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90
제190화 – 그만!
나는 재차 물었다.
“뭐라고 쓴 거요?”
사로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공자님께서 사내를 좋아하는지 묻는군요.”
쓴웃음이 났다.
“좋은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 주구려.”
사로가 든 나뭇가지가 내 말을 옮겼다. 빨강 머리 여인이 반색했다. 그러더니 잽싸게 검을 놀렸다.
“자기는 어떠냐고 물어보랍니다.”
나는 안진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적극성과 당돌함에서 그녀와 이 여자는 동류였다.
빨강 머리가 싫지 않았지만,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몹시 끌렸지만 나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마음에 둔 이가 있다고 전해주구려.”
빨강 머리는 집요했다.
“그 여자가 자기보다 센지 궁금하답니다.”
헛웃음이 났다. 더 예쁜지, 혹은 더 현명한지가 아니라 더 강한지를 묻다니.
나는 사로를 통해 여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 사안을 두고 입씨름을 벌여봤자 피곤해질 뿐임을 예감한 나는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확실히 선을 그었다.
사로가 안절부절못했다. 빨강 머리의 태도가 싸늘해졌기 때문이었다. 우호적이었던 검사들의 눈길도 덩달아 차가워졌다.
그들이 자아내는 분위기에 황당했으나 나는 감정을 내색지 않고 어서 내 뜻을 빨강 머리에게 전하도록 사로에게 촉구했다. 사로는 부지런히 땅에 장문의 글을 써 내려갔다. 다행히 자존심이 상한 듯 나를 사납게 노려보던 빨강 머리가 그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한참 후 사로가 긍정적인 결과를 알렸다.
“공자님의 청을 들어주겠답니다. 성으로 돌아가는 즉시 다른 법사들과 왕들에게 사정을 알리고 한자리에 모이도록 하겠다는군요.”
나는 쾌재를 불렀다. 막연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초장부터 이리 술술 풀리다니.
“잘 됐구려. 그녀에게 고맙다고 전해주오.”
웬일인지 우물쭈물하더니 사로가 흐뭇한 기분에 초를 쳤다.
“대신 공자님 연인과의 결투를 주선해 달랍니다.”
어이가 없었다. 정신 나간 여자가 아닌가. 확 무후를 데려올까 보다. 무후가 작심하면 빨강 머리를 묵사발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빨강 머리가 덧붙인 글을 본 사로가 내 눈치를 보며 구겼던 낯짝을 활짝 폈다.
“아, 농담이랍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
나는 사로와 함께 빨강 머리의 전용 마차에 탑승했다.
마차 안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내게 치근덕거렸다.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장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하여 어느 순간부터는 사적인 질문엔 함구로 일관하며 수작을 원천 차단했다.
그러자 빨강 머리가 자기를 무시하면 협조하지 않겠다는 유치한 협박을 들고나왔다. 엄포에 불과함을 알았기에 나는 그 또한 침묵으로 대응했다. 그랬더니 빨강 머리가 불같이 화를 냈다. 얼토당토않은 작태에 나도 부아가 치밀었으나 선정의 힘으로 평정을 유지했다. 중간에 껴서 애꿎은 고생을 한 사로는 아스로 돌아가는 동안 부쩍 늙어 보였다.
정오경에 아스의 성(城)에 당도하니 급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의 총관인 뚱보 여인이 건넨 두루마기를 읽은 빨강 머리가 서둘러 종이에 글을 적었다. 그를 본 사로가 내게 내용을 알렸다.
“프라고가 나타났답니다.”
“사대마왕의 하나라는 화룡(火龍)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 귀물들은 동시대에 나온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소?”
“제가 알기론 그런데…….”
말끝을 흐르며 사로가 목을 움츠렸다. 그의 잘못이 아니니 따질 까닭이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와 사로의 대화를 듣고 있던 빨강 머리가 종이에 글을 휘갈기더니 사로에게 보여주었다.
“같이 가주겠냐고 합니다만.”
“물론이오.”
사로가 글 대신 말로 ‘치’라고 하자 빨강 머리가 환히 웃더니 주먹을 내밀었다.
“주먹을 맞대십시오. 여기에선 의기투합의 의미로 쓰입니다.”
사로의 권유에 따라 손을 들어 정권을 만들려는데 빨강 머리가 맹렬하게 제 주먹을 부딪쳐왔다. 나는 얼른 기방을 둘렀다.
쾅!
난데없는 폭음과 함께 빨강 머리가 손을 부여잡고 울상을 지었다. 나도 손목이 시큰거렸지만 일절 내색하지 않고 시치미를 뗐다.
빨강 머리는 쓸데없는 장난의 대가를 치렀다. 뼈가 부러진 것이었다. 하필이면 검을 쥐는 오른손이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고에 소동이 벌어졌다. 다들 출동을 만류하며 난리를 쳤다. 그러나 빨강 머리는 고집을 부렸다.
“동방에서 온 신과 함께 하는데 뭐가 걱정이야? 설마 내가 다치도록 내버려 두겠어?”
나는 그제야 사로가 나를 ‘동방의 신’으로 소개했음을 알았다. 이는 내 지시를 어긴 것이었다. 나와 달리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로는 그에게 시선을 돌린 나에게 영문도 모르고 굽실거렸다.
***
결국 빨강 머리의 뜻대로 됐다. 다만 나는 마차에 타기를 거부했다.
“느긋하게 갈 때가 아닌 것 같소만.”
빨강 머리의 아름다운 얼굴에 기대감이 만발했다. 내 비행에 대해 이미 들었다는 반증이었다.
“부탁해요.”
나는 출발에 앞서 빨강 머리에게 주의사항을 알린 후 그녀와 사로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천공으로 날아올랐다. 빨강 머리가 폐부에서 솟아나는 환성을 내질렀다.
“스무라(최고다)!”
내가 허리에 팔을 두른 것에 대한 보답인지 보복인지 빨강 머리가 멀쩡한 팔로 내 목을 감고는 노래까지 불렀다. 기가 막혔으나 그 와중에도 사전에 이른 대로 방향은 착실히 가리키는지라 나는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갈수록 숨이 막혔다. 빨강 머리가 노골적으로 몸을 밀착시키며 비벼댔기 때문이었다. 내 반신(半身)을 공략하는 탄력과 질감에 나는 어질어질했다.
시험(!)에 들었음에도 나는 흔들림 없이 비행을 지속했다. 전적으로 선정의 공이었다.
내 무반응에 지쳤는지 빨강 머리의 육탄공세도 시들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경로를 알리는 검지도 건성으로 쳐들 뿐이었다.
나는 문득 이 모든 게 사기가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빨강 머리는 나와 붙어있을 기회를 만들기 위해 화룡이 나타났다고 허풍을 떤 게 아닐까. 수하를 마차에 앞서 성으로 보내 총관인 뚱보 여인에게 미리 지시를 내렸다면 충분히 가능했을 일이었다.
빨강 머리를 추궁하고 싶었으나 마땅한 방도가 없어 답답했다. 비행을 멈추고 사로의 필담을 이용할까도 고려했으나 접었다. 빨강 머리가 부인하면 무슨 수로 확인하겠는가.
그리고 아까 성에서 뚱보 여인이 보였던 심각한 태도는 가짜가 아니었다. 그게 위장이었다면 그녀는 숨 쉬는 것도 거짓일 터였다.
뇌리에 피어오른 의혹을 지웠으나 찜찜함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빨강 머리의 옆얼굴을 슬쩍 노려보고는 비행에 집중했다.
***
노을이 졌다.
일점으로 오그라들었던 의심이 다시 부풀었다. 그러고는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한 황혼처럼 내 의식을 잠식했다.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않고 줄곧 최고속도를 유지했으니 적어도 이천이삼백 리는 날았을 것이었다. 어쩌면 삼천 리에 육박할지도 몰랐다.
아스의 성에서 스카니아 숲까지 거리의 두 배 이상을 난 셈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았다니 뭔가 이상했다. 심드렁하게 나를 힐끗거릴 뿐 엄중한 기미는 찾아볼 길 없는 빨강 머리의 초록빛 눈도 의심을 부채질했다.
인내심이 바닥 난 나는 지상으로 하강했다.
“자우 다 디아(뭐 하는 거예요)?”
나는 빨강 머리의 질문을 묵살하고 착지하기도 전에 사로에게 말했다.
“이 여자한테 정말로 화룡이 출현했는지 물어보시오. 당장.”
어리둥절해 있던 사로의 낯빛이 변했다. 그러고는 화염봉을 붓 삼아 땅에 재빨리 글씨를 썼다. 표정 가득 당혹감과 불만을 담고 있던 빨강 머리가 바로 답을 주었다.
“그렇답니다.”
나는 빨강 머리를 응시했다. 그녀도 지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아보구려.”
잠시 후 사로가 빨강 머리의 말, 아니 글을 전했다.
“거의 다 왔답니다.”
“그게 다요? 뭔가 많이 쓴 것 같은데.”
“……실은 왜 지금 와서 발을 빼려 하냐고 항의하는군요. 자기는 공자님만 믿고 검과 갑옷도 챙겨오지 않았는데. 화룡이 두려우면 그냥 꺼지랍니다. 혼자서라도 가겠다고.”
두 뺨이 머리카락 색깔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빨강 머리와 짧은 눈싸움을 벌인 나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일순 나를 밀치며 짜증을 냈지만 빨강 머리는 결국 내게 몸을 맡겼다. 다른 팔에 사로를 안은 나는 다시 날아올랐다. 이 잠시간의 지체를 뼈저리게 후회할 것을 꿈에도 모른 채.
수십 개의 산을 넘고 몇 개의 강과 들판을 건넜다.
‘거의 다 왔다’던 빨강 머리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을 확신하려는 순간 무언가 내 고막을 건드렸다. 내겐 익숙한 기음이었다.
나는 소리가 날아온 곳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아비규환의 지옥도를 목도했다.
작지 않은 크기의 도시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산 자들이 죽은 이들을 수습하며 토해내는 통곡성이 대지를 울렸다.
내 목을 흔드는 빨강 머리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참혹한 광경에 할 말을 잃은 나를 일깨웠다. 나는 그녀의 의사를 알아들었다. 망연자실해있을 때가 아니었다. 살겁의 원흉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응징해야 했다.
나는 빨강 머리의 집게손가락에 의지하지 않고도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도시 바깥으로 기다랗게 이어진 파괴의 흔적이 길잡이 노릇을 했다.
도시를 벗어난 우리는 북서 방면으로 올라갔다.
빨강 머리가 뒤늦게 분노의 고함을 내지르더니 경련까지 일으켰다. 내가 아니라 화룡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나는 자책했다. 쓸데없는 의심으로 시간을 잡아먹는 바람에 화를 키우게 생겼다. 약간의 지연이었지만 수천의 목숨을 대가로 요구할 수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무리에 무리를 거듭하며 비행에 박차를 가했다.
어느덧 해가 졌다. 넓고 두껍게 깔린 구름이 달빛을 가렸다.
추적의 실마리가 땅에 있었기에 난감해졌다. 하지만 발작적인 광분 후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던 빨강 머리가 제 역할을 했다. 나는 그녀의 검지가 가리키는 대로 나아갔다. 그러면서 갈수록 초조해졌다. 실제로는 반의반 시진도 지나지 않았을 테지만 조바심 탓인지 그 몇 배의 시간이 경과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을까.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까마득한 곳에서 일렁이는 기음의 아지랑이를 포착한 나는 빨강 머리의 지시와 무관하게 그리로 직행했다. 먼 어둠 속에 반딧불 같은 빛이 명멸했다.
나는 선천지기까지 쥐어짜며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내 자신이 굼벵이처럼 느껴졌다. 천마의 마력을 상실한 게 지금처럼 뼈아팠던 적이 없었다.
이윽고 참극의 현장에 도달한 나는 공중에서 빨강 머리와 사로를 떨구고는 간헐적으로 불길이 치솟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한창 도시를 화염지옥으로 만들고 있던 괴수를 발견했다.
황소의 몸뚱이에 새 대가리를 한 양이 용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지만 부리처럼 튀어나온 주둥이에서는 정말로 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불길에 휩쓸린 사람들은 순식간에 재가 되었고 직격을 모면한 이들도 가공스러운 열기에 속절없이 쓰러졌다.
“그만!”
괴수에게로 쇄도하며 나는 호통 쳤다. 그러면서 살계를 어길 것을 작심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무자비한 살육을 일삼는 괴물을 살려둘 수는 없었다.