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95
94화 진정한 마(魔)
사천당가가 내부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사천에서 벌어질 전쟁을 막기 위한 이야기를 들으신 허도진인은 사천 정파를 이끄는 세 개의 큰 힘 중 하나인 아미파의 공조가 필요할 것이라며 이를 직접 담당하겠다는 열의를 보이셨다.
덕분이랄까, 취죽 선생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아련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지만.
‘역시 평화는 공짜로 오는 게 아니구나.’
……못 본 척했다. 평화라는 게 참 비싼 거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청풍자는 청성파로 돌아가 수뇌부의 의견을 이끌어내 보겠다고 했다.
내 개입으로 사천당가의 입장은 명확해졌다. 그 의견에 청성파와 아미파가 동의하면 작은 주장은 알아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사파에서도 지금 일어나는 분쟁에 마교가 개입해 있다는 건 알고 있을 거고, 백 노사 같은 분이 내부에서 목소리를 낸다면 저쪽 수뇌부들도 전쟁은 피하겠지.’
정사만의 대립이라면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지만, 이 분쟁에는 마교가 개입해 있는 상황이다. 사파로서는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다.
결국, 사파에서도 자중하자는 의견이 생길 것이고, 정사 간의 합의를 이뤄낼 수 있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흘러간다면 마교는 어부지리로 이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정파와 사파에 양면으로 공격당할 수도 있다.
설령 정파와 사파가 연합하지 않더라도 음모를 획책한 마교를 그냥 두고 보고만 있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마교에서도 이쯤에서 슬슬 발을 뺄 거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말이지.’
문제는 마교 놈들 하는 꼬라지를 보면 뭔가 또 수작을 부리려 할지도 모른다는 건데…….
‘그냥 확 마교로 쳐들어가서 내가 진짜 천마의 직계라는 걸 증명하고 다 찍어 눌러 버려?’
이화가 말하길 현 천마가 반쪽짜리라고 했던가?
잠깐이지만 미친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기도 했다.
천마 연청운이라니.
끔찍한 가정이다.
“뭐가 그렇게 생각이 많아?”
백무호가 날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조금 전 떠올렸던 생각이 얼굴 위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나 보다.
“내가 뭘?”
“아니, 살아 있는 벌레라도 씹는 듯한 얼굴이라.”
갑자기 입안에 수상한 텁텁함이 느껴진다.
진짜 뭐라도 씹은 기분이다.
“……꼭 그런 비유를 써야 했냐?”
“그런 얼굴이었던 걸 어쩌라고.”
“하아…….”
나오는 건 한숨이다.
“그런데 뭘 그렇게 고민한 거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미 다 끝났잖아? 판은 다 깔아 놨으니 나머지야 알아서 흘러갈 일 아냐?”
사서 고민한다는 말을 하려나 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거대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기껏해야 벌여 놓은 판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는 정도가 전부일…….
이어지던 상념을 끊어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전에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다.
‘누구지?’
그것도 여성의 목소리. 사부님 중 한 분에게 갑자기 심각한 변성기가 왔거나, 남성의 소중한 어딘가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분명 새로운 분이다.
[여(余)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소매를 살짝 걷어 보련?]확실히 자오경이란 기물을 처음 써 보시는 분이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기에 지시대로 소매를 걷었다.
“갑자기 왜? 나 패려고?”
그런 내 행동을 한판 붙으려는 것으로 착각했는지 백무호가 다급히 뒤로 물러나며 투덜거렸다.
“설마, 그런 거로 친구를 패겠…….”
[맛있게 생겼구나.]“……냐?”
“왜 거기에서 끝에 갈고리를 붙여?”
백무호가 바싹 긴장하며 으르렁거렸다.
“시끄러. 조용히 해 봐.”
내가 방금 뭔가 들은 것 같은데.
뭐지?
맛있…… 뭐요?
[아, 오해하지 말거라. 이상한 뜻이 있어 한 말은 아니니라.]‘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한 뜻으로 느껴지는 말이었는뎁쇼.’
요즘 천상에서 유행하는 농담인가?
너무 고차원적이라 내가 못 알아먹은 거라던가?
내 얼굴이 잔뜩 굳어져서 그런지 천상에서 내 오해를 풀고자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는 그저 네 혈관 도드라진 게 예뻐서 한 말이니라. 그저 피가 날 만큼 깨물어보고 싶어 했던 말일 뿐이니 여의 말을 저열한 희롱이라 생각하지 말려무나.]“…….”
나는 후다닥 소매를 내렸다.
세상에 맙소사.
천상에 예쁜 혈관을 보면 물고 싶어 하는 혈관성애자가 있다니!
“뭐 잘못 먹은 거라도 있냐?”
덕분에 나를 잔뜩 경계하고 있던 백무호가 미간을 좁혔다.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다.”
아무래도 지금 내게 말을 거는 이분과 대화를 하려면 중간 지점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니까 어느 사부님이든 와서 통역 좀 부탁드립니다!’
***
……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오랜만이군.]“……옙!”
내 행동이 무척이나 기괴했는지 무척이나 걱정하는 눈치로 피곤해 보인다면서 가서 좀 쉬라는 백무호의 배려 덕에 거리낌 없이 천상과 대화할 수 있었다.
그건 좋은데…… 참 좋았는데…….
통역이 필요하다는 소망에 화답이라도 하듯 갑자기 튀어나온 분은 무려 천마 사부셨다.
‘여러모로 이분은 좀 불편하단 말이지.’
가끔 친근해지고 하는 느낌은 있었지만, 여전히 존재 자체가 불편하다고 할까?
뭐, 최근에 나를 뺑뺑이 치게 만든 주적의 뿌리 같은 분인 것도 한몫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최근 방문을 끊으신 이유가 사부님들 사이의 불화 때문이지 싶었는데…….’
이화를 내게 보낸 일 말이다.
솔직히 이화가 천마 사부의 명을 받고 내게 온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놀랐다.
신탁이라는 수단을 통했다고는 하지만, 자오경이 아닌 다른 교신 방법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뭐, 그렇게 됐다.]내 고민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장삼풍 사부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딱 들어봐도 심히 심기가 불편하셨지만, 굳이 천마 사부를 제지하진 않으셨다.
나름 사부님들끼리도 합의가 됐다는 의미이려나?
‘그럼 나는 제자답게 잘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 거겠지?’
그러니까 사부님들 간의 일에 대해서는 입 닥치고 가만히 있자.
역시나 위에서는 알아서 대화를 진행시켰다.
[명계에 보내 놓은 편작과 화타가 뭔가를 알아냈다. 선화문이란 곳인…… 악! 씹……!]‘말씀하시다가 혀라도 씹으셨습니까?’
어째 꺼내던 말이 뚝 끊어지면서 욕지거리 내뱉는 게 딱 그런 모습이다.
애초에 사부님 같은 분들도 혀를 씹나?
[빌어먹을 인과율.] [풋!] [……뭘 좋다고 웃는 거냐, 장삼풍.] [웃겨서? 댁이 그 정도 인과율 때문에 쩔쩔매는 게 솔직히 웃기긴 하잖아?] [하아…….]천마 사부가 꺼내려던 말, 정보는 인과율을 지불해야 하는 계통이었던 모양이다.
명계에서 알아낸 사실이라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이화를 보낸 일 때문입니까?”
[맞다. 이화라는 아이를 네게 보내겠다고 봉신대결계에 틈을 만들어 지상에 직접적으로 개입했지. 네 입장에서 보면 그저 말 한마디 보낸 정도에 불과하다지만 하늘이 세운 천리는 그 정도로 초월적인 존재들이 지상에 개입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천마 정도 되는 양반이 저 고생을 할 정도로. 뭐, 소모한 인과율의 대부분은 봉신대결계에 틈을 만드는 데 쓴 거라곤 하지만.]사부님 중 가장 인과율이 빵빵한 축에 속한다던 천마 사부가 말 몇 마디 전하기 위해 거지꼴이 됐다니.
게다가 최근에 기물을 팔며 인과율 꽤나 모았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싹 털어 넣으셨다는 의미일 것이다.
좀 신기하게 느껴지는 부분이지만 한편으론 다른 생각도 들었다.
‘그럼 지금 이 대화는 대체…….’
이 대화는 천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건가?
뭔가 아리송하다.
[그럼, 여기부터는 여가 나설 차례이니라.]나왔다, 혈관성애자!
[으음…… 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구나.]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듣자마자 흠칫해 버렸는데 그 반응을 본 이분은 서운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내셨다.
‘나 이런 거엔 약한데…….’
게다가 인과율에 대해 들어보니 내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다짜고짜 지상에 강림해 내 팔뚝을 물어뜯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까…… 에라 모르겠다.
쓱쓱!
나는 보란 듯 소매를 걷어 올렸다.
[호호호. 귀여운 아이로고.]내 마음이 나름 전해졌는지 푸근함이 감도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 귀엽다는 게 제 혈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속마음을 입에 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여튼.]그리고 인과율이 필요하다는 말이 이어졌다.
“얼굴 가죽을…….”
끔찍한 이야기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 얼굴 가죽을 뜯어냈다니. 명계에 올라가서도 억울한 죽음을 토로할 만하다.
[인피면구를 만들 생각이라면 살아있을 때 뜯어내는 게 상태가 좋지. 더 질 좋은 놈으로 만들어지고.]‘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천마 사부.’
좀 역겹기는 하지만요.
그보다.
“그렇다는 건 마교의 마인들이 선화문이란 곳의 사람들로 위장을 하고 있다, 이 말인 거네요?”
[그런 이야기겠지.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노리는 것은 뻔한 거고.]“……정사(正邪)의 화의.”
감정은 이성을 흩뜨린다. 지금 같은 시기에 그들이 선화문의 이름을 등에 업은 채 수작을 부린다면 화의가 결렬될 수 있다.
이런 꼴을 당하고도 참고 넘어가야 하냐.
외통수가 되는 것이다.
막아야 한다.
[네가 나서도 막을 만할 거다. 대충 이화를 쫓던 놈들 수준인 것 같으니까.]이화를 쫓던 아문장이라던 아자(啞者: 벙어리)를 말하는 것이리라.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천마 사부는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신다.
문제는 그게 아닌데.
“마교의 마인들이라는데, 괜찮으신 거죠?”
[그 잡것들 말이냐?]“…….”
예, 그 잡것들이요.
이화를 내게 보낸 것은 나를 천마로 만들기 위함이 아닌가?
내심 그 이유라 생각했는데, 마교의 마인들을 잡것 취급하는 모습을 보니 뭔가 좀 이상하다.
괴리감이 느껴진다고 해야겠다.
[흥!]내 내심을 읽으셨는지 천마 사부가 콧방귀를 뀌셨다.
[신(神)이 있기에 마(魔)가 있다. 마는 신의 양면이며 또 다른 얼굴이다. 내가 지상에 있을 때 남긴 것은 그러한 마(魔)에 이르는 도(道)다.]시작의 기원.
태초의 신성.
천마 사부의 말은 위대한 것을 논하심이다.
[나는 위대한 마도(魔道)를 논했지 하찮은 악행(惡行)을 논한 바가 없다. 그것들이 추구하는 것은 사(邪)이며 악(惡)이다. 악은 인간의 감정이 낳은 찌꺼기에 불과한 것. 찌꺼기 따위를 추종하는 자들은 나를 따르는 자들이 아니다. 결국, 그것들은 제 꼴리는 대로 날뛰기 위해 내 이름이나 팔아대고 있을 뿐이지. 내가 왜 그런 버러지들을 신경 써야 하겠느냐?]‘마는 신성에 이르는 길이지만, 악은 인간의 감정이 낳은 찌꺼기에 불과하다?’
천마 사부의 일갈은 내가 품고 있던 개념에 큰 파문을 남겼다.
[다 죽여라. 네가 내 무를 이은 제자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다.]진정한 마(魔)께서 하찮은 악(惡)을 쓸어버리라 명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