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304
303화 복장 한번 뒤집어볼까요?
나는 물끄러미 범각을 바라보았다.
범각은 어딘가 여유가 없어 보였다. 아니, 여유가 없는 것을 넘어 애먼 짓거리를 벌였다.
범각 이놈이 얼빠진 데다가 오만한 구석도 있는 편이긴 하지만, 아주 생각 없이 사는 놈은 아니다.
방금 산문에서 범각이 보인 행동은 노골적인 의도가 다분했다. 머리가 생각이라는 것을 한 다음에 저지른 행동이라는 소리다.
“야, 솔직히 털어놔. 뭔 일이냐?”
직설적인 물음에 범각이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태사조님 상황이 좀 그래.”
“신승 어르신이?”
소림 최고 존엄께서 상황이 안 좋다니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허도진인께 끌려가며 눈물을 글썽이던 무당파 장문인을 직접 봤는데, 신승 어르신이라면 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말이야…….”
의아해하는 내게 범각이 설명을 해줬다.
생각지도 못했던 맹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불편한 웃어른…인가.’
근래 신승 어르신은 소림의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셨다고 한다.
일반적인 소림 제자들에게는 명절날 찾아온 성격 나쁜 어르신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도 않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성가신 잔소리를 해대는 껄끄러운 어른 말이다.
“게다가 신승 어르신은 이전부터 좀 경원시 되는 부분이 있었거든.”
“뭔지 알겠네.”
혜원 스님이 내 소림권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고 연결해주려 하셨던 분이 바로 신승 어르신이다.
그 정도로 신승 어르신은 누구보다 소림무공의 원류를 추구하셨다.
당연히 변모한 소림무공에 익숙해진 소림 제자들에겐 거슬릴 수밖에 없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수련이 부정되는데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자신들이 옳고 신승 어르신이 틀렸다고 여길 것이다.
대놓고 정통파를 부정하지는 못하겠지만,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식으로 몰아갈 공산이 높다.
아마도 처음 만났을 때 범각이 했던 말을 그대로 떠들어대겠지.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대충 소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려졌다.
“그럼 달마 사…조님을 언급한 것도?”
나도 모르게 사부라고 부를 뻔한 것을 가까스로 틀었다.
“일단 태사조님이 좋은 쪽으로 관심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소림 제자들에게 달마 조사님의 흔적은 아무래도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으니까. 아마 달마 조사님이 쓰시던 밥그릇도 소중히 떠받들걸? 하물며 마지막으로 남기신 무공이면.”
이 또한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서 범각이 왜 이렇게 나섰는지도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나도 좀 살아야지.”
“너도?”
“소림에서 내가 어느 쪽 사람이라고 여겨지겠냐?”
“아하!”
“감히 태사조님께 개기지는 못하니까 만만한 나를 툭툭 건드리는 작자들이 꽤 있어. 구닥다리 정통파의 실체라나 뭐라나.”
신승 어르신은 못 건드린다.
연세가 상수(上壽:100세)를 넘었지만, 아직도 무쌍의 무위를 자랑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돌려 깎는 거다.
정통파가 대단한 게 아니라 그저 신승 어르신이라는 개인이 뛰어난 것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치졸하네.’
아니, 이건 그냥 치졸하다는 말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무맥이란 대대로 이어나가기 위한 것이다. 정통파의 무맥이 현재 소림이 추구하는 무맥보다 뛰어나다는 결과를 가시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신승 어르신의 입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결과를 내도 후폭풍이 클 것이라는 점이다.
나름 발전하겠답시고 이것저것 보강해서 구축한 것이 지금의 소림무공이다.
하지만 신승 어르신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면 지금까지 해온 온갖 노력이 장대한 뻘짓이 되어버린다.
발전은커녕 퇴보를 했는데, 그게 옳다고 자화자찬한 얼간이들이 되는 것이다.
골치 아픈 일이다.
고쳐도 문제고, 고치지 않아도 문제라니.
결국, 방법은 하나다.
자발적으로 바뀌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통렬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가능할까?
무림의 태산북두로 자부심이 높은 소림이다.
그런 소림이 바뀔 수 있을까?
‘방법이 하나 떠오르기는 하는데…….’
“일단 어르신께 가봐야겠다.”
“같이 가.”
범각이 따라붙었다. 의외다.
삼양현에서 신승 어르신께 굴려질 때 기회만 되면 도주를 감행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눈초리에 범각이 얼굴을 찌푸렸다.
“처맞지 않으려면 강해져야지.”
“틀린 말은 아니네.”
범각도 나름 필사적이다.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괄목상대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그렇게 범각과 함께 신승 어르신이 기거하시는 초옥으로 향했다.
“왔구나.”
안으로 들어서자 온몸에 날카로운 살기를 흉기처럼 두르고 계신 신승 어르신이 맞이해주셨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랴.
소림 무승들이 살계를 열고 악인들 뚝배기를 깨부술 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당장에라도 한 몸 내던져 소림 내 불순분자들 대가리를 깨부술 생각으로 가득해 보였다.
‘휴우! 서둘러 오길 잘했네.’
신승 어르신이 성급하게 행동하시면 득이 될 게 없다.
학의 주구들은 오히려 신승 어르신이 일으킨 혼란을 명분 삼아 소림에서의 영향력을 높일 것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적을 특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명분까지 넘겨준다면 정말 답이 없어진다.
무엇보다 신승 어르신께서 가셔야 할 곳은 지옥이 아니라 극락정토여야 한다.
좋은(?) 곳으로 가셔서 달마 사부님을 도우셔야 할 분이 이상한 곳으로 가면 내가 매우 곤란해진다.
“좋은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던 신승 어르신의 열기를 빼내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중토신공에서 크게 성취를 봤다고?”
“예. 신경과 이어지는 세맥에서 성과를 보자 벽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흐음… 세맥이라…….”
신승 어르신은 꽉 막힌 성향이 아니다.
정확히는 한 가지에 관심이 생기면 무식하리만치 파고드는 성격에 속한다.
학의 주구들을 척결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과몰입해 계신 것을 달마 사부의 유산인 중토신공 쪽으로 돌려놓으니 빠르게 열기가 식었다.
물론 가슴속에 담으신 분노를 지워낸 것은 아니지만, 당장 폭발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시기에 그만한 성취를 보았다니. 부처님이 보우하셨구나.”
“예. 그런 모양입니다.”
이와 같은 시기.
굳이 말을 더하신 것만 봐도 아직 학의 주구들을 향한 적의가 들끓는 게 느껴진다.
“제가 왔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반드시 소림을 정상으로 돌려놓겠습니다.”
나는 신승 어르신과 한배에 타고 있음을 강조했다.
아군 하나 없이 몰려있다는 압박감을 해소할 수 있고, 무엇보다 신승 어르신이 멋대로 날뛰면 한배를 탄 나도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부각하기 위함이다.
“……아미타불.”
다행히 내 의사를 받아들이신 것으로 보인다.
비로소 여유가 생기셨는지 신승 어르신의 시선이 내 옆으로 향했다.
“네가 나를 찾아온 건 처음이구나.”
“배움을 청하고자 왔습니다, 태사조님.”
“그으래?”
아군이 더 있다는 사실이 흡족한지 신승 어르신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걸렸다.
그렇게 여유를 되찾은 신승 어르신이 물었다.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마음을 가라앉혔으니 계획을 들어보자꾸나.”
그걸 깨달으실 정도라면 충분히 이성이 돌아온 것이니 이야기를 꺼내도 되겠다.
“사실, 소림에 오기까지는 어르신만 믿고 보조만 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서론이 길구나.”
핀잔을 주는 신승 어르신의 표정에서 무안한 기색이 느껴진다.
어째 신승 어르신 역시 뜻대로 소림을 움직일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던 것이 아닌가 싶다.
“산문 앞에 계시는 지객승에게 신승 어르신께 배운 무공에 성취가 있어 찾아왔다고 말했더니 범각이 재미있는 일을 벌였습니다. 제가 달마 조사님의 무공을 대성한 것이냐며 소리를 치더군요.”
“소문이 쫙 퍼졌겠군. 머리 민 녀석이라면 모르는 놈이 없겠어.”
“예, 그럴 겁니다.”
나는 슬쩍 범각을 살폈다.
범각은 죄인이라도 된 것마냥 고개를 푹 숙였지만, 나는 책망하기 위해 눈치를 준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성가시다 생각했습니다만, 소림 내부 상황을 듣고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건 활용할 수 있겠더라고요.”
“오호라.”
바로 알아들으신 것 같다.
“……???”
다만 멀뚱거리고 있는 범각의 상태를 보아하니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지금 소림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림방장과 신승 어르신의 분쟁은 권한과 권위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 싸움은 신승 어르신께 불리합니다. 그렇다면 불리한 판을 엎어버리고 유리한 판으로 자리를 바꿔야겠죠.”
소림 제자라면 껌뻑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달마 사부의 중토신공이다.
그런 중토신공을 대성했다는 소문의 근원이 신승 어르신 옆에 머문다면 어떨까?
과거 내가 중토신공을 해석했다는 내용이야 소림 상층부라면 알고 있을 테지만, 그걸 제대로 익혀서 대성한 것은 다른 문제다.
내가 중토신공을 익히고 대성한 기간을 생각한다면 중토신공이 속성으로 익힐 수 있는 무공이라 오판할 가능성이 크다.
당연히 소문을 접한 소림 제자들은 더욱 몸이 달아오를 거다.
문제는 그 중토신공을 쥐고 있는 것이 신승 어르신이라는 점이다.
“신승 어르신은 실질적인 권한은 없으십니다. 하지만 권위는 높으시죠. 설령 소림방장이라 할지라도 그 권위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습니다. 신승 어르신께서 소림방장의 권한을 함부로 침해할 수 없는 것과 같죠.”
“허나 방장에게는 녹옥불장이 있다. 무리수를 각오하고 녹옥불장의 권한으로 내게 지시를 내릴 수도 있다만?”
“기다리라고 하시죠. 아직 정리가 다 되지 않았다는 명분이면 충분합니다.”
“기다리라…… 푸훕!”
소림방장이 신승 어르신께 뭐라 말하며 손을 떼게 했는지는 쉬이 짐작이 된다.
모르긴 몰라도 일단 알아보겠다는 식으로 얼버무렸을 것이다.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닦달을 한다면 신승 어르신이 알고 계시는 부분만 전달하면 됩니다.”
내가 중토신공을 해석했을 때, 그걸 신승 어르신 혼자 꿀꺽했을 리가 없다.
당연히 자격이 되는 소림 상층부도 이를 접했을 것이다.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만 알려준다면 그들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신승 어르신의 편에 서야 진짜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이를 통해 영향력을 넓히면 신승 어르신을 따르는 실무진이 늘어난다.
없던 권한이 생기는 것이다.
그 권한을 움직여 학의 주구를 밝혀내 공론화시킨다면 소림은 움직이고 싶지 않아도 움직일 수밖에 없다.
지금쯤이면 무당파에서 있었던 사건도 꽤나 알려졌을 것이다.
소림 내부에도 그런 간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경각심을 품은 사람들도 제법 있을 것이 분명하다.
“허면, 소림방장이 네게 지시를 내린다면 어찌하겠느냐?”
장수를 잡으려면 말을 노리라고 했다.
신승 어르신의 권위에 함부로 도전할 수 없다면 그 주변을 노리는 것이 정석이다.
나는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잊으셨습니까? 저는 소림의 ‘명예 제자’입니다.”
명예 제자는 어떤 책무도 없는 명예직이다.
책무가 없으니 책임 또한 없다.
따라서 녹옥불장의 권한으로도 나를 어찌할 수 없다.
“이참에 소림방장의 복장 한번 뒤집어볼까요?”
“하하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신지 신승 어르신이 박장대소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