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32
제132화 – 여기선 더더욱 안 되오.
다음 날 새벽 나는 천마고원으로 출발했다.
높이가 일천 장에 달하는 거산에 당도했을 때는 날이 밝아있었다. 하지만 팔백만 평의 면적을 자랑하는 고원은 음산한 기운으로 그득했다.
나는 일부러 마기를 발산하며 천공을 가로질러 적벽으로 나아갔다. 내 비행을 목도한 지상의 마인들이 소요를 일으켰다.
천마의 발원지라는 신화가 깃든 적벽에 이른 나는 이름과는 달리 누리끼리한 황토로 이루어진 둔덕 위에 올라 반도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나를 보러 올 터였다. 달아날 심산이었다면 진즉 그랬을 것이었다. 그들이 천마고원으로 되돌아온 건 여기서 옥쇄하겠다는 의사표시였다. 나로서는 좀 의외였다. 도마류는 몰라도 요마류까지 멸절을 각오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한 식경쯤 지난 후 좌우에서 각각 이삼백 명가량의 마인들이 적벽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선두에 낯익은 남녀가 보였다. 도마와 요마였다.
도마류와 요마류는 섞이지 않고 서로 이십여 장이나 떨어진 채 둔덕 아래 운집했다. 나하고의 거리는 칠팔 장에 불과했다. 둔덕은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모두들 나를 올려다보는 형국이었다.
요마가 먼저 입을 열 줄 알았는데 최초의 일성을 발한 이는 도마였다.
“부탁이 있다.”
말투가 바뀐 것은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번 거사는 전적으로 내가 결정한 일이다. 이들은 단지 나를 따랐을 뿐이다. 선처를 바란다.”
도마류의 마인들이 그들의 우두머리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울부짖었다. 나는 발광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한 거요? 결말이 빤히 보이는데.”
“나는 너를 마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너는 마종이 아닐뿐더러 마인이라 보기도 어렵다. 아무리 강해도 마인이 아닌 자를 주군으로 받들 수는 없다.”
“어째서 내가 마인이 아니라는 거요?”
“네가 마인이라면 그런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 마인은 그러지 않는다. 버러지들을 버러지로 대할 뿐.”
“하지만 현마류는 이십 년이나 그러고 살았잖소? 기마류도 얼마간은 내 부친의 명을 이행했고. 그들도 마인이 아니라 우길 참이오?”
“그렇다. 그들은 가짜다.”
“무슨 소리요?”
“현마류의 뿌리가 뭔 줄 아느냐? 무림사 초창기에 우리 선조들과 대적하던 정파 나부랭이들 중 일부가 우리와 동화되어 은근슬쩍 자리를 잡은 게 그들의 기원이다. 이는 기마류도 마찬가지다. 기문둔갑이나 좌도방문에 심취한 무림의 떨거지들이 이곳으로 쫓겨 와 우리에게 끼어든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보다는 잡마류로 전락한 혈마류와 철마류가 정통이라 할 터, 언젠가는 가짜를 몰아내고…….”
“그럼 장마류와 독마류, 그리고 검마류는 어떻소? 그들도 가짜요?”
“그들은 겁쟁이들일 뿐이다. 그들 또한 머지않아 네게 반기를 들 것이다. 지금은 네 위세에 눌려 웅크리고 있지만…….”
“누가 겁쟁이인지 모르겠군. 외인들을 끌어들인 주제에. 좀 전에 마인이 아닌 자를 주군으로 받들 수 없다고 했소? 나를 몰아내고 도제를 주인으로 모실 심산이었으면서…….”
“그런 적 없다. 그들은 우리의 독자성을 보장했다. 우리는 다만 우리만으로는 너를 감당할 수 없기에 그들의 도움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들이 너처럼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리며 우리를 지배하려 들었다면 똑같이 결사항전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목숨을 걸고 나와 싸우겠다는 거요?”
“나는 네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안다. 모든 걸 책임지고 자결할 테니 이들만큼은 살려다오. 그러면 저승에 가서도 그 은혜는 잊지 않겠다.”
도마류의 마인들이 다시 자기들도 죽겠다며 아우성을 쳤다. 이로써 이야기가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내가 도마와의 언쟁에 응한 건 그에게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나는 기실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칠마 중 현마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호감을 느낀 이였다. 하지만 이렇게 빡빡하게 굴어서야 관용을 베풀 여지가 없었다.
나는 도마에 대한 처결을 보류하고 요마에게 눈을 돌렸다. 내 시선을 받자 요마가 풍만한 몸을 배배 꼬았다. 기가 막혔다. 이 와중에도 저러고 싶을까.
“죄송해요, 마종. 죽을죄를 지었어요. 도마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저도 모르게 미친 짓을 했지만 바로 후회했어요. 그래서 이리로 철수해 마종의 처분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앞으로는 절대로 마종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 없을 거예요.”
요마의 간청을 무시하려다 무심코 물었다.
“그러면 겁간을 금하는 명령에도 복종할 거요?”
“당연하죠. 그 명을 어기는 년들이 있으면 제 손으로 찢어 죽일 참이에요.”
“하지만 당신들은 사내의 정기를 빨아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잖소?”
일순 요마가 표독스러운 안광을 발했다. 그걸 알면서 그런 명령을 내렸느냐는 항변이었다. 하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 금세 눈빛이 유순해졌다.
“요력을 키울 순 없지만 살아가는 데는 지장이 없어요. 그리고 나름 대안을 생각해봤어요.”
“대안이라니?”
“마종의 명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을 겁간하는 자들이 부지기수로 나올 거예요. 그런 자들을 저희에게 맡겨주세요. 거세보다 훨씬 끔찍한 고통과 치욕감을 맛보여 준 후 골로 보낼 테니까. 그들의 씨가 마르면 바깥세상의 짐승들을 먹이로 삼으면 돼요. 어차피 조만간 마도천하를 이루실 거잖아요. 세상은 넓고 여자를 범하는 쓰레기들은 강가의 모래알처럼 많으니…….”
“그럴듯하군. 그럴 걸 어째서 다짜고짜 반기부터 든 거요?”
“열흘 전엔 미처 그 생각을 못 했어요. 그리고 무림에서 칼의 황제로 군림한다는 자로부터 지원을 받기로 했으니 승산이 충분하다며 도마가 계속 꼬드기는 바람에…….”
요마의 뒷말은 뭉개졌다. 도마류의 마인들이 닥치라며 난리를 쳤기 때문이었다. 요마류의 요녀들도 그에 맞서 고함을 질러대는 바람에 들판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만!”
내 최대치의 선력과 마력을 담은 호통에 악머구리 끓듯 했던 장내가 일순지간 죽은 쥐처럼 조용해졌다.
“당신들에 대한 처분을 내리겠소.”
모두들 호흡을 닫았다. 사백여 명의 일급 마인들이 발산하는 긴장감에 주위의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가운데 나는 도마를 직시했다.
“저들은 당신을 따르고자 하니 따로 처리할 수는 없소. 다 죽든가, 아니면 다 살든가.”
마인들의 반응은 복잡하고도 미묘했다. 희망과 절망이 반반씩 섞인 탓이었다. 혹자는 즉각적인 징치를 보류한 처사를 두고 아량을 베풀 거라 기대했을 터이고 또 어떤 이들은 몰살이 불가피할 거라 단정하고는 체념했을 것이었다.
내 눈빛을 정면에서 치받으며 도마가 입을 열었다.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말했잖소? 저들을 데리고 염왕에게 가던가, 아니면 내게 무릎을 꿇고 본인과 저들의 구명을 청하던가.”
도마류는 물론이고 요마류의 요녀들까지 술렁거렸다. 요마가 그들 전부를 대표해 물었다.
“우리가 무릎 꿇고 빌면, 그리고 마종께 충성을 맹세하면 우리를 용서해주겠단 말인가요?”
나는 요마의 질문을 묵살하고 도마의 답을 재촉했다.
“어쩔 거요?”
맹렬한 안광을 쏘아내며 나를 노려보던 도마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마종께 용서를 청하오. 부디 우리를 살려주시오. 맹세코 다시는 반역하지 않겠소.”
요마가 냉큼 따라 했다.
“저도요. 앞으로는 마종의 수족이 되어 견마지로를 다할게요. 믿어주세요.”
나는 요마에게 눈을 돌렸다.
“저들과 당신들은 별개요.”
“무슨 말씀인가요?”
요마의 음성이 버들피리처럼 떨려 나왔다.
“당신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소. 당신만 살든가, 아니면 저들을 살리든가.”
양편의 색깔은 극적으로 갈렸다.
환호성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수장은 물론이고 자신들도 목숨을 보전하게 된 도마류 마인들의 안색이 보름달처럼 밝아진 반면 초상집 분위기로 화한 요마류는 요마를 필두로 죄다 낯빛에 암운이 드리웠다.
요마가 이의를 제기했다.
“어째서 도마에겐 그토록 관대한 처분을 내리시고 저에겐 이토록 가혹한 선택을 강요하시나요?”
“내 맘이오.”
말문이 막힌 요마가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당장 결정하도록. 반각 주겠소. 참, 미리 말하건대 판정의 번복은 없소. 당신과 저들 중 한쪽만 봐줄 거요. 뭐, 다 같이 염왕전 구경을 가고 싶다면 기꺼이 들어주겠소. 어서 의논들 해보구려. 양자 간에 합의를 보면 그대로 집행해 주겠소.”
나한테 매달려도 소용이 없을 거라 판단했는지 벌떡 일어나서 몸을 돌린 요마가 제 식구들을 상대로 장광설을 쏟아냈다. 요컨대 자기가 살아야 요마류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으니 너희가 희생하라는 소리였다.
요녀들은 이구동성으로 되받아쳤다. 그런 논리라면 집단을 보존하는 게 훨씬 유리하다는 반박이었다. 요마가 살벌한 요기를 발하며 요녀들을 압박했지만 그들도 목숨이 달린 문제인지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섰다.
일대수백(一對數百)의 입씨름은 갈수록 격렬해졌다. 이러다간 합의는 고사하고 자기들끼리 이전투구를 벌일 판이었다. 나는 심술을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이제 됐소. 대충 양자의 입장들을 알았으니 판정을 내리겠소.”
모두들 숨을 죽였다.
나는 요마를 보았다.
내 눈길을 받은 그녀가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땅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박았다.
“제발 살려주세요, 마종. 살려만 주시면…….”
나는 요마의 말을 막았다.
“누가 죽인다고 했소?”
고개를 쳐든 요마의 얼굴에 기사회생했다는 안도감이 가득했다.
“고마워요, 마종. 정말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할게요. 그리고 저년들을 대신해 새로이 키울 아이들은 마종의 뜻에 따라…….”
“뭔가 오해한 모양인데 내가 찍은 쪽은 당신이오. 저들을 일일이 손보려면 귀찮잖소?”
“하지만 방금 저를 살려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소.”
“그러면 제가 아니라 저년들을 처단하신다는 말씀 아닌가요?”
“아니. 저들은 아까 당신이 제시한 대안을 충실히 따른다는 전제 하에서 기회를 줄 참이오.”
“그럼 저는…….”
“이런 일을 벌이고도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소. 당신을 본보기로 삼아 앞으로 나에게 거역하는 자들이 어떤 꼴이 될지 알려주고자 하오.”
요마는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는 둔덕에서 뛰어내려 그녀의 머리맡에 섰다. 그 순간 요마가 벼락같이 손을 뻗더니 내 사타구니를 찔러왔다. 소위 최후의 발악이었다.
나는 요마의 손을 낚아챘다.
그런 후 선력과 마력을 압기로 전환해 그녀의 동체를 짓눌렀다. 대번에 내부가 터진 요마가 축 늘어졌다.
나는 그녀의 장심을 통해 마기를 흡수했다. 마기가 빨림에 따라 스무 살 여인처럼 탱탱하던 요마의 몸뚱이가 물에 불어 터진 면처럼 흐물흐물해졌다. 중년 미부에서 주름살투성이 노파로 변신한 요마가 남은 힘을 모아 악다구니를 썼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이 악마!”
“이곳은 신성한 곳이오. 천마의 발원지라서가 아니라 내 부모가 현신한 장소이니. 원래도 내 치하에서 살인은 금기지만 여기선 더더욱 안 되오.”
나는 요마가 저주를 퍼붓기 전에 수혈을 짚었다. 내 처치를 목도한 마인들의 눈에 원초적인 공포가 어렸다. 요마의 말마따나 그들로서는 마력을 잃고 폐인이 되느니 죽는 게 백 배 나을 터였다.
나는 후속 조치를 취하고 천마고원을 내려갔다.
도마류의 마인들에겐 고원에서의 일 년 근신을 명했다. 그들이 그동안 양 관주가 정리한 규율들을 충실히 지킨다면 일 년 후 사면을 해 줄 참이었다.
요마류의 요녀들은 하동으로 보냈다. 그들은 이제 양 관주의 통제하에 겁간의 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저승사자 노릇을 하게 될 터였다.
요마류는 그런 식으로 당분간은 존속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바보가 아닌 한 그들이 그걸 모를 리 만무했다. 하지만 요마류의 요녀들은 요마가 보여준바, 전체의 보존보다는 자기들 개인의 안위를 훨씬 중요시하는 족속이었다. 내가 건재한 한, 두 번째 반란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