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69
68화 머리가 많으면 생각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다툼도 많다
평생 햇살 아래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 온 사람들처럼 짙은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를 지닌 노인은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분위기 속에서 나는 가물가물한 옛 기억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싶더라니.’
취죽 선생과 마찬가지로 할아버지와 인연이 있었던 어르신이다. 취죽 선생의 호위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었다.
분명한 사실은 할아버지의 친구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사파였구나.’
그것도 청성파 제자가 한 지역을 대표하는 무인으로 언급할 정도의 위명을 가진 고수다.
뭔가 묘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소속보다는 개인의 품성을 보셨다. 마음에 든 사람이라면 정(正)·사(邪)를 막론하고 인연을 맺으셨다.
‘취죽 선생이 이곳에 자리 잡는 데 도움을 준 건가? 아니, 잠깐. 이거 잘 생각해 봐야 할 문젠데. 선후 관계가 어떻게 되는 거지?’
백풍립 노야가 취죽 선생을 따라와 이곳에 와서 자리를 잡은 상황.
본래 백풍립 노야의 영역이었던 지역으로 취죽 선생이 임관을 온 상황.
‘어느 쪽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전자라면 그저 두 사람만의 이해관계로 정리되는데, 후자인 경우라면 굉장히 복잡해진다.
취죽 선생이 이곳으로 임관해 온 이유가 좌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자의가 섞여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즉, 목적이 있다는 의미다.
‘그런 분에게 할아버지가 서신을 보냈다.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쓸 만큼 조심하시면서……. 할아버지 사직(辭職)하신 거 맞나?’
어째 돌아가는 상황이 내가 모르는 뒷이야기들이 산재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단지 기분 탓이 아니라, 주의해야 할 상황이기도 하다.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들이 뒤섞이는 가운데 백풍립 노야가 내 앞에 섰다.
“휘하의 아이들을 고쳐 준 은인이 맞는가?”
“누굴 말하는지 대충 알 것도 같은 걸 보니 제가 맞는 것 같네요.”
“신의라 하더니 젊군.”
“그게 문제가 됩니까?”
“약간은. 젊은 사람을 대하는 법이 그리 능숙하지 않다 보니. 내가 알고 있는 방식은 과히 친절한 편도 아니고.”
딱딱하다. 본인 스스로도 ‘나 딱딱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니 뭐라 꼬집기도 그랬다.
알아서 조심하라는 건가. 아니면 이해해 달라는 건가.
어느 쪽이든 기억 속 모습처럼 무게감이 있는 사람이란 것만은 분명하다.
취죽 선생과는 다르게 세월이 지났음에도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이다.
[나는 이 인물이 꽤 마음에 드는구나.]강직함이 느껴지는 탓일까. 달마 사부가 백풍립 노야에게 호감을 드러내신다.
“백풍립이라 하네.”
“청운이라고 합니다.”
연씨 성은 흔한 성씨가 아니다. 그에 반해 청운이라는 이름은 상당히 흔한 편에 속한다. 이름만 밝히면 그냥 흔한 이름 중 하나일 뿐이라는 소리다.
“청운인가…….”
내 이름을 곱씹으며 백풍립 노야가 날 지그시 바라보았다.
풍기는 무게감 때문인지 커다란 바위 하나가 앞에 서 있는 느낌이다.
“많이 닮았구먼.”
“감사합니다.”
누굴 말하는 것인지는 명확했다. 취죽 선생과 연관이 있다면 내가 이곳에 왔다는 것도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름만 밝힌 것은 좋은 판단이었네. 자네 이름 세 글자에 칼을 겨눌 사람은 많으니까. 사천이란 곳이 좀 과한 면이 있지.”
주변에 흘러 들어가서 좋을 게 없다는 듯 작게 말했음에도, 내 귀에는 분명하게 들렸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파에도 대화가 통하는 사람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게 사파 전체가 그렇다는 이야기가 될 순 없다.
정파에도 과격파가 존재하는데, 사파 같은 곳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내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내가 신의건 나발이건 관계없이 칼부터 집어들 작자들은 분명 있을 거다.
“이해한다니 다행이군. 그렇다면 앞으로도 쭉 그럴 거라 믿겠네.”
“예.”
“그럼 좀 더 건설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보세.”
지금까지가 서로를 알아보는 사적인 대화였다면, 이제는 공적인 심각한 대화를 해보자는 이야기다.
어떤 주제의 이야기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능했다.
‘독(毒).’
스스로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말단들과 다르게 백풍립 노야는 돌아가는 상황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차라도 한잔하러 가세. 좋은 차를 구비해 두는 곳을 알고 있다네.”
백풍립 노야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확실히 지켜보는 눈들이 많기는 했다.
다행히 그동안 급성 질환자들은 대부분 손을 봐뒀기에 잠깐은 자리를 비워도 문제는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백풍립 노야를 따라 움직이려는 찰나.
“이야~ 사이가 좋아 보이는데? 알고 있던 사이라도 되나?”
실실 쪼개며 다가온 사내가 앞길을 막아섰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육식동물의 등장에 황급히 도주하는 초식동물의 모습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악사도왕 곽대평.”
“오우! 나도 알고 있네?”
웃음 뒤에 칼이 있다.
웃으며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다.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나는 그쪽에 대해 잘 모르는데, 그쪽은 나를 알고 있네? 어떻게 알았지?”
대개 그런 자들은 대하기가 피곤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다.
곽대평의 휘어진 눈빛 사이로 꿈틀거리는 감정의 기복이 엿보인다.
‘싸워야 하나?’
한 지역을 주름잡는 고수답게 느껴지는 기운이 상당하다.
‘일단 피하자.’
직접적인 싸움은 피하는 것이 좋다. 무당파 무공이나 소림 무공은 그 특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본격적으로 손을 겨루는 순간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이곳 고현에서 백노야와 맞설 만한 사람은 한 명뿐이라 들었습니다.”
“아하.”
곽대평이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 부분은 납득했으니 그렇다 치고.”
“다른 볼일이라도?”
“있으니까 왔지. 저 노친네가 있는 것을 보니 잘 온 것 같네.”
곽대평이 백풍립 노야를 보며 이죽거렸다.
뭔 소리인지 알겠다.
“고현에 퍼져 있는 것 때문에 제가 편향적으로 나갈 수도 있단 거군요.”
“이야, 신의라더니 역시 머리가 좋네?”
아무래도 고현은 두 사람이 양분한 상태인 모양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느 한쪽도 상대를 굴복시키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백중세인 상황에서는 작은 동추(銅錘) 하나로도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
하물며 독을 쓴 주체가 어디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독을 치료하는 신의의 가치는 무척 높을 수밖에 없다.
‘신의 행세를 하니까 이런 단점이 있었네.’
확실히 고현의 세력 구도는 생각지 못했다.
“편향적으로 사람을 치료할 생각이 없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신뢰해 달라?”
“예.”
‘안 먹힐 것 같지만 그래도 일단 던져는 봐야지.’
딱 봐도 누굴 신뢰하거나 할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곧 내 말을 듣자마자 들개의 입처럼 길게 찢어지는 입술 끝의 벌어짐을 보며 직감했다.
‘안 먹히겠네.’
“그거보다 더 좋은 게 있긴 하지.”
다른 방법을 제시하는 곽대평이다.
“이게 ‘바닥에 떨어졌을 때’, 홀수는 대화로 푼다. 짝수는 힘으로 누른다.”
주사위 놀음.
도왕(賭王)이란 별호가 괜히 생긴 게 아니라는 듯 그의 손에 들린 주사위가 틱! 소리를 내며 튕겨 올랐다.
“바닥이라.”
파락!
그 순간 내 옆에서 몸을 박차고 나가는 이가 있었다.
짙은 갈색의 궤적이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백풍립 노야께서 움직였다.
빠바바박!
가볍게 한 번 부딪치는 것 같은데 백풍립 노야와 곽대평의 사이에서 뼈와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단순히 귀에 들려온 소리는 서너 번 부딪치는 것이 중첩된 소리였지만, 실제 오간 공수의 교환은 그 이상이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주사위를 노리고 백풍립 노야가 손을 쓸 때마다 왜 귀수(鬼手)라는 별호가 붙었는지 알 법한 광경이 펼쳐졌다.
백풍립 노야의 무공은 환(渙)의 요결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허깨비 같은 손 그림자 수십 개가 일순간에 일어나 상대를 덮쳤다.
재미있는 것은 그에 대응하는 곽대평의 무공이다. 도박의 손재주를 무공으로 승화시키기라도 한 것인지 눈을 어지럽히는 변(變)의 요결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환과 변의 물결이 맞물려 부딪치는 광경은 집채만 한 파도가 부딪치는 광경만큼이나 장엄했다.
“이야~ 불꽃놀이가 따로 없네?”
백무호의 눈에는 화려하게 부딪치고 산화하는 불꽃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 사이로 말끔하게 뜯어 먹은 닭다리 뼈가 날아든 순간 매서운 소리가 났다.
파각!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두 고수가 치고받는 사이 주사위는 튕겨지기를 반복하며 허공에서 노닐고 있었다. 몰래 그 주사위를 노렸던 것이다.
“쳇!”
백무호가 혀를 찼다.
악사도왕 곽대평의 수하들이 도끼눈을 하고 이쪽을 노려봤다. 손은 허리춤에 있는 무기로 옮겨간 후다. 또 손을 썼다간 바로 개입할 모양새다.
“손을 쓰려면 걸리지 않게 해야 한단 소린데…….”
“그게 아니면 피 좀 보겠지.”
내 말에 백무호가 답했다.
하지만 백무호에게 한 말이 아니다. 보고 계실 사부님께 조언을 구한 것이다.
[거리를 두고 손을 쓴다라……. 소림의 무공 중 백보신권이 대표적인 것이겠으나, 주사위가 버티지 못할 게다.]소림의 무공으론 좀 까다로운 모양이다.
[천마의 무공이 이상적이겠으나, 요즘 그 양반 천상에도 잘 안 올라오고 있단 말이지.]‘예, 자오경 엿보는 보패 만들어 팔아먹는 중이라 참 바쁘시다죠?’
안 그래도 좀 따져 물을 것이 있던 참이라 언제 오시는지 벼르고 있었는데, 부재가 아쉬워질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고…….’
짜증 난다고 함부로 나설 수도 없다.
당장 저 양반이랑 한 판 뜨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뒷수습이다.
취죽 선생과 백풍림 그리고 그들에게 서신을 전한 할아버지까지.
내가 모르는 어떤 중대한 일이 굴러가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생각 없이 날뛰었다간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 온 무엇인가를 산산조각 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완전히 손 놓고 있자니 짜증이 났다.
‘아무도 모르게 손을 써야 한다는 말인데…….’
그렇게 절실히 궁리하는 내 머릿속에 문득 하나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된다는 건 천지소통(天地疏通)이 이미 이뤄지고 있단 말인데……. 그래서 자오경과 소통이 된다는 거라면 말이 되는 건가?] [그렇다 하더라도 극성에 이르면 상천지극력(上天至極力)과 닿을 수도 있는 심법의 기반을 단번에 터득한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규격 외인데?]처음 장삼풍 사부와 만났을 때의 일.
나는 단순히 경을 썼다고 생각했었으나, 장삼풍 사부는 그것을 두고 이상한 말들을 하셨다.
‘그때처럼 한다면…….’
당시 장삼풍 사부가 내 안의 힘을 끌어낸 방식을 되짚어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당시와 달리 지금은 그 힘의 운행이 어느 정도 파악이 되는 느낌이다.
‘어? 뭐야. 갑자기 왜?’
하지만 장삼풍 사부의 가르침을 구현하는 가운데 심통을 부리듯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천마무겁수가 요동치며 움직였다.
탁!
주사위가 땅으로 뚝 하고 수직 하강했다.
주사위를 두고 격렬하게 부딪치던 백풍립 노야와 곽대평은 그대로 멈춰선 채 바닥에 떨어져 있는 주사위를 노려보며 눈을 부릅떴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눈으로 주사위와 나를 노려보던 두 고수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격공장……은 아니겠지. 허공을 격해 타격할 수 있는 상승무공이긴 하지만, 주사위를 이 방향으로 떨어트릴 수는 없어. 그렇다는 것은…….”
“어우야. 이거…… 재미있네?”
‘저렇게 놀랄 일인가?’
갑자기 요동치는 천마무겁수의 힘을 억누르는 것에 전력을 다했던 나는 그들의 시선이 왜 그렇게 경악으로 물들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주사위가 바닥으로 뚝 떨어진 게 전부다. 사람들이 보기엔 둘의 격돌이 만들어낸 모습이 더 굉장했을 거다.
[저들 눈엔 방금 네가 한 무공이 의념(疑念)을 현실에 구현(具顯)한 광경으로 보인 모양이구나.]달마 사부가 넌지시 설명해주셨다.
의념의 구현?
‘주사위 하나 떨군 것에 너무 거창한 말이 아닌가요?’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마 무림에서 심검지도(心劍之道)의 초입으로 취급하는 경지였던가?]“…….”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