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86
제186화 – 잘 부탁하오.
나우는 열네 개 도시에서 스물일곱 명의 악당을 선정해두었다.
그들에게 원한을 품은 이들의 수는 삼만여 명에 달했다. 나는 서방으로 출발하기 전에 하루에 한 곳씩 들러 행사를 치르라는 나우의 권고를 거절했다. 타우린을 잡으러 가는 게 급선무라서가 아니라 더 이상의 청-적화는 불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전날 아르에게 천지조화지경까지 반보도 남지 않았다고 한 건 허풍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반걸음은 선력의 증강을 전제하지 않았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였다. 나는 할아버지가 내게서 떠난 날 이미 내가 선을 넘기로 결정하고 그를 결행하면 그 즉시 신선이 될 것임을 알았다. 그러면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자재한 존재로 화할 터였다.
그래서 보류했다. 모든 집착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책임감도 소멸될 것임을 우려해서였다. 나는 아직 세상에, 그리고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지 못했다. 적어도 내가 받은 만큼은 돌려줘야 홀가분하게 궁극의 경지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게 언제가 될지, 혹은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 건지 나는 몰랐다. 하지만 조바심이 나지는 않았다. 그저 주어진 오늘을, 매 순간을 충실히 살고자 할 뿐이었다. 그러다 보면 때가 올 터였다. 그때 기꺼이 떠날 참이었다. 영원과 무한의 세계로.
***
나우는 각국의 왕들이나 실권자들에게 나의 방문과 무관하게 악인 처단을 집행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명을 추가했다. 내 공식적인 별호를 전하며 그를 널리 알리도록 한 것이었다.
‘동방의 벗’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의미도, 어감도 마음에 들었다.
이름의 효과는 상당했다.
나를 보기만 하면 신분에 상관없이 엎드리기부터 하던 사람들이 허리만 숙이는 정도로 예를 표했다. 시선을 맞추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먼발치서 서성이는 아이들이 ‘아만 까만’을 읊조리면 나도 가벼운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러면 화들짝 놀라서는 달아나곤 했다. 내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수줍음에서 나오는 반응이었다. 극소수지만 일부는 ‘꺄아’하고 함성을 지르며 나와 교감한 기쁨을 적극적으로 표출했다. 여전히 내게 달려오지는 못했지만.
나는 아이들이 귀여웠다. 전에는 없던 감정이었다. 할아버지도 나를 이런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까. 할아버지가 계실 때 좀 더 살갑게 굴지 못했던 게 못내 아쉬웠다. 내가 위악을 떨고 있음을 넉넉히 짐작하셨을 테지만 그래도 죄송스러웠다.
진부한 표현이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는 말만큼 뼈에 사무치는 진리는 드물었다.
***
나우를 따라 들어온 노인의 첫인상은 별로였다.
마주 앉아 있음에도 나를 똑바로 보지 않고 힐끔거리는 양이 교활한 느낌을 주었다. 나우에게도 그러는 걸 보면 나를 어려워해서라기보다는 습성인 모양이었다.
손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연신 어지러이 움직거렸다. 이 또한 긴장이나 불안함의 발로가 아니라 그저 습관적인 행위인 듯했다.
무엇보다 눈빛이 탁했다. 나이가 있으니 노회함이 묻어나는 거야 그렇다 쳐도, 강호행 초기에 처리한 악인들로부터 공통적으로 접했던 사기(邪氣)가 번들거리는 건 영 언짢았다.
그러나 나는 심기를 내색하지 않고 노인을 정중히 대했다. 좋든 싫든 그와는 이제 함께 대장정에 나서야 할 터였다. 가급적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게 피차간에 편했다.
“이분이 사로 법사님이에요, 오 공자.”
나우의 소개는 그걸로 끝이었다. 이미 노인에 관해 내게 상세히 알려주었기에 덧붙일 말이 없었을 터였다.
사팔뜨기처럼 시선을 딴 데 둔 노인을 직시하며 나는 나우에게 들었던 정보를 되새겼다.
노인은 서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특급법사였다. 그가 부리는 기물은 팔대신물에 속하는 화염봉이었다. 화염봉이 아니더라도 각종 술법에 달통한 대(大)법사라고 했다.
그러나 나우가 노인을 ‘동행인’으로 천거한 건 그런 조건 때문이 아니었다. 노인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나우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희대의 방랑자이자 풍운아였다. 팔십 평생의 절반을 서방에서 떠돌며 수많은 역경을 극복했기 때문이었다.
노인이 서역을 떠나 서방으로 간 까닭은 밀왕에 대적할 신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서역의 법계엔 세상의 서쪽 끝에 그들의 본향이 존재하고 거기엔 신적 권능을 지닌 이들이 거주한다는 전설이 있었다. 과거에는 그 전설을 쫓아 서방으로 간 법사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생환자들이 전무했던 탓에 어느 시기부터 서방행은 금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다 노인이 밀왕의 사술을 분쇄할 신력을 구해오겠다는 염원을 품고서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물경 사십이 년이나 미지의 대륙을 누비다 얼마 전에야 돌아왔다니 노인은 나우의 말마따나 ‘최고의 적임자’임엔 분명했다.
나는 궁금한 점부터 물었다.
“본향은 찾으셨소?”
노인은 유창한 중원어로 대답했다.
“그런 곳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법계가 그들로부터 유래되었음은 확인했습니다.”
“그들도 기물을 부린다는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무위는 어느 정도요?”
“그이들의 법계에서 으뜸을 다툰다는 ‘빈 지븐’ 즉, 칠성(七星) 중 다섯을 만나보았지만 밀왕에 필적할 만한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 전부를 합쳐야 겨우 상대가 될까요. 그래도 나더러 양편의 승부를 두고 내기를 하라면 밀왕 쪽에 걸겠습니다.”
그렇다면 서방을 통틀어도 내게 위협이 될 만한 이는 없으리라는 뜻이었다. 다섯의 총합이 밀왕에 비등하게 열세라면 하나하나는 건곤장 정도의 고수 두엇을 대적할만한 수준일 터였다. 꽤 강하지만 나나 개세팔천 같은 무존(武尊)들에겐 역불급이었다. 그렇더라도 양천의 무력을 발휘할 타우린에겐 감당불가의 강호들일 터이기에 나는 다소 안심이 되었다.
“방금 ‘빈 지븐’이 일곱 개의 별이라고 했는데 그들의 언어에도 능통하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로 통일된 동방어나 우리 같은 공용어가 따로 없습니다. 주요 언어만 열 개가 넘습니다. 나는 그중 일부만 알아들을 뿐입니다. 말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고요.”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노인의 토설대로라면 그의 역할은 상당히 제한될 터였다. 노골적으로 말해 지리 말고는 별 쓸모가 없지 않겠는가.
노인의 이어진 말이 내 우려를 불식시켰다.
“하지만 의사소통에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고대 통일제국의 문자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사어(死語)이긴 하나 상층부의 인사들은 그 문자로 자신들의 권위를 과시합니다. 그래서 말은 안 통해도 문자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 문자를 익히셨소?”
“그렇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일상의 대화를 나누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완벽한 답변이었다.
***
나는 두 시진에 걸쳐 노인에게서 서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사십여 년의 방랑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노인이 축적한 지식의 양은 실로 방대했다. 나는 노인을 다시 보았다.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 방면의 전문성만으로도 인정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실질적인 효능도 다대했다.
노인 없이 홀로 서방행에 나섰다면 나는 미아 신세를 면치 못했을 터였다. 노인의 분류대로라면 서방은 세 개의 권역으로 나뉘는데 각각이 중원보다 광대하단다. 신통의 공능으로 말은 어찌어찌 알아듣더라도 그 땅의 사람들에게 내 뜻을 전할 방도가 없으니 나 혼자였다면 무슨 수로 타우린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타우린 역시 고전이 불가피할 터였다. 노인 같은 조력자를 구하지 못했다면 전날 문상이 예견한 대로 적응과 조사에만 족히 몇 달은 잡아먹을 게 뻔했다. 그렇다면 상당한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낙관은 금물이었다. 타우린이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전격적으로 일을 벌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예컨대 그가 특정 왕국의 왕궁에 잠입해서는 환상환을 부려 왕으로 하여금 전쟁을 일으키도록 한 후 광구를 타고 내빼면 대규모 참극이 발생할 터였다. 그런 사태가 생기기 전에 그를 잡거나 예방책을 마련하는 게 최선이었다.
다행히 천운은 내 편이었다. 목표의 조기 달성에 크나큰 도움을 줄 ‘귀인’을 초장에 만났으니.
***
출발에 앞서 나는 노인의 무력을 점검했다.
노인은 내 요청에 응해 화염봉을 꺼내어 코끼리 석상을 겨냥했다. 화염봉은 모르고 보면 그냥 평범한 막대기에 불과했다. 한 자가량 길이에 손가락 굵기였다. 손잡이 부분에 옹이 같은 돌출부가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 특징이 없었기에 길에 떨어져 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쳤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볼품없는 작대기가 뿜어낸 불길은 가히 위력적이었다. 순식간에 삼십여 보 떨어진 목표물에 이른 화염은 삽시간에 석상을 거대한 불덩이로 만들었다. 그것만이었다면 딱히 인상적이라 할 수 없었을 테지만 다음 순간 입을 벌어지게 하는 기사가 일어났다. 돌이 녹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건곤장 같은 초절정 극상의 고수가 두른 호신강기로도 저 화공엔 버티기 어려울 듯싶었다. 실로 엄청난 화력이었다.
노인이 연신 나를 힐금힐금 쳐다보았다. 나는 고소를 지었다. 노인의 속셈이 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노인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로 했다. 모른 척하고 넘어가도 감히 청하지는 않을 테지만 앞으로의 원활한 일정을 위해 힘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먼저 받았으니 나도 내주는 게 예의였다.
“나에게 쏘아보시오.”
내 말에 노인이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나는 손을 흔들어 들어오라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몸을 돌린 노인이 막대기를 내 쪽으로 뻗었다. 그와 나의 거리는 칠팔 보에 불과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노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막대기가 불을 뿜었다. 일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방금 전보다 화염이 더 맹렬한 것 같았다.
화르르.
불길에 휩싸인 나는 침을 삼켰다. 최대치의 선력을 투여해 여덟 겹이나 되는 기방을 둘렀음에도 살갗에 열기가 전해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뜨거움의 강도도 점점 올라갔다. 그러나 나는 태연을 가장했다. 아직은 견딜 만했다. 그리고 반각은 더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전에 약세를 드러낼 까닭이 없었다.
차츰 부담스러워지려는 찰나 노인이 별안간 비명을 토해내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이형환위를 발해 그의 면상이 바닥에 부딪히기 전에 잡아주었다. 노인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렸다. 나를 시험하느라 기력을 소진했음이 틀림없었다.
“괜찮소?”
노인은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릴 뿐 소리를 내놓지 못했다. 아직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표정이 그의 심사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충격. 경악. 그리고 완전한 승복.
응혈까지 토해내고서야 노인의 목이 트였다. 그의 일성은 찬사, 혹은 아부였다.
“가히 신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으십니다. 모시게 되어 일생일대의 영광입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넘어갈까 하다가 화답했다. 노인과는 이제부터 수만 리 여정을 함께 해야 할 터였다.
“나도 잘 부탁하오.”
씰그러졌던 노인의 면상이 활짝 펴졌다. 함박웃음으로 노인은 한결 나은 인상을 만들었다. 눈빛은 여전히 탁하고 음험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