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13
제113화 – 어떻게든 수를 내봅시다.
다음 날 새벽 나는 현마를 대동하고 육처 순회에 나섰다.
현마와의 동행은 내 의사가 아니라 본인의 원에 따른 것이었다. 마원의 지리를 꿰고 있었기에 불필요했지만 나는 자기를 길잡이로 삼아달라는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첫 번째 방문지는 장마류가 장악한 소흥이었다.
소흥은 하동에서 남서로 사오백 리가량 떨어진 대처였다. 사전에 인구 수준을 알고 싶었지만 현마가 가진 정보가 너무 부실한 탓에 현장에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동틀 무렵 목적지에 이르렀다. 전날 순서를 정해 대략적인 방문 시각을 알렸기에 장마는 이미 도시의 광장에 수많은 군중을 모아둔 상태였다. 일견에도 하동의 두어 배는 되어 보였다.
“어서 오시오, 마종. 찾아주셔서 영광이외다.”
용왕에 버금가는 거한인 장마가 포권과 동시에 허리를 접으며 깍듯한 예의를 차렸다. 땅에 무릎을 꿇고 있던 마인들이 그 모습을 목도하고는 술렁거렸다. 땅바닥에 이마를 박고 있던 백성들 가운데 간이 큰 부류들도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장마의 자세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수고했소.”
간단히 장마를 치하한 나는 그가 마련한 단상 위에 올랐다. 장마가 단상 아래에서 전날 사자를 통해 미리 일러준 언설을 쏟아냈다.
“다들 마종께 무한한 감사를 바쳐라. 너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새 삶을 주신 은인이시다.”
낯 뜨거웠지만 나는 장마의 소개말이 가져올 효과를 기다렸다.
실망스러웠다.
광장에 운집한 이들의 수는 못 해도 엊저녁 하동의 두 배에 달했지만 그들이 일으킨 청화의 양은 절반에도 한참 못 미쳤다. 기실 이것도 적은 양은 아니었으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망감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축생만도 못한 노예 신세를 면하게 해주었음에도 감사의 마음을 품은 자가 백 명에 하나꼴도 안 되다니. 이래서야 짐승보다 나을 게 없지 않은가.
배은망덕한 종자들을 비난하던 나는 그나마 일었던 청화마저 사그라지는 걸 인지하고는 정신을 차렸다. 그들을 탓할 때가 아니었다. 기특한 이들이 선사한 선물을 챙기는 데 집중해야 했다.
***
다음 행선지는 검마류가 터를 잡은 흑단이었다.
흑단에서의 성과는 소흥과 대동소이했다. 여전히 실망스러웠지만 그럴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소흥에서와 같은 충격은 없었다.
그렇더라도 내 심기가 편치 않음을 알아차렸는지 흑단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마가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뭐가 마음에 안 드시오, 마종?”
내 은덕에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는 자들이 괘씸해서 그런다고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분위기가 하동과는 사뭇 다른 듯해서 말이오. 소흥이나 흑단이나 백성들이 아직 자신들의 바뀐 처지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더이다.”
현마가 동료들을 변호했다.
“첫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지 않소? 나는 장마나 검마가 그 정도라도 해내서 오히려 탄복했소이다. 우리야 지난 이십 년간 축적된 경험이 있으니 별다른 어려움 없이 천지개벽할 변화를 강제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이른 시일 내에 그만한 틀을 갖추고 질서를 잡은 데는 고충이 많았을 거외다. 장마와 검마가 전력을 쏟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게요. 그러니 그들의 충정을 믿고 좀 더 기다려줍시다.”
나는 현마의 고언을 수용했다.
“노인장의 말이 맞소. 내가 조급했소.”
현마가 백세노인답지 않게 활짝 웃었다.
“듣기에 거슬렸을 터인데 그리 말해주니 안심이구려. 과연 마종은 그릇이 크오.”
나는 그저 쑥스러웠다.
***
세 번째 도시는 기마류의 원포였다.
원주에서 얻은 결실도 앞선 두 곳과 비슷했다. 군중이 피워올린 청화는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으나 그들의 수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오는 길에 현마의 지적도 있고 해서 나는 실망감을 내색하는 대신 기마를 격려했다. 기마는 칭찬을 받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도저히 극악무도한 마두로 보이지 않는 행태였다.
여하간 청화를 갈무리하고는 원주를 뜨려는데 누군가 내 발목을 잡았다. 군중의 앞줄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쳐든 염소수염의 중년인이었다.
“외람되오나 감히 마종께 면담을 청하옵니다.”
나는 중년인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그를 일으키며 물었다.
“어째서 여기에 있소?”
중년인은 마전을 알려줌으로써 내가 구 단계의 벽을 돌파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장관이었다. 그와는 거의 한 달만의 재회였다.
나는 기마가 내준 전각에 들어가 장관과 독대했다. 그럼으로써 그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친인임을 기마류의 마인들에게 알려주었다. 기실 그는 나에게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천마고원에서 돌아온 현마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한산을 떠나 이곳에 왔습니다. 제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해서요. 현마님이 붙여주신 마인이 기마님께 저와 마종의 인연을 알려준 덕분에 저를 노리던 이를 굴복시키고 오결종사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마종이 내리셨다는 특명을 수행할 중책을 떠맡았고요. 바라던 바였기에 지난 열흘 내내 침식을 잊어가며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노고가 많았구려.”
장관은 겸손을 떨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감히 고충을 말씀드리고자 하는데 괜찮을는지요?”
“말해보구려.”
“여러 난제가 산적해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식량부족입니다. 현재 이곳에 비축된 재고로는 최대한 아껴가며 배분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한 달 정도만 버틸 수 있을 터입니다. 부족한 양은 사냥 등으로 보충하고 있으나 그것도 곧 한계에 봉착할 겁니다. 벌써부터 인육의 습성으로 돌아가려는 조짐이 보입니다. 원포 바깥에서는 이미 그런 사태가 공공연히 발생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곳들도 저희와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러니 시급히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초기라 강압이 통하지만 눌러두었던 불만들이 터지기 시작하면 통제 불능으로 치달을 게 불 보듯 뻔합니다.”
난감했다.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모를 때는 물어보는 게 상책이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마원은 척박한 땅입니다. 면적은 방대하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극히 적습니다. 그나마 독마류와 요마류가 자리한 사구와 진원은 근처에 곡창지대를 두고 있어 형편이 나을 것입니다. 우선 그들에게 일정 정도의 원조를 명해 당장의 위기를 해소해야 할 듯싶습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마원 외부에서 식량을 조달할 수밖에 없을 터입니다.”
“내가 전권을 주면 그 일을 해낼 수 있겠소?”
“죄송하오나 불가합니다. 저는 어찌어찌 살림을 꾸릴 수는 있으나 복잡한 상행위를 행할 재주는 없습니다. 따로 전문가를 찾아보심이 나을 것입니다.”
나는 퍼뜩 양 관주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가 이 험지에 와서 수백만의 입을 먹여 살리는 과업을 떠맡으려고 할까. 어쨌거나 달리 대안이 없었기에 아르를 보러 보양에 간 김에 그녀와 의논해보기로 했다.
“알겠소. 한 달이라고 했소? 그 안에 어떻게든 수를 내봅시다.”
***
원포에 이어 들른 사구와 진원에서는 의외로 성과가 괜찮았다. 두 대처의 민중은 하동보다는 못하지만 앞선 세 곳의 군중보다는 양질 모두에서 양호한 청화를 일으켰다.
전날 내가 도마와 더불어 가장 경계했던 독마는 육마 중 가장 비굴하게 굴며 내 비위를 맞췄다. 다만 독마류가 보유한 곡식을 다른 육처에 나눠주라는 지시에는 찰나지간이나마 뚜렷한 반감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자기들도 먹을 것이 부족해 굶기를 밥 먹듯 한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나는 그의 불평을 묵살하고 요구를 관철시켰다.
진원의 요마는 독마와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다. 자신의 염기(艶氣)가 내게 무용지물임을 재차 확인하고는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굴더니 식량 분배의 명에는 고분고분 응했다. 내가 눈빛에 담은 불쾌감에 꼬리를 내린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천마고원에서의 소득은 별게 없었다.
칠마의 좌장이라 할 도마는 전날 마지막까지 버티던 앙금이 남았는지 마지못해 사람들을 데려다 놓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 광대한 고원에 모인 이들의 수는 육마류의 마전들에서 캐낸 마동(魔童) 일천을 포함하여 고작 팔구천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성의가 없었다.
도마를 본보기로 삼으려던 나는 생각을 바꿨다. 아니, 실행을 보류했다. 그에 대한 징치는 만마(萬魔)의 눈앞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래야 본보기로서의 실효를 거둘 터였다.
하여 내년 봄으로 예정했던 대(大)소집을 앞당기기로 마음먹었다. 이번 일정에서 수확한 과실을 체화하면 미증유의 선력을 취득할 터이고 그리되면 현마를 포함한 칠마 전원을 상대하더라고 어렵지 않게 격파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일만 마인의 목전에서 그들의 수장들이 내 지공에 추풍낙엽처럼 나뒹구는 광경을 현시함으로써 나는 절대적 권위를 구축할 참이었다.
***
천마고원에서 내려온 나는 동편으로 이삼백 리가량 이동한 후 인적 없는 험산준령에서 경신을 멈추었다. 이미 자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나와 함께 진종일 수천 리를 강행군했던 현마는 운기조식을 마다하고 내 호위를 자청했다. 그를 배려할 계제가 아니었기에 나는 더 권하지 않고 바로 운공에 들었다.
익숙하면서도 매번 생경한 극통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나는 오늘 취한 청화를 건기로 전환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아흐레 전 서역의 전장에서 태산 같은 적화를 취득한 이후 내내 떠안고 있던 극심한 불균형이 서서히 완화되었다. 아직 완전히 해소하기에는 불충분했지만 위험한 고비는 확실히 넘긴 듯했다.
급증한 건곤기를 운용하던 중 나는 소스라쳤다. 느닷없이 내 내부가 확연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노인네가 말한 관조지경(觀照之境)에 다다른 것이었다. 노인네는 구 단계에 오른 이후 거기에 이르는 데 십이 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걸 단 이십일 만에 해냈으니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맑디맑은 물속을 들여다보듯 체내의 뼈와 근육과 힘줄과 내장과 피의 순환이 투명하게 드러났다. 신기하고도 신비했다.
황홀경에 빠져있던 나는 상단전을 면밀히 탐색했다. 독고(毒蠱)는 금방 찾아냈다. 좁쌀 크기의 벌레는 내 두개골 안쪽에 딱 붙어있었다.
나는 내기를 이용해 독고를 긁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내 머리뼈에 못이라도 박은 듯 벌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 차례 더 용을 써보았으나 별무소용이었다.
긁어내기를 포기한 나는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건곤기로 태워버리면 어떨까. 독고 주변의 조직도 상하겠지만 시도해 볼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그 구상을 실행에 옮기자마자 나는 간담이 서늘해져서는 바로 중단했다. 너무 작아 하찮다는 표현조차 쓰기 아까운 벌레의 더듬이가 심하게 요동을 쳤기 때문이었다. 내 의도를 간파하고는 성을 내는 듯했다.
벌레가 자폭이라도 하는 날엔 큰일이었다.
양 관주를 통해 알아본 바에 따르면 천지쌍고는 그 조그만 체구에도 불구하고 상단전을 박살 내고도 남을 폭발력을 갖고 있었다. 뇌가 터지면 설령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만사휴의였다. 그러니 감히 벌레의 심기를 더는 건드릴 수가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
독고의 제거를 단념하고 선력의 체화에 몰두하던 나는 어느 순간 눈을 떴다. 뭔가 꺼림칙한 소리가 고막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운공 중에 청력을 열어둔 건 현마를 경계해서가 아니었다. 봉화산에서 사인조에게 암습을 받은 이후 누구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후유증이 생겼으나 나는 그를 믿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내 뒤통수를 친다면 나는 앞으로 영원히 사람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을 껴안고 살아야 할 터였다.
각설하고 내 신경을 건드린 것은 현마가 아니라 멀리서 다가오는 미묘한 소리였다. 나는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기음이었다. 그리고 그에 동반된 기억은 썩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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