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26
제126화 – 아무려나.
나는 퍼뜩 생각이 떠올랐다.
“내 부모의 출신 내력을 알아냈단 말이오?”
실망스럽게도 문상의 고개가 좌우로 돌아갔다.
“아니에요. 그보다 어서 들어가 봐요.”
문상이 왼편의 벽으로 갔다. 그러더니 벽에 걸린 족자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반대편 벽이 갈라지더니 통로가 나왔다. 나는 얼핏 용궁이 떠올랐다.
“들어가요. 언니의 연무장까지는 짧지 않은 거리지만 오 공자의 경공이면 반각 이내에 당도할 수 있을 거예요.”
“같이 안 가오?”
“그러고 싶지만 내가 낄 자리가 아니잖아요. 언니의 연무장은 꽤 넓긴 해도 절대고수 둘이 비무를 벌이기에 아주 넉넉한 공간이라 할 수는 없어요. 괜히 구경한답시고 얼쩡거리다 날벼락을 맞을 수도 있으니 자중해야지요.”
“나는 무후와 손을 섞지 않을 거요.”
열린 벽으로 가서 금빛의 선을 건드리려던 문상이 손길을 멈췄다.
“무슨 소린가요?”
“아직 그녀를 상대할 준비가 안 됐소.”
“하지만 불과 닷새 전에 도제를 물리쳤잖아요?”
“그렇긴 하나 순수한 무력으로 이긴 건 아니었소.”
문상의 호흡이 일시지간 끊어졌다. 그러더니 뜻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다행이군요.”
그 말의 의미를 물으려는데 문상이 나를 재촉했다.
“그렇더라도 일단 들어가 봐요. 이미 오 공자가 온 걸 알렸으니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서두르는 게 좋을 거예요. 언니는 시간을 낭비하는 걸 몹시 싫어하니까.”
내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상이 통로 안쪽으로 난 현(絃)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띠이잉.
금색 줄이 떨리며 청아한 기음이 울려 퍼졌다.
“이제 들어가요. 좀 어둡긴 해도 나아가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거예요. 비무를 할 수 없는 사정은 오 공자가 언니에게 직접 설명해요. 무운을 빌어요.”
불길한 말을 덧붙이며 문상이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마지못해 시커먼 통로 안으로 몸을 날렸다.
***
암굴은 길었다. 그리고 좀 어두운 게 아니라 아주 어두웠다. 거기에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했기에 수시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선령을 동원하지 않았다면 전진에 적잖이 애를 먹었을 터였다.
나는 이런 길을 내준 문상의 저의가 궁금했다. 나를 골탕 먹이려던 걸까. 아니면 내가 이 정도의 장애는 쉽게 극복하리라 여겼던 걸까. 전자일 것 같은 의심을 떨칠 수 없었으나 어쨌든 선령의 공능으로 나는 후자를 실현하며 빠르게 암흑을 뚫고 나갔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멀리 희미한 빛이 어른거렸다. 그리로 빠져나가자 환하고 널찍한 공간이 나를 맞이했다. 무후의 연무장이었다.
곳곳에 값비싼 야명주가 박힌 오천 평 넓이의 지하광장을 독점한 무후는 전날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흉터로 그득한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냈던 그날과 달리 오늘은 산뜻한 백색 무복을 걸치고 있었다. 나는 다소 부담스러웠다. 무후의 착복(着服)은 그녀가 나를 맞수로 인정한다는 의사표시였다. 내가 기대감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면 분노를 유발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심중에 움트는 불안감을 다스리며 나는 무후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무후는 제자리에 서서 나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와의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압박감이 커졌다. 첫 만남 때처럼 짓눌리는 듯한 기분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감당하기 어려운 기운이었다.
나는 무후의 이십 보 전면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발산하는 강대한 투기(鬪氣)가 해일처럼 나를 덮쳤다.
이미 임전태세에 돌입한 무후가 다짜고짜 손을 쓸까 봐 나는 얼른 포권했다.
“오선이 무후를 뵙소.”
압기를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무후가 내 말을 받았다.
“도제를 꺾었다고?”
기다렸던 질문이었다. 나는 문상에게 주었던 것과 똑같은 답을 내놓았다.
“그렇긴 하나 순수한 무력으로 그를 물리친 건 아니었소.”
무후는 문상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무슨 말이냐?”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와 맞붙기는 했으나 내 무력은 아직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 그러나 물러설 수 없는 일전이었기에 옥쇄를 각오하고 사력을 다해 싸웠소. 죽을 때 죽더라도 그의 팔 한 짝쯤은 떼어갈 각오로 말이오. 그랬더니 확연한 우세를 점하고도 냅다 튑디다. 그것이 그날 승부의 진상이오.”
“…….”
무후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내 말의 진위 여부를 따지기 위한 시간은 아닌 듯했다. 나는 그녀가 터무니없이 들릴 수도 있는 내 설명을 처음부터 받아들였음을 알았다.
그녀는 도제의 진면목에 대해 나만큼이나 잘 파악하고 있을 인물이었다. 삼십 년 전 난세사강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였을 무렵 도제는 세 번이나 무후의 비무 청을 물리쳤다. 무후는 그 과정에서 그가 겁쟁이임을 간파했을 터였다.
훗날 십자무련과 도산이 전략적 제휴 관계가 되었을 때도 무후는 도제를 동등한 상대로 대하지 않고 멸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도제는 그녀의 도발에 응하지 않고 회피로 일관했다.
그만이 아니라 다들 무후를 꺼리는 분위기였기에 그의 그러한 처신은 별 뒷말을 낳지는 않았으나 체면이 깎인 것은 사실이었다.
***
무후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렇더라도 도제의 양보를 받아낸 건 그간 네 무력이 일취월장했다는 의미일 터, 이제부터 확인해보겠다.”
예상했던 발언이었기에 나는 준비된 답을 꺼냈다.
“분명히 나는 넉 달여 전 이곳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소. 그러나 아직 당신의 수들을 받아낼 정도는 아니오. 더욱이 불과 닷새 전에 버거운 상대인 도제와 생사투를 결하느라 중한 내상을 입었소. 그날 그가 튀기 전에 일도만 더 휘둘렀다면 나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요.”
“…….”
나는 초조해졌다.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도 무후가 시험을 고수하려 든다면 응대할 수밖에 없었다.
내 입장에서 그녀와의 싸움은 실익이 전무했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그녀의 성향을 고려할 시 괜한 부상만 입을 위험성만 다분했다. 자칫 사지 중 하나가 뜯겨나갈 우려도 있었다. 무후는 그러고도 남을 여자였다.
하여 나는 무후가 내게 불리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다시금 설득에 나섰다.
“내상이 아물면 다시 찾아오겠소. 하지만 그보다는 좀 더 시간을 주었으면 싶소. 지금의 무력으로는 전력에 전력을 다해도 십 초가 한계일 거요. 도제에게도 정확히 칠 초를 버텼을 뿐이었소. 당신과 적어도 삼십 초의 공방을 벌일 수 있는 무력을 갖출 때까지 기다려줄 수 없겠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요.”
“…….”
갈등하는 무후를 바라보며 나는 비장의 패를 내밀었다.
“창제와의 승부는 일 년 가까이 남았잖소? 과실이 설익었을 때 따 먹으면 배탈만 날 공산이 크오. 얼마 안 있으면 무르익을 테니 그때 제대로 된 맛을 즐기는 게 어떻겠소?”
침묵하던 무후가 입을 열었다. 역시 그녀에겐 창제가 특효약이었다.
“얼마나 더 주면 되겠느냐?”
나는 원래 약속했던 시일이 여덟 달 이상 남았음을 상기시키려다 말을 아꼈다. 구태여 무후를 자극할 까닭이 없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일백일만 주구려. 그때까진 어떻게든 당신의 어깨 어림까지 자라보겠소.”
시퍼런 안광을 발하며 나를 노려보던 무후가 숫자를 수정했다.
“두 달.”
나는 무후와 줄다리기를 하지 않고 즉시 수용했다.
“알겠소. 그렇게 합시다.”
볼일이 끝났다는 듯 무후가 손을 내저었다. 축객령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아까 들어왔던 암굴을 향해 첫걸음을 떼자마자 깨달았다. 어느새 내 옷이 흥건히 젖어 있음을.
더위 때문이 아니었다. 지하광장의 공기는 늦가을 날씨처럼 서늘했다. 내가 땀으로 범벅이 된 것은 무후 탓이었다. 그녀로 인한 긴장감이 온몸을 적신 식은땀의 원천이었다. 나는 무후가 개세팔천 중 최강자일 수도 있다는 용왕의 주장이 헛소리가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
문상은 다실에 그대로 있었다.
내가 통로를 나오자 벽을 도로 닫으며 문상이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얼마나 벌었나요?”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문상은 내 맞은편에 착석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두 달이오.”
“언니가 놓아줄 만하군요. 그런데 그때까지 언니와 대등한 무위에 이를 수 있으리라 자신하나요?”
“그녀에게 삼십 초를 견딜 정도의 수준을 전제로 한 거요.”
“그렇군요. 하지만 오 공자의 발전 속도를 감안하건대 그 기간이면 능히 언니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면 그 절반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문상이 나를 그리 높게 평가하는지는 미처 몰랐구려.”
“있는 그대로를 볼 뿐이에요.”
나는 주전자를 기울여 내 앞에만 놓인 찻잔에 차를 따르는 문상의 섬섬옥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면사에 가려진 그녀의 끔찍한 면상을 떠올렸다. 참혹하게 상하기 전에는 얼마나 매끄럽고 고운 얼굴이었을까.
뇌리에 떠오른 단상을 떨쳐낸 나는 궁금한 점을 물었다.
“문상이 알아냈다는 내 비밀이 뭐였소? 나는 당연히 내 부모에 관한 것이리라 생각했소만.”
“그 방면으로는 진척이 없어요. 실로 기이한 일이죠.”
“어째서 그렇소?”
“오 공자는 당금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에요. 그런데도 두어 달 내내 중원 전역을 샅샅이 훑었지만 오 공자와 빼닮았다는 이에 관해 아무것도 건진 게 없어요. 이는 오 공자의 선친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곳에서 성장했다는 뜻이에요. 기실 그런 데는 의외로 많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그러한 극소수의 비처에 거의 다 연줄을 갖고 있어요. 그럼에도 어떤 단서도 찾지 못했어요. 정말로 오 공자의 부모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이들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예요.”
나는 낙담했다. 문상의 정보력으로도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다면 앞으로도 영영 부모의 내력을 알 길이 없을 듯싶었다. 대체 그이들은 어디에서 태어나서 어떻게 자랐을까. 어쩌다 천마의 마령을 취하게 되었을까.
머릿속에서 잇달아 일어나는 의문들을 누르며 나는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내 비밀이란 게 뭐요?”
“비밀이라기보다는 비결이라고 하는 게 낫겠네요.”
“비결이라니?”
“오 공자가 단기간에 경이로운 무력 상승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 말이에요.”
나는 침을 삼켰다. 설마 이 여자가.
“나는 오 공자의 행적을 철저히 추적했어요. 강호 초출 시엔 정검문의 창천검에게도 고전한 흔적이 있더군요. 본련의 총사에게도 첫 대결 시엔 일방적으로 밀렸고요. 그런데 매번 불과 며칠 만에 전력의 열세를 극복해냈어요. 창천검과 별 차이가 없는 광마도를 꺾었나 하면 총사도 나흘 만에 완벽한 역전승을 일구었어요.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무력이 급증할 수 있었을까. 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진즉 찾았어요. 다만 확신할 수는 없어서 좀 더 근거가 쌓이기를 기다렸을 뿐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확신하게 되었단 말이오?”
“그래요. 확실하게 밝혀냈다고 확신해요.”
“그렇게 큰소리치다 틀리면 창피할 텐데?”
문상은 말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면사 속에서 득의양양한 미소를 머금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나도 웃음 지었다.
정말 자신할 수 있소?
그리 단언하는 걸 보니 건곤기를 키우는 비법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진실에 가깝게 추론해냈을 성싶지만 또 다른 힘의 원천에 관해서는 꿈에도 모를 터인데.
마치 내 속을 읽은 듯 문상이 답을 주었다.
“자신해요. 그러지 않았다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거예요.”
아무려나. 그러시겠지.
나는 이해득실을 판단했다. 문상이 선력 증진의 비법을 알아냈다는 전제하에 그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녀는 양날의 칼이었다. 워낙 대단한 정보력을 갖고 있으니 내게 지대한 도움을 줄 수도 있을 터이나 동시에 작심하고 방해하려 들면 걸림돌이 될 소지도 다분했다. 어떻게든 전자 쪽으로 유도해야 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