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53
제153화 – 깜짝 놀랄 게요.
해가 저물었다.
나는 밀왕이 오지 않으리란 결론을 내렸다. 전날엔 보고를 받은 지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도래했으니 나와의 대결을 회피했다고 보아야 했다. 이유가 궁금했다. 마기가 정말로 그의 조문인 걸까.
나는 흉터 노인을 불러 어떻게 밀궁에 급보를 보내는지, 그리고 밀왕은 어떤 상태인지 등을 물어보았다. 부드럽게 대했음에도 천성적으로 겁이 많은지 노인은 안절부절못했다. 피리 소리처럼 파들거리는 음성에 심하게 더듬거리기까지 하는 그를 달래가며 알아낸 내용은 다소 싱거웠다.
신속한 전달의 비결은 예상했던 대로 북소리였다. 흉터 노인은 평균적으로 십 리마다 새로 이어지는 고성(鼓聲)을 통해 한 식경이면 밀궁에 내 출현을 알릴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밀왕에 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전날 밀왕이 빈민굴 뒤편의 야산으로 나를 찾아온 것도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다.
노인에게서 더 캐낼 게 없다고 판단한 나는 그를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사전에 계획한 대로 밀궁 출정에 나섰다. 밀왕이 오지 않으니 내가 가야 했다.
***
나우가 길잡이 겸 통역 겸 증인으로 삼을 사내를 데려왔다.
기실 그녀는 자기가 그 역할을 하겠다고 자청했으나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 내가 만류했다. 안진은 나우와 함께 파리나 본부에 남기로 했다. 그녀는 나우의 개인 호위 노릇을 할 작정이었다.
안내역을 맡은 사내는 사십 대 중반의 털보였다.
외공을 익혔는지 팔뚝이며 가슴팍이며 온통 근육질이었다. 목도 통나무처럼 두꺼웠다. 나를 몹시 어려워했지만 묻는 말에 또박또박 답하는 것으로 보아 제법 강단도 있었다. 이름은 소우라고 했다.
나우에게 미리 언질을 들었던 듯 소우는 공중에서 경로를 효율적으로 지시했다. 새보다 빠른 내 경공 속도에도 별반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야밤임에도 소우가 적절하게 방향을 알려준 덕분에 나는 그날이 가기 전에 목적지 인근에 이르렀다.
멀리 밀궁의 전경에 시야에 들어왔을 때 몸에서 반응이 왔다. 자시였다. 근래엔 그 시각에 운공에 들지 않는 경우가 더 많지만 오랫동안 익숙했던 탓에 지금도 자시만 되면 체내에서 신호가 올라왔다.
어쨌거나 자시라면 고르에서 밀궁까지 이천일이백 리를 두 시진 이내에 주파한 셈이었다. 엄청난 기록이었으나 전날 밀왕이 현시했던 이적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 대체 그는 어떻게 그 먼 거리를 한 시진도 안 되어 날아올 수 있었을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기사였다.
소나무 숲에 소우를 내려놓은 나는 일백 장쯤 떨어진 밀궁을 바라보았다.
밀궁은 삼십 장 높이의 바위산을 통째로 깎아 만든 거대한 조각품이었다. 하지만 밀궁의 본체는 웅장한 외양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에 들어있었다. 나우가 알려준 바에 의하면 돌산 아래 땅속엔 일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가 자리했다. 밀궁은 이를테면 도원의 확장판이었다.
밀교의 본산지이지만 서역 전체를 놓고 보자면 변방의 패자에 불과했던 밀궁이 일약 대륙의 주인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절대자를 배출한 덕분이었다. 다름 아닌 밀왕 타우린이었다.
오십여 년 전 혜성과 같이 등장한 밀왕은 단 사십 일 만에 열네 개의 왕국을 평정하고 사상 최초로 대륙을 일통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가 왕국들을 굴복시킨 방법은 간단했다. 한 마디로 무력 시위였다.
홀로 각 왕국의 도읍을 찾은 밀왕은 일단 성벽을 무너뜨리며 소동을 일으킨 후 그를 잡으러 몰려나온 왕과 군사들 앞에서 신위를 과시했다.
손짓 한 번에 십 장 높이에 일 장 두께의 철문을 종잇장처럼 쪼개고 손바닥에서 무시무시한 태풍을 일으키는 괴물에게 대들 배포를 가진 왕은 아무도 없었다. 특급법사들을 다수 보유해 강국으로 군림하던 일왕국과 칠왕국조차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륙을 수중에 넣은 밀왕은 폭정과 선정을 오가는 괴이한 행적을 보였다.
보름달이 뜬 밤에 태어난 여아들을 모조리 끌고 가 그들이 신으로 받드는 ‘카이’에게 제물로 바치는가 하면 왕실과 토호들을 겁박해 빈민 구휼을 강제하기도 했다.
왕국들 간의 경계선을 제멋대로 조정하고 각지에 밀영(密影)들을 파견해 금은보화를 닥치는 대로 약탈한 적도 다반사였다. 그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학살도 빈번히 저질렀다. 그러다가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천민들에게 평민과 동등한 처우를 보장하는 혁신적인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민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선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왕실들과 내통이라도 하는지 밀궁이 내세웠던 각종 개혁안들은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반면 학정은 점점 더 강화되었다. 오락가락하는 통치는 사라졌지만 온 대륙을 아우르는 공포와 원성은 확연히 남았다.
***
나는 소우에게 송림에서 대기하라고 일렀다.
그런 연후 숲을 나가 밀궁을 향해 걸어갔다. 공개적으로 방문을 알린 후 밀왕과 당당히 정면승부를 할 참이었다. 위험한 지경에 빠질 가능성은 희박했다. 전날 밀왕을 쫓아냈던 마력이 한층 강해진 데다 그것과 무관하게 순수한 무력만으로도 그에게 밀리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그의 이동 비술이 마음에 걸렸으나 전투력에 영향을 줄 요소는 아니리라 판단했기에 아주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밀궁의 구성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밀왕을 물리친 후 소우를 불러내 승자의 권리를 행사할 참이었다.
일부 반발하는 자들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래봤자 미풍에 그칠 터였다. 나는 밀왕을 제외하면 밀궁엔 내 삼초지적도 없을 거라 보았다. 자만이 아니라 나우가 가져온 정보를 바탕으로 내린 판단이었다.
그렇더라도 방심은 금물인지라 적당한 긴장감을 일으킨 채 밀궁으로 다가가고 있던 나는 도중에 발걸음을 멈췄다. 내 삼십여 장 전면에서 소란 비슷한 기미가 일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귀를 기울이던 나는 일순 숨이 멎었다.
누군가 서역어로 떠들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너무나 낯익었다. 혹시 착각했을지 몰라 다시 집중했지만 틀림없었다.
나는 앞뒤 잴 것 없이 바로 소란의 진원지로 날아갔다. 밀왕처럼 시커먼 장포를 걸친 괴인들 십여 명이 중원의 복색을 한 청년을 둘러싸고 있었다.
산뜻한 백색 무복을 갖춰 입은 청년은 내가 짐작한 대로 양천이었다.
나를 본 양천의 안구가 튀어나올 듯 불거졌다.
“아니, 단주가 여긴 어떻게?”
내가 할 소리였다. 어째서 양천이 밀궁에 나타났단 말인가. 그리고 방금 전에 들었던 유창한 외어(外語)는 무엇이었던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양천이 장포 괴인들에게 무어라 소리쳤다. 그러자 나에게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던 그들이 싹싹하게 물러났다. 그렇게 해서 맹수의 아가리 같은 느낌을 주는 밀궁 입구엔 나와 양천밖에 남지 않았다.
양천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나는 방금 전 그가 던진 질문을 되돌려주었다.
“당신이 대체 여긴 어쩐 일이오?”
양천이 특유의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더니 동문서답했다.
“일백 일 만의 재회구려. 내가 자책의 늪 속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단주는 까마득히 높은 곳으로 날아올랐더구려. 도제를 꺾다니,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소. 그러면서도 단주라면 능히 그럴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더구려.”
언제적 얘기인가. 내가 도제를 물리친 건 벌써 한 달하고도 열흘이나 지난 과거지사였다.
그리고 무언가 이상했다. 자책의 늪에서 허우적댔다는 사람치곤 양천의 혈색과 신수가 너무 좋아 보였다.
전날 공주에서 보았던 해골 같은 모습은 첫 만남 때처럼 극히 수려하고 준수한 용모로 돌아와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목전의 양천에게선 광채까지 뿜어져 나왔다.
내 의구심을 간파한 듯 양천이 선수를 쳤다.
“여러 가지로 의문이 많을 게요. 내가 여기에 온 연유하며, 단주를 찾아가지 않고 꾸물댄 것 하며. 속 시원히 해명하리다.”
그래야 할 터였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는 확인해야 했다.
“방금 그자들에게 뭐라고 한 거요?”
“내 벗이니 물러들 가라고 했소.”
“그자들이 왜 당신 명령을 듣는 거요?”
양천이 대답 대신 왼팔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소매를 걷자 금팔찌가 나왔다. 금팔찌엔 청룡이 상감기법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것 덕분이오. 밀궁의 신물이라 하더이다. 검룡이 이르길 이 금천(金釧)을 지닌 이는 밀왕의 최우등 손님으로 대우받는다고 했소. 아까 단주가 오기 전에 그이들은 나를 외인으로 간주해 불문곡직 공격하려 들었소. 그러나 이 기물을 보여주자마자 태도가 공손해집디다. 그래서 한시름 놓던 차에 단주가 나타난 게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오. 지금도 심장이 펄떡거리는구려. 대체 여긴 어인 일이오?”
나는 이번에도 양천의 질문을 묵살하고 내 관심사를 앞세웠다.
“설명을 한다고 했소만.”
다시 고소를 지은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말해주리다.”
***
내게서 시선을 거둬 허공으로 올리며 양천이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소. 처음부터 합시다. 그 일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기 그지없지만 결국은 꺼내야 할 얘기이니. 그날 나는 미쳤더랬소.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르오. 마치 귀신에 홀렸던 듯하오.
책임을 면피하고자 하는 소리가 아니오. 그저 나 자신도 내가 범한 무도한 짓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오. 나는 단주가 어떤 벌을 내리건 무조건 감수할 작정이오. 이번에 검룡이 부탁한 일만 마치면 단주를 찾아가 용서를 빌고 처분을 청할 참이었소. 정말이오.”
나는 위화감이 들었다. 분명 양천의 목소리에 그의 말투였지만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가 무슨 부탁을 했다는 거요?”
“그건 조금 후에 알려주면 안 되겠소? 가급적 순서대로 나가고 싶구려. 그편이 단주가 이해하는 데도 나을 게요.”
“그러든가.”
“고맙소. 그날 단주가 떠난 후 나는 자결로써 스스로를 응징하려고 했소. 하지만 검룡과 아르 공주의 간곡한 설득에 따라 자진을 포기하고 훗날 떨어질 단주의 처분을 기다리기로 했소. 그래서 본가로 돌아가 근신하려는데 검룡이 찾아왔소. 자기하고 검림에 가자며.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단주의 안위를 위해서 그래야 한다는 통에 따라나섰소. 과연 그는 검제 어르신을 비롯한 검림의 어른들에게 봉화산에서의 일을 솔직히 알리는 한편 전적으로 자기 잘못이니 절대로 단주를 해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더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신뢰하게 됐소.”
여기서 한 가지가 걸렸다. 검제는 검룡이 그날의 진상을 두고 아르, 양천, 그리고 도봉 삼인(三人)의 작당에 동조한 과실이라 밝혔다고 했다. 양천은 그런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단 말인가.
나는 의문점을 제기하지 않고 양천이 이야기를 잇도록 내버려 두었다.
“검림에 당도한 다음 날 나는 검룡의 요청에 응해 그와 함께 폐관수련에 들었소. 그는 나중에 단주가 빚을 받으러 오면 무인답게 싸우다 전사하겠다고 하더이다. 단주를 이길 가능성이 극히 희박함을 알지만 몸부림이라도 쳐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말이오.
나는 그를 지켜보면서 묘한 감동을 받았소. 실로 처절하리만치 지독한 수련이었소. 부끄럽지만 그에게 같은 죄를 저지르고 공히 죽음의 대가를 치러야 할 자들끼리의 삿된 동질감에 더해 무인으로서의 존경심이 움텄다오.
그 때문인지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나는 그에게 깊은 정이 들었소.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전조도 없이 파국을 맞이했소. 그의 신체가 극한의 수련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진 모양이었소.
망연자실한 내가 밖으로 나가 검림의 어른들을 데려오려는데 그가 말렸소. 그들이 와도 소용이 없을 터이고 긴히 부탁하고픈 게 있으니 들어달라고. 찰나지간 고민했지만 나는 그의 뜻에 따르기로 했소. 그가 회생할 가능성이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소.
그는 최후의 힘을 쥐어짜 내게 유언을 남겼소. 유언이라기보다는 충격적인 고백이라고 하는 게 낫겠구려. 단주도 들으면 깜짝 놀랄 게요.”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았지만 ‘가설’을 증명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약간 흥분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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