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70
제170화 – 안 그래?
내가 재차 채근하자 문상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하루밖에 안 지났잖아요. 내막을 파악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 아닌가요?”
“당신이 조각들 몇 개를 건지는 데는 충분했을 성싶소만. 그리고 이미 그것들을 활용해 전체적인 윤곽을 그려냈을 것 같은데.”
“나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군요.”
“시답잖은 겸양은 그만 떨고 어서 내놔보쇼. 대체 그자가 어떤 경로로 우장평에 발을 들여놓은 게요?”
“모른다고 했잖아요.”
“정말 이러기요?”
“가설이라도 듣고 싶다면…….”
“바로 그거요. 가설! 어서 들려주구려.”
“하아.”
의도적으로 소리 내어 한숨을 내쉰 문상이 그녀의 머릿속에 든 ‘가설’을 입 밖으로 꺼내놓았다.
“미인계가 아닐까 싶어요.”
나는 단박에 알아들었다.
“그들이 도봉을 미끼로 써서 빙왕을 낚았을 거란 말이오?”
“그래요. 그 아이는 주요 인사이긴 하나 특급으로 분류되지는 않았기에 일상적으로 감시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나는 그 아이가 요 근래 비밀리에 북해로 가서 빙왕을 만났을 거라 생각해요. 실물을 봐야 빙왕이 혹할 테니까.”
“그는 몇 살이오?”
“여든일곱으로 알고 있어요. 빙왕은 개세팔천 중 밀왕 다음의 고령자로 알려져 있어요.”
“허어, 노추(老醜)군. 아흔을 코앞에 둔 나이에 손녀뻘의 여자한테 음심을 품다니.”
“사내의 욕정엔 노소가 없어요.”
“빙왕이 여자를 밝히는 족속이오?”
“기실 그에 관한 정보는 많지 않아요. 중요한 것도 별로 없고요. 용왕과 수백 초를 겨룰 만큼 굉장한 강자라는 것과 중원을 적대시한다는 정도 말고는 다 자질구레한 내용들이에요. 그렇지만 그 질문에는 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색을 탐하는 성향과 상관없이 그 아이가 작정하고 꼬리를 치면 홀리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오 공자 같은 이는 극히 드물어요. 빙왕도 사내인 이상 그 아이의 미색에는 저항하기 어려웠을 거라 봐요.”
“도봉이 제 몸뚱이를 내주는 대가로 무얼 요구했을까?”
“그야 오 공자의 목숨이지요. 달리 뭐가 있겠어요.”
“누가 시켰을 것 같소? 도봉의 머리에서 나온 발상 같진 않소만.”
“십중팔구 도제일 테지요. 세상 누구보다 오 공자가 사라지길 바라는 위인이니까. 목적 달성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위인이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제자를 바치다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늙은이군.”
“맞아요. 오 공자가 아니었다면 도제의 실체는 영원히 드러나지 않았을 거예요. 만도(萬刀)의 제왕이 그런 겁쟁이에 그렇게 추잡스러운 노물인지 누가 알았겠어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그런 위인이기 때문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고 안 소저도 무사히 구출할 수 있었을 거예요. 어찌 보면 그가 빙왕을 끌어들인 게 오 공자에겐 전화위복이 된 셈이죠.”
나는 말귀를 알아들었다. 그리고 문상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
도제의 도주는 외통수에 몰렸던 나를 구제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나는 그 시점을 전기 삼아 난제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었다. 검제를 쓰러뜨렸고 위급지경에 처한 무후를 구했으며 뜻밖에 전개에 당황했을 빙왕으로 하여금 달아나게 했다. 사정을 알게 되면 본인은 통탄하겠지만 국면 전환의 공은 오롯이 도제의 몫이었다.
그의 공헌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만약 도제가 빙왕을 포섭하지 않았다면 검룡은 다른 전략을 들고나왔을 공산이 컸다. 예컨대 그가 안진을 인질로 내세워 나를 겁박했다면 대처할 방도가 마땅치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빙왕의 가세로 압도적인 전력을 갖췄다고 여기고는 검룡은 굳이 잔수를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었다. 다만 처음부터 자신들의 진용을 노출하면 내가 대결에 응할 리 만무하니 검제가 나를 묶어둘 때까지 들키지 않는 것에만 신경 썼을 터였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상황은 안진에겐 호재로 작용했다. 나를 처치할 거라 확신하지 않았다면 검룡이 그녀를 숨겨두고 우장평에 나왔을지 의문이었다.
***
순전히 가설이었지만 나는 문상의 추측이 옳으리라는 데 손목을 걸 수도 있을 듯싶었다. 그만큼 설득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내가 그녀를 매우 높이 평가하는 탓이었다. 나는 그녀가 모래알로 밥을 짓는 비법을 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 아이의 근황에 관한 몇 가지 정황만 확인하면 이 가설의 근거 여부를 알 수 있을 거예요. 빠르면 사나흘 후에 정리해서 알려줄게요.”
“그러구려. 헌데 그들은 어디로 갔을 것 같소?”
“창제는 신창문으로 돌아갔어요. 경로를 훤히 드러냈으니 확실해요. 도제와 빙왕, 그리고 검제를 안고 사라진 밀왕의 행방은 묘연해요. 하지만 나는 그들이 신창문에서 합류할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봐요. 따로따로 흩어져 있다가 오 공자와 용왕에게 사냥당할 우려가 크니까요. 자신들의 안위와 더불어 창제는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전력이니 지키려 들 테고요.”
나는 생각에 잠겼다. 문상의 예측이 맞는다면 그냥 넘기기 아까운 기회였다.
“도제가 빙왕과 함께 북해로 달아났을 가능성은 없소?”
“당연히 있죠. 방금 말한 건 즉흥적으로 떠오른 예상들 중 하나일 뿐이에요. 나는 십전공자의 탈을 쓴 검룡이 종적을 감추려 들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봐요. 밀왕을 데리고요. 그 경우라면 창제도 모처로 피신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거예요. 이제 일대일로는 도저히 오 공자에게 안 된다는 걸 알았을 테니까. 더군다나 이쪽엔 용왕까지 있잖아요.”
“그들의 동향과 소재를 파악할 수 있겠소?”
“은밀히 행동할 터이니 쉽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신창문에 모인다면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얼마나 걸리겠소.”
“지금으로선 단정하기 어려워요.”
“그래도 대충 정해보구려.”
“닷새에서 열흘 사이가 아닐까 싶어요.”
“좋소. 기다리겠소.”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면 바로 손을 쓸 참인가요?”
“그렇소. 만약 창제만 신창문에 있다면 그 하나만이라도 처리할 작정이오. 그래야 균형이 맞을 테니까.”
“그러면 우리가 우세할 텐데요? 검제에게 운신불능의 중상을 입혔다면서요? 도제는 사실상 쭉정이인데다 오 공자는 누구하고 붙어도 우위를 점할 수 있으니 남은 이들끼리의 삼대삼이면 지려야 질 수 없는 승부잖아요?”
반박하기 어려운 형세 판단이었다.
***
고월서각을 나와 오죽채로 향하던 나는 공중으로 비상했다. 그러고는 전속력으로 비행했다. 나를 보고 굳어버릴 행인들이 부담스러워서가 아니었다. 오죽채 방면에서 날아온 소음 때문이었다.
오솔길로 들어가지 않고 검은 대나무밭 위를 날아서 오죽채에 이른 나는 숱 많은 머리의 땜빵 같은 마당에 내려앉았다. 모옥 앞에서 재수 없는 늙은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용왕이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오?”
짐작이 가고도 남았지만 굳이 물어보았다. 용왕의 큼직한 입술에서 예상했던 답이 흘러나왔다.
“아, 글쎄 이렇게 한 편이 된 김에 우의를 도모하는 차원에서 한 판 붙어보자고 청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하지 뭔가. 자네가 왔으니 이이에게 잘 좀 말해주게나.”
용왕은 개세팔천 중 나머지 모두와 겨뤄본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를 빼면 내가 가장 많은 무존들을 상대했다. 내가 아직 손을 섞어보지 않은 이는 해왕(海王)뿐이었다.
각설하고 자신이 개세팔천의 구조를 완성했다고 자부하는 용왕은 늙은이의 무위가 그들에 필적한다는 내 말을 듣고는 친히 확인해보고 싶어 몸이 달았을 터였다. 그는 무후처럼 승부욕이 강한 유형은 아니었으나 호기심만큼은 어린아이 못지않게 왕성했다.
나는 못마땅한 표정을 만면에 담은 늙은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가 용왕의 비무 청을 받아주라는 내 권유를 수용할 가능성은 서산일출만큼이나 낮았다. 전무하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용왕의 구시렁거림을 예방하려면 시늉은 해봐야 했다.
“가볍게라도 어울려보는 게 어떻겠소? 무림의 괴물들이 얼마나 강한지 몸소 체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소만. 전날 우장평에서 부딪쳤던 자와의 승부는 그가 바로 내빼는 바람에 싱겁게 끝났잖소?”
안진이 나를 거들었다.
“그래, 사부. 한번 해 봐. 다섯 달 전에 만난 칼잡이는 손에 열이 나기도 전에 달아나버려서 실망했다고 했잖아.”
“됐다. 이미 뜻을 밝혔으니 더는 귀찮게 굴지 마라.”
늙은이는 애먼 나를 노려보며 모옥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를 따라가지 않고 안진이 소리쳤다.
“그럼 나, 선하고 같이 여기저기 둘러보고 올게, 사부. 괜찮지?”
늙은이의 비무 거부에 볼이 부어있던 용왕이 안진의 말을 받았다.
“십자무련에는 이른바 십대명소가 있다네. 따로 서열은 없지만 내가 보기에 극락원이 단연 으뜸일세. 들어가면 진짜 극락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네. 꼭 가보게.”
안진이 당장 내 팔을 잡아끌었다.
“들었지, 선? 가자.”
***
오죽채를 나온 우리는 천하제일도 호원의 최고번화가인 남사로 구경을 간다는 용왕과 헤어져 극락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용왕의 설명에 따르면 오죽채에서 극락원은 멀지 않단다. 곧게 뻗은 대로를 따라 일다경가량 쭉 걸으면 나온단다.
하지만 가는 길은 평탄치 않았다. 나를 보러 나온 이들로 순식간에 인산인해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안진이 지나갈 때마다 갈라서며 진로를 터주긴 했지만 아무래도 불편했다. 다들 곱사등이처럼 허리를 깊이 구부리고 있으면서도 가자미눈으로 나를 훔쳐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안진이 콧방귀를 꼈다.
“흥, 봄에 왔을 땐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나중에 무영도수인가 뭔가 하는 작자를 보러 갈 땐 또 우르르 몰려나와서는 잡아먹을 듯 노려보더니 이제는 무지하게 굽실거리네. 바람에 따라 이리 휘고 저리 기우는 갈대들도 아니고, 뭐 하는 행태야.”
왜 심통이 났는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나 좀 과한 비난이었다. 저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상황에 따라 태세가 변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었다.
현재 내 위상은 가히 신(神)급이었다. 우장평 결전은 어제의 일이었지만 나와 검제의 비무는 워낙 초미의 관심사였기에 벌써 결과가 알려졌을 터였다. 단순히 검제를 꺾은 게 아니라 그와 밀왕, 그리고 도제까지 상대하고서 격퇴했으니 내막을 알 리 없는 사람들에겐 내 무력이 개세팔천 셋을 감당하고도 남을 정도라 여겨졌을 것이었다. 그러니 어찌 바짝 엎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월의 내가 단지 무림제일후기지수였다면 지금의 나는 그야말로 천하무적의 절대지존(絶對至尊)이었다.
극락원은 인공 동굴 너머의 별천지였다.
금은으로 만들어진 통로를 통과하자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한 기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안진이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나는 감탄하기보다는 위화감이 들었다. 어떻게 봄의 목련과 가을의 국화가 한데 어우러질 수 있단 말인가. 그 뒤로는 겨울에도 보기 힘든 매화와 설연(雪蓮)까지 무성했다.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이역의 화초들도 눈에 띄었다.
최고의 귀빈들에게만 입동이 허락된다는 비처를 독차지한 우리는 화원에 난 길을 거닐었다.
“진짜 굉장하다. 저기 폭포 좀 봐, 선. 마치 청룡이 내려오는 것 같아.”
과연 수로를 교묘하게 설정해 용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물 색깔마저 푸르스름했다.
“세상에 이렇게 신비한 곳이 있었다니. 나가고 싶지 않아. 너도 그렇지, 선?”
“여기하고 천벽 중 한 곳을 택해 평생 살아야 한다면 어디를 고를 거냐?”
“그야 당연히……, 천벽이지. 아름다움은 장엄함을 이기지 못해.”
그보다는 인조와 자연의 차이라고 하는 게 나을 듯싶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발갛게 상기되어있던 안진이 돌연 시무룩해졌다.
“양 공자도 같이 볼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이를 구할 수 있겠지, 선? 검룡 따윈 애초부터 네 상대가 아니고 기괴한 술수를 부린다는 밀왕도 이제 네 발아래잖아. 안 그래?”
그 순간 퍼뜩 중요한 질문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