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48
47화 음모의 한 걸음
“너무 넘겨짚는 건가?”
너무 성급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을 정해 놓고 몰아세우는 느낌이랄까.
왜 그런 것일까?
이유라면 짐작이 간다. 화산파 제자에게서 느꼈던 거슬리는 느낌 때문이다.
좀 더 객관적으로 상황을 관조할 필요가 있다.
‘나야 이 흔적이 천마 사부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거지만, 모르고 있다면 착각할 수도 있지 않나?’
천마 사부가 남긴 흔적에는 요사스럽다거나 사악한 기운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깊고 무거운 심연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백무호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
‘얼토당토않게 달마 사부 무공이라 착각해 버렸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른 한 가지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달마 사부가 남겼을 흔적을 파괴한 건 말이 안 돼. 이건 정파 무공을 적대시하는 사람이어야 할 수 있는 짓이다. 기연을 독차지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천마 사부가 남긴 것도 파괴해야 하고.’
너무 넘겨짚은 것이 아닌가 싶어 다각도로 가설을 세워 봤지만 역시 이런 짓을 한 놈은 정파가 아니라는 결론뿐이다.
결국, 돌고 돌아 유력한 용의자인 마교의 인물이 이곳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처음부터 여기에 천마 사부가 남긴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았다던가?’
천마 사부의 행적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마교 내에 남아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역시나 너무 비약적이지만, 눈앞에 떡하니 결과물이 있다.
천마 사부가 돌아오시면 한번 물어봐야겠다.
‘굳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달마 사부와 천마 사부는 한동안 같이 어울려 이곳저곳을 다닌 느낌이었다. 여기만 해도 같이 흔적을 새겼다는 것 같고.
“달마 사부. 천마 사부가 여기에 뭔가 남겨 놨던 게 있나요?”
[남긴다?]“예, 뭔가 기념할 만한 거라든가.”
[그 양반이 그런 걸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다만……. 아!]역시나 싶은 대답이 나왔지만, 달마 사부가 돌연 탄성을 내셨다.
[하긴, 그때라면 지금보다 때가 좀 덜 탄 시기이긴 했던가. 자존광대가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으니.]기억할 만한, 기록을 해 둘 만한 이정표. 증표 같은 게 있었던 거라면 마교 애들이 여기까지 찾으러 올 이유는 충분하다.
그런데 뭘까, 이 기분. 자꾸 뭔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상황을 살피고 있던 덕분에 나는 금방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위화감의 정체를 파악했다.
“너무 느긋했어!”
하지만 내 다급한 목소리에도 백무호는 미동도 없이 벽의 흔적만을 바라볼 뿐이다.
어마무시하게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알겠다. 내가 방금 무심결에 했던 혼잣말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겠지.
뭔가 얻는 중인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빠악!
“악!”
“정신 차리고 빨리 따라와.”
“뭐? 왜?”
한참 빠져 있던 것에서 강제로 끌려 나온 탓인지 백무호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지금은 그 투정을 받아 줄 틈이 없다.
“화산을 공격하고 있는 놈들이 뭘 원하는지 알겠어.”
말을 끝내지도 못한 채 나는 동굴 밖으로 몸을 날렸다.
잠시 나와 천마 사부의 흔적 사이에서 갈등하던 백무호가 한숨과 함께 내 뒤로 따라붙었다.
내가 이리 다급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한 모습이다.
“뭔데?”
“화산파 인근의 마을들이 습격당하고 있잖아.”
“응.”
“그 덕분에 지금의 화산파는 인근 마을들을 지키느라 바깥쪽에 온통 힘이 몰려 있는 상태고.”
“그야 그렇……. 아앗!”
백무호도 감을 잡은 모양이다.
이곳은 화산파가 있는 화산이다. 마교의 간자를 처리하는 일 따윈 식은 죽 먹기다.
평소라면.
“지금 화산파는 비어 있어.”
하지만 정체가 들통나지 않은 간자라면?
“빈집털이다.”
부수든, 훔치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
“이게 뭐라고, 기분 더럽네.”
화산파의 본산제자. 아니, 마교의 간자 상우경은 기름기가 묻어 있는 손을 옷에 쓱쓱 문지르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쯧.”
상우경이 열 살 무렵, 교에서는 근골이 뛰어난 아이들을 모았다. 천마신교의 미래를 열어 갈 후기지수를 뽑기 위함인 줄 알고 열성적으로 지원했던 상우경은 마침내 교의 선택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허나 그런 상우경이 보내진 곳은 이곳 화산파였다.
상우경의 자질을 알아본 화산파 사람들은 천애 고아처럼 내던져진 상우경을 거둬 제자로 삼았다.
“금제만 아니어도 이러지 않았을 겁니다.”
화산파 제자로 살아 온 지난 세월은 나쁘지 않았다. 이십 년 가까이 화산파 사람으로 살아오며 정도 들었다.
이대로 화산파 제자 상우경으로 살다 죽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십 수년간 잠잠하던 세월이 무색하게 지시가 떨어졌다.
화산 어딘가에 있을 천마의 유산을 거둬 오라는 지시였다.
마도의 것이라 부를 수 없는, 요상하고 사이한 수법으로 금제가 되어 있는 상우경의 목숨은 교에 저당 잡혀 있었다. 교에서는 세월의 흐름에 쓸려 간자로 잠입한 이가 변절할 가능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죽기 싫으면 지시를 따라야 했다.
“결국, 이것도 변명일 뿐이겠습니다만…….”
화산파 본산제자 상우경으로 남고자 한다면, 그간 쌓아 온 인연이 소중했다면, 할 일은 간단하다.
자결하면 된다. 그럼 죽더라도 화산파 본산제자로 남을 수 있다.
상우경은 선택했다.
“저는 살아야겠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더 중시 여겼다.
그간 쌓아 온 모든 인연을 배신하고, 그들의 등에 칼을 꽂더라도 살아남을 것을 결심했다.
남을 위해 희생하는 건 머저리 같은 짓이다. 자기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누구든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 사람이다.
상우경은 자신의 선택을 당연한 것이라 합리화하였다.
화산파 본산제자 상우경은 사라지고 마교의 간자 상우경만 남았다.
“사부님들 말처럼, 마교의 개새끼가 개새끼답게 구는 겁니다. 마교도가 마교도의 일을 하는 것이니 너무 뭐라 하지 말아 주십쇼.”
마교도로 살아갈 것을 선택한 순간 상우경은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곧 화산파 주요 거점들에서 불길이 치솟을 거다. 기름을 먹여 둔 동아줄에 불씨를 붙여 놓아 시간차로 불길이 치솟게 만들어 놨다.
평상시라면 절대 통하지 않을 방법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남아있는 사람들로는 불길을 잡는 것만도 벅찰 터. 그 혼란한 틈을 이용한다면 한 몫 단단히 챙겨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다.
“저도 먹고는 살아야죠.”
정파 무공을 이십 년이나 익혔다. 이대로 천마신교로 돌아간들 마공을 익히지는 못한다. 이도 저도 아닌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천마신교에 돌아가서도 익힐 무공을 알아서 챙겨야 한다.
비전 중의 비전인 자하신공 같은 것 말이다.
그 과정 중에 화산파에 큰 타격을 입힌 것 역시 좋은 실적이 되어 줄 것이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모든 인연을 털어버린 상우경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즐겁게 웃었다.
***
“늦었나.”
화산파에 가까워지자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였다.
“와! 한둘이 아닌데?”
백무호의 말처럼 사방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 사이로 알싸한 향기들이 퍼져 나갔다. 불타오르는 건물 중에는 약재들을 보관하는 약방도 있었던 것 같다.
“물! 물 가져와!”
“내용물이라도 꺼내!”
화산파 제자들은 필사적으로 화마에 맞섰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길은 살아 있는 생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건물을 집어삼켰다.
“손이 너무 부족해 보인다.”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화산파다. 물론 대부분의 건물들이 재건축을 했지만, 그래도 수십 년은 기본이다.
불에 타기 딱 좋은 상태라는 의미다.
하물며 약초와 영초를 보관하는 곳이라면 습기를 막기 위해 건조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 또한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결국, 불을 끄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옷에 불이 붙는 것도 감수하며 귀한 약초나 영약들만 빼내고 있었다.
“넌 그놈 찾아. 불길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시간을 생각하면 아직 놈은 화산을 벗어나진 못했을 거야.”
“너는?”
“이쪽을 도와야지. 그래도 하룻밤 얻어먹은 예의가 있는데.”
백무호는 막연하게 말했지만, 저 말의 수위가 어디에 닿아 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갔다.
“이제 경공은 네가 나보다 낫잖아.”
감정적인 판단으로 눈앞에 없는 것을 쫓기보다 당장 급한 눈앞의 최선을 택하겠다.
백무호답지 않게 현실적인 판단이다.
위기 속에서 오히려 차분해지는 성격이라고 하겠다.
“얼른 가!”
말로 내 등을 떠민 백무호가 손이 부족한 화산파 사람들을 도와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진다.
백무호의 말대로 몸을 돌리는데,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렸다.
“언 놈 짓이야!”
“으악! 사숙! 살살해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묵언 수행은 접어 던진 자부도인이 거대한 화마를 검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문제는 그 검압에 건물도 짓눌린다는 점이다.
불길이 꺼지긴 했지만, 건물도 뭉개졌다.
저런 광경들을 보고 있자니 이런 짓을 한 놈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커졌다.
[뭐야, 벌써 일이 터진 거냐?]그때 천마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옥에서 뭔가 알아 오셨는지 ‘벌써’라는 말을 쓰신다.
[지옥에서 족친 놈이 뱉은 정보대로라면…….]“감사합니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지옥을 통해 정보를 캐낸다. 좋은 발상이라 생각했는데 상대의 행동력이 훨씬 더 빨랐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도 얼굴을 확인한 뒤다.
“인과율이라는 문제도 있다면서요? 그거 이야기하시는 순간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은데, 이제 와서 들어 봐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잖아요.”
이미 상황은 벌어졌다. 굳이 비싼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들을 이유는 없다.
[뭐, 그리 생각한다면야.]지나친 생각일까. 뭔가 천마 사부의 목소리에서 다른 게 숨어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들어 봤어야 했나?
뒤늦게 다른 생각이 들지만.
“사부님들, 그것보단 그놈이 어느 쪽으로 도주했을지 조언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일단은 그놈을 잡는 것이 우선이다.
선인봉에서 마주쳤던 화산파 제자.
상대의 안방이나 다름없던 곳이니 무턱대고 쫓기 보다는 그래도 어느 정도 지식이 있으실 사부님들의 조언을 구하는 것이다.
이거라면 천상의 힘을 직접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니 문제는 없을 터.
[흠.]뭔가 하실 말씀이 있는지 천마 사부가 잠깐 뭔가를 생각하는 듯 소리를 내셨다.
[선인봉에 있던 나와 달마의 흔적을 발견하고 온 거냐?]“예.”
[그럼 놈이 재미있는 걸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군.]“재미있는…요?”
어째 천마 사부가 저리 말하니 단순히 재미있다는 것만으로는 들리지 않는데?
달마 사부도 모르는 일이었던 것 같다.
정파의 영역 한가운데 천마의 신표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한 짓이었지만, 만약 그것이 제대로 작용을 했다면 그 안에 서방금신의 신력이 미약하게나마 깃들었을지도 모르겠군.]서방금신의 신력이라면, 그 백제의 진력이라는?
[허어……. 이렇게 인연이 이어질 힘이었나.]달마 사부가 이 인연의 어우러짐에 감탄과도 같은 숨을 내뱉으셨다.
[미약하다 해도 신력이다. 작은 것도 어둠 속의 빛처럼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지.]“어떻게 하면 됩니까?”
[공간을 읽으면 된다. 제대로 무겁의 기초를 가르쳐 주마.]접해 버린 순간 터무니없는 진척을 보인 탓에, 내가 익힌 천마무겁수는 오히려 기초가 부실했다.
천마 사부가 그 기초를 설명하셨다.
사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느껴라. 본디 본다는 것은 불확실한 것이다. 사냥꾼은 숲을 볼 때 사냥할 사냥감을 보고, 나무꾼은 나무를 보며, 약초꾼은 약초를 본다. 같은 것을 보아도 사람의 눈은 저마다 다른 것을 눈에 담는다.] [읽고 느껴라.] [네가 지배할 세상을 읽고, 느낀 후, 무언지 알아라.] [그것이 이 천마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의 시작이다!]천마 사부의 말이 일방적으로 몰아쳐 온다.
그 말들이 내 안에서 싹을 틔웠다.
화산 가장 높은 곳에서 확장되어 나가는 감각이 뻗어나가는 순간.
“찾았다!”
신이 사라진 이 세상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기운 한 줄기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