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354
353화 무(武)로써 협(俠)을 이룬다
삼악도 호걸들은 무공 특성 때문에 점혈에 무지했다.
일행 중에 해혈이 가능한 사람은 나와 종 노 정도였다.
다행히 혈교 마인들의 점혈법은 모두 동일한 수법이었기에 해법이 밝혀진 뒤로는 쉽게 해혈이 가능했다.
내공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좀 더 빠르게 끝낼 수 있었겠지만, 애석하게도 도시 내에 무인들은 전멸한 상황이었다.
도시 내에 있던 표국과 무관 중 무당파와 연관된 곳은 어김없이 포구 마을에서의 참상이 재현되어 있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참상에서 느껴지는 원한의 흔적으로 윤시후 그놈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윤시후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윤시후가 무당파 속가제자들을 잔인하게 다루라는 지시를 내렸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실제로 십만대산에서 때려잡았던 혈교 마인이 윤시후를 소교주라 칭했었다.
그만한 권력이 생겼다면 이 정도 영향력은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혈교에 입문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 정도까지 지위를 올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놈이 진짜로 혈교의 소교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어쨌거나 문제는 심각하다.
흑기를 쓰는 놈들과 달리 이놈들은 어느 정도 양산이 가능하다.
혈교 마인들의 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이놈들이 작정하고 호북에서 혈겁을 일으킨다면 피해가 얼마나 커질지 가늠할 수 없다.
무당파에서 사태를 파악하고 움직인다면 막아내기야 하겠지만, 그 전까지 흘릴 피가 적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를 사전에 차단할 필요가 있다.
혈교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먼저 움직여 막아내야 한다.
“…….”
그렇게 고민에 빠져있는데,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자기들 딴에는 조용히 속삭인다지만 귀가 밝다 보니 대화가 고스란히 들렸다.
무엇보다 그 대화 속에서 빠지지 않는 ‘용신’이라거나, ‘장강용왕의 화신’이라는 단어가 더욱 신경이 쓰이게 했다.
농담이 아니라 횡액을 당한 상황만 아니라면 내 앞에 제단이라도 차릴 기세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어린 여자아이의 눈빛이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수군거렸지만, 이 아이는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요망하게 내 엉덩이를 쓰다듬은 것부터가 보통은 넘는 아이였다.
“이화야.”
“예.”
“저 아이 말이야…….”
“제낄까요?”
“……어디서 배운 말이니, 그건.”
여자아이를 노려보는 이화의 눈빛은 그야말로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떨떠름한 기색을 보이자 이화도 스스로의 발언이 천박했다고 느꼈는지 살짝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조용히 타일러서 보내렴.”
“……예.”
내 지시에 이화는 곧장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품에서 당과를 꺼내 아이에게 내밀었다.
“이거 줄 테니 다른 곳으로 가렴.”
품에서 나온 걸 보면 이화 본인이 먹으려고 아껴두었던 간식인 것 같았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아이를 구슬리는 데 단 것은 확실히 효과적이다.
“이 당과 언니 거예요?”
“응.”
“헤에……. 어리네요.”
내가 잘못 본 걸까?
한순간 이화의 뒷목에서 혈관이 불끈 치솟는 게 보인 것 같았다.
배포가 보통이 아님은 알았지만, 진짜 당돌한 아이다.
이화를 엿 먹이다니. 난다 긴다 하는 천마신교의 마인들도 하지 못한 위업을 해냈다.
다만, 저대로 뒀다간 이화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나서기로 했다.
‘쉽게 가자, 쉽게.’
결국, 뭔가 원하는 것이 있으니 저러는 것이다.
이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화를 삭이게 한 뒤 몸을 숙여 아이와 눈을 맞췄다.
“뭔가 할 말이 있니?”
보통 이런 식으로 눈을 마주치면 압박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어느 정도는 의도한 행동이었지만, 아이는 피하지 않았다.
크게 움찔거리긴 했지만 끈질기게 눈을 마주쳤다.
‘겁 없는 철부지는 아니네.’
위압감을 느꼈음에도 꿋꿋하게 버틴다.
용기가 있는 아이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부탁이 뭘까?”
“오빠는 용신님이잖아요. 용은 상서롭다고 했어요. 그러면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들어줄 수 있을 거예요.”
세상을 더 좋게.
더 아름답게.
아이가 내게 바라는 소망이다.
“그럼 이런 일도 없어질 거고,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거예요.”
어리기에 가질 수 있는 순수함이 때 묻은 어른이 된 내 가슴을 찔러왔다.
“그래…….”
“너는 어리더라도 용이니, 언젠가 크게 되지 않겠느냐. 언제고 훗날 이 말이 네 안에 남아 있길 바랄 뿐이다. 어여삐 여겨다오.”
왜 지금 과거 취죽 선생이 했던 당부가 떠오르는 것일까?
협(俠).
내가 걷는 길이자, 걸어가야 할 길.
해내야 하는 의무.
무(武)로써 협(俠)을 이룬다.
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근본이 다시 한번 선명하게 떠오른다.
“잘 알았다.”
“정말요?”
“그래, 그러니 부모님이 걱정하시기 전에 얼른 돌아가렴.”
“예!”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였던 모양이다.
세상을 구하기라도 한 것처럼 활짝 웃으며 여자아이는 부모를 향해 달려갔다.
안절부절못하던 여자아이의 부모가 아이를 끌어안는 것이 보인다.
여간 걱정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좋은 가족이다.
“아…….”
그들을 보니 한 가지 머릿속을 스치는 걱정이 있었다.
삼양현.
무종이라는 별호가 부담스러웠던 나는 줄곧 호북 삼양현 사람 연청운으로 나를 소개하곤 했다.
흑기를 쓰던 놈들이 나를 노리고 매복을 했다면, 삼양현을 노릴 가능성도 충분하다.
삼양현의 위치가 무당파 본산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기에 호북을 들쑤시고 있는 지금 삼양현으로 접근하는 짓은 상식 밖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애당초 내가 무당파 속가제자들을 상대로 혈겁을 펼치는 범인이 윤시후라고 추정했음에도 삼양현을 바로 떠올리지 못한 이유다.
하지만, 미친 짓을 하고 있는 미친놈들을 상식선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혈교의 정신 나간 행보를 생각한다면 단언할 수 없다.
“삼양현으로 가자.”
혈교의 행보를, 윤시후의 악행을 막아야 한다.
나를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
“으아아아아아!”
비명이 울려 퍼진다.
호협한 기상을 자랑하는 화산의 정상이자, 화산파의 본산이었던 곳에서는 낯선 소리다.
하지만 요 근래에는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익숙해진 소리이기도 했다.
“쯧!”
고막을 자극하는 소리에 매경풍이 혀를 찼다.
“자공진인이 생각보다 목청이 크군.”
매경풍은 지금 귀를 아프게 하는 비명 소리의 주인을 잘 알고 있다.
전형적인 화산파 도인인 사람이다.
호협한 기상을 가졌고, 화산파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지금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곡기도 끊고 팔다리도 잘렸으면 기력이 쇠할 만도 한데 말이지.”
자허진인의 도주 이후 화산파가 쪼개진 것은 그 당시 정당한 명분이 매경풍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매경풍의 주장을 불신하는 이들은 화산파를 떠났고, 매경풍의 말을 믿은 이들은 어떻게든 화산파의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리를 지켰다.
화산파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이를 악물고 동문들에게 검을 겨눴다.
그러나 그 정당해 보이던 명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종남파 제자들이 화산에 들이닥치면서 더 이상 위선을 떨 필요가 없어진 매경풍은 순식간에 화산파를 집어삼켰다.
그렇게 독 안에 든 쥐가 된 화산파 제자들에게는 양자택일의 선택권이 주어졌다.
혈교의 대법을 받아들이고 혈교의 마인이 될 것이냐, 아니면 혈교의 대법을 위한 제물이 될 것이냐.
공포를 이겨내지 못한 일부가 매경풍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끝까지 거부한 화산파 제자들에게는 생지옥이 펼쳐졌다.
육체를 고문하고 정신을 붕괴시키는 조치들이 취해졌다.
그렇게 화산파는 완전히 멸천회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남은 것은 제물로 삼기 위한 극소수의 생존자들뿐.
계획대로 화산파의 모든 것을 손아귀에 넣었음에도 매경풍의 표정에는 불쾌감이 감돌았다.
“돌아가는 상황이 영 께름칙하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었지만, 단 한 가지 변수가 화룡점정(畵龍點睛)을 망가트렸다.
종남파 장문인이 화산을 오르다 죽은 것이다.
문제는 그 흉수로 지목된 것이 흑살대라는 점이다.
종남파는 이를 두고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 주장했다.
그러면서 매경풍 역시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아예 화산파에 자리를 잡아버렸다.
매경풍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멸천회는 아직 천하를 평정하지 못했다.
설령 토사구팽할 생각이 있었더라도 천하를 평정한 이후지, 앞으로 큰 싸움이 있을 지금은 아니다.
하지만 종남파 장문인이 흑살대 소속으로 보이는 자들에게 살해당한 것도 사실이다.
당연히 매경풍 본인도 삶아질 수 있다는 의심의 씨앗이 심어졌다.
그렇기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자 화산파 제자들을 혈교의 마인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도 곧 마무리가 되니까.”
집안 정리가 끝났으면 밖으로 눈을 돌릴 차례다.
“차차 인근 속가제자들도 흡수하고, 윗분들의 동태도 살펴야겠네.”
힘이 없으면 밟힐 뿐이다.
그럭저럭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로 힘을 갖춘 매경풍이 슬슬 움직일 방향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
“흐흐흐…… 진충 자네 말이 맞았네…….”
종남파 속가제자 장일선이 반쯤 정신줄을 놓은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방에 시체가 늘어져 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눈앞의 현실은 끔찍했다.
“내 아들…… 내 조카……. 진충 자네도 거기 있는 겐가…….”
장일선의 앞에 놓은 것은 산처럼 쌓인 시쳇더미였다.
위에는 아직 다 썩지 않은 시체들이 얹혀 있었고, 그 아래 깔린 것들은 백골이 드러나기 시작한 뼈다귀들이었다.
텅 빈 해골의 어두운 부분이 장일선을 바라보는 시선인 것처럼 음울한 빛을 내었다.
그런 장일선은 혼자가 아니었다.
“미친놈들…… 개도 안 먹을 쓰레기들…….”
“으어어엉! 건아, 이 아비가 죽일 놈이다! 이 아비가 죽일 놈이야!! 으어어어엉!”
종남파 본산제자의 습격 뒤, 장일선은 섬서 일대를 돌며 종남파 속가제자들에게 진실을 알렸다.
종남파 본대가 돌아오기 전에 거사를 일으켜야 했기에 최대한 서둘렀다.
장일선처럼 자식들과의 연락이 끊어진 종남파 속가제자들은 장일선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
둘은 넷이 되었고, 넷은 여덟으로, 여덟은 열여섯이 되었다.
그렇게 며칠 만에 종남산 인근 속가제자들을 모아 세를 형성한 장일선은 그대로 종남파 본산을 쳤다.
혈교의 대법을 받은 종남파 본산제자들은 비록 이대와 삼대제자들에 불과할지라도 속가제자들의 역량을 능가했지만, 압도적인 머릿수를 이겨낼 정도는 아니었다.
크나큰 희생을 치렀지만, 끝끝내 종남파의 산문을 넘은 속가제자들은 눈 앞에 펼쳐진 참상에 할 말을 잃었다.
“으허허허………….”
각오를 다졌음에도 다리의 힘이 쭉 빠지는 참상에 장일선은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장일선을 더욱 허탈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들의 힘으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점이었다.
종남파를 점거했다지만 진짜 원흉들은 대부분 화산파에 있었다.
그 진정한 원수들을 징치할 힘이 없었다.
고작해야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종남파를 불태우는 것뿐이었다.
그때였다.
“복수하고 싶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든 장일선은 뒷머리가 삐죽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살기가 짙군.”
“……누구냐?”
적의가 없는 것을 알아본 장일선이 정체를 묻자, 상대는 순순히 이름을 밝혔다.
“사천연합 총군사, 제갈신무.”
그는 제갈신무였다.
사천연합의 본진을 이끌던 중 종남파 인근에 퍼진 소문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
제갈신무가 냉정한 눈으로 장일선을 바라보았다.
“목숨을 버릴 각오가 있다면, 종남파에 복수할 기회를 만들어주지.”
“그것이 정말이오?!”
기회의 대가가 목숨이라는 제갈신무의 제안에 장일선이 눈을 부릅떴다.
희망인지 희망을 가장한 절망인지를 가늠했지만, 고민의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내가…….”
결정을 내린 장일선의 주변으로 하나둘 종남파 속가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 기척을 인식한 장일선이 말을 바꿨다.
“……우리가 뭘 하면 되겠소?”
장일선의 주변에 모여든 자들은 모두 복수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