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390
389화 멸천회주의 수
청조는 영물이다.
그것도 천년 이상을 살아온, 까마득한 과거에는 천마 사부와도 어울렸었던 영물이라고 했다.
당연히 가진바 힘도 상당하다.
혈마와 싸웠을 때 겹겹이 늘어선 호신강기의 벽을 청조가 깨주지 않았다면 승산은 없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 외에도 하루 만에 대륙을 횡단하는 등 여러모로 규격 외의 존재다.
“내가 보낸 신호를 못 볼 리가 없는데…….”
내가 황도에 있는 동안 근방에서 대기하기로 했었다.
그랬는데 신호에 반응하지 않는다?
“찾아봐야겠어.”
느낌이 좋지 않다.
“이화야.”
“예.”
“청조를 찾을 수 있을까?”
이따금 이화가 부리는 술법은 내 이해를 넘어가는 영역의 힘을 보이기도 했다.
“해보겠습니다.”
이화가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욕이 가득했다.
하늘을 살짝 올려다보듯 고개를 들던 이화가 손뼉을 쳤다.
짜악!
기묘한 울림이 손과 손의 마주침에서 생겨나는 것이 느껴졌다.
짜악!
다음 박수에는 작은 불꽃이 일었다.
짜악!
그리고 세 번째로 쳤을 때.
화르르륵!
한줄기 불꽃이 뱀처럼 길게 뻗어 나오더니 어느 방향을 향해 꼬리를 흔들며 날아갔다.
“저쪽입니다.”
불꽃으로 만들어진 뱀은 백 보 정도 날아간 뒤 스르르 사라졌지만, 방향은 알 수 있었다.
“가자.”
나는 이화를 등에 업고 달렸다.
설아 누나가 그런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설아 누나는 이미 오행을 완성한 몸이다. 굳이 배려하며 달릴 필요가 없다.
그림자가 늘어질 정도로 쭉쭉 달려 나가자 황도가 내다보이는 산의 등줄기가 보였다.
“이건…….”
그 부근에는 거대한 흔적이 있었다.
수백 그루의 나무가 짓밟히고 부서진 모습.
거인들이 치고받은 듯한 파괴의 흔적이 길게 이어져 있다.
그렇게 강한 힘이 격돌한 흔적 곳곳에 푸른빛이 감도는 깃털이 널브러져 있다.
청조가 누군가와 싸운 흔적이다.
누구였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무림삼불기라 불리며 경원시 되는 고수들이라도 쉬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청조의 힘이다.
그런 청조가 이 정도로 털렸다면 하나뿐이다.
멸천회주.
멸천회주가 직접 손을 쓴 것이라면 청조라도 위험하다.
아니나 다를까.
흔적을 따라 달려가자 수십 그루의 나무를 깔고 발라당 누워있는 청조를 볼 수 있었다.
청조의 거체에는 온갖 상흔이 가득했다.
뭔가 뜨거운 기운에 손상된 것인지 주변에는 검게 그을린 나무가 가득했다.
“살아있냐?”
뺘아.
청조에게서 얕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오자 절로 안심이 되었다.
영락없이 청조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멸천회주가 굳이 청조를 살려두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왜 살아있어?”
뺘앗! 뺘아빠빠빳(매우 심한 욕)!
왜 안 죽었냐는 식으로 들린 건지 청조가 거세게 성질을 냈다.
“아, 미안. 어떻게 살아있는 건가 해서.”
[그러게 말이다. 그냥 확 뒈졌으면 깔끔하게 천상으로 올라오는 건데.]장삼풍 사부가 혀를 찼다.
‘아니, 그거 천상이 아니라 명부로 가는 길 아닌가요?’
뭔가 수순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러기엔 장삼풍 사부의 목소리가 좀 무섭다.
살기등등하달까.
[쿠르릉! 빠지지직! 그아아아아아…….]게다가 벼락 치는 소리와 비명이 묘한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뭔가 저쪽에서 끔찍한(?) 일이 자행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뭐, 사부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별일 없겠지?’
저쪽은 선계다.
고명한 신선들이 가득한 곳에서 흉흉한 일이라니.
선뜻 상상이 되지 않는다.
[쿠르릉! 빠지지직! 그에에에에에…….]나름대로 납득을 하며 청조에게 다가가 상처를 살폈다.
뺘아. 뺘뺘뺘아앗.
“이런.”
청조는 보이는 그대로 엉망이었다.
[진짜, 딱 목숨만 살려놨군.]“그러네요. 혼자 힘으론 일어서지도 못하겠어요.”
사람으로 치면 전신의 뼈와 신경을 모조리 끊어놓은 꼴이다.
[청조를 이 꼴로 만들어놨단 말이지…… 흐음…….]장삼풍 사부가 진지하게 장고에 들어가셨다.
[뭔가 노림수가 있다고 봐야겠구나. 놈도 청조를 직접 건드리는 것은 꽤나 무리수를 둔 것이거든.]“무리수라…….”
청조가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멸천회주에 비하면 손색이 있다.
직접 부딪치고 겪어본 멸천회주의 힘이라면 청조가 번거로울지언정 무리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장삼풍 사부가 아직도 그걸 모르냐고 타박하신다.
[무력적인 부분이 아니다. 인과를 말함이지. 청조는 서왕모 님의 권속으로 천산에서 천년이 넘는 세월을 군림해온 놈이다. 천마의 상징이기도 하지. 사실상 신의 사도 같은 존재로 천년 넘게 숭배되어왔단 말이다. 그 세월 동안 쌓아온 인과가 어느 정도일 것 같으냐?]“아…….”
들어보니 과연 그렇다.
더불어 왜 멸천회주가 청조를 죽이지 않고 망가트리는 선에서 그쳤는지도 알 것 같았다.
오랜 세월 준비한 대업이 코앞이다.
멸천회주 역시 함부로 인과를 낭비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좀스럽게 고위관리들을 쓱싹하고 물러난 것도 이해가 되네.’
선계에 존재가 드러났기 때문인지 몰라도 작은 부분에도 신중을 기하는 느낌이다.
[강상 선배의 판단인데, 아무래도 네게서 기동력을 빼앗겠다는 것 같다.]“기동력이요?”
[이번에 황도에서 네가 한 일이 그놈에겐 적지 않은 손해가 되었다는 것이겠지. 무리수를 둔다는 건 다시 말해서 여유가 없어졌다는 소리이기도 하니까.]“아하!”
확실히 납득이 되었다.
청조 덕분에 황도로 빠르게 도착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전에 흑살대를 쳐서 황제의 허튼짓을 파악하게 된 것도 크다.
요컨대 청조를 통한 전광석화와도 같은 움직임은 멸천회주가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다.
나로서도 청조가 없었다면 생각하지 못했을 움직임이다.
멸천회주의 계획을 무력화시킨 일등공신을 뽑자면 청조라고 해도 무방하다.
어찌 되었건 멸천회주에게 한 방 먹인 것은 분명하다.
동시에 운이 너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전에 사부님이 ‘좋은 일을 하면 복이 온다’라고 하셨던 적이 있다.
어쩌면 이것도 인과의 흐름이 만들어낸 결실 같은 게 아닐까?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그 잡놈이 네 기동력을 없애겠다고 결정했다면, 방해받고 싶지 않은 다른 계획이 있다는 의미니까.]“그건… 그렇겠네요.”
보통 책략가들은 하나의 계획에만 몰입하지 않는다고 한다.
당연히 초기 계획이 어그러질 것을 대비한 차선책을 마련하는 것이 기본이다.
황제를 통해 세운 계획이 어긋난 것은 치명적이지만, 대비책이 있다면 멸천회주가 무리를 해가며 청조를 이 상태로 만들어놓은 것도 이해가 된다.
멸천회주는 다음 계획에 내가 개입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청조를 회복시키면 그만이다.
일전에 무극을 통한 의념의 힘으로 부상을 치유해본 경험도 있다.
“그럼…….”
[청조를 회복시킬 생각이라면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이 좋을 거다.]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장삼풍 사부가 제지했다.
신중하게 판단하라.
호수(好手)가 될 수도 있지만, 악수(惡手)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어어? 문제가 됩니까?”
[당연하지. 지금 청조를 회복시키겠다는 것이 내공의 힘이냐?]“그야…….”
[세상의 이치에 네 의지를 개입하는 힘. 의념의 힘이지. 그럼, 거기에는 뭐가 들어간다?]“인과죠?”
[그래, 제자야. 인과다. 인간 수준에서 펼치는 무극은 작은 결과를 조작하는 수준이다. 기껏해야 검을 제 의지대로 휘두르는 정도에서 그치는 수준이야. 그 정도 행위에 소모되는 인과는 별거 없지. 하지만 저 지경이 된 청조를 회복시키는 것에는 과연 어느 정도의 인과가 소모될까?]“어… 으음…….”
그렇게 생각하니 또 이야기가 달라졌다.
서왕모 님의 권속.
천마 사부의 상징.
신의 사도와도 같은 존재.
사실상 이번에 멸천회주를 엿 먹인 최고의 변수였던 것이 청조다.
멸천회주조차 인과의 소모를 염려하여 죽이는 것만은 하지 못한 격(格)을 갖춘 영물이다.
작은 돌을 굴릴 때는 작은 힘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커다란 바위를 굴릴 때는 그만큼 큰 힘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청조 정도 격을 갖춘 존재를 회복시킬 때 들어갈 인과는 어느 정도일까?
“……적진 않겠죠?”
[그러니까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거다. 청조를 회복시키는 데 어느 정도 인과가 소모될지는 나도 몰라. 하물며 너, 인과의 축적이나 소모가 생기는 거 못 느끼고 있지?]“……예.”
[네가 가진 막대한 인과는 어느 의미로 그 잡놈이 너를 직접적으로 노리지 못하게 만드는 억제제다. 더불어 놈의 선택지를 줄이는 역할도 하고 있고. 네가 이번 일로 생각보다 많은 인과를 소모한다면 그 잡놈이 어찌 나올지 몰라.]“으음…….”
확실히 신중한 판단이 필요했다.
고위관리들의 죽음은 멸천회주가 손을 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멸천회주도 직접 나를 습격하지는 못했다.
장삼풍 사부가 말한 억제제라는 말의 의미는 그런 뜻이다.
만에 하나 청조를 회복시키는 것이 그 이점을 버려야 할 정도라면?
‘기동력을 확보한다고 해도…… 애매한가?’
기동력을 확보하게 된다면 흑살대 본진 강습이나 황도에서처럼 보다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억제제가 사라지게 된다면 멸천회주가 직접 등판해 곧장 나를 노릴 위험성이 생겨버린다.
“그럼 청조는 어쩌지요?”
[적당히 황궁 같은 곳에 버려두면 될 게 아니냐. 황궁 쪽 아해들이야 신령한 영조가 황궁에 머문다면 길조라고 좋아할 테고, 청조 저놈도 적당히 반년쯤 정양하면 운신할 만큼 회복할 수 있겠지.]“괜찮네요.”
내심 청조더러 반년 정도 인간들 구경거리나 되어보라는 악의(?) 같은 것이 느껴지긴 했지만, 아마도 장삼풍 사부의 생각대로는 될 것 같진 않다.
어쨌든 청조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나의 다음 포석이 중요한데…….’
현재 멸천회주와 나의 싸움은 바둑을 두는 것과 비슷했다.
나는 멸천회주의 선택지를 줄여가며 그의 영향력을 쳐내는 중이고, 멸천회주는 그런 내 수를 피해 스스로가 판 위에 올라갈 수 있는 인과를 확보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
내가 멸천회주보다 유리한 점은 그와 달리 판 위에 직접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자칫 한 수만 어긋나도 멸천회주가 직접 판 위에 올라올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
최선의 방도는 멸천회주가 판 위에 올라올 기회를 주지 않고 그의 모든 선택지를 쳐내는 것이다.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해내야 한다.
‘할 수 있어. 나는 그놈과 달리 혼자가 아니니까.’
그 잡놈과 달리 내겐 사부님이 계시다.
무인으로서 가르침을 주시는 사부님이시자, 멸천회주 이상으로 한발 물러서 바라보는 관조자이기도 하다.
언제나 조언을 구할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분들.
이걸 못 써먹는 게 멍청한 짓이다.
“사부.”
[말해라.]“멸천회주가 제 기동력을 끊어놓았으니 다음은 무엇을 노릴까요?”
[그 잡놈이 노릴 부분?]내 물음에 장삼풍 사부가 잠시 생각을 하시는지 말이 없으셨다.
주변과 의견을 나누는지 숙덕대는 소리가 있었지만 잘 들리진 않았다.
그렇게 천천히 열을 셀 시간이 흐른 뒤.
[그놈은 당장 나설 수 없어. 과율이 과다하게 쏠리는 것을 두려워하니 조언조차 조심해서 해야 하지. 다시 말해 그놈이 포석을 둘 패는 제 놈과 끈이 닿아있는 놈들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혈교 같은 놈들이 되겠구나.]“그렇죠.”
[나라면 너 말고 가장 성가신 쪽을 쳐내겠다. 어차피 당장은 너를 직접 쳐낼 수가 없을 테니까.]어차피 멸천회주의 목적은 분명하다.
멸천회주가 인과를 얻을 판을 만들기 더 쉽게 하려고 움직일 때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구파.”
[결론을 내렸으면 얼른 움직여라. 놈이 무리해서까지 손을 썼다는 건 이미 준비를 마치고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니까.]흑살대를 친 것.
황궁의 혈겁을 막은 것.
어찌 보면 멸천회주를 상대로 공세를 펼친 것과 같은 일이다.
이번에는 방어를 해야 할 차례인 것 같다.
더불어.
‘무리수를 둘 정도로 여유가 없어졌다는 건, 다시 말해 멸천회주 역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얼마 없다는 뜻.’
가만히 되새겨보면 무림에 출도한 이후 내가 해온 일들은 대부분 멸천회주에게 타격을 주는 일들이었다.
나는 멸천회주의 존재를 알기 전에도 그와 싸워온 것과 다름이 없었다.
멸천회주와의 싸움도 끝이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