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35
제135화 – 나만 믿어요.
나우는 서역에서 전해지는 고대의 신화로 포문을 열었다.
장황한 내용이었으나 간략히 추리면 다음과 같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신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누가 더 센지를 두고 언쟁을 벌이다 제대로 한판 붙었단다. 그러고는 양패구상, 아니 동귀어진했단다.
터지고 깨져나간 그들의 동체는 각각 네 개로 나뉘어 천지간에 흩어졌다. 그게 팔대신물이 되었단다.
“팔대신물에 속한 기물들을 아나요?”
“몇 개는. 금강저와 철벽운은 그때 나우 덕분에 몸소 겪어보았고 방금 들은 광구와 여의주, 그리고 환상환까지 총 다섯 개군.”
“나머지 세 개는 천라망(天羅網)과 풍운선(風雲扇), 그리고 화염봉(火焰棒)이에요.”
“그것들 사이에 등급이나 서열이 있소?”
“예리하군요. 전날 금강저와 철벽운을 보고서 시시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것들은 팔대신물들 중 하급에 위치해요. 화염봉과 풍운선도 그렇고요.”
“그러면 다른 넷이 상급이오?”
“아니에요. 광구와 천라망은 중급으로 분류돼요. 여의주와 환상환이 상급이죠. 금강저와 화염봉이 각각 네 개, 풍운선과 철벽운이 각각 세 개씩 있는 반면에 중급과 상급의 신물들은 하나씩들밖에 없어요.”
“신물들의 소유자들은 알고 있소?”
“몇 명은요. 사실 요 근래 풍년이 들어서 그렇지 신물들은 아무 때나 나오는 게 아니에요. 삼십 년에 하나가 나올까 말까 하죠. 특히 중급과 상급의 신물들은 백 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일 때도 많아요.”
“혹시 환상환은 누가 가지고 있는지 아오?”
“몰라요. 환상환은 마지막으로 등장한 게 사백오십 년 전이었어요. 여의주는 그보다 오래되었고요.”
“그것들은 어디에 쓰이오?”
“둘 다 신들의 머리에서 떨어져 나온 신물들이니 비슷한 공능을 가지고 있어요. 한마디로 인간의 정신을 조종할 수 있죠. 그러니 여의주나 환상환의 주인이 되면 천하무적이 될 수 있어요. 남의 마음을 마음대로 부리는데 구태여 힘을 쓸 필요가 없잖아요?”
“그게 아무한테나 통한다는 말이오?”
“그렇진 않아요. 그랬으면 예전에 그 신물들의 선택을 받았던 이들이 이 대륙을 일통했겠죠. 열네 개의 왕국들을 돌아다니며 왕들을 말 잘 듣는 충견으로 만들면 되니까. 그러지 못했던 건 제약이 있기 때문이에요.”
“어떤 제약?”
“방금 오 공자가 말한 대로 신물이 통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어요. 그런 이들에게 함부로 올가미를 씌우려 들었다간 역공을 당할 우려가 크죠. 실제로 여의주와 환상환을 지닌 법사들은 그런 식으로 최후를 맞이했어요.”
“그들이 통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이오?”
“그럴 거라 추정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오래 가지는 못했을 거예요.”
“왜 그렇소?”
“진짜 제약은 따로 있기 때문이죠. 여의주와 환상환 모두 일회적이고 일시적인 효능만 가진다고 알려져 있어요. 가령 그 신물들에게 홀려 개가 되었더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사람으로 돌아오는 거죠. 한 번 당했던 사람은 다시 개가 되지 않고요. 그러니 대륙 일통은 어림도 없죠.”
“그 정도라면 별거 아니군. 상급이 된 까닭을 모르겠소.”
“그렇게 우습게 보다 큰코다칠걸요. 생각해 봐요. 여의주나 환상환을 부릴 수 있는 법사가 오 공자의 정신을 장악한 후 자결하라고 명령하면 어쩔 거예요? 대책이 있나요?”
“…….”
“거 봐요. 아무리 오 공자의 무력이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른다고 해도 그 신물들의 주인에겐 역불급이에요. 대적할 방도가 없으니까요. 그러니 당대에 그런 자들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게 오 공자로서는 최선일 거예요.”
“내가 그 기물들이 통하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잖소?”
“물론 가능성 자체를 배제할 순 없죠. 하지만 그런 이들은 극소수였어요. 오 공자가 그 부류에 들 것 같지는 않네요.”
“…….”
“미안해요. 화났어요?”
“…….”
***
결국 문상의 가설에 일리가 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 별 소득이 없었다.
나우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아르가 나를 유혹하기 위해 사용했다던 ‘오치’가 떠올랐다. 어딘가 환상환과 비슷하지 않은가.
혹시 태곳적에 용족의 선조들에게 용궁을 주었다던 신인(神人)들이 서역의 팔대신물을 남긴 천지의 신들과 동일인들이 아니었을까. 그곳에 보관된 여의주도 이곳의 여의주와 동일물이 아닐까. 사람의 정신을 조종한다는 기물이 어떻게 세상을 파괴하거나 지배할 힘을 가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비유적인 표현이라면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여하간 나는 천라망이나 풍운선 등의 용도를 좀 더 들은 후 이 화제를 마무리 지었다. 밀왕의 암기에 당한 내-외상이 어느 정도 아물었으니 이제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
“나우의 처소로 갑시다.”
내 말에 나우의 눈이 반짝거렸다.
“계속 물으려다 심장이 떨려 아껴뒀는데, 정말 밀왕을 물리친 건가요?”
“모르겠소. 그를 쫓아버린 건 맞지만 그게 밀왕 본인인지 확신할 순 없소.”
“무슨 말인가요?”
“뭔가 이상했소. 내 지공이 그에게 적중했음에도 표도 나지 않은 거며, 한순간에 연기가 꺼지듯 사라진 거며. 마치 허깨비 같았소. 어쩌면 실체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오.”
“실체가 아니면 환영이라는 건가요?”
“그건 아닌 듯하오. 단순한 환영이라면 나를 이 꼴로 만들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럼 뭐죠?”
“그게 뭐든 일단 나우의 처소로 갑시다. 거기서 대륙의 현황을 알아본 후 나를 전장으로 데려다주길 바라오.”
“파리나의 원로들에게 밀왕을 이겼다고 선언할 건가요?”
나는 답을 미루고 되물었다.
“혹시 중원 소식이 여기 전해지는 데 얼마나 걸리오?”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 중대한 내용일 경우엔 열흘이면 받을 수 있어요.”
애매했다. 도제와의 일전은 열하루 전이었다.
“그렇다면 그냥 밀왕을 상대했다는 정도로만 해둡시다.”
“믿지 않을 텐데요.”
“상관없소. 믿건 말건 내 뜻대로 할 테니까.”
“전쟁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요?”
“약간의 무력 시위를 할 참이오.”
“어떻게요?”
“혹시 그곳에 쓸모없는 장식품이 있소? 예를 들어 궁전의 지붕 같은.”
“그런 거야 널리고 널렸죠. 왜요? 그걸 부수게요?”
“그렇소.”
“그렇다면 적당한 게 있어요. 사방에 뱀 대가리가 달린 석상인데 예전부터 너무 보기 싫었어요. 흉물도 그런 흉물이 없어요. 근데 깰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자칫 실패하면 망신만 당할 텐데.”
“뭐로 만들어졌소? 크기는 어느 정도요?”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돌이라는 철암(鐵巖)이 주성분이에요. 어지간한 도검으로는 흠집도 낼 수 없고 오로지 팔대신물의 하나인 금강저로만 깎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죠. 덩치는 황소 삼십 마리를 합쳐놓은 정도랄까요. 어마어마하게 크죠.”
“좋소. 그걸로 합시다.”
내가 허리에 팔을 두르자 나우가 손바닥으로 내 가슴을 밀며 출발을 제지했다.
“잠깐만요. 만약 아까 그 괴인이 밀왕의 분체에 불과하다면 전장을 돌아다니다 밀궁에서 날아든 그의 본체와 맞닥뜨릴 수도 있잖아요? 그럴 때 그를 대적할 방도가 있나요? 보아하니 공개적인 행보를 하려는 모양인데, 그 상황에 대한 대비책이 없으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걱정 말구려. 그는 내 앞에 나타나지 못할 거요.”
“어째서죠?”
“내가 그의 약점을 발견했기 때문이오.”
“그게 뭔데요?”
“나에 대한 두려움이오.”
“네?”
***
파리나의 본단은 으리으리했다.
전날은 입구에서 나우를 내려주고 떠났지만 이번엔 성벽 같은 담장을 넘어 궁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경내까지 들어갔다. 나우를 안고 천공에서 낙하하는 나를 본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나우가 가리킨 장소에 착지했다. 사면에 사두(蛇頭)가 달린 거대한 석상과는 십이삼 장쯤 떨어진 곳이었다.
창과 방패를 든 무사들이 나와 나우 주위를 에워싸더니 화려한 의복을 차려입은 노인들이 하나둘 달려 나왔다. 모두 스무 명 남짓했다.
그들 중 고깔 같은 뾰족한 모자를 쓴 노인이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무어라 떠들었다.
나우가 그의 말을 되받았다. 둘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그러자 주변에서 술렁거림이 일었다.
잠시 노인과의 입씨름을 중단한 나우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나직이 속삭였다.
“이제 이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요. 실수하면 안 돼요.”
나는 나우가 흉물이라고 부른 석상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런 다음 검지만 남기고 나머지 네 손가락은 접었다. 수백 쌍의 눈들이 내 손과 석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우가 소리쳤다.
“리앗 바!”
잘 보라는 뜻일 테지. 똑똑히 보라는 말이거나.
나는 나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최대치의 선력과 마력을 담은 지공을 발출했다.
일지관천지는 여러 변용이 가능했다.
관통이 주된 기능이지만 경우에 따라선 밀거나 베어내는 용도로도 쓸 수 있었다. 이번엔 파괴가 목적이었기에 나는 지공이 목표물에 닿은 순간 경력이 면으로 확산되도록 했다.
거리도 사전에 신중하게 계산한 것이었다. 십오 장을 넘어가면 아무래도 위력이 떨어졌다. 그렇다고 너무 가까우면 강렬한 인상을 주기 힘들 터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두 석상이 박살이 났다.
시커먼 돌가루들이 비산하는 가운데 비명성과 경악성들이 난무했다. 그러다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장내를 내리누르는 묵직한 정적을 깨뜨린 것은 나우의 의기양양한 목소리였다.
“리아우! 리아우!”
‘봤지!’라는 뜻이 아닐까.
경망스럽게 폴짝폴짝 뛰지는 않았으나 나우는 보기 민망할 정도로 희희낙락했다. 그러면서 노골적으로 으스댔다. 마치 제가 한 일인 양.
“잘했어요, 아양. 최고예요. 진짜 최고예요.”
나를 꽉 끌어안으며 나우가 찬사를 쏟아냈다. 나는 신음성을 흘릴 뻔했다. 의외로 풍만한 나우의 젖가슴이 내 팔뚝에 밀착되어서가 아니라 내부가 격탕되었기 때문이었다. 태연한 척했지만 혹시라도 실패할까 봐 일지에 총력을 실은 탓에 혈맥들이 터지며 아물어가던 내상이 도졌다.
사정을 알 리 없는 나우가 내 팔을 잡고 나를 흔들어댔다.
“고마워요, 아양. 이제 나한테 찍소리도 못할 거예요. 아! 너무너무 통쾌하고 후련해요. 그렇게 나를 업신여기더니 다들 눈도 마주치지 못하네요. 깔깔깔.”
나우의 웃음소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물었다.
“지난번에도 그렇게 부르더니 아양이 무슨 뜻이오?”
일순지간 나우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어머! 내가 그랬어요? 나도 모르게 그만. 신경 쓰지 말아요. 무심코 나온 말이니까. 별 의미 없어요.”
수상쩍었다. 하지만 나는 더 캐묻지 않고 진도를 재촉했다.
“대충 분위기는 잡은 것 같으니 일을 하는 게 어떻겠소?”
나우가 썰면 두 접시는 나올 것 같은 두툼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조금만 더 즐기면 안 돼요? 살면서 가장 신나는 순간인데.”
이런 철딱서니를 봤나.
“당신은 신났을 줄 모르지만 나는 힘자랑하는 껄렁이가 된 것 같아 거북스럽소. 그리고 내겐 시간이 많지 않소.”
나우가 마지못해 물러섰다.
“알겠어요. 시작할게요.”
노인들에게 시선을 돌린 나우가 앙칼진 음성을 날렸다. 안 그래도 잔뜩 주눅이 들어있던 노인들이 일제히 목을 움츠렸다.
***
나를 꿔다놓은 보릿자루로 만들어놓고 노인들 중 셋을 밀실로 불러들여 면담을 가진 나우는 한참 후에야 결과물을 내놓았다.
“됐어요. 필요한 정보는 다 얻어냈어요.”
“아직도 전쟁이 한창이오?”
“아뇨. 대부분 소강상태래요. 하지만 곧 나다와 고란이 붙을 것 같대요. 아, 나다는 팔왕국이고 고란은 십이왕국이에요.”
“얼마나 머오?”
“남서 방면으로 이천오백 리쯤 돼요.”
“지리를 아오?”
“그럼요. 나만 믿어요.”
썩 미덥지는 않았으나 따로 길잡이를 구하자고 하면 삐칠 게 빤한지라 그냥 나우에게 의존하기로 했다.
그녀를 안고 천공으로 비상하며 나는 이번 출행에서 지난번과 같은 다대한 성과를 얻기를 기원했다. 그리되면 단박에 개세팔천의 무위에 육박할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