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80
제180화 – 또 저러네.
검제에게 어떤 처분을 내릴지 마음을 정했기에 더 이상의 대화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입에서 봇물이 터진 듯 말이 쏟아져 나왔다.
“뒤늦게 답을 해서 미안하오만 나는 그 아이가 서역에서 왔음을 전혀 알지 못했소. 오래전 사라진 내 사제의 후손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더랬소. 그럴 수밖에 없었소. 본문의 직전 제자들에게만 전해지는 검결을 알고 있는 데다 무엇보다 외양이 사제와 판박이였기 때문이오. 마치 어린 시절의 사제를 보는 것 같았소.
사사로운 이야기이나 나는 내 사제에게 부채 의식이 있었소. 출중한 무재를 가졌으되 다소 편협했던 성정으로 인해 사문의 어른들은 그를 나보다 엄격하게 대했소. 편애라 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으나 예민했던 사제는 차별을 받았다고 여겼을 게요.
여하간 우리는 최고의 경쟁자였다오. 서로를 의식하며 참으로 치열하게 수련했더랬소. 그 덕분에 나날이 성장할 수 있었고. 하지만 약관을 전후해 나와의 차이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하자 사제는 심마에 들었소. 나를 볼 때마다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오. 자기가 나에게 뒤진 건 오랜 세월 누적된 차별의 결과라고.
그러다 결국 더 견디지 못하고 사문을 뛰쳐나갔소. 그러고는 영영 소식이 끊겼다오. 어른들께서 은밀히 중원 전역을 뒤졌지만 끝내 사제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소. 그로부터 반백 년 동안 사제는 내 마음속의 짐이었다오.”
이미 아는 내용이었으나 나는 검제의 회상을 끊지 않고 경청했다. 타우린의 말과 맞춰보는 게 나름 흥미로워서였다.
갑자기 검제의 면상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제가 내 앞에 나타난 게요. 우리가 형제처럼 지내던 시절의 모습을 하고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오. 나는 제자로 삼아달라는 그 아이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였소. 어찌 거절할 수 있겠소?
고백건대 실로 꿈결 같은 시간이었소. 그 아이는 외양과 무재는 사제의 재판이었지만 속은 완전히 딴판이었소. 외골수였던 사제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넉살을 부리곤 했지. 나는 그 아이를 진심으로 아꼈다오. 그 아이는 내 전부였소. 그 아이가 원하면 심장도 꺼내주었을 게요.”
일순 노인네가 떠올라 가슴이 뭉클했다. 검제의 두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아이가 죽었을 때 나도 죽었소. 하지만 이토록 비참하지는 않았소. 사실이 아니길 빌고 또 빌었소. 하지만 우장평에서의 일을 떠올려보니 도저히 부인할 수 없었소.”
드디어 끼어들 여지가 생겼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그날이 아니라 전날이었소. 한동안 보이지 않던 양가의 아이가 우리를 찾아왔더랬소. 놀랍게도 밀왕을 대동하고서. 내 제자의 부탁을 받았다고 합디다. 양가 아이의 얘기를 듣던 도중 그대에게 맹렬한 살의가 솟구쳤소. 그래서 결심했소. 기필코 그대를 죽여 제자의 원을 풀어주겠다고. 하지만 창제나 다른 이들과 따로 모의한 것은 아니었소. 그래서 환상환이라는 기물이 조화를 부렸다는 그대의 주장을 받아들인 게요. 그게 아니라면 그날의 일을 설명할 방도가 없으니.”
어린아이의 등판 같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검제가 정색했다.
“추태를 부렸구려. 이제 마무리를 지읍시다. 나는 그대에게 나를 징치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오. 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겐 관용을 베풀어주길 간곡히 청하오. 그래 주면 저승에서도 그 은혜를 잊지 않겠소.”
검제가 별안간 손을 치켜들었다.
“내 목숨으로써 나와 그 아이의 죄를…….”
나보다 빨리 용왕이 검제의 손을 붙잡았다.
“무슨 짓인가? 창제 소식 못 들었나? 하긴 우리가 전서구보다 빨리 날아왔으니 아직 모르겠군.”
“……?”
나는 의아해하는 검제에게 사정을 알렸다.
“오늘 오전에 창제를 보았소. 그리고 그에게 일 년 봉문을 명했소. 우장평 건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게 아니오. 나흘 전 십자무련을 침공한 죄과에 대한 처분이었소. 당신은 그날 그들에게 가세하지 않았으니 봉문도 필요 없소. 하물며 자결은 더더욱 불필요하오.”
사방에서 조용한 기음이 일었다. 나와 검제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검림의 검호들이 낸 안도의 한숨 소리였다.
“혹시 몰라 하는 말인데, 내가 간 후 엉뚱한 짓을 하면 괜한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소. 내 조치를 무시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곳에 분풀이를 할지도 모르오. 그러니 명을 보전하구려. 애먼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담장 너머에서 숨죽인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나는 멍하니 선 검제를 두고 공중으로 치솟았다.
“같이 가세나, 천룡.”
용왕이 부리나케 나를 쫓았다.
***
다음 행선지는 까마득히 먼 곳이었다. 직선거리로만 일만 이삼천 리에 달할 터였다. 거리만 먼 게 아니라 길도 어려웠다. 용왕은 나 혼자서는 경로를 백 번 알려줘도 찾아가지 못할 거라고 단언했다.
과장이 아니었다. 중원을 벗어나 광대한 초원이 펼쳐진 평북 무림을 지나자 끝없는 동토가 펼쳐졌다. 대(大)사막보다 열 배나 크다니 아무리 내가 한 시진에 일천오백 리를 주파하는 초인일지라도 방향을 모르면 미아가 되기 십상이었다. 다행히 나에겐 천하를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는 최고의 길잡이가 붙어있었다. 지리에 대한 용왕의 지식과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무한히 이어질 것 같은 빙원 위를 비행하며 용왕이 뒤늦은 불만을 쏟아냈다.
“검제는 딱하기도 하거니와 저번 침공에 동참하지 않았으니 자네의 처분을 십분 이해하지만 창제는 어째서 그대로 돌려보낸 건가? 하다못해 손가락 하나라도 뽑지 않고서.”
대꾸하기 귀찮았지만 묵살했다간 계속 물고 늘어질 게 빤한지라 입을 열었다.
“무후의 청이었소. 멀쩡한 상태의 창제와 붙어 꺾고 싶다더군.”
“독한 여자 같으니. 도무지 정이 안 간다니까. 그나저나 언제까지 그 여자한테 끌려다닐 텐가. 어서 족쇄를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 참이오.”
“호오, 해결방안이 있는가?”
“…….”
“그럴 줄 알았네. 그러지 말고 나한테 맡겨주게나. 내 단숨에…….”
“없다고 하지는 않았소만. 준비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오.”
“얼마나?”
“나도 모르오. 하지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정말인가?”
“그렇소.”
“쩝, 내가 해주고 싶었는데.”
용왕이 아쉬움의 입맛을 다셨다.
***
광활하다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얼음들판이 마침내 끝을 드러내었다.
멀리 바늘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물상을 가리키며 용왕이 소리쳤다.
“저길세!”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은빛 바늘은 하늘까지 솟은 얼음 탑으로 화했다. 높이가 어림잡아 일백 장은 될 듯했다. 금빛 햇살을 둘러 신비감을 더하는 거대한 빙탑은 천하제일비처(天下第一秘處)로 명명된 빙궁이었다. 문상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저 얼음 궁전 안에 물경 이십만에 달하는 이족이 산다고 했다.
나는 용왕을 따라 정체불명의 괴수에 올라탄 날개 달린 여인의 조각상 앞에 떨어져 내렸다.
“십수 년 전에 여기서 빙왕과 대결했을 때 산산조각 냈더랬는데 다시 만들었구먼. 보석이 썩어나는 모양이군.”
호랑이와 황소를 섞은 듯한 괴수의 코를 쓰다듬으며 용왕이 중얼거렸다. 나는 비로소 조각상의 재료가 얼음이 아니라 수정임을 알아차렸다.
조각상에게서 손을 뗀 용왕이 빙왕을 불렀다.
“어이! 안에 있는 걸 알고 있네. 어서 나오시지. 꾸물거리면 이 조각상만이 아니라 당신 소굴 전체를 박살 낼 수도 있어.”
용왕의 협박이 주효한 듯 빙왕이 궁전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풍을 맞은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빨리 안 와? 며칠 전 내뺄 때는 쏜살같더니.”
빙왕이 냉큼 뛰어왔다. 그리고 내 면전에서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빙궁에 오신 걸 환영하오.”
유창한 중원어였다.
“바본가? 곧 뒈질 인간이 환영은 무슨.”
용왕의 겁박에 빙왕의 허여멀건 낯짝이 파랗게 질렸다.
“창제는 봐줬다고 들었소만. 나도 그 환상환인지 뭔지 하는 마물에 혹했던 게요. 여기까지 전해진 초신성의 무위를 친견하고픈 욕심에 중원을 찾았을 뿐, 귀하를 해할 의도는 손톱만큼도 없었소. 정말이오.”
“어디서 흰소리를. 우장평에서야 그렇다 쳐도 십자무련에 쳐들어온 건 뭔가? 환상환은 한 번밖에 안 듣는다는데. 그러니 십자무련 건은 자의적으로…….”
“아니오, 절대로 그렇지 않소. 정말이오. 들어보구려. 나는 내가 우장평에서 행한 일로 망연자실했소.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오. 그래서 불문곡직 귀하와 용왕에게 사죄하려고 했소. 정말이오. 하지만 그들이 말렸소. 나아가 나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내 일족을 몰살시키겠다고 을렀소.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따라나선 게요. 정말이오.”
나는 ‘정말이오.’를 남발하는 금발 벽안의 노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외양은 판이하나 그도 도제나 해왕, 그리고 창제와 동일한 부류였다. 무력은 진즉 인간의 범주를 넘었을 터이나 다들 필부에 불과했다.
“단지 내 무위를 친견하려고 중원에 왔다고 했는데, 정말이오?”
나는 빙왕의 용어를 차용해 그를 시험했다. 빙왕이 즉답을 못 하고 우물거렸다. 불길한 예감이 든 모양이었다. 아주 둔한 위인은 아니었다.
“그게, 실은 어떤 이의 부탁을 받고…….”
내 눈치를 보며 빙왕이 뒷말을 얼버무렸다. 용왕이 그를 추궁했다.
“어떤 이라니? 누구?”
“그게, 그러니까…….”
“이실직고하시지. 이빨을 뽑아버리기 전에.”
빙왕이 마지못해 실토했다.
“도제의 제자였소.”
“오호라, 그렇다면 애당초 천룡을 노리고 중원으로 기어든 것이었군. 그 살쾡이 같은 아이가 구경이나 하고 오라고 그 먼 길을 보냈을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환상환과 무관하게 처음부터 작정하고 나선 게지.”
“아니오. 절대로 그렇지 않소. 정말이오. 물론 그 간특한 계집이 나를 꼬드기기는 했소. 하지만 나는 그년의 수작에 응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소. 단지 기회가 생긴 김에 위대한 풍문의 주인공을 보러 가기로 마음먹었던 것뿐이오. 정말이오.”
“어디서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짓말을. 치졸하게 되도 않는 변명이나 늘어놓지 말고 당당히 벌을…….”
돌연 무릎을 꿇으며 빙왕이 부르짖었다.
“거짓말이 아니오. 하늘에 맹세코 정말이오. 제발 믿어주시오.”
용왕이 코웃음을 쳤다.
“흥, 개소리.”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빙왕이 특단의 대책을 들고나왔다.
우드득.
말리려면 말릴 수도 있었으나 용왕도 나도 제 팔을 잡아 뽑는 빙왕의 작태를 잠자코 지켜보았다. 뜯겨나간 어깨 부위에서 우윳빛 피가 솟구쳤다. 백혈(白血)이라니, 신기했다.
내공으로 지혈하며 빙왕이 자못 침중한 음성을 발했다.
“결백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팔이 아니라 목을 내놓을 용의도 있소. 하지만 그리되면 내 신민들은 부모 잃은 자식의 신세가 될 게요. 나 하나 살고자 이러는 게 아니라…….”
“하아, 도저히 못 봐주겠군. 이보게, 빙왕. 그리 구차스럽게 굴지 말고 왕답게 그냥 뒈지게나. 여기 오기 전에 검제를 만났는데 그이는 모든 책임을 지고 자결하려 들더구먼. 그러면서 검림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더군. 그 정도는 돼야 아량을 베풀 마음이 나지 않겠는가?”
쾅쾅.
빙왕이 얼음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제발 살려주시오. 그래만 주면 일 년이 아니라 영원히 중원 출입을 삼가겠소. 그리고 향후 무조건적으로 귀하의 명을 따르겠소. 맹세하오. 그러니 제발…….”
빙왕의 애원을 듣는 게 고역이었기에 나는 기습적인 질문으로 그의 말을 잘랐다.
“도봉은 아직 여기에 있소?”
빙왕이 움찔했다.
“그 계집은 내가 중원에 다녀오는 동안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났다고 하더이다. 그 계집을 만나더라도 그 계집이 하는 말을 믿지 말길 바라오. 그 교활한 계집은 틀림없이…….”
이번에도 빙왕은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내가 훌쩍 천공으로 비상했기 때문이었다. 용왕이 여지없이 구시렁거렸다.
“또 저러네.”
며칠 전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빙왕을 더 괴롭히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용왕은 할 수 없이 나를 쫓아왔다. 나는 그를 기다려주지 않고 내쳐 날았다. 다음 행선지까지는 거의 이만 리를 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