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368
367화 팔다리를 잘라라
소수신마의 혈족이 짊어져야 할 업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이런저런 변화로 인해 작은 파장이 일었지만, 그 시간은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평온한 시기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멸천회주의 음모를 저지하고, 더 나아가 멸천회를 무너트려야 한다.
하지만, 멸천회주가 준비하는 대계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태라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한 변수도 하나 생겼다.
“이거 어렵네…….”
설아 누나가 이리저리 손발을 뻗으며 무공을 펼쳐보았다.
한번 움직일 때마다 중후한 힘이 공기를 뒤흔든다.
그저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주변에 여파를 만들어내는 모습은 어지간한 고수라도 혀를 내두를 정도지만, 설아 누나는 전혀 만족한 얼굴이 아니다.
분명 굉장하긴 하다.
하지만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설아 누나의 불만이 이해가 되었다.
설아 누나는 가진 힘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나보다 담아낸 힘의 크기가 작다곤 하지만, 오행신력의 순환을 이뤄낸 설아 누나의 힘은 이 정도가 아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기존에 설아 누나가 익혔던 무공인 명옥진기는 소수신마의 무공인 한천마경을 다듬어 개량했다.
기본적으론 한빙의 기운을 휘두르는 무공이다.
그저 초식을 교환하는 것만으로 상대의 기혈을 얼려버리고 내공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어 우세를 쥐는 것이다.
하지만 한빙의 기운이 사라지고 오행의 순환이 자리 잡게 되었으니 무공 역시도 새로이 쌓아야 한다.
기존에 익힌 무공을 대부분 폐기하고 새롭게 익혀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무공은 선계에서 만들어진 무공이다.
사부님들이 아니라, 설아 누나를 지지하는(?) 신선분들이 대거 참여해서 만든 신공절학이라고 하셨다.
[기본 바탕은 있는 아이니 금방 배울 게다. 애초에 명옥진기라는 무공을 낱낱이 해부해서 개조한 무공이니까.] [대양무절기라는 무공도 그랬지만, 이쪽도 현천궁 무공 색채가 꽤 짙어서 간단히 해결되었지. 흘흘흘.]익숙해지기만 하면 다 해결될 거라고 자신하신다.
누가 들으면 기절할 이야기를 태연하게들 하신다.
천하제일을 다툴 만한 무공을 식은 죽 떠먹듯 만든 것만으로 모자라 편의성까지 보장해놓은 것이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볼 만한 천고의 기연도 천상 분들에겐 그저 밤마실 나가서 떠드는 농담 따먹기에 불과했다.
솔직히 이 정도면 누가 내 멱살을 잡고 흔들며 세상 불공평하다고 피눈물 흘려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그러니까, 이걸 네가 만들었다고?”
피눈물까진 아니지만, 한산월 아주머니가 내 멱살을 잡고 흔들 때 당연히 할 말이 없었다.
한산월 아주머니의 경우도 한빙의 기운이 사라지고 막대한 물의 신력만이 남았다.
당연히 이분이 쓰실 무공도 새로 만들어줘야 했다.
문제는 무공의 출처다.
머릿속에서 선계 신선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할 수는 없다 보니 그 모든 공로를 날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예, 뭐.”
“미친놈이더냐?”
혼란을 수습한 뒤로는 원래의 성격으로 돌아오신 한산월 아주머니지만, 딱히 심기가 불편해 보이진 않았다.
은근히 설아 누나와 닮은 사고구조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은 백진성 아저씨의 말처럼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계의 어르신들은 이게 ‘새침부끄’라는 속성이라며 낄낄거리셨다.
“네 머리를 한번 열어보고 싶구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눈빛이 살벌하게 번뜩이는 것이 진심이 살짝 섞여 있는 느낌이다.
그런 나를 구해준 것은 설아 누나였다.
“어머니 운이 괴롭히지 말고 저리로 가요.”
설아 누나가 눈매 끝을 치켜세우며 한산월 아주머니를 밀어냈다.
노골적으로 내 편을 드는 설아 누나의 행동에 한산월 아주머니가 미간을 찌푸리셨다.
“제 낭군이라고 챙기기는. 입맞춤도 마음대로 못 하는 게.”
“엄마!”
“알았다, 알았어.”
눈꼴 시다는 듯 고개를 픽 돌린 한산월 아주머니가 백진성 아저씨에게 쪼르르 달려가더니 보란 듯이 품에 안겼다.
들으라는 듯 딸자식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느니 하며 하소연을 하더니 중간에 설아 누나와 눈이 마주치자 혀를 메롱 내밀기까지 하신다.
뭔가 지금까지 쌓여있던 한산월 아주머니에 대한 인상이 붕괴되는 느낌이다.
백진성 아저씨는 익숙하신지 실실 웃기만 하신다.
급박하게 흘러가는 세상의 흐름과 동떨어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해진다.
하지만 나는 마냥 그 편안함에 몸을 맡기고 있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주로 지키는 싸움을 해야 했다.
적의 정체도 모르고, 목적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한발 먼저 움직여야 한다.
선수필승(先手必勝)이 모든 곳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는 상황만은 피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를 어떻게 노려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생긴다.
병서(兵書)에 따르면 전쟁을 함에 있어 진퇴가 명확해야 하고, 노리는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지피지기(知彼知己). 멸천회주의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놈이 쥐고 있는 패가 무엇인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그 순간 장삼풍 사부의 말이 떠올랐다.
‘칼과 강도…….’
장삼풍 사부는 멸천회주의 행동을 칼과 강도의 관계로 설명하셨다.
칼이 잘못이냐, 강도가 잘못이냐.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지만, 인과는 후자에 책임을 싣는다고 하셨다.
즉, 멸천회주는 멸천회 휘하 세력들이 과율(過律)을 쌓는 부분에 한해선 직접적으로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직접 지시를 내리는 순간, 그로 인해 발생한 과율의 책임을 멸천회주 또한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칼을 쥐여 줄 뿐이다.
욕망을 키워내도록.
자발적으로 악행을 하도록 만든다.
적어도 과율이 쌓이는 선택지에선 그런 위치를 고수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과 같은 태평성대에 가까운 고요한 정세를 만들었다는 건 꽤나 역설적이긴 하다.
그렇기에 인과가 소모되는 것에는 편집증적인 반응을 보일 공산이 높다.
실제로 사부님들을 비롯해서 천상의 신선분들이 이따금 인과의 문제로 인해 탈이 나는 반응을 접했었다.
천마 사부의 경우 이화에게 신택을 내리는 것으로 인과가 부족해지자 이상한 반응을 보였었고, 천사대선께서도 인과가 부족해지자 인과가 소모되는 대답을 할 때 버벅거리며 괴로워하셨다.
구도가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면, 공략할 방도가 없진 않다.
‘운신의 폭을 좁혀버린다.’
멸천회주의 팔다리를 자른다.
칼을 쥐여 준 강도들을 쳐내버린다.
멸천회주가 꾸미고 있는 계획을 망가트린다.
인과의 역풍을 맞고 몰락시킬 방도를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이르니 극단적인 방법도 떠올랐다.
‘내 목이라면…….’
멸천회주는 말했다.
나는 거대한 인과의 덩어리라고.
자오경이라는 기물과 연결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동안 내가 쌓아온 결과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멸천회주에게 나는 독약 같은 존재라는 거다.
오행합일을 이루며 기량이 대폭 상승하긴 했으나, 상대는 소림이 창건되기 이전부터 신선의 몸으로 살아온 존재다.
순수한 기량 싸움으로 그를 이길 것이라 자신할 수 없다.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하고 있는데 사나운 꾸지람이 들려온다.
[방금 너 같은 표정을 짓던 얼간이들을 안다!]표정에서 방금 떠올린 극단적인 생각이 표출되었나 보다.
[네가 나, 이 천마의 적통 제자라면 응당 해야 할 것은 오로지 적을 꺾고 부수는 것뿐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찍어 누르는 것처럼 압박해온다.
마치 코앞에서 천마 사부가 얼굴을 들이밀고 꾸짖는 것처럼 느껴진다.
입에서 숨결 대신 불길을 토해내는 마신의 모습, 두렵지만 경외로 가득 찬 모습이 연상된다.
꼭 한번 만나 뵙고 싶다.
이전이라면 그저 두렵기만 했을 뿐이지만, 지금은 그런 느낌이 아예 없어졌다.
내 상상력이 만든 모습이 어디까지 일치할 것인지 오히려 궁금하기까지 하다.
그래서인지 괜히 웃음이 나왔다.
“명심하겠습니다.”
[흥!]자신만만한 천마 사부의 코웃음 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어이구 잘난 척은.] [그래 봐야 똥퍼가.] [한 판 뜨자, 이 새끼들아!]뒤에 이어진 말들과 소란은 못 들은 걸로 하자.
아무튼, 방침이 세워졌으니, 표적 또한 결정되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멸천회주가 가장 요긴하게 쓸 칼을 부수는 거다.
“누나.”
“응?”
“흑살대를 조질 생각인데, 같이 갈래요?”
자객(刺客). 살수(殺手). 암살자(暗殺者).
후방을 교란하고 주요 요인들을 제거할 수단으로 암살만큼 편리한 방법도 없다.
방치해둔다면 언젠가 빈틈을 치고 들어와 피해를 키울 것이다.
“흑살대라…….”
하물며 흑살대는 과거 삼양현을 노리고 공격해온 전적이 있다.
“그들도 멸천회주라는 자의 수족이었구나.”
“맞아요.”
“그럼 가야지.”
설아 누나의 눈빛이 달라졌다.
말랑말랑하던 조금 전과는 달리 서릿발 같은 기세가 흘러나온다.
한빙의 기운이 모두 사라진 것이 착각인가 싶을 정도다.
멸천회주에게 빚 받을 게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모습이다.
좋다.
말랑말랑했던 누나도 좋지만, 이런 면도 좋다.
“그런데, 흑살대 놈들의 본거지가 어딘지는 알아?”
“물론.”
팔십일호가 깊은 원한을 담아 전해주었던 정보가 있다.
“흑살대 본거지를 찾을 생각이라면 귀주(貴州)의 검림산(劍林山)을 뒤져봐라.”
“거기에서 이호를 만나면 꼭! 꼭! 산 채로 혀와 사지를 뜯어주길 바란다.”
그 정보를 써먹을 때가 온 것 같다.
팔십일호는 나와 흑살대가 충돌하며 양자 모두가 상잔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전한 정보였겠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뜻은 반만 이뤄질 것이다.
“적응훈련 삼기엔 딱 좋은 곳일 거예요.”
‘오늘’ 흑살대에 신선한 경험을 안겨줄 생각이다.
‘공중’에서 감당 못 할 괴물 둘이 투척 되는 일은 상상도 못 한 경험이 될 것이다.
마지막 경험이 될 것이고.
***
연청운이 백설아, 이화와 함께 청조에 타고 떠난 뒤, 남겨진 삼악도 호걸들이 종극에게 물었다.
“우리는 사천연합 측과 합류하면 된다고?”
“그리 지시하셨네.”
“그럼, 우리가 문제 일으킬 때 누구랑 먼저 이야기해?”
왜 이 작자들은 문제 일으킬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걸까?
그런 의문이 잠시 종극의 뇌리에 떠올랐지만, 말을 아꼈다.
어차피 말해봐야 씨알도 안 먹힐 걸 종극도 알고 있다.
“약조한 대로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원론적인 이야기로 대응했다.
문제를 일으키기 전 무조건 연청운과 대화를 우선하라고.
“하지만 한동안 못 만날 것 같은데?”
“그러게.”
“사나이의 약조였는데 어길 수도 없고.”
다행이라면 삼악도 호걸들은 연청운과의 약조를 성실하게 지킬 마음이 있다는 점이었다.
종극 역시 삼악도 호걸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그동안 충분히 보고 배웠다.
“불만이라면 돌아가도 좋네. 한 입으로 두말할 사나이가 있겠는가 싶네만.”
“사나이!!”
언제나 그렇듯 삼악도 호걸들이 호탕하게 외쳤다.
“쟤넨 또 뭐야?”
한산월이 그런 삼악도 호걸들을 수상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
흑살대의 본거지가 귀주에 있는 검림산이란 건 알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른다.
청조 역시 천산산맥 인근에서만 살았기에 귀주 지리에는 어두웠다.
하지만 선계의 도움을 받으면 뚝딱 해결되는 문제였다.
결과적으로 검림산을 찾아가는 일은 고민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그보단 청조를 타고 가느라 이화가 괜찮겠냐는 점이 더 걱정이었다. 나름 고수의 위치까지 오른 당사연도 고생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화는 내 걱정이 무색하리만치 별문제가 없었다.
혹시 몰라 뒤에서 끌어안는 모양새로 뒷받침까지 해줬는데, 괜한 짓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솔직히 은근히 설아 누나 눈치가 보이는 자세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설아 누나가 이화를 질투했던 적이 있었다.
도화를 얻기 위해 이화와 둘이서 소주를 다녀왔던 일에 설아 누나가 화를 냈었다.
이화가 어떻게 설득했는지 모르겠지만, 흥분한 설아 누나를 진정시켰었다.
내심 크게 놀랐다.
함부로 말을 꺼내면 안 되는 분위기였던지라 따로 묻진 않았지만, 그때 이화가 주술로 최면이라도 걸은 것인가 싶었다.
‘뭐, 언젠가 들을 날이 오겠지.’
인사불성이 될 만큼 술이라도 진탕 마셔서 용기가 샘솟은 때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검림산으로 추정되는 장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호?”
검을 박아 넣은 듯한 바위산이다.
일(一)자로 곧게 뻗은 바위들이 울창한 나무숲처럼 주르르 정렬되어있다.
왜 검림산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알 것 같은 풍경이다.
거기에 바위를 감싸고 있는 짙은 안개는 신비로움을 더했다.
자객단 본거지로 쓰인다는 것이 아까울 정도다.
이제 곧 사라질 풍경이라 안타까움이 더했다.
짙은 안개에 가려져 있는 사이사이에 인위적인 것들의 흔적이 느껴졌다.
검림산 전체가 그랬다.
흑살대가 안배해둔 것이라면 있어 봐야 이로울 게 없는 것들일 터.
아예 민둥산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낫다.
“나 먼저 간다!”
청조에서 뛰어내리며 내 안에 담겨있는 힘을 끌어올렸다.
오행신력이, 태극이, 혼돈이 맞물리는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해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