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76
제176화 – 참아야죠, 뭐.
축 처진 실눈, 삐뚤어진 코, 기형적으로 긴 뻐드렁니, 함몰된 광대, 누리끼리한 안색.
잡스럽다 못해 추악하다고까지 할 만한 용모였으나 내겐 세상 무엇보다 친숙하고 정겹고 그리운 얼굴이었다.
내 부모였던 사람. 내 스승이었던 사람. 내 벗이었던 사람.
어린 시절 노인네를 따라 세상을 떠돌 때, 나는 매일이 즐거웠다.
답답하다고 늘 투덜거렸지만 구 년간의 은거 생활도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매우 좋았다. 노인네가 가르쳐주는 선술(仙術) 하나하나가 신기했고 내 것으로 만들 때마다 뿌듯한 성취감에 몸을 떨었다.
돌이켜보건대 노인네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이 눈물겹게 행복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노인네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울컥했지만 나는 짐짓 눈을 부라렸다.
‘흥, 내가 망해서 그렇게 기쁘오?’
노인네가 뭉툭한 눈썹을 팔(八)자로 만들었다. 남들은 죽상으로 착각하겠지만 나는 그것이 미소임을 알고 있었다. 뭔 수작이지?
‘망하다니? 아직도 모르겠느냐?’
나는 어리둥절했다. 노인네가 혀를 찼다.
‘쯧, 이리도 여유가 없어지다니. 더 놀아주고 싶지만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구나. 잘 살아라, 선아. 부디 마지막까지 정진하려무나.’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선기가 심장 어림에서 응축되더니 잡을 새도 없이 빠져나갔다. 아니, 연기처럼 꺼져버렸다.
눈물이 났다.
‘할아버지.’
노인네는 내 부름에 응답하지 않고 영원히 나를 떠났다.
***
선령은 노인네가 자신의 피와 땀으로 만든 선물이자 고뇌의 산물이었다. 노인네는 그것으로 내 속에 깃든 마정으로부터 나를 지키고자 했다. 그러면서 나를 감시하려 들었다. 만약 내가 삿된 길로 빠지면 나를 다그쳐 발을 돌리려 했을 터였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즉 내가 마정의 마력을 온전히 취해 천마로 화한다면 가차 없이 폭사함으로써 내 목숨을 거두려 했을 수도 있었다. 노인네는 한없이 자상했지만 경우에 따라 서릿발처럼 냉엄해지기도 했다.
선령은 희생이었다.
만약 선령에 수십 년의 적공을 담지 않았다면 노인네는 천지조화지경에 이르러 우화등선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를 위해, 혹은 세상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꿈을 포기했다.
노인네가 나에게 작별을 고했다는 것은 내가 이제 그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노인네는 내가 밀왕을 사멸시켰음을 감지했을 터였다. 불살(不殺)의 금제를 어겼음에도 나를 징치하지 않은 건 결과가 아니라 동기를 살폈다는 반증이었다. 이는 노인네의 선령과 내 마음이 이어져 있었음을 의미했다.
하여 ‘욕심’ 운운했던 노인네의 일성은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노인네는 내가 너무 빨리 성장해 내게 더 머물러 있지 못하는 아쉬움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성장한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실제로 떠나간 건 내가 아니라 노인네였지만.
나는 슬픔을 누르며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를 보냈다.
‘잘 가, 할아버지.’
***
노인네와의 재회와 작별은 한순간의 일이었다.
일상의 시간으로는 반 호흡도 지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내가 밀왕을 두 동강 내고 그의 왼발 새끼발가락을 터뜨린 직후였다.
선령의 요란한 작별 인사로 찰나지간 움찔했던 나는 또다시 휘청거렸다. 이번엔 외부에서 무언가 나를 덮친 것이었다.
그것은 해일이었다. 그 거대한 파도를 내게 보낸 이들은 참극의 생존자들이었다. 적게 잡아도 십만은 넘을 터였다. 그들이 반 토막 난 밀왕에게 발산하는 원념(怨念)과 증오, 나를 향한 감사의 염은 한데 어우러져 붉고 푸른 불길의 회오리를 일으켰다.
나는 전율했다. 산사태처럼 쏟아지는 이 청화와 적화는 나를 궁극의 경계로 올려보낼 것이었다.
흥분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나는 중요한 과제가 남아있음을 망각하지는 않았다.
검룡, 아니 타우린을 찾아야 했다. 그는 십중팔구 군중 속에 들어있을 터였다. 아니면 근처의 건물 어딘가에 은신해있거나. 어디서건 숨어서 밀왕의 학살을 조종하다 해가 지면 은근슬쩍 나타나 그를 쫓아내고는 구원자 행세를 하려 들었을 것이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청-적화를 취하는 와중에도 나는 선정의 통찰안으로 사방을 살피고 천이통을 발해 타우린의 숨소리를 잡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밀왕의 급작스러운 최후에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동안 고요의 바다에 잠겨있던 군중이 너도나도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후자는 포기해야 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타우린을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군중 뒤편에서 빛살이 일었을 때 그 부근을 집중적으로 탐색하던 중이기 때문이었다. 타우린은 내가 그를 포착하고는 지공을 쏘려는 찰나 움직였다. 실로 간발의 차이였다.
순식간에 이백 장이나 멀어진 타우린은 그대로 달아나지 않고 뾰족한 탑의 꼭대기에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달라붙었다. 나는 군중의 아우성을 뒤로 하고 그리로 날아갔다. 하지만 탑과의 거리가 오십 장쯤 남았을 때 타우린이 나를 제지했다.
“거기까지다, 애송이. 더 다가오면 그냥 가버릴 테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땅으로 내려갔다. 내가 착지하자 타우린이 불만을 토해냈다.
“쳇, 죽 쒀서 개 준 꼴이군. 염치없는 놈 같으니. 남이 차려놓은 진수성찬을 제멋대로 처먹다니.”
“내 친우를 내놔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크흐흐, 애송아. 나를 참회동인가 뭔가에 가둘 속셈임을 모를 줄 아느냐? 그나저나 내 조문을 아는 걸 보니 토로를 만났구나. 역시 그 늙은이를 살려두는 게 아니었어. 그깟 사사로운 정리에 못 이겨 이런 후환을 자초하다니. 내가 어리석었어. 하지만 나를 배신하다니, 나쁜 늙은이. 갈기갈기 찢어버릴 테다.”
타우린이 분기를 토해내는 동안 나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무리였다. 이십 장만 더 가까우면 어찌어찌 지공을 꽂을 수 있을 듯싶었지만 이 거리에서는 성공을 바라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내 속을 읽은 듯 타우린이 경고성을 날렸다.
“허튼 생각 하지 마라, 애송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가버릴 테다.”
“본체를 잃었으니 너는 이제 껍데기나 마찬가지다. 뛰어봤자 벼룩일 터, 괜한 고생 하지 말고 순순히 잡혀라. 그러면 고통 없이 끝내주마.”
“크하하핫, 귀엽군, 애송이. 그래, 할 수 있을 때 실컷 기고만장하려무나. 나를 다시 보는 날 피눈물을 흘리게 될 테니까.”
“되도 않는 허장성세라니. 가소롭다 못해 가엽구나, 노물.”
“나를 우습게 보지 마라, 애송이.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는 네놈의 비법을 이미 터득했다. 분명 원기(冤氣)의 화염을 내기로 전환했을 테지? 기다려라. 네놈을 능가하는 비력을 쟁취한 후 빚을 받으러 갈 터이니. 한 사오 년쯤 걸릴 게다. 뭐, 십 년 후일 수도 있고. 아무튼 언젠가 기필코 네놈 몸뚱이를 두 쪽으로 쪼개줄 테다. 그때 보자.”
내게 응답할 겨를을 주지 않고 타우린이 빛살로 화해 멀어졌다. 나로서는 따라잡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 빠르기였다. 나는 그저 우두커니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점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타우린은 꿈에도 몰랐을 터였다. 자신의 예고가 틀릴 것임을. 먼 훗날이 아니라 머지않은 장래에 나와 만나게 될 것임을.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
나는 나우를 떨궈놓았던 산등성이로 돌아갔다.
“어떻게 됐어요?”
내가 땅에 내려서기도 전에 나우가 물었다.
“밀왕은 처치했소. 하지만 검룡은 놓쳤소.”
절반의 성과임에도 나우는 뛸 듯이 기뻐했다.
“정말 잘됐네요.”
과연 그럴까.
“밀왕이 없다면 그치는 쭉정이에 불과하잖아요. 얼마든지 법사들로 막을 수 있을 거예요.”
나는 회의적이었다. 타우린이 양천의 무력 정도만 발할 수 있다고 해도 서역엔 적수가 많지 않을 터였다. 거기에 여전히 환상환을 비롯한 신물들이 갖고 있으니 결코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우의 판단에도 일리가 있었다.
밀왕이 없으면 적어도 대규모 살겁은 일으킬 수 없을 터였다. 내가 강호 초출 시에 행했던 방식을 차용하려고 해도 서역과 중원 전역에 그를 잡기 위한 그물이 깔릴 터이니 그마저도 쉽지 않을 것이었다.
요컨대 타우린은 쥐새끼처럼 숨어서 찔끔찔끔 먹이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반드시 꼬리가 잡힐 터였다. 광구를 부린다고 해도 이젠 내겐 그를 낚아챌 방안이 있었다. 그가 내 흉내를 내어 적화를 취하려 드는 한 포획은 시간문제였다.
나우는 신이 났다.
“실감이 안 나네요. 진짜로 이런 날이 오다니. 그거 알아요, 오 공자? 딱 넉 달밖에 안 걸렸어요. 근데 약속 지킬 거죠? 천하의 주인이 되면 나한테 이 대륙을 다스릴 권한을 준다고 했잖아요.”
나는 나우에게 전제조건을 상기시켰다.
“그렇긴 하나 내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 그러겠다는 단서를 달았잖소?”
내 어깨를 툭 치며 나우가 싱긋 웃었다.
“우리는 한뜻이잖아요. 안 그래요?”
“어, 그랬소? 나는 몰랐소만.”
“왜 이래요. 자고로 정치는 두 종류밖에 없어요. 통치자가 제 맘대로 하는 것과 뭇 백성들의 평안에 중점을 두는 것. 오 공자나 나나 두 번째를 추구하잖아요. 설사 오 공자가 첫 번째를 고집한다고 해도 걱정 안 해요. 오 공자의 뜻을 아니까요. 비천한 이들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말 것. 그들에게도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할 것. 아닌가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나우가 결론을 내렸다.
“오 공자는 이제 중원에나 신경 쓰고 이곳은 나한테 맡겨줘요. 이러라고 그렇게 힘들게 공부한 거니까. 잘 해낼 자신이 있어요. 이럴 게 아니라 당장 고르로 돌아가요. 모두에게 희소식을 전하고 왕국들에 소집령을 내려야겠어요. 할 일이 태산이네요. 국경 재조정이며 공통 율령 제정이며 서열 정리며. 밀궁 건도 서둘러 처리해야 하고요. 어서 가요.”
나는 나를 잡아끄는 나우의 손을 떼놓았다.
“미안하지만 운공에 들어야겠소. 좀 오래 걸릴 수도 있소.”
나우가 왕방울 눈을 부릅떴다.
“왜요? 어디 다쳤어요?”
“그건 아니오. 내기를 다스려야 해서 그렇소.”
나우의 두툼한 입술에서 기다란 한숨이 빠져나왔다. 양 관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난 또 뭐라고. 알겠어요. 한시라도 빨리 대업에 착수하고 싶지만 참아야죠, 뭐.”
나는 나우를 안고서 사람들이나 짐승이 접근할 수 없는 절벽 가운데의 돌출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는 좌정하고서 눈을 감았다. 황혼의 붉은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
건곤기를 생성한 이후 그림자처럼 내게 달라붙어 있던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구 단계에 들어서고부터는 점차 약해지긴 했으나 이처럼 완전히 없어진 건 처음이었다.
나는 감격하기보다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전의 질곡에서 벗어난 대신 새로운 족쇄를 차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 심상을 떠도는 수만 개의 원념(怨念)들이었다. 나는 운공 시에만 나타났던 현상이 일상화될 것임을 예감했다. 이것이 천지조화지경에 이르는 마지막 관문이 될 것임도.
내 속에서 끊임없이 명멸하는 통한과 비애와 저주의 불빛들을 관조하며 나는 그것들을 영구적으로 꺼뜨릴 수단을 궁구했다. 수십 가지의 방도가 우후죽순 격으로 떠올랐다. 하나하나 시도해보았으나 별무소용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다. 내가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았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