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06
제106화 – 그이가 괄시하지는 않을 게요.
용왕이 아까 품에 집어넣었던 원판을 다시 꺼냈다.
“타르엔 자네 위치만 파악하는 기능만 있는 게 아닐세. 여길 보게나. 만약 자네의 생기가 소멸하면 이 노란 점은 청색으로 변한다네. 다시 말해 아르가 언제라도 자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걸세. 만약 이게 파랗게 된다면 자기 스스로 벌을 내리겠다는데 내가 어찌 자네를 해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도제나 검제가 자네를 죽이러 오면 저지해야 할 입장일세.”
용왕이 거구를 일으켜 세웠다.
“방금 도제와 검제를 언급했네만 그치들이 실제로 나설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우이. 한 명이라면 내가 어찌어찌 막을 수 있을 터이지만 둘은 버겁다네. 그래서 말인데 이참에 나하고 용궁에 가는 게 어떻겠는가? 용궁은 철옹성일세. 거기라면 설사 일후삼제가 전부 쳐들어와도 방비할 수 있네. 천하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뜻이지.”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아르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용궁에서는 선력의 증강을 도모할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전쟁이 발생한 지역으로 가야만 했다.
내가 거절할 낌새임을 알아챈 용왕이 그전에 설득하려 들었다.
“아르와는 당장 대면하지 않아도 되네. 자네 마음이 풀릴 때까지 따로따로 지내게나. 그동안 나는 중원을 오가며 아르가 요구하는 자료들을 수집할 걸세. 검림의 애새끼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추정할 수 있는 자료 말일세.”
나는 문상이 떠올랐다. 그녀라면 자료를 참고할 것 없이 바로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용궁엔 갈 수 없소. 공주 때문은 아니니 오해는 말구려. 그리고 정말로 나를 도와줄 의사가 있다면 나 말고 내 친인들을 보호해주시오.”
“이미 그러고 있네. 아르는 용궁으로 귀환한 게 아닐세. 그날 그 일이 있고서 바로 보양으로 돌아갔더랬지. 그러고는 여태 자네 거처에 머물고 있네. 나도 일단 그리로 돌아갈 거고. 나와 내 딸아이가 거기 있는 이상 도제와 검제도 함부로 자하옥관을 건드릴 수 없을 걸세. 하지만 장기간은 우리로서도 무리일세. 어쨌거나 나와 아르는 외인이 아니던가. 창제까지 나서서 압박할지도 모르네. 그러면 용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네. 중과부적이니.”
“내 친인들을 용궁으로 데려가는 건 어떻소?”
“안 그래도 딸아이가 그 예쁘장한 여자한테 그러자고 권했다네. 하지만 도피보다는 은신하는 게 낫다며 손사래를 쳤다더군. 숨어서라도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그러면 거기 가서 얼마간만 버텨주시오. 최대한 빨리 돌아가겠소.”
“그건 아니지. 자네야말로 꽁꽁 숨어야 하네. 자네가 나타나면 그들이 즉각 달려올 테니까. 나 혼자서는 역부족일세.”
“도제나 검제 중 하나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해져서 돌아가겠단 말이오.”
용왕이 작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떻게 말인가?”
굳이 그에게 복안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에 나는 짧게 답변했다.
“어떻게든.”
***
용왕은 떠났다.
엄청난 속도로 인해 그의 거대한 덩치가 순식간에 멀어지며 작은 점으로 화했다. 나는 새삼스레 행운을 절감했다. 하루 사이에 호랑이와 곰을 연달아 만나고도 목숨을 부지한 것이었다.
안도도 잠시, 온갖 상념이 심중에 휘몰아쳤다. 아르와 양천, 그리고 검룡의 얼굴이 두서없이 떠오르며 수많은 가설들이 한데 뒤엉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나는 사고를 강제로 중지했다.
지금은 답을 찾을 길 없는 의문들을 붙잡고 씨름할 때가 아니었다. 강해지는 데 전력을 쏟아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개세팔천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무위에 도달해야 했다. 그래야 꼬이고 꼬인 실타래들을 풀 수 있을 터였다. 무림은 무력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계였다.
나는 방향을 반대로 돌려 서쪽으로 몸을 날렸다.
내 행선지를 두고 적들을 교란시키려는 건 얕은 술책이었다. 잔머리를 굴릴 것 없이 곧장 천지조화지경으로의 여정을 시작하는 게 나았다.
하늘에 깔린 장엄한 노을이 중원을 벗어나 머나먼 이역으로 향하려는 나를 오래도록 배웅했다.
***
어두운 밤, 사막의 천공은 찬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감회가 새로웠다. 어린 시절 노인네의 팔에 안겨 사천사백 리에 걸쳐 뻗어있는 모래의 바다 위를 지나며 백만 개의 별들을 품은 듯한 야천(夜天)의 경이로움에 탄성을 내질렀던 일이 기억에 생생했다.
사막 너머의 천벽은 노인네와 나의 천하주유의 출발점이었다. 십육 년 전 우리는 거기서 동진(東進)하며 세상을 훑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곳에 들른 후 그때 가지 않았던 서편으로 발을 들일 참이었다.
전쟁터를 찾아서.
높이가 이삼천 장에 달하는 고산준봉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천벽은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의 장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광대한 영역인데다 십수 년만의 방문이었으나 나는 한 번도 길을 헤매지 않고 목표했던 극락촌(極樂村)에 이르렀다.
산중에 자리한 마을은 이름과는 달리 삭막하고 추레한 땅이었다. 중원엔 여름이 한창이건만 한겨울인 양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괜히 으슬으슬한 것이 귀기(鬼氣)까지 떠도는 듯했다.
그러나 극락촌은 서역을 오가는 중원의 상인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하고 편안한 안식처였다. 그래서인지 인심들도 후했다. 전날 이름 모를 상인들은 거지꼴을 한 나와 노인네를 멸시하지 않고 물과 국을 내주며 우리를 보듬었다. 아쉽게도 고깃국이라 그들의 친절을 마다해야 했지만 내겐 따뜻한 추억이 깃든 장소였다.
나는 상당한 수준의 대금을 지불하는 거상(巨商)들만 들 수 있다는 천왕전(天王殿)으로 발길을 옮겼다. 거창한 명칭과 달리 천왕전은 겨우 눈비와 바람만 막을 수 있는 허름한 창고였다. 그렇더라도 면적은 꽤 넓었다. 대충 사오백 평은 될 듯싶었다.
입구에서 험상궂은 인상에 어깨가 떡 벌어진 장한 둘이 나를 가로막았다.
“입전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다. 황금 두 냥이다.”
이런 도둑놈들 같으니.
“그만한 돈은 없소. 안에 있는 이들에게 몇 가지 물어보기만 하고…….”
두 장한 중 구레나룻을 기른 자가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그러면 긴소리 하지 말고 썩 꺼져라. 우리는 네놈하고 노닥거릴 만큼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다.”
나는 좌측으로 손을 뻗었다.
“돈은 없지만 이건 있소.”
내 검지에서 발출된 지공이 십칠팔 장이나 떨어진 거목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전날 사당에서주태를 으르며 써먹었던 수법이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드, 드, 드, 드, 들어가십시오.”
눈알이 튀어나온 구레나룻이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입전을 허락했다. 그 옆의 장한은 오체투지 할 생각도 못 하고 그저 입을 쩍 벌린 채 바짝 얼어붙어 있었다.
“고맙구려. 그럼 수고들 하구려.”
삐거덕거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바깥의 소동을 인지한 몇몇 사람이 내게로 시선을 보냈다. 그들 중 하나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갑자기 소리 질렀다.
“마, 마협!”
오랜만에 들어보는 별호였다.
대전이라고 부르기에 너무나 소박한 휑뎅그렁한 공간 안에 든 이들은 오십 명 정도였다. 그 가운데 절반가량만 마협이라는 철 지난 별호에 반응을 보였다. 나머지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실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중원과 서역을 왕래하는 상행은 평균적으로 일 년이 소요된다고 했다. 워낙 장거리인 데다 변수가 많아 그 이상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들었다. 그러니 서너 달 전에 서역에 있다가 중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천벽으로 온 이들이라면 지난 몇 달간 중원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내 소문을 듣지 못했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방금 전 한 눈에 내 정체를 알아본 중년인에게로 걸어갔다. 화려한 금의를 걸친 중년인에겐 호위로 보이는 무인 둘이 붙어있었다. 둘 다 태양혈이 불쑥 솟은 걸로 보아 절정 급은 될 터였다. 그만한 호위무사들을 거느리고 있다면 중년인도 상계에서는 나름 행세깨나 하는 인물일 것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내 접근을 경계하는 무사들을 물리친 중년인이 소매를 포개 읍을 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상주 연천 백암상단의 강 모가 무림의 협객에게 입사 올리오.”
나는 포권으로 답례했다.
“공공문의 문주이자 정의단의 단주인 오선이오.”
“긴가민가했는데 정말로 본인이었구려. 용모화에서 본 모습 그대로인지라 바로 알아볼 수 있었소.”
백암상단은 들어본 적이 없지만 중년인은 상운과 관련된 인사일 확률이 높았다. 나는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기실 천벽에 이를 때까지만 해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한 상태였다. 그런데 오자마자 나를 알고 정보에 밝을 이를 만났으니 만족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중년인의 대화를 듣고 있던 촉새처럼 생긴 민머리 노인이 끼어들었다.
“이분 소협은 뉘신가, 강 단주?”
“강호 초출 이후 악인들을 징치하는 등 협행을 이어오다 백일 전쯤 온 천하에 위명을 떨친 무림의 신성입니다, 배 장주님.”
노인이 나를 힐끔거렸다.
“그래? 어떤 위명인가?”
“놀라지 마십시오. 보양에서 광마도를 꺾었다더군요.”
일순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짧은 백미를 한껏 치켜떴던 민머리 노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광마도라면, 설마 광풍혈사대의 주인 말인가?”
“그렇습니다.”
웅성거림이 더 커졌다. 노인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허리를 접었다.
“포주 만화장(萬華莊)의 배운영이 무림의 젊은 영웅을 뵙소이다.”
다른 이들도 노인을 따라 분분히 예를 갖추었다.
나는 노인을 비롯한 천왕전의 객들이 나에 관한 최근 소식을 들으면 어떤 태도를 보일지 궁금했다. 그러나 내 입으로 떠들기엔 뭐한지라 말을 아꼈다. 마협의 위상만으로도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기엔 지장이 없을 터였다.
다들 중년인에게서 내 활약상을 자세히 듣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나는 그들의 바람을 묵살하고 바로 진도를 나갔다.
“몇 가지 물어보고자 합니다만.”
내 시선을 받은 중년인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하문하시지요.”
“근래 서역에서 전란이 일어났습니까?”
일순 중년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나는 실내를 둘러보았다.
“다른 분들은 어떻습니까?”
중인이 이구동성으로 떠들었다. 아무도 그런 소문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맥이 빠졌다. 오천여 리를 쉬지 않고 달려왔건만 헛걸음을 한 건가.
아직 단념하기엔 일렀다.
문상이 허위정보를 알려주었을 리가 없었다. 상인들이 모를 뿐 서역 어디선가는 분명 전쟁이 일어났을 터였다.
서역은 중원 못지않게 거대한 땅덩어리였다. 외곽을 들락거리는 상인들이 대륙 내부의 사정까지 알지는 못할 터였다.
하지만 나는 낙관하지 못했다. 기실 문상에게 그 정보를 받았을 때부터 의아했다. 서역의 지배자는 밀궁이었다. 완벽한 장악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밀궁의 통치하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건 쉬이 수긍하기 어려운 기사였다.
혹시 문상은 서역의 한 귀퉁이에서 일어난 국지적인 분란을 전쟁이라 과장한 게 아닐까. 단지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서.
나는 그날 문상과 이에 관해 좀 더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처사를 후회했다. 당시엔 그럴 경황이 없었으나 그렇더라도 기본적인 내용들은 확인해두어야 했다.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몰라 침묵하고 있는데 민머리 노인이 나섰다.
“혹시 내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소.”
나는 귀가 솔깃해졌다.
“전쟁에 관해 들어보셨소?”
“그건 아니나…….”
말끝을 흐린 노인이 뒤를 돌아보며 누군가를 불렀다. 삼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뻐드렁니 사내였다.
“서역은 아주 넓은 땅이라오. 나 역시 전란이 발생했다는 소리는 들은 바가 없으나 혹시 내륙 깊숙한 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보장도 할 수 없소이다. 소협께서 상운에 대해 아는지 모르겠으나 서역에도 ‘파리나’라고 그와 비슷한 조직이 있다오. 나는 파리나의 수장쯤 되는 이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소. 그이라면 서역 전역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할 테니 소협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게요. 이 아이를 길잡이로 내줄 터이니 데려가구려. 소개장도 써주겠소. 그이가 괄시하지는 않을 게요.”
나는 민머리 노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촉새 같은 인상이라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이 노인이야말로 귀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