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55
제155화 – 나한테도 생각이 있어.
반지는 실핏줄 같은 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날 용궁의 여의주에서 보았던 것과 흡사한 구조였다. 구슬의 표면 아래만 살짝 훑을 수 있었던 그때와 달리 선력의 증강 덕분에 이번엔 반지의 속을 속속들이 볼 수 있게 된 나는 이것이 신비한 이물이 아니라 매우 정교한 기계장치임을 알아차렸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선들을 따라 파란빛들이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곳곳에 붉은 점들이 깜박이는 게 마치 살아있는 생물 같았다.
투시안을 거두려고 하는데 별안간 선들이 확장되더니 나를 덮쳤다. 그러자 내 시야에 기괴한 광경이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동굴이었다. 내 전면에 그림자 하나가 일렁거렸다. 잠시 후 그 뒤편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나타났다.
희미한 빛 속에서 안력을 돋운 나는 소스라쳤다. 첫 번째 그림자는 안진이었다. 머리카락이 허리께까지 내려오긴 했지만 틀림없는 그녀였다. 아니, 그녀를 빼다 박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찡그린 콧잔등에 새겨진 주름의 결이 달랐다. 아아, 그렇다면 이 여인은!
짐승처럼 바닥에 엎드려있는 내 모친에게 다가온 인영은 재수 없는 늙은이였다. 늙은이도 내 모친처럼 알몸이었다. 두 눈에서 시뻘건 혈광을 뿜어내는 양이 선풍도골의 용모는 온데간데없고 흉신악살 같은 형상이었다.
늙은이가 가까이 오자 어머니가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절규하고 있음을 알았다. 늙은이의 발이 어머니의 턱을 인정사정없이 걷어찼다. 그러고는 벌렁 나자빠진 그녀 위에 올라탔다.
나는 늙은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았다.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수도(手刀)로 그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내 입에서는 비명 같은 괴성이 터져 나왔다.
“죽어라, 늙은이!”
***
환상임을 알았지만 너무나 생생해서 나도 모르게 찰나지간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섬뜩한 느낌과 함께 목이 잘린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무방비 상태였다면 느낌이나 고통만이 아니라 실제로 두부(頭部)가 동체에서 분리되었을 터였다.
내 목을 친 것은 양천의 부채가 아니었다. 강기를 뻗어냈다고 해도 그의 철선(鐵扇)으로는 기방을 두른 내 목에 이 정도의 충격을 가할 수 없었다. 나를 거의 단두(斷頭)할 뻔했던 것은 밀왕의 암기(暗氣)였다.
나는 잽싸게 거리를 벌리는 양천을 붙잡지 못했다. 삼사 장 위 상공에 등장한 밀왕을 대적해야 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내 운신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끈적끈적한 꿀이었다. 내게 달라붙은 꿀은 나를 물속에 든 사람처럼 만들었다. 옴짝달싹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몸을 마음대로 부리기가 어려웠다.
이 꿀은 아르에게 들었던 천라망일 터였다. 아르는 그 그물에 갇히면 숨이 끊어진 후에야 빠져나올 수 있다고 했다. 천라망은 전날 겪었던 철벽운이나 금강저보다 상위의 신물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양천을 놓친 나는 어쩔 수 없이 밀왕을 상대해야 했다.
낫처럼 휜 그의 암기는 이미 내 전신을 무차별적으로 난도질하고 있었다. 여러 겹의 기방을 둘렀음에도 도처에 창상을 입었고 소름끼치는 사기(邪氣)가 뼛속까지 전해졌다.
칠팔 초간 일방적으로 당하던 나는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섰다.
운신의 제약으로 인해 바람개비처럼 공중을 휘도는 밀왕을 제대로 겨냥하기 힘들었지만 일단 발출하기만 하면 지공의 방향을 조정할 수 있었기에 그의 장포에 꽂아 넣을 수 있었다. 천라망을 뚫느라 위력이 다소 감소되었으나 금강석도 파괴할 지공들이었다.
그럼에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밀왕에겐 별무소용이었다. 지공에 적중당할 때마다 휘청거리기만 할 뿐 그는 아무런 타격이 없는 듯했다.
나는 선력이 주가 되는 지공이 아니라 마력을 극대화하는 장공으로 전환했다. 그러자 바로 효과가 나타났다. 밀왕의 동요가 확연히 전해졌다. 기방이 무력화되기 일보직전이었던 나는 숨통이 트였다.
일지관천지를 비수처럼 이용해 단숨에 천라망을 찢어버리고 나온 나는 최대치의 마력을 담아 밀왕을 맹폭했다.
까아아.
기괴한 소리를 발하며 밀왕의 신형이 뒤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대로 사라지는 대신 다시 내게로 쇄도했다. 면상 전체를 가린 깊숙한 두건 탓에 어떤 표정이 떠올라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의 심상을 알 것 같았다.
밀왕은 분명히 내 마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달아나지 않고 정면승부를 고수했다.
마치 배수진을 친 장수처럼. 아니, 도주하면 목을 치는 장수를 뒤에 둔 병사처럼.
실로 이해불가의 사태였다. 이 비유에서 장수는 양천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밀왕이 동귀어진의 태세로 나오는 바람에 나는 위급지경에 처했다.
그의 무력은 결코 내 아래가 아니었다. 너덜너덜해진 기방으로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지만 마력을 꺼려 밀왕이 결정적인 순간마다 멈칫거리지 않았다면 내 몸뚱이는 벌써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었다.
밀왕도 갈수록 둔해졌지만 이대로 간다면 공멸은 필연이었다. 반전의 계기가 필요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양천에게 소리쳤다. 모습을 감추었으나 그는 어디선가 나와 밀왕의 일전을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안진은 내 친누이다, 양천!”
뚱딴지같은 말이었으나 반응이 왔다. 다만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는 약간 늦었다. 내 지공과 장공에 얻어맞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맹공을 퍼붓던 밀왕이 일순지간 주춤했다.
이로써 나는 두 가지를 확인했다. 첫째, 심중에 들었던 의혹대로 양천이 밀왕을 조종하고 있었다. 설령 조종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가 밀왕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둘째, 양천인지 양천의 껍질을 한 검룡인지는 여전히 불확실했지만 어쨌든 내가 알던 양천은 아직 남아있었다.
***
임기응변으로 반 호흡을 번 나는 천이통을 발했다. 이십 장쯤 떨어진 곳에서 양천의 숨결이 잡혔다. 밀궁의 입구 너머였다.
나는 다시 공격을 재개한 밀왕에게 최강의 맞불을 놓은 후 그를 뿌리치고 양천이 숨은 곳으로 몸을 날렸다.
양천이 헛바람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새의 주둥이 모양을 한 석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좌측으로 달아나는 양천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인 일인지 밀왕은 나를 추격해오지 않고 뒤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에게 신경 쓰지 않고 양천을 쫓는 데 전념했다.
쏜살같이 내뺀 양천은 통로로 들어갔다.
폭은 제법 넓었지만 높이가 턱없이 낮아 경공을 전개하기는 어려운 길이었다. 그렇더라도 내가 몇 배는 빠른지라 나는 금세 그를 따라잡았다.
그의 목덜미를 낚아채려는 순간 위에서 벼락같이 떨어진 철문이 나를 가로막았다. 간발의 차이로 양천을 놓친 나는 분기를 토해내며 철문을 찢어발겼다.
그 이후로는 동일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마치 소나기가 내리듯 철문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손에 두른 기방을 도끼처럼 부려 철문들을 쪼개가며 나는 줄기차게 양천을 쫓았다. 초장에 그의 다리에 지공을 쏘지 않은 처사를 후회하면서.
다행히 길은 줄곧 외줄기였다. 도중에 여러 갈래가 나왔다면 양천을 찾는 데 애를 먹었을 터였다. 철문이 찢어지는 굉음으로 인해 양천의 숨소리를 포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차츰 요령이 생긴 나는 최소한의 힘과 동작으로 철문을 갈라가며 양천과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워낙 기본적인 속도에서 차이가 나는지라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지척에 이르렀다.
구불구불한 통로의 모퉁이 너머에서 양천의 가쁜 숨소리가 날아왔다. 지금까지 족히 이백 장은 달렸을 터였다. 그동안 부순 철문도 칠십 개는 넘을 것이었다. 나는 수평 경신에 박차를 가했다.
이제 양천을 손아귀에 넣을 거라 자신했던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곡선주로를 빠져나오자마자 나를 맞이한 것은 원뿔 모양의 공간이었다. 바닥의 면적은 넓었다. 일천 평 정도일까. 천장도 꽤 높았다. 어림잡아 삼십 장은 될 듯싶었다. 그렇다면 석산의 꼭대기가 아닐까. 천장엔 어린아이 하나가 간신히 빠져나갈 법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 구멍으로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월광이 없어도 크게 어둡지는 않았다. 원형의 벽을 돌며 박힌 야명주들 덕분이었다.
양천은 공터 중앙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천장으로 도약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몸을 솟구쳐봤자 내 손에 걸릴 터이니 도주를 포기한 모양이었다. 내가 들어온 통로가 유일한 출입구인 듯 사방이 막혀있었다. 그러니 양천은 이제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방심은 금물인지라 나는 선정의 통찰안으로 밀왕의 출현에 대비하며 천천히 양천에게 다가갔다. 그가 움직이면 즉시 종아리에 지공을 쏘아 운신불능으로 만들 참이었다.
내 접근을 막으려는 듯 양천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무언의 요구를 묵살하고 내쳐 걸었다.
***
양천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도제를 물리쳤다기에 반신반의했는데, 사실이었군. 가히 괴물이구나.”
나는 양천의 칠팔 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는 밀왕이 불시에 나타나도 충분히 양천을 묶어둘 수 있었다.
“너는, 누구냐?”
내 질문에 양천의 고소가 비릿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보면 모르오, 단주? 단주를 흠모해마지않는 양 모잖소? 그건 그렇고 말투가 바뀌었구려. 그새 변심했소?”
“허튼소리를 지껄일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부러뜨려주지.”
내 협박에 양천이 울상을 지었다.
“그건 곤란하오, 단주. 어떻게 얻은 몸인데.”
나는 정색했다. 경고의 의미였다.
“양천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양천, 아니 그의 외양을 한 검룡이 껄껄 웃었다.
“다 알면서 왜 묻나?”
나는 검룡에게 두 발짝 다가섰다. 검룡이 과장스럽게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알겠어, 알았다고! 다 말해 줄 테니 거기 서. 무지하게 무서우니까.”
나는 방금 전의 질문을 반복했다.
“그에게 무슨 짓을 했냐?”
“보면 몰라? 내가 몸을 좀 빌렸잖아. 그거 알아, 괴물? 마지막 순간까지 너하고 그를 두고 저울질했다는 거. 실은 너에게 아주 약간이라도 더 구미가 당겼지만 비술이 먹히지 않을 우려가 너무 커서 이놈을 택할 수밖에 없었어. 뭐, 완벽하게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 몸도 그럭저럭 괜찮아. ‘미모’도 너에게 밀리지 않고 재주도 꽤 쓸 만하니까.”
“양천은 소멸한 건가?”
“쓸데없는 간 보기는 그만두시지. 이미 알고 있잖아? 그놈이 온전하다는 걸. 그놈은 다만 이 몸뚱이의 주도권을 넘겨주었을 뿐이야. 여전히 팔팔하게 살아서 여기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다고. 아까는 기어 나와서 난리를 치는 통에 기겁했지 뭐야. 그나저나 뜻밖이군. 그 계집이 네 누이였다니. 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지?”
“그에게서 나와라.”
“내가 왜? 그리고 이미 늦었어. 그러고 싶어도 불가능하니까. 좋든 싫든 이놈과 나는 이 몸에서 공생할 수밖에 없어. 다시 말해 나를 죽이면 이놈도 뒈진다는 뜻이지.”
“…….”
“어이, 괴물. 이러자고. 가끔 이놈을 돌려줄 테니까 나를 좀 봐줘. 너는 중원을 차지하고 나는 이곳의 주인이 되어 따로따로 노는 거지. 어때?”
“닥쳐라, 쥐새끼.”
“클클, 점입가경일세. 선인이 욕설을 내뱉다니. 그러고 보니 너는 전례가 없는 별종이긴 하지. 그 계집과 남매라면 도가 혈통일 터인데 그들과 경쟁자라 할 선맥 공공문의 전인이 된 것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양파 모두에 천적이나 다름없는 마기를 품고 있다니.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사란 말이지. 너무 궁금해서 머리통에 쥐가 날 지경이다. 좀 가르쳐주면 안 되겠나, 괴물? 사실 그걸 알고 싶어서 일부러 잡혀 준 거야. 너하고 밀담을 나누기 위해 밀왕에게도 따라오지 말라고 이른 거고.”
“밀왕은 네 꼭두각시인가?”
“이것 참,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군.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한테도 생각이 있어.”
허세임을 알면서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