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7
제17화 – 늦기 전에 피해야지.
나는 화상을 입은 여인과의 만남에 감사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먼 길을 돌아가야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여인이 준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나를 귀인이라고 불렀지만 그녀야말로 내게 더할 나위 없는 귀인이었다.
여인의 원수들을 잡아 오는 건 떨어진 이삭줍기보다 쉬웠다.
죽립으로써 내 신분을 알리자 보원당의 하인들은 감히 나를 막아서지 못했다. 나는 이미 보양에서는 코흘리개들과 노망난 이들을 빼고는 모르는 이가 없는 명사였다.
면상에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노인과 노파는 나를 보고서 혼비백산했다. 달아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주저앉아 오줌을 지리는 노부부를 마차에 처박고는 여인의 사는 천민촌으로 돌아갔다.
여인의 보복은 잔혹했다. 노인은 돌칼로 찍어 죽이고 노파는 양 손목과 양 발목의 힘줄을 자른 채 풀어놓았다. 그런 꼴로도 살겠다고 노파는 미친 듯이 기어서 달아났다.
여인이 피워올린 청화는 적화에 크게 못 미쳤다.
예상했던 바였지만 낙담했다. 그러나 실망하기엔 일렀다. 나에겐 또 다른 기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여인은 그 마을의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여인의 처치를 지켜보던 일백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명에 따라 내게 절을 하며 내 은덕을 칭송했다. 그러자 여인이 일으켰던 적화에 버금가는 청화가 일어났다.
이럴 수가!
원사와는 무관한 이들이 표출하는 감은(感恩)도 동일한 효과를 가지다니.
하나하나만 보면 보잘것없지만 합치면 제법 상당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던가.
주근깨에 이어 불균형을 해소할 방도를 찾은 나는 희희낙락했다. 그러고는 목표를 수정했다.
십 년이 아니라 일 년 이내에 천지조화지경에 들 테다. 그래서 중원과 사방의 대륙을 모조리 평정하고 명실상부한 절대지존(絶對至尊)이 될 것이다.
우하하핫!
***
나는 두 건을 더 처리했다.
여인의 사연을 들을 때처럼 공감이 가지는 않았으나 그러려고 노력했다. 성과는 미미했지만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첫술에 배부르랴!
익숙해지면 나아질 터였다.
여인 다음의 두 의뢰인에게서는 적화와 청화의 불균형도 발생하지 않았다. 역시 남에게 맡기지 말고 내가 직접 제물들을 잡아야 했다.
해가 떨어지고 처처에 등이 내걸렸다.
주태와 헤어진 나는 자하옥관으로 향했다. 양 관주와 약속이 있어서였다. 그녀는 늦어도 술시 말까지는 별채로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이유를 물었지만 답은 없었다.
어차피 그녀를 봐야 했다.
전날 나는 그녀에게 오절도와 원한을 진 자들이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내 손으로 그의 명줄을 끊어버릴 수는 없으니 그들의 손을 빌릴 참이었다. 그러면서 적화와 청화도 피울 테니 나로서는 일거양득이었다.
***
마당에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던 양 관주와 별채 다실에 들었다.
찻잔에 노란 빛깔의 차를 따르며 그녀가 성과를 알렸다.
“오절도는 의외로 원한을 많이 졌더군요.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그는 젊은 시절 무동들에게 엄격하기로 악명 높은 교두였어요. 때로는 정도가 지나쳐 불상사가 일어나곤 했지요.”
“아이들을 몰아붙이다가 제 성질을 못 이기고 타작이라도 했소?”
“직접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혹독한 수련을 견디지 못하고 도태된 아이들을 무인이 될 자격이 없는 떨거지라고 부르며 온갖 악담을 퍼부었대요. 다른 아이들이 괴롭히는 것도 방치하고요. 대부분은 무관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일부는 버텼고 그들 중 또 일부는 자살했어요.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지금도 오절도라면 이를 갈아요. 알아보니 여기 보양에서만 스무 명 가까이 되더군요.”
나는 쾌재를 불렀다. 이런 횡재가.
“내일 해 지기 전까지 그들을 모아줄 수 있겠소?”
“해 볼게요. 다들 오 공자 소문을 들었을 터이니 적극적으로 나설 거예요.”
나는 술 대신 양 관주가 따라준 차로 축배를 들었다.
쓰디쓴 차 맛에 인상을 쓰며 사달의 발단이 된 청년의 행방을 물었다.
“그 애송이는 어디에 있소?”
“백방으로 찾고 있는데 오리무중이에요. 일단은 보양을 떠났을 가능성이 커요.”
나는 양 관주의 추측에 동의하지 않았다. 애송이는 오늘 낮에 벌어졌던 나와 쌍둥이 노인들의 격전을 지켜보았을 터였다. 싸움이 끝난 후 귀를 곤두세웠다면 주변 전각에 은신해있었을 그의 호흡을 잡아냈을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그는 관심 밖의 존재였기에 그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어째서 수천 리나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예월 소저에게 껄떡거린 거요? 사막엔 여자가 없더라도 서주(西州)에만 나가도 미녀들이 널렸을 텐데.”
“모르겠어요. 각지에 전서구를 날리며 상세히 조사해봤지만 딱히 건진 게 없어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요. 그들은 은밀하게 움직였어요. 광마도의 아들은 정식으로 강호에 나온 적이 없으니 그의 용모화를 확보하고 있는 우리 같은 이들 말고는 알아보는 눈들이 없었겠지만 난주쌍곤은 그렇지 않거든요. 문통이나 첩인이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눈썰미만 있으면 누구든 쉬이 정체를 알았을 거예요. 그럼에도 여기에 이르도록 아무 소문이 나지 않은 건 의도적으로 비밀스럽게 행보했다는 반증이에요. 그래서 불길해요.”
“너무 걱정하지 말구려. 다 잘 될 거요.”
“…….”
습관처럼 한숨을 내쉰 양 관주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당한 소리라는 걸 알지만 물어볼게요. 만약 광마도와 일대일로 붙으면 이길 자신이 있나요?”
“모르겠소. 그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를 모르니.”
“걱정하지 말라면서요?”
“걱정한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다 잘 될 거라면서요?”
“낙관은 내 천성이오.”
양 관주가 폐부를 쥐어짠 것 같은 한숨을 뿜어냈다.
“아무래도 내가 미쳤나 봐요. 철부지 계집애처럼 오 공자의 감언이설에 혹해 독이 든 미끼를 덥석 물어버리다니.”
“도로 물리고 싶소?”
“그 정도로 지조 없는 여자는 아니에요. 하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어요. 광풍혈사대라니,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혀요.”
“너무 겁먹지 말구려. 그들이 여기 오려면 족히 열흘은 걸리지 않겠소? 정 두려우면 내가 그들과의 은원을 정리하는 동안 피신해 있든지.”
“어떻게 정리하겠다는 건가요?”
“그야 이제부터 고민해 봐야지. 그러다 보면 묘수가 나올 터이니 너무 심려치 말구려.”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가자 양 관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숨보다는 덜하지만 이것도 그녀를 대표하는 징표들 중 하나였다.
해시(亥時)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더 볼 일이 없었기에 나는 양 관주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만 가보겠소. 내일 해지기 전까지 오절도를 원수로 여기는 이들을 백화루 주 총관의 처소에…….”
“안 돼요.”
“아까 그러기로 하지 않았소?”
“그게 아니라 지금 가면 안 된다고요.”
“할 얘기가 남았소?”
“실은 기다리는 이가 있어요. 오 공자도 그이를 만나야 해요. 그리고 반드시 그를 매료시켜 한편으로 끌어들여야 해요. 그이만이 유일한 구명줄이니까.”
“그 사람이 누군데 그러오?”
양 관주의 두툼한 입술에서 상상도 못 했던 명호가 튀어나왔다.
***
철웅(鐵雄) 석진(石晉).
당금 무림 최고의 괴짜로 통하는 걸물이었다. 나와는 간접적인 인연이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구 년 전 석곡에 틀어박히기 전에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이곳 보양에서 사흘을 머무르는 동안 나는 그의 이름을 족히 삼천 번은 들었을 터였다. 과장이 아니다. 어딜 가든 다들 그 이야기뿐이었다.
정파 무림의 명문 조양 석가의 종가 출신인 석진은 가문의 골칫덩이였다. 여자를 너무 밝혔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연령의 고하는 물론이고 미추도 가리지 않고 자기를 받아들이는 여자라면 누구하고도 붙어먹었다. 예컨대 팔십 먹은 노파라고 해도, 혹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추녀라고 해도, 스스로 치마만 내린다면 기꺼이 잠자리를 가졌다.
석가의 원로들은 그의 기벽을 고치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동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발기를 불가능하게 하는 약물까지 강제로 복용시켰음에도 석진의 난행을 막을 수 없었다.
무재가 출중한 탓에 어린 시절부터 기대를 한 몸에 모았던 기린아는 가문의 수치거리로 전락했고 결국 고작 열일곱 살의 나이에 파문당하고 말았다.
가문에서 쫓겨나면서도 창피해하거나 괴로워하기는커녕 이제부터 ‘일만의 정인(情人)’을 채울 때까지 일로매진할 거라는 황당한 포부를 밝힌 석진은 자신의 공언을 실천에 옮겼다.
그로부터 어언 삼십이 년, 지천명을 코앞에 둔 나이에 다름 아닌 보양에서 목표를 달성한 그는 그 유명한 탈색의식(脫色儀式)을 거행했다. 만인의 면전에서 자신의 남근을 거세한 것이었다.
그 역사적인 장면을 직관하기 위해 몰려든 군중으로 보양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도 보고 싶다고 졸랐지만 노인네는 약이라도 올리듯 결정적인 순간이 도래하기 직전에 나를 안고 날아올랐다. 발버둥 치며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소문의 주인공을 먼발치에서 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
나는 양 관주를 힐끔거렸다.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이상한 상상하지 말아요. 그이와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만. 그런데 그런 사이라는 게 뭐요?”
“그런 적이 없다고요.”
“그런 적이라니? 무슨 적 말이오?”
“됐어요. 아무튼 곧 올 터이니 어떻게든 그이를 구슬려 봐요. 오 공자가 마음에 들면 간이든 쓸개든 다 내어 줄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이에겐 유력한 친우들이 여럿 있어요. 그이가 진지하게 청한다면 분명 도움을 주러 달려들 올 거예요. 그런들 광풍혈사대를 감당할 수 있을성싶지는 않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이와 그들만이 유일한 희망이에요. 광마도도 강북사우(江北四友)나 의주육걸(義州六傑) 등이 이편에 있다면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나한테 떠넘기지 말고 양 관주가 직접 그를 구워삶는 게 어떻겠소? 듣자 하니 그와 친분이 적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요. 그이는 오직 자기 잣대로만 다른 사람을 재는 사람이에요.”
“어떤 잣대요?”
“제멋대로인 잣대죠.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내일도 달라질 게 뻔하고.”
“그럼 잣대라고 할 수 없잖소?”
“하지만 일단 결정하면 절대로 변하지 않아요. 방금 말했듯 호감을 품으면 자기 심장도 꺼내 줄 사람이고 반대로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리 잘해줘도 원수 대하듯 하는 사람이에요. 그 기준도 수시로 바뀌어요.”
“복불복이군.”
“맞아요. 그래서 조언해줄 수 없어요. 오로지 오 공자 본인의 솜씨로 그이를 낚아야 해요.”
“만약 실패하면?”
“미련 없이 짐을 싸야죠. 그리고 튀어야죠. 광풍혈사대가 바위라면 우리는 계란이에요. 바위가 떨어지는데 가만히 있으면 깨지는 수밖에 없잖아요.”
나는 내가 계란이라면 금강석만큼이나 단단한 계란이라고 뻐기고 싶었지만 말을 아꼈다. 아직 팔 단계에 접어들지 않았으니 큰소리는 자중해야 했다. 광포한 이리 떼의 두목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조바심이 났다.
자시가 임박하도록 석진은 오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간 이곳에서 운공에 들어야 할 판이었기에 나는 양 관주의 양해를 구하고 별채를 떠나려 했다.
그녀는 절대로 안 된다며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그녀의 간곡한 청에 응해 나를 보러 달려올 석진이 내 부재를 자신에 대한 존중의 결여로 간주할 거라는 주장이었다. 그녀와 실랑이를 할 여유가 없었기에 나는 그녀를 힘으로 밀치며 다실을 나왔다. 언제 자시를 알리는 종이 울릴지 몰랐다.
나를 잡고 늘어지는 양 관주를 혹처럼 달고서 와옥을 나서는데 마당 반대편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툭 튀어나왔다.
마당가 석등의 불빛을 받은 흑영은 땅딸막한 사내의 모습으로 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