당하도록 유도했다.
만일 이경천이 이번 일을 고하지 않았다면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심한 천마혈족 놈들이 이런 식의 책략을 쓸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잘하는 것 하나 정도는 있으니 저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겠지요.”
이런 식의 책략에는 잔뼈가 굵은 자들이다.
천마로서 내세울 힘은 잃었지만, 대신 독니 하나 정도는 기르고 있다는 평가다.
그랬기에 더욱 추레했다.
“아무튼, 다행이네요. 괜한 의심이 필요 없으니.”
“나는 화가 나는 중이다만…….”
한심한 자들이라 평가절하했던 작자들에게 농락당할 뻔했다.
한때 천마위를 꿈꿨던 이경천이다.
넘볼 수 없는 벽을 마주하고 그 꿈을 접었다고는 하나, 자존심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분노한 기색을 드러내는 이경천에게 이화가 넌지시 제안했다.
“바라는 것을 줘보는 건 어떨까요?”
“바라는 것을 준다?”
“천마신공의 구결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지 싶은데요.”
이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나이대에 맞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이 되었다.
“천마님을 뵙기 전까지 천마신공을 보완하기 위한 독창적인 구상들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했었지. ……무의미한 일이었지만.”
연청운에게서 완전한 천마신공을 전수받으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천마신공이 얼마나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는지 깨달은 이경천이었다.
“천마혈족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흔들어놓으면 저희도 포섭해야 할 대상들에게 접근하기가 한결 쉬워질 거예요.”
안 그래도 연청운은 적극적으로 순천파에서 사람들을 빼 오길 바랐다.
“그럴싸하게 만들어봐야겠군.”
이경천이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이 느낀 분노를 되갚아줄 방법을 떠올린 사람의 웃음이었다.
***
“알아서 잘 굴러가네.”
아침이 되어 신당으로 돌아오자, 천마수신위가 찾아오더니 천마혈족 장로들의 수하들이 이경천에게 접촉한 것과 이경천이 이 내용을 이화에게 알리며 둘이 뭔가를 상의했다는 내용을 보고했다.
상황을 만들어놓으니 알아서 굴러가는 것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잘만 된다면 순천파가 무너지는 시간이 더욱 단축될 것 같다.
“그럼, 남은 문제는 둘인데…….”
혈교와 입천신마존.
혈교 쪽이야 순천파를 쓸어내면서 함께 정리한다고 쳐도, 입천신마존이 문제다.
보름의 유예기간이 생겼고,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고는 있지만, 보름 뒤의 상황을 예측할 수가 없다.
‘또라이였단 말이지.’
어설픈 수를 써 봐야 이빨도 안 들어갈 거다.
게다가 서장 쪽의 움직임도 신경이 쓰인다.
죽은 짜천마 이강무가 나를 부른 이유 중 하나가 서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짜천마 이강무가 천마답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얼간이는 아니다.
눈앞의 일에 급급한 내가 보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씨발! 그럼 올라오든가!”
“이 주제도 모르는 놈이!”
고민을 거듭하며 걷고 있는데, 대무장 쪽에서 묘한 소란이 일고 있었다.
대무장 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내는 옷에 흙먼지가 잔뜩 묻어있었다.
‘대무장 고치는 것을 도와준 건가?’
평천마왕의 첫수를 정면으로 받아낸 여파는 작지 않았다.
간단하게 받아낸 것처럼 보였지만, 그 여파만으로도 대무장 바닥이 상당히 파손되었다.
대무장 위에 있는 사내 주변에는 바닥을 깔기 위한 청석들이 쌓여 있었다.
옷이 흙먼지로 더러워진 이유도 밤새 저걸 다듬고 옮긴 탓인 것 같다.
그에 반해 삿대질을 하며 화내는 다른 한 명은 말끔한 차림을 하고 있다.
차림과 구도만 봐도 대충 감이 잡혔다.
‘순천파. 주제도 모른다며 까는 걸 보면 상하관계인 것 같네.’
흙먼지 사내의 도발에 삿대질하던 놈이 대무장으로 뛰어올랐다.
드디어 나 이외에도 대무장을 쓰는 이들이 나타났다.
나는 기척을 죽이고 대무장 위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지켜봤다.
퍽! 퍼퍽!
“개자식아! 큭!”
퍽! 푸억!
“고작 그따위 실력으로 깝쳤냐! 컥!”
거칠고 투박했다.
둘 다 기준 미만. 마장급에도 못 드는 실력이다.
하지만 묘하게 시선을 끄는 맛이 있었다.
‘이 맛에 보는 건가?’
나야 당연히 대무장을 고치는 데 도움을 주었던 하급자 쪽을 응원했다. 다행히 실력도 그쪽이 조금은 나았다.
“뒈져! 뒈져버려!”
“컥! 크억!”
빠악!
저돌적으로 날뛰던 흙먼지의 사내는 기어이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어 미간을 들이받았다.
코뼈가 부러져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어 옥수수를 추수한 사내는 그러고도 울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멱살을 잡아 대무장 밖으로 패대기를 쳤다.
“으아아아아아!!”
그리고 그간 쌓인 모든 것을 토해내는 듯 악다구니를 썼다.
“천마강림! 영세무궁! 영세! 영세! 영영세!!”
사내는 외치고 있었다.
상급자에게는 윗사람으로서의 자격이 없었노라고!
대무장 위에서 벌어진 이 싸움은 정당했노라고!
정당함을 바라는 자가 천마를 기리며 울부짖었다.
“훗! 부른다니 가줘야지.”
나는 한걸음에 몸을 날려 대무장 위에 올라섰다.
“어…… 어?”
사내는 갑자기 코앞에 나타난 나를 보며 당황했다.
“나를 부른 거 아니었나?”
“딸꾹!”
대답보다 먼저 튀어나온 딸꾹질 소리가 그의 마음을 대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