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242
241화 정리(1)
싸움은 금방 정리되었다.
내 손에 삼거태부와 괄력편주, 독사비권이 명을 달리했을 때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싸움이 마무리되었을 때쯤 백무호 녀석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이야! 채주급이 셋이라니. 월척이구나!”
백무호는 쓰러져 있는 시체를 확인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겉으로는 여유를 부리는 것 같은 모습이지만, 내 눈에는 다 보인다.
기식이 살짝이지만 흐트러져 있는 것이 얼마나 화급하게 달려왔는지 알겠다.
백무호 정도 수련을 쌓은 녀석이 고작 여기까지 좀 달려왔다고 기식이 흐트러질 리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진짜라면 처음부터 수련 다시 해야지.
“그래그래, 잘 낚아 놨으니 굽든지 삶든지 알아서 해라.”
“안 그래도 그럴 거다. 하! 이 새끼들 땜시 머리 아팠던 걸 생각하면 진짜…… 어휴!”
말하는 투가 상당히 고생했던 것 같다.
내가 던져준 월척을 백무호는 냉큼 받아먹었다.
백무호가 내게 자격지심 같은 것이 있었다면 아마 다른 반응이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가령 비꼬는 식으로 돌려친다거나.
하지만 백무호에게는 일절 그런 기색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편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였다.
“아…… 그런데 말이야…….”
갑자기 백무호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비비적거린다.
뭐 때문인지 훤히 예상되었다.
“상후.”
“예!”
내 부름에 환하게 답하며 달려온 상후가 손짓을 하자 십여 명이 우르르 몰려와 나와 백무호 앞에 섰다.
도적 연맹을 속일 때 배신자 역할을 했던 녹림마인들이다.
“조만간 무호가 요청을 하나 할 거다. 여기에서 도적놈들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에 대해 다들 궁금해하겠지. 그 내용을 삼양현에 있는 다른 친구들에게 세밀하고 면밀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는가?”
“예! 그놈들이 얼마나 쓰레기였는지, 우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고 들은 대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도적 연맹 놈들의 노림수가 무엇이었는지 알리기만 하면 내심 고민을 하고 있던 이들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자식…….”
알아서 필요한 것을 착착 준비해 주는 내게 백무호가 감동을 했다.
“도와주는 김에 서류 작업도 좀…….”
“꺼져!”
“……쳇!”
설아 누나 부탁이라면 모를까, 내가 미쳤다고 그 지옥으로 들어가겠냐!
백무호 녀석도 그냥 한번 찔러본 거였는지, 질척거리지 않고 깔끔하게 물러났다.
그런 가운데 녹림마인들의 시선이 한 번씩 상후에게 닿았다.
다들 내게 이름을 불린 상후를 무척이나 부러워하는 눈치다.
‘걔는 조만간 이화가 끓인 솥에 집어넣을 거 같은데…….’
그래도 이들 역시 제 역할을 다 했다.
격려가 필요할 것이다.
“다들 수고했어.”
나는 지나가면서 한 번씩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해하며 우렁차게 답했다.
그마저도 받지 못한 이들이 살짝 시무룩해 하는 것 같지만, 돌아가서 차차 챙겨주면 될 것이다.
비중 있는 활약은 하지 못했더라도, 오밤중에 동원되어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인 이들이다.
‘돼지라도 대여섯 마리 잡아야겠네.’
먹는 것이라도 제대로 챙겨줄 생각이다.
그렇게 내가 전후 조치에 대해 생각하는 가운데.
“와! 벌써 끝났어요?”
청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사연 소저가 완전무장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 내 옆에 선 것은 무호 녀석도, 간밤에 고생했던 녹림마인들도 아니었다.
못 본 사이에 뭔가 많이 성장한 것 같은 당 소저가 함께했다.
‘솔직히…… 마음에 짐이 있으니까.’
중요한 일을 맡겨 놓고는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다행인 것은 당 소저가 무척이나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한 듯 보인다는 점이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저돌적인 성향.
배경도, 미모도, 기량도 갖춘 미인이 매달려 준다는 것은 남자로서 뿌듯한 일이겠지만, 아무래도 심적으로는 걸리는 것이 많았다.
‘확실히 뭔가 안정된 느낌이네.’
이전과는 달리 조급함이 사라지고 행동에 여유가 묻어났다.
“본가, 사천당가에서 뭔가 있었나요?”
불쑥 당사연 소저가 물어왔다.
함부로 언급하기 어려운 내용들도 있다 보니 슬쩍 얼버무렸다.
“일이 있긴 했는데…… 무슨 연유인가요?”
“갑자기 본가에서 전서구가 날아왔는데, 서신에 딸랑 [육탄 돌격]이라고만 쓰여 있더라고요.”
‘당 가주 이 양반아아아아아아!!’
갑자기 음흉하게 웃는 당천기 가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당가 사람도 아닌데 얼굴이 다 화끈해질 정도로 창피했다.
반대로 당 소저는 무척이나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대체 뭔 말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어딘가 적이(?) 있으니 과감하게 쓰러트리라는(?) 뜻일라나요?”
“그, 글쎄요…….”
“꺄르르르! 연 소협도 모르는 게 있네요?”
놀리는 듯 말하는 당 소저다.
놀리는 거 맞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겠다.
무척이나 짓궂어졌다.
‘그래, 이것도 다 업보려니 해야지.’
내 일을 돕느라 삼양현에 처박혀 있어야 했던 당 소저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를 신경 써주지 못했다.
“정말 몰라요?”
“……예.”
그래. 바라던 방향은 아니지만, 이렇게나마 조금씩 짐을 덜 수 있다면 나도 환영이다.
‘아니, 그건 염치가 없는 짓이지.’
“미안합니다.”
“뭐가요?”
“그냥…… 이것저것…….”
“그렇게 생각하지 마요. 난 오히려 지금이 좋으니까.”
뜻밖이다.
내색은 안 해도 크게 서운한 마음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당 소저가 상큼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이젠 알게 되었거든요. 내가 나답게 당당해지려면 진짜 내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문. 배경. 재산.
과거 당사연 소저가 스스로의 앞에 두었던 것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언제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은 이제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낸 당 소저는 스스로 빛나고 있었다.
괄목상대(刮目相對)라고 했던가.
못 본 사이에 당 소저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스스로를 바꾸고자 노력한 결실이 싹을 드러낸 것이다.
“처음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하는 것 같네요. 우리.”
“그러네요.”
부족함을 채우고 어른이 된 소녀가 눈을 마주쳐왔다.
“좋은 거네요. 같은 눈높이를 가진다는 것은.”
싱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당 소저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밤길을 앞서갔다.
그런 당 소저를 보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 같은 모습이었다면 지금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네게 마음이 있는 것 같다만?]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온 천마 사부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마음에 들면 그냥 덮치든가.]‘아! 거! 좀!! 아니, 왜 맑고 싱그러운 청춘 이야기에 청소년 관람 불가 최음탄을 던지십니까아아아!!’
미친놈 취급당할까 봐 소리도 못 지르겠다.
매우 심한 말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하지만 그 표정만으로도 충분했는지 천마 사부가 퉁명스럽게 말씀하셨다.
[남녀 간에 깊이 고민할 게 뭐 있냐. 마음에 들면 그냥 하는 거지.]갑자기 천마 사부의 연애관이 궁금해졌다.
장삼풍 사부나 달마 사부와는 다르게 혈족도 남기신 양반이다.
“……사부는 어떻게 고백하셨습니까?”
누가 들으면 오해할까 싶어 조심스럽게 입만 달싹이는 수준으로 작게 물었다.
[내 여자가 돼라. 그거면 끝났지.]그만하자.
더 들었다간 내 남녀관계에 대한 상식이 이상해질 것 같다.
차라리 다른 쪽으로 머리를 굴리는 것이 더욱 생산적일 것이다.
지금 내게 있어 가장 급한 사안.
‘역시 안휘의 일이지.’
물론, 시급을 요할 정도로 아주 급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째 조금이라도 머뭇거렸다간 누군가에게 발목이 잡힐 것 같다는 짙은 불안감이 일었다.
예를 들면 서류 더미에 익사하며 세상의 부조리에 절망하고 있는 백 모 씨의 아들 모 무호군이라든가.
‘그래, 튀자.’
한 번 했는데, 두 번 못 할 거 있나.
그렇게 머릿속으로 매우 진취적이고, 건설적인 계획을 차곡차곡 수립했다.
***
보통 술을 마실 때 사람들은 안주를 함께 먹는다.
육류는 술과 좋은 조화를 이룬다.
그렇게 술과 친숙해진 사람들은 돼지를 통째로 굽거나 삶는 것을 보면 반사적으로 술을 찾게 된다.
밤새 수고한 녹림마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돼지를 잡고 있는데, 이를 귀신같이 알아챈 백무호가 끼어들었다.
졸지에 위로차 열려고 했던 포식이 연회로 변해버렸다.
백무호뿐만이 아니라 싸움을 준비했던 백가표국의 표사들과 설영들, 사천당가의 무인들도 함께 자리를 했다.
백무호 녀석은 이 기회에 삼양현에서 따로 놀던 녹림마인들이 다른 이들과 좀 더 어울릴 수 있는 기회로 여길 생각인 것 같았다.
“뭐부터 마실까?”
집에서 약초로 담근 술들부터, 삼양현 주루에서 파는 술들까지 모조리 늘어놓으며 백무호가 히죽 웃었다.
‘절대로 나랑 단둘이 마실 양은 아닌데…….’
아무리 봐도 열댓 명은 너끈히 마실 수 있는 양이다.
“다 마실 생각으로 가져온 건 아니지?”
“나눠 마실 수도 있겠지?”
“있겠지?”
“남으면?”
말하는 투를 보니 죄다 처마실 모양이다.
왠지 내가 없는 동안 어떻게 버텼는지 훤히 보이는 것 같다.
짠하네……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왠지 다른 생각도 뇌리를 스쳤다.
‘눈치챈 거 아냐?’
어째 오늘 밤 나를 술로 담가 버리고 며칠 꿇어 앉힌 다음 발목을 잡을 계책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저 자신만만한 표정만 봐도 백무호 녀석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느껴졌다.
‘뭐, 그런 것치곤 눈이 완전히 풀려있지만…….’
착각해선 안 되는 것이 도적 연맹이 삼양현에 합류한 전 녹림도들을 꾀어내려는 계책은 부쉈지만, 아직도 산재해 있는 일들은 무척 많았다.
도적 연맹의 본심을 모두에게 알려야 하고, 외부에 나가서 역참을 건설 중인 다른 채주들에게 소식을 전달해야 하며, 차후 도적 연맹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한 계획을 짜고 입안을 준비하는 등등.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다급하면서도, 중요하고, 피곤한 일들이다.
그 일들을 중추적으로 해야 하는 만큼 앞에 놓인 가시밭길이 얼마나 험난할지를 백무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믿을 수 있는 일손이 필요하겠지.
“자, 짠!”
“빈속에?”
“고기 구워지는 냄새를 안주로 마시는 것도 운치 있잖아?”
퍽이나 운치 있겠다.
날 술로 담가 버리려는 것이 확실했다.
‘이건 네가 걸어온 싸움이다?’
내 몸 안에는 거의 단계별로 여과기가 설치되어 있는 수준이다. 어지간한 독은 날 것으로 마셔도 다 걸러내진다.
술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마 내가 누군가와 술내기를 했을 때 더 이상 술을 못 마시는 상황이 온다면, 그건 인사불성으로 취해서가 아니라 배가 불러서 더는 못 마실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날 술로 담가버릴 놈은 세상에 없을 거란 소리다.
“짠!”
“좋다! 짠!”
빈속에 짜르르한 맛의 강한 술이 들어왔다.
하지만 기세 좋게 내려오던 술은 금방 분해되어 버렸다.
‘잘됐네.’
아마도 백무호의 의식은 조만간 새외로 여행을 떠날 것이 분명하다.
적당히 내일 아침쯤 떠나면 될 것 같다.
굳이 도망치듯 야반도주를 시도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러기 위해 내가 술이 되고, 술이 내가 되는 세상을 보여주자.
“자, 다시 짠!”
“짠!”
백무호가 환하게 웃었다.
나도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