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357
356화 아직 웃을 수 있어
지나간 모든 기억은 추억으로 남는다.
그렇게 잊히지 않고 남은 추억은 일반적으로 극과 극으로 나눠진다.
매우 좋거나, 매우 나쁘거나.
당연하다.
일상적인 기억은 거의 남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몇 년 전 일상적으로 먹은 아침 식단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특별하게 남을 만한 사건이 없는 한 어지간한 기억은 묻혀버린다.
그렇기에 남겨진 추억에는 특별함이 있다.
추억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백무호는 화산파에서 남긴 추억거리가 제법 있다.
워낙 성격이 특출난 편이다 보니 사고도 적잖이 쳤다.
“역시 하산하기 전에 옥녀지에다 오줌을 갈겼어야 했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백무호가 키득키득 웃었다.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인지라 주변의 시선에 걱정이 담겼다.
직설적인 성격인 팽철은 백무호를 보며 머리 옆으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기도 했다.
“돌았냐?”
“씁! 이게 정신무장이란 거란다, 새꺄.”
“아, 그러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지만, 팽철은 퉁명스럽게 받아넘겼다.
키득거리는 웃음 주변으로 날 선 살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주변에서는 걱정의 시선을 지우지 않았다.
“이번 일은 빠지는 게 나을 것 같다.”
사천당가의 가주 당천기가 진지하게 권유했다.
당천기의 성정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드문 경우다.
“답지 않게 오지랖이십니다?”
팽철이 읽어냈던 대로 백무호는 무척이나 날카롭게 반응했다.
한 가문의, 그것도 무림의 그 누구도 척지는 것을 꺼린다는 사천당가의 수장에게 할법한 말버릇이 아니다.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의미다.
허나 당천기는 이를 모두 이해한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며 조언했다.
“오래갈 게야.”
상처를 입는 건 몸뚱이만이 아니다.
정신도 상처를 입게 된다.
몸에 입은 상처보다 정신에 그어진 상처가 오래간다.
실제로 무림초출에서 살인을 경험한 후기지수가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일선에서 물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백무호는 피식 웃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웃을 힘이 남아있으면 아직 버틸 만한 거라고.”
“기어이 가겠다?”
“당연하죠. 지금 저 웃고 있는 거 안 보이세요?”
백무호가 스스로의 얼굴을 가리키며 보란 듯이 웃음을 지었다.
“제가 선두에 설 겁니다.”
“쯧! 맘대로 해라.”
기백이 느껴지는 백무호의 태도에 당천기가 혀를 차며 물러났다.
백무호와 당천기 사이의 대화를 들은 이들 역시 걱정을 지우지 못했지만, 딱히 반론을 하지 못했다.
백무호에겐 화산을 탈환해야 할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확답을 받은 백무호가 다시 한번 웃으며 일행의 선두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검을 쥐었다.
스르릉.
서늘한 한기와 함께 자허진인의 검이 뽑혀 나왔다.
“매경풍…….”
웃는 얼굴로 이 길 끝에 기다리고 있을 개자식의 이름을 중얼거린 백무호가 숨을 크게 골랐다.
“갑니다!”
그리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돌겨어어어어억!
백무호가 앞장서자 그 뒤를 사천연합 무인들이 함성과 함께 뒤따랐다.
선두에서 화산을 오르는 백무호는 등으로 느껴지는 시선들을 선명하게 느꼈다.
“X발!”
당장에라도 멈추고 싶은데 등 뒤에서 떠미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짊어진 짐이지만,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렇게 화산의 정경이 눈에 익숙해질수록 그 앞으로 무수히 많은 추억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기억 밑바닥에 잠들어있던 것들이 병풍의 그림처럼 촤르르 펼쳐지는 것 같았다.
백무호는 그 추억들을 찢으며 질주했다.
행복했던 웃음소리가 고통스러운 비명으로 바뀌었다.
원혼의 울음이 되어 울부짖었다.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붉게 물들었다.
“웃어…… 난 웃을 수 있어. 아직 웃을 수 있어.”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다.
차라리 그게 덜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그 고통스러운 길목에서 한 무리의 무인들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종남파 제자들이다.
그들의 뻔뻔스러운 낯짝을 목도하는 순간 백무호는 끓어오르던 무언가가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이 개자식들아아아아아!!”
폭발한 분노가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며 힘을 끌어냈다.
땅을 박차는 순간 힘을 증폭하며 몸을 날려 보냈다.
평생 쌓아온 본연의 내공과 자허진인에게 물려받은 내공, 그리고 각기 다른 두 힘을 굳건히 묶어낸 땅의 신력이 백무호의 전신 세혈로 흘렀다.
보통 사람이라면 오히려 힘이 꼬여 꺼꾸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백무호의 재능이 이를 제어해냈다.
얄궂게도 이 엿 같은 기분으로 인한 분노가 백무호의 재능을 개화시켰다.
백무호는 흉험한 기세로 강궁의 화살처럼 날아가 앞을 가로막는 종남파 제자들을 향해 검을 뻗었다.
빠르면서도 날카로운 화산의 검로에 초대 천마의 검의가 불어 넣어진 검.
설매검의 일초가 모든 것을 갈라낼 의지를 드러냈다.
촤아아악!
참단(斬斷)!
우악스러운 참격이 가장 선두에 있던 종남파 제자를 일격에 양단했다.
“뭐, 뭐냐!”
“이 무슨!!”
상식 밖의 무의에 당황하는 종남파 제자들 틈새로 들어간 백무호의 검이 매화를 뿌렸다.
화산의 검은 한순간 꽃의 형상을 그려낼 만큼 변화무쌍하다.
“죽어!”
변화무쌍함 속에 패도가 담긴 검로가 종남파 제자들이 밀집해있는 한가운데에서 천변만화(千變萬化)의 검화(劍華)를 그리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파파파파팟!!
검세에 휩쓸린 종남파 제자들이 찢겨나갔다.
한순간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뜨거운 피를 뒤집어쓴 백무호가 그대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콰드드드드득!
“쳐라!”
와아아아아아아!
“으악!!”
그리고 선봉의 뒤를 따르는 사천연합의 힘이 종남파 제자들을 덮쳤다.
종남파의 제자라면 무림에서 알아주는 강자들이다.
하지만 사천연합의 정예들 역시 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들인 것은 마찬가지다.
종남파 최고수들인 장로들이 굳건하게 버텨주고 있다면 모를까, 그 밑 단계인 일대제자들의 수준으로 감당할 전력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진형이 붕괴된 종남파 제자들은 덮쳐오는 파도를 만난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호오?”
그런 가운데 후방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입천신마존이 묘한 시선으로 백무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
거침없이 질주하던 백무호가 화산파 산문을 넘었다.
병풍처럼 펼쳐지는 추억들이 절정을 이루는 곳.
그곳을 넘어 화산 초입에 들어서는 순간 백무호는 실소(失笑)를 자아냈다.
“하… 하하…….”
웃을 수밖에 없는 광경.
웃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광경.
말라붙은 핏자국이 물든 화산파 도복을 입고 있는 이들.
검을 들고 백무호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정상이 아님을 알 수 있듯, 망가진 장난감처럼 비틀거리는 화산파 제자들이 검을 질질 끌며 다가왔다.
그저 살기만이 가득한 껍데기들이 백무호를 침입자로 취급하며 바라보았다.
껍데기들이 입을 열었다.
“ㅈ……ㅓ……ㄱ…….”
한계까지 혈교의 대법을 받아 망가진 화산파 제자들이다.
망가지고 이성이 사라졌음에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단 한 가지가 그들을 움직였다.
“화사…ㄴ…을… 위하ㅇ…ㅕ…….”
“우리가… 지 ㅋ ㅣ ㄴ 다…….”
자부진인에게 들었다.
비록 뜻은 갈렸다 하나 화산파에 남기로 했던 이들 또한 화산의 긍지를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채로 남아있는 긍지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백무호를 향해 검을 들었다.
“돌겠네…….”
당천기 가주의 말이 떠올랐다.
오래 갈 거라고 했던가?
“아저씨, 틀렸어요.”
오래간다?
평생 못 잊을 거다.
죽는 날까지 악몽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선봉인 백무호의 발이 멎었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저들은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베고 싶지 않은 것들이 검을 휘두른다.
화산파를 대표하는 검법, 이십사수매화검법이 피 냄새를 풍기며 날아들었다.
그에 맞서 백무호의 검이 설매검의 궤적을 그렸다.
서걱!
단번에 첫 상대의 목을 날렸다.
상대가 펼치는 검의 허를 한눈에 꿰뚫어 보고 그 사이로 검을 넣었다.
당연하다.
심기체가 무너진 채 검을 휘두르는 자들이다.
강화된 육신을 통해 펼치는 매화검법은 그저 빠르고 강하기만 할 뿐이다.
아무리 화산의 절기라 할지라도 그저 형에 불과하다면 삼류검법에도 미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 불균형을 하나로 맞출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재능이 만개하며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백무호의 설매검 앞에서 그저 파훼하기 좋은 허접한 껍데기에 불과했다.
서걱!
백무호가 다시 한번 피를 뒤집어썼다.
얄궂게도 검을 휘두를수록 백무호의 검은 완성되어갔다.
화산의 무공이 빚어내는 새로운 가능성을 찬란하게 꽃피웠다.
그 꽃 아래로 동문의 피가 쌓여갔다.
“아직 웃을 수 있어…….”
웃을 수 있다면, 아직 버틸 만한 거다.
스스로 했던 말이 족쇄가 되어 백무호를 움켜쥐었다.
서걱!
그렇게 마지막 한 명까지 베어버린 뒤, 백무호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자신의 얼굴인데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웃어야 하는데…….”
웃지 않으면 그대로 무너질 것 같다.
사람이 왜 미치는지 알 것 같다.
들끓는 감정이 머리를 정신없이 두들긴다.
그런 와중에도 분명하게 남아있는 의지가 무너지려는 정신을 받쳐냈다.
아직 이 길의 끝에 다다르지 못했다.
“매경풍…….”
그놈을 죽인다.
그러기 위해서 웃는다.
“아직 웃을 수 있어…….”
허물어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백무호의 앞을 가로막는 이들이 있었다.
스무 명쯤 되는 그들은 처음 마주쳤던 이들과 달리 이성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아…….”
백무호의 감정이 다른 이유로 들끓기 시작했다.
이성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 아직도 검을 들고 있는 것일까?
화산을 제압했던 종남파 무인들은 이미 이곳에 남아있지 않을 텐데?
“한 가지 물어도 됩니까?”
“…….”
혀가 잘리기라도 했는지 말 없는 그들의 대답은 화산파 검법의 기수식이었다.
백무호는 그들에게 다시 물었다.
“저 지금 웃고 있습니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화산파를 대표하는 검 중 하나인 매화삼릉검이었다.
화산파 특유의 변화무쌍함이 담긴 검초가 쏟아졌다.
백무호가 그 검세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살을 베는 소리도, 뼈를 가르는 소리도.
검이 부딪치는 소리도 없었다.
살기도 투기도 없는 검이 백무호의 주변을 가득 채운 채 멈춰 서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죽기를 원했다.
백무호의 검에 죽기를 바란 것이다.
“X발, 제발 좀…….”
얼마나 더 짐을 짊어지게 해야 속이 풀리는 걸까.
백무호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앞으로 나간 만큼 사방을 겨누고 있던 검들이 물러났다.
그중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를 향해 백무호가 손을 뻗어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비겁하게 도망치려는 겁니까? 예? 말 좀 해보라고요! 말 좀! X발!!”
무림에서 가장 고고하다는 화산파의 검수들이 그 자리에서 뒤엉켜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