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262
261화 절반의 성공
제갈윤재는 발을 뺐다.
하북팽가는 전통적으로 제갈세가를 싫어해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데 동행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아무리 봐도 핑계에 불과했다. 팽철의 성격을 알기에 떠넘긴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가 없다.
“한패냐고 물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다.
한패라고 한다면 당장에라도 저 육중한 칼을 휘두를 것 같다.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하지 말라며 휘두를 것 같다.
‘그럼 입을 다물면?’
“침묵은 긍정이라지?”
어떤 답이든 간에 칼부림이 준비되어 있는 작자다.
‘망할 관중연!’
다시 보면 뚝배기를 쪼개놓든가 해야겠다.
진심이다.
관중연에 대한 처분은 정했으니, 눈앞의 팽철에 대한 대응을 정해야 하는데.
‘확 들이받아?’
아무리 하북팽가의 기재라지만 박살 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무림의 법도(?)에 맞게 ‘힘으로 찍어 누른 후 대화’라는 선택지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아니다. 참자. 여기서 꼬여버리면 일이 틀어지게 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도적 연맹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일단 머릿수가 중요하다.
제갈세가가 전력을 다해 돕겠다고는 했지만, 가문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북팽가의 조력이 있고 없고는 이후 행보를 크게 변화시킨다.
남궁조 대협의 설명에 의하면 모용세가는 아예 처음부터 삐딱선을 탄 상황이다.
하북팽가를 완전히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모용세가는 아예 설득할 방도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조만간 구파가 크게 뒤집힐 일이 벌어진 상황이다. 안휘의 일을 하루라도 빨리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럼 이 양반을 어떻게 설득을 해야…….’
“요즘 용린대 신입은 개판이군.”
팽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용린대를 아십니까?”
“뭔 또 같잖은 소릴! 나 하북팽가야. 황도가 있는 하북에 자리 잡은 가문이라고. 용린대도 모르면서 오대세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띨빡아?”
돌려 말하면, ‘넌 그것도 모르냐, 빡대가리야.’쯤 되시겠다.
뭐, 이 정도면 온화한 나도 많이 참았다.
“저 용린대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럼, 이건 왜 가지고 있어?”
“모르겠네요. 그걸 준 작자랑 다시 만났을 때 사지를 분질러 놓고 대화해 보면 알 수 있겠죠.”
부처님 얼굴도 세 번까지라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성질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팽철 이 양반이 한 번 더 성질을 건드리면, 무림식 설득(?)으로 진행해야겠다고 내심 결심하는데,
“호오?”
어째 반응이 나쁘지 않다.
호의적으로 변했달까?
그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설득하는 방법도 쉽게 파악이 되었다.
관중연을 까면 된다.
관중연을 까면 호감이 풍년을 맞이한 가을의 오곡처럼 풍성해진다.
“그 빌어먹을 작자가 하는 짓이 다 그렇죠. 첫 만남부터 다짜고짜 칼부림을 하는 미친놈답달까.”
“맞아, 제정신이 아닌 놈이지.”
동의를 하면서도 슬그머니 궁금증을 드러낸다.
“한데, 그 게으른 늘보 같은 작자가 첫 만남부터 칼질이라니? 대체 뭔 일이 있었기에?”
나는 팽철에게 관중연과 있었던 이야기를 풀었다.
외부에 털어놓을 수 없는 민감한 이야기는 빼고, 관중연을 씹을 만한 것들 위주로 구성을 했다.
자연히 얼마 전에 있었던 동릉에서의 일이 중심이 되었다.
“남 뒤통수치는 짓거리는 여전하구만.”
도적 연맹의 부역자였던 송하상단 수하를 조진 일임에도 팽철은 관중연을 씹으며 이를 갈았다.
모르긴 몰라도 관중연에게 뒤통수 찐하게 맞은 경험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
“고생이 많았겠어.”
깊은 위로와 함께 팽철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면서 내게 깊은 호감을 보였다.
남자의 호감 따윈 달갑지 않지만.
‘아, 설아 누나 보고 싶다.’
갑자기 설아 누나 생각이 났다.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지, 고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들었다.
그런 내 속마음과 달리 내게 동질의식을 느낀 팽철은 짜증과 함께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냈다.
“그 새끼가 나한테 먹인 게 천일취였어.”
관중연과 대작비무라는 것을 했는데, 그때 관중연이 천일취를 먹였다는 것이다.
“대작비무(對酌比武)……라면 그거죠? 술 놓고 술 먹기?”
“열 잔 먼저 비우는 쪽이 이기는 거지.”
말만 비무가 붙었지, 사실상 술자리 여흥이다.
규칙도 간단하다.
각자 탁자 위에 술을 채운 술잔을 늘여놓고 먼저 술을 다 비우는 쪽이 승리하는 것이다.
다만, 일반적인 대작과 달리 이 놀이는 술을 마시는 사이사이 상대가 술을 못 마시게 방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술자리 여흥이니만큼 진지한 비무가 아니니 분위기를 망치는 짓은 금지되어 있다.
‘그런 자리에서 천일취라…….’
한 잔 마시면 천 일간 취한다는 술이다.
물론 진짜 천일을 재운다는 건 아니다.
그쯤이면 독약이지.
그 정도로 독한 술이라는 것이다.
밑밥을 깔아놓은 채 만반의 준비를 갖춘 관중연이라면…… 어렵다.
‘몰래 깔아놓은 독한 술에 취한 채 생각보다 빠르고 사납게 치고 들어오는 초식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도 좀 했을 것이고…….’
팽철이 어떻게 당했을지 일목요연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완벽하게 판을 짜놓은 상태에서 단기 결전을 걸어오는 관중연이라면…… 어지간하면 싸우고 싶지 않다.
말 그대로 온갖 개짓거리를 다 부릴 것이기 때문이다.
관중연의 실력은 무공의 고하로 나눌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특히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 무척이나 골치 아프다.
“그럼 그 부러진 쇳조각은…….”
“그때 깨진 내 칼.”
“아하!”
“덕분에 집에서 엄청 깨졌지. 용린대 같은 놈들과 뭐 하러 내기를 하고, 내기를 했으면 이겨야지 졌다고. 관중연 그놈에겐 내기에서 진 걸로 부탁 하나 들어달라는 목줄도 생겼고……. 빠득!”
아주 양각으로 탈탈 털렸나 보다.
쇳조각을 보자 눈이 뒤집힌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이걸 내게 내밀었다는 건, 하북팽가가 남궁세가를 도왔으면 한단 거겠지?”
“예.”
“뭐, 좋아. 돕지.”
거의 즉답으로 수락했다.
“가문에서 내 입김이 꽤 먹히는 편이니까 기각되는 일은 없을 거다.”
“진짜로요?”
“진짜지, 새꺄.”
의심스럽단 기색을 슬쩍 내비쳤더니 바로 본성이 나온다.
그러면서도 팽철은 히죽 웃었다.
“모용세가와 달리 우리는 뒤통수가 간지러운 것이 영 거슬렸거든.”
모용세가는 적당히 장강을 내어주고 남궁세가를 방패막이로 써먹을 생각이라고 했다.
하북팽가는 그런 모용세가의 결정이 내심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런데 뒤통수라니?’
도적 연맹이 남쪽에 있으니 북쪽에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 있다는 의미다.
그러자 바로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북란대전?”
“눈치가 빠르니 좋구만. 요즘 그쪽 기색이 영 심상치 않거든.”
하북팽가의 신경은 북쪽으로 집중되어있다는 것 같다.
하북팽가 입장에서는 배후의 안정을 위해 기회만 닿는다면 남궁세가를 도와 도적 연맹을 삭초제근(削草除根) 하는 쪽으로 의중을 두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겸사겸사 거슬리던 목줄도 뜯어낼 기회인데, 나야 반대할 이유가 없지.”
팽철은 쥐고 있던 쇳조각을 종잇장마냥 구깃구깃 뭉개 구석에 던져버렸다.
속이 다 후련한 표정이다.
그걸 보니 어째 아까운 패 하나를 잃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접었다.
엄연히 따지자면 내 것도 아니었으니 딱히 손해랄 것도 없다.
“나중에 관중연 사지 꺾을 때 꼭 부르라고. 같이 하게.”
“거 좋네요.”
오히려 마음이 통할 좋은 지기를 얻었으니 큰 이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남은 문제는 하난데…….’
모용세가.
제갈세가나 하북팽가와 달리 이쪽은 처음부터 남궁세가를 이용해 먹을 생각으로 가득한 곳이다.
짤막하게나마 얻은 정보를 종합해 봐도 모용세가를 설득하는 것은 제갈세가나 하북팽가와 달리 무척이나 힘들 것 같다.
***
“오늘따라 손님 방문이 잦군.”
모용세가가 머물고 있는 곳을 찾자 들은 말이다.
아무래도 내가 하북팽가에 갔던 사이, 남궁조 대협이 나름 먼저 움직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투를 보니 좋은 대답을 받아내진 못한 것 같다.
모용세가를 대표하는 모용진이라는 인물에게선 어딘가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
“도적 연맹을 장강에서 몰아내자는 의견을 들고 왔는가?”
“맞습니다.”
북천대협이라 불린다는 모용세가의 명숙은 난처하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곤란하구먼.”
완곡한 말이다.
승낙은 아니지만, 거절도 아니다.
겉만 보면 예의 바른 중년인이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품격 있는 정파 무인의 귀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눈엔 전혀 다르게 보였다.
능구렁이다.
어째 이 사람의 어투에서 뱀이 떠올랐다.
능구렁이가 말을 이었다.
“도적 연맹의 근황에 관해 들은 것이 있나?”
“뭔가 변한 것이 있습니까?”
“흩어졌던 힘을 다시 장강으로 불러들이는 중이라는군. 필경 ‘우리’ 오대세가의 힘이 집결하는 것에 경각심이 든 것이겠지.”
특히 ‘우리’라는 대목에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고 느꼈다면 착각일까?
마치 나와 남궁한, 남궁세가 무인들의 분투 따윈 없고, 오롯이 모용세가의 위용 때문이라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도적 연맹을 상대론 검 한 번 휘두르지 않았으나, ‘우리’의 존재감은 적을 물러나게 만들었네. 이것만으로도 남궁세가가 안휘의 북부와 중부를 수복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겠지. 이만한 도움으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염치없는 놈이라고 후려치고 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지 사부님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도 이런 곳엔 발도 담그기 싫다.
하지만 어쩌겠나. 상황이 이런걸.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능구렁이가 스르르 움직이며 지 좋을 명분을 선점한다.
“물론 나도 편치만은 않네. 마음 같아서는 이 몸 하나쯤 협을 위해 바치고 싶다네. 허나 나는 지금 가문을 대표하고 있네. 가문의 손해가 뻔히 보이는 길 위로 혈족의 피를 뿌릴 수는 없네.”
“도적 연맹을 내버려두면 힘을 키울 겁니다. 탐관오리들과 연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저들은 단단한 뒷배를 두고 있습니다. 지금은 남궁세가의 위험일 뿐이지만, 장차 정파에 큰 해악을 끼칠 것입니다.”
“어쩌겠는가. 힘이 부족한 게 안타까울 뿐이라네.”
이야기가 헛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무슨 말을 해도 어긋나니 설득도 힘들다.
‘잠깐.’
그러고 보니 팽철이 했던 말 중에 모용세가와 무관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북방이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이 이야기는 마냥 무시하기 힘들었는지 잠깐이지만 모용진의 얼굴에 반응이 있었다.
“팽가에서 들었나?”
“예.”
“허면 더 힘들지 않겠나? 북방이 심상치 않은데 가문의 전력을 밖으로 빼내 위험을 자초할 수는 없다네.”
“그때도 오대세가가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는 것이 좋긴 하겠지.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네.”
‘고려는 개뿔.’
싫다는 소리다.
까놓고 말해 자신들은 남궁세가처럼 당할 일이 없다는 자신감이다.
‘글렀네.’
모용세가를 끌어들이는 일은 실패다.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
그저 모용세가의 결정이 ‘인과’에 의한 ‘업보’가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