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75
제175화 – 이럴 줄 알았다.
노인의 용무는 끝났지만 나는 아직 그에게 볼 일이 남아있었다.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소.”
“당신들은 기물에 의존하는 법사들의 방식에 반발해 오로지 본신의 능력만으로 비력을 발휘할 방도를 추구하는 무리라던데 그가 어째서 환상환을 비롯한 여러 신물을 소유한 게요? 그것과 연관해 보다 근본적으로 떠오르는 의문은 이역에서 잡아 온 검사의 몸을 취한 그가 어떻게 그 기물들을 사용할 수 있었는가요. 신물을 부릴 수 있는 건 법사들뿐이라고 들었소만.”
그제야 나는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전날 검룡의 진술에는 일단의 진실이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따로 질문을 보태지 않자 잠시 입을 다물었던 노인이 말을 이었다.
“광구 말인데, 구체적으로 얼마나 빠르오? 그리고 약점은 없소?”
별로 보탬이 되는 정보가 아니었다.
자리를 정리하기 전에 나는 사적으로 궁금한 점을 물었다.
“당신들 밀교와 내 사문인 선맥엔 일맥상통하는 비기들이 있는 것 같소. 예컨대 우리에게도 이혼대법과 비슷한 비술이 존재하오. 일정 단계 이상에 도달했을 때 획득하는 신묘한 치유력도 공통점이라 할 만하오. 우리와 한 뿌리라 할 도가에는 밀왕이 구사했던 공간 이동의 술법과 흡사한 신술도 있소. 혹시 이에 관해 아는 바가 있소?”
노인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갑자기 노인의 회색 동공에 광채가 번득였다. 그러면서 무어라 격정적인 말을 쏟아냈다. 그의 옆에서 열심히 통역하고 있던 나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더니 허둥지둥 노인에게서 떨어졌다. 나는 무슨 상황이 벌어질 것인지 알아차렸다. 순간적으로 노인을 제지할까 했지만 그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화르르.
노인의 몸이 불타올랐다. 형언할 수 없는 극통을 느낄 터임에도 그는 미동도 없었고 표정도 평온했다.
나우가 노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전해주었다.
“이제 분신할 거라며 나더러 비키래요. 하잘것없지만 자기 목숨으로써 사죄할 터이니 같은 조상을 둔 자기들을 용서해달라면서요. 밀궁이 앞으로 세상에 나올 일은 없을 거래요. 이리로 오기 전에 이미 봉문을 명했대요.”
나는 더 이상 내 말을 들을 수 없는 노인에게 마음속으로 말했다.
‘유감이지만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오.’
마치 내 심어를 알아들은 양 제가 발한 화염에 휩싸인 노인이 부르르 떨었다.
***
나는 나우를 안고 비상했다.
목적지인 보크까지는 거의 삼천 리 장도였다. 쉼 없이 전속력으로 날아간다고 해도 정오가 지나서야 당도할 수 있을 터였다.
우리는 가는 길에 어제 밀왕의 표적이 되었던 구왕국의 수도 파라를 경유했다. 이국의 도시는 아직도 수습하지 못한 수만, 수십만 구의 시신들로 지옥도를 그리고 있었다. 냄새를 잘 맡지 못하는 내 코에도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끔찍한 참상을 목도한 나우는 턱이 부서져라 이를 악문 채 분노를 참았다. 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목전의 비극은 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우가 아픈 데를 꼬집었다.
“다 챙겼나요?”
나는 묵묵부답했다. 파라에 들른 건 부끄러운 짓이었다.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화를 얻을 심산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우를 외면하던 나는 말없이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는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이제 밀왕을 잡으러 가야 했다.
우리는 보크가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대기했다.
밀왕의 출현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운공에 들었다. 전날 중원의 대도들을 순회하며 취했던 건기와 오전에 파라에서 새로이 취득한 곤기는 절묘하게도 균형이 맞았다. 양도 상당했다.
이제 한두 걸음만 더 가면 노인네의 경지에 이를 듯싶었다. 거기서 천지조화지경은 코앞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렇게 쉽게 신선이 되어도 괜찮은 걸까. 수많은 이들의 한(恨)을 먹어 치우며 성장하고서는 날개가 돋았다고 나 혼자 훌훌 날아올라도 되는 걸까.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나는 내 심혼이 던지는 준엄한 질문에 답을 주지 못했다.
보크 외곽의 산에 은신한 지 나흘 후 드디어 기다리던 신호가 왔다. 북녘으로의 출발을 재촉하며 나우가 볼멘소리를 했다.
“보크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다못해 브라였어도 나쁘진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오라’일 게 무어람. 그래도 산토는 아니니 최악은 면했네요.”
나는 전날 나우에게 들었던 정보를 상기했다. 보크를 기준으로 브라는 삼사백 리, 산토는 이천팔백 리, 그리고 오라는 일천이백 리쯤 떨어져 있었다. 나우의 말마따나 최악은 면했으나 다소 아쉬운 결과였다. 보크가 최상이었고 브라만 되었어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터인데.
심히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로서는 그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빨리 오라에 가는 게 최선이었다.
***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날고 또 날았다. 멀리 길게 누운 산줄기를 가리키며 나우가 다 왔다고 알렸을 때는 보크 동편의 산에서 출발한 지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기실 나는 나우가 소리치기 전부터 오라에 근접했음을 알고 있었다. 먼 산 너머에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미음(微音)을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고막을 간질일 듯 말 듯 작은 소리였으나 내게는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그것은 공포의 도가니에 빠진 수만의 입이 내지르는 아우성임이 틀림없었다.
“반드시 처치해야 해요.”
나우가 내 귀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부담스러운 요구였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
단숨에 시야를 가로막았던 산등성이에 이른 나는 나우를 떨궈놓고 산 아래 도시로 하강했다.
삼사십만의 인구를 자랑한다는 이왕국의 도읍은 참극의 현장으로 화해있었다. 수만 평 넓이의 광장에 운집한 군중이 거대한 원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중 아랫부분은 이미 시산혈해였다.
지금도 밀왕으로 추정되는 인영이 상공에 떠서 살육에 한창이었다. 오라의 백성들은 망연자실한 채 그들의 친족과 이웃들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사방을 에워싼 병사들에 막혀서가 아니라 ‘절반’을 살려준다는 밀왕의 ‘약속’때문일 터였다.
한눈에 상황을 파악한 나는 찰나지간 갈등했다. 어쩔 것인가.
엄밀히 따졌을 때 살겁을 저지르는 밀왕은 도구에 불과했다. 도구를 부리는 자를 잡는 게 우선이었다.
검룡은 틀림없이 근처에 있을 터였다. 어쩌면 군중 속에 들어있을지도 몰랐다. 이지를 완전히 상실해 시체나 다름없는 밀왕이 ‘단죄’나 ‘약속’ 따위를 운운했다는 것은 검룡이 육합전성(六合傳聲)을 발했다는 뜻이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검룡의 소재를 파악하는 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운이 좋으면 내 도래에 당황할 그가 눈에 띄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운이 따르면 그가 광구를 써서 도주하기 전에 일지관천지를 먹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검룡을 포기해야 했다. 내 뜻대로 풀릴 가능성이 극히 낮거니와 당장 목전에서 벌어지는 학살극을 두고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밀왕의 손짓 한 번에 수백의 생목숨이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밀왕에게 쇄도했다. 전속력으로 날았지만 그와의 거리는 아직 팔구십 장에 달했다. 그가 나와의 충돌을 꺼려 공간 이동의 비술을 발하고 광구를 부린 검룡이 그를 챙겨 달아난다면 손 쓸 방도가 없었다.
다행히 나를 발견한 밀왕은 도주 대신 대결을 택했다. 따로 분류해놓은 군중에게 퍼붓던 암기(暗氣)의 태풍을 내게로 돌린 밀왕은 그 바람을 뚫고 들어간 내 지공들을 얻어맞고는 지상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땅에 부딪치자마자 돌연 사라졌다. 일초의 공방 만에 절대열세임을 자각하고는 예의 비술을 펼친 것이었다. 그가 본능적으로 행한 건지 아니면 그를 조종하는 검룡의 판단인지 헷갈렸다.
여하간 밀왕이 꺼낸 전가의 보도는 이번엔 별무소용이었다. 내게도 비장의 패가 있었던 덕분이었다.
전날 안진에게 들은 늙은이의 신술이 가진 특징을 염두에 둔 나는 밀왕에게 지공을 쏜 후 지체 없이 그의 주위에 기막(氣幕)을 펼쳤다. 밀왕은 무형의 포위망에 걸려 삼 장 위의 허공에서 다시 형체를 드러냈다. 나는 바로 그에게 붙었다. 그러고는 지공을 도끼처럼 부려 그를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쪼갰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밀궁 노인의 말에 따르면 설사 몸뚱이가 양단된다고 해도 밀왕은 재생이 가능했다. 그를 완전히 소멸하려면 밀정(密精)을 깨뜨려야 했다. 기가 막히게도 밀정이 든 곳은 왼발 새끼발가락이었다. 노인이 아니었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터였다. 그런 곳에 심장이 들어있을 거라고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나는 땅에 떨어진 밀왕의 반신(半身)에서 발가락을 겨냥했다. 일지관천지를 쏘아내려는 찰나 뇌리에 요란한 경고성이 울렸다.
강시나 다름없다고 하나 밀왕은 엄연히 살아 움직이는 생체였다. 그를 재생 불능으로 만든다면, 다시 말해 영원히 말살한다면 불살의 금제를 어기는 게 아닐까. 그리되면 평생의 공적이 물거품이 되고 내겐 마력만 남지 않을까. 천마가 될 수는 없으니 마기를 마정에 봉인하고는 전생을 해야 할 터인데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까.
이미 작심하고 있었음에도 나는 갈등했다. 하지만 두 개로 나뉜 밀왕의 동체가 스멀스멀 달라붙는 걸 보고는 결단을 내렸다.
지금 이 괴물을 놓치면 다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될 것이었다. 밀왕을 부리지 못하는 검룡은 아주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나우를 통해 그의 정체가 만천하에 까발려질 터이니 내가 아니더라도 그의 야욕을 분쇄할 이들이 나올 터였다.
마음을 다잡은 나는 밀왕의 새끼발가락에 가차 없이 일지관천지를 꽂았다.
퍽.
포도 알맹이가 터지는 듯한 느낌이 손끝에 전해졌다. 반으로 갈라진 밀왕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잠잠해졌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선기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나는 내부에서 휘몰아치는 폭풍을 방관했다. 의지로써 제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직감해서였다.
부정적인 기변이 닥칠 것을 예감했지만, 그래서 늦기 전에 전생을 도모해야 할 터였지만, 이상하게도 담담했다.
설령 이로써 이번 생을 마감한다고 해도 미련이 없을 듯싶었다. 오로지 어머니를 보지 못하고 가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내 심상에 나타난 노인네가 약을 올렸다.
‘어이구, 이 녀석아. 그리도 욕심을 부리더니, 내 이럴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